“하필이면 울름 남작가란 말이지….”
거리를 돌아다니며 고민했다. 마리아는 자기도 따로 방법을 생각해보겠다 했지만, 사실 그녀도 딱히 방법은 없을 거다.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울름 남작은 마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선 사업도 결국 명분은 ‘좋은 일 하는 데 같이합시다’였다. 이런 일에 함께한다는 건, 서로 사이가 좋지는 못해도 나쁘지는 않게, 서로 미약하게나마 연줄은 남겨놓는다는 뜻이었다.
황후의 파벌에서 청탁을 모아 실제로 수행하는 일을 맡을 정도의 위치면, 울름 남작을 초대한다 해도 거절할 게 분명했다.
“결국 숙청의 단초가 될 증거를 찾아내려면, 한 번은 저택에 침입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수월하게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던 건, 이들이 황후 파벌의 말단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수도 귀족들의 지체가 작위만으로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이들은 지방에 근거지를 둔 이들이라 해당이 없었다.
요컨대, 그들의 본래 세력이 어떤지와 관계없이 수도에 끌고 온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아 보안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했기에 내가 마음껏 헤집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울름 남작은 달랐다. 기반은 지방에 있을지라도, 워낙 오랜 시간을 버텨온 가문인지라 영지 바깥에도 여기저기 세력을 뻗칠 여력이 있었다.
특히 상속권이 혼인을 통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봉건제 세상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는 건, 본래 영지 외에도 여기저기 월경지가 많다는 의미였다.
울름 남작 역시 수도 근처에 영지가 하나 있었다.
“보나 마나 기사단‘만’ 안 불러왔을 거란 말이지.”
수도에서 기사단을 운영할 수 있는 건 황실뿐이기에 다들 경비병력 정도만 들여올 수 있었지만, 편법은 언제나 존재했다. 기사단에 아직 입단하지 않은 기사 후보생들을 경비병이라는 명목으로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사 후보생도 결은 영지의 중요한 전력이었기에 아무렇게나 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오직 수도 근처에 있기에 영내의 반란이나 친족의 쿠데타를 억제할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울름 남작 역시 수도 근처의 영지에서 모집한 후보생들을 투입했겠지.
일반적인 경비병이라면 마력을 사용해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걸로 움직임을 숨길 수도 있고, 고압적인 태도로 상대를 속일 수도 있겠지만, 기사 후보생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의 눈을 속이고 몰래 물건을 빼 오는 건, 아쉽게도 익스퍼트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했다.
“차라리 무력이라도 쓸 수 있었으면 달랐을 텐데.”
“그건 좀 참아주시죠.”
마리아의 명령으로 나를 따라 나온 요나스가 나를 만류했다. 울름 남작가를 뚫어낼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할 일이 없다 보니, 당장 할 일이 없어 대련이라도 할까 싶어 그를 데리고 나왔다.
마침 그는 오늘 비번이었기에 데려올 수 있었다. 비번 날에 대련을 위해 끌려 나온다는 소식에 저항하던 그였지만, 일급의 세 배가 되는 돈을 준다는 소식에 얌전히 따라 나왔다.
물론 정말 상대가 되진 못했다. 태도는 쓰지 않았기에 초반에는 조금 해볼 만한 승부가 되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 차이가 많이 났다.
“단련 좀 해.”
“그렇게 말하면 억울하죠. 저도 단련 열심히 합니다. 그냥 빌 경이 지나치게 체력이 좋은 겁니다.”
그래도 몸은 풀렸기에 많이 구박하진 않았다.
“하, 진짜. 차라리 상대가 기사단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기사단이 있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끼리 친선 대련 한 번 하자는 명목으로 밖으로 끌어낼 수 있거든.”
나도 나름 기사단의 부단장인지라 아는 게 있었다. 종종 이웃한 영지의 기사단끼리 친선을 명분으로 대련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친선대련의 경우, 정말 서로 원수를 진 수준으로 가문 간의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닌 이상에야 받아주는 것이 귀족계의 암묵적 도의였다.
명분뿐이라도 친선이 목적인 만큼, 사람이 죽는 일은 정말 재수 없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잘 없었고, 그렇기에 친선 대련 제의를 거절하는 건 보통 ‘나는 자신이 없으니 도망칩니다.’라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울름 남작이 수도에서 활동하는 이상, 그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렇습니까?”
물론,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결국 수도에 있는 기사단은 황실이 보유하거나 고용 중인 기사단뿐이었으니까.
“됐다, 어차피 안 될 일에 집착해서 뭐하겠어. 다른 방법이나 생각해봐야지.”
“흠….”
요나스도 내 말에 턱을 짚고 함께 고민했다.
다만 둘 다 명확한 해법을 궁리해내진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둘 다 칼 쓰는 데 더 재주가 있지, 중상모략은 특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마리아가 답을 떠올리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는 게 현실이긴 했다.
툭.
“응?”
그렇게 걸어가던 중, 내 어깨도 안 올 것 같은 사람이 요나스를 치고 지나갔다.
정신 안 차리고 걷냐며 놀려주었다.
“그걸 부딪히냐.”
“아니, 저는 피했어요. 쟤가 의도적으로 부딪힌 거라니까요?”
“뭐?”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새 인파의 틈으로 파고든 사람이 서둘러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그제야 우리가 소매치기를 당했음을 깨달았다.
“야, 지갑 어디다 뒀어?”
내 말에 요나스가 급하게 주머니를 확인했다.
“지, 지갑이 없어졌습니다!”
정말 소매치기였다. 아무리 성 밖이라지만 수도에도 소매치기가 있나. 아니, 수도라서 소매치기가 있는 건가?
굳이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솔직히, 기사가 돼서 저런 일반인 소매치기 한 명 못 잡으면 자격 없는 거지. 우리는 양쪽으로 흩어져 느긋한 마음으로 소매치기를 추격했다. 요나스는 바로 그를 덮치려 했지만, 수신호로 그를 말렸다.
일부러 그가 계속 도망치도록 방치했다.
소매치기들도 바보가 아니어서, 정말 경험 없이 단독으로 시작한 소매치기가 아닌 이상에야 장물아비와 같은 사람을 거쳐 한 번은 세탁하기 마련이었다.
특히 지갑 또한 현금화가 가능한 물건이었기에 한 푼이 아쉬운 소매치기들이 그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소매치기는 어딜 가든 존재하고, 그걸 몇 번이고 당하다 보면 알기 싫어도 깨닫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다. 한참을 도망치던 그는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정말로 이런 장소가 있었군요.”
척 봐도 소매치기나 범죄자들이 모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요나스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작게 말했다. 이런 건 처음 당해보는 눈치였다.
뭐, 항상 궁에서 황녀를 호위하는 사람이 소매치기당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긴 하지.
“지금 바로 돌입할까요?”
“아니, 기다려.”
“어차피 확정된 거 아닙니까?”
“가끔, 건물 자체가 위장인 경우가 있어.”
나도 소매치기를 몇 번 추격해보며 경험해본 적 있었다. 말 그대로 겉면의 건물은 그저 위장이고, 본격적인 돈세탁은 비밀통로를 통해 들어가는 곳에서 하는 경우였다.
특히 수도에서 이런 짓을 하는 세력이 그 정도 보안도 신경 쓰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우리 지갑을 훔친 놈이 나오면, 그때 걔를 붙잡고 들어가자고.”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얼마 안 있어, 소매치기가 나왔다. 그는 척 봐도 돈을 얻어 신났는지 손가락에 침까지 발라가며 돈을 세고 있었다.
“지금.”
“예!”
그가 건물에서 나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를 덮쳐 제압했다.
“끄악!”
비명과 함께 소매치기가 바닥에 엎어졌다. 그 즉시 팔을 뒤로 꺾었다. 요나스는 능숙한 솜씨로 다리를 천으로 감아 제압했다.
…이게 왜 익숙한데?
“어디,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아무튼, 팔다리를 묶어 제압하고 그의 두건을 벗겼다.
“음?”
“어라.”
우리 둘 다 당황했다.
키가 작아 예상은 했지만, 범인은 우리 생각 이상으로 어렸다. 아무리 봐도 10대 초반을 넘지 못할 것만 같은 외모였다.
그리고,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이 나이에 소매치기나 하는 애가 이런 키라니. 빈민층의 영양 섭취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잠시만.”
“예?”
아마도 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망토처럼 둘렀을 천을 치웠다.
그리고, 예상대로의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뭐, 뭡니까?”
소매치기범의 가슴께에는, 성당 소속 고아원에서 아이들의 소속을 밝히기 위해 달아주는 옷핀이 달려 있었다.
-―
장물 처리소를 들쑤시기 전에, 우리는 먼저 대성당으로 향했다.
요나스가 불평하긴 했지만, 어차피 대련을 위해 나온 만큼 돈을 거의 들고 오지도 않았고, 지갑도 별로 비싸지 않았기에 그도 크게 미련을 가지진 않았다. 소매치기범이 갖고 있는 돈을 다 주니 그는 금방 싱글벙글 웃으며 따라왔다.
‘어차피 범죄자들에게 채권추심 하는 데 기한 같은 건 없으니까요. 천천히 합시다!’
물론 지갑을 포기하진 않았다. 지갑을 되찾는 기한을 뒤로 좀 미뤘을 뿐.
우리는 소매치기범을 데리고 대주교에게로 향했다.
대주교는 착잡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수녀와 사제들도 누군가는 한숨을 쉬고, 누군가는 분노를 삭였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자이자 통솔자인 대주교가 앞에 있었기에 먼저 나서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대주교는 한숨을 쉬며 소매치기범에게 다가갔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무릎을 꿇고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차마 눈을 들지 못하고 바닥을 바라보던 아이는 대주교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그토록 대담하게 소매치기를 했으면서, 자신의 죄가 대주교에게 드러나자 창피함을 느끼는 듯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니.”
대주교는, 호통을 치며 다그치는 대신 나긋하게 물었다. 아이는 오히려 더욱 움츠러들었다. 대주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나는 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죄를 저지를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하던 시절, 성당 앞에 버려진 너를 거두고 지금까지 키우며 너를 보아왔기에 잘 안단다. 너는 언제나 당당하게 네 또래를 이끌었지만, 그렇다고 네 잘난 맛에 다른 아이를 괴롭히지 않고 오히려 돕는 아이였지.”
그리고는 한 번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놓아주었다. 그는 아이의 양 어깨를 살짝 부여잡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런 네가 순전히 개인의 욕심 탓에 이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분명 우리가 네가 바라던 무언가를 채워주지 못했기에 이런 일을 했겠지. 부디, 우리가 네게 무얼 소홀히 했는지 알려줄 수 있겠니?”
대주교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수녀와 사제들이 움직여 아이의 시선에 우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사이를 가렸다. 아마 우리를 보이면 아이가 부담을 느껴 답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듯했다.
그제야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부모님이요.”
그 말에, 좌중의 모두가 침묵했다.
그래, 여기 있는 이들은, 나와 요나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종교인이었다. 황금십자교도 나름 세계종교로서 박애를 강조했기에 이들은 모두 성심성의껏 아이들을 대했다. 나도 며칠간 여길 드나들며 본 적이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고아원의 관리자였고, 아이들에겐 ‘수녀님’과 ‘사제님’일 뿐이었다. 이들은 결코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줄 수 없었다.
“어떤 귀족 아저씨가, 자기 말을 잘 따르고 실적이 좋으면 좋은 귀족 부부에게 입양시켜준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대주교의 어깨가 꿈틀했다.
“저, 저 말고 다른 형이나 누나들도 몇 명 한다고 들었어요! 시, 실제로 이미 그렇게 입양을 간 형, 누나도 있다고….”
참담한 이야기였다. 철십자 기사단이 아직 나와 만나기 전, 모종의 이유로 주군을 지키지 못하고 떠돌던 시절 온갖 험한 꼴을 봤을 요나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대주교는 잠시 침묵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떨리는 호흡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물었다.
“혹시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있을까?”
“—-때부터요.”
순간 내 호흡이 잠시 멈췄다. 아이가 말한 때는, 딱 황후파가 본격적으로 대주교를 비롯한 다른 브로커들을 밀어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였다.
“…그럼, 그 귀족이라는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려줄 수 있니?”
그리고, 아이의 대답을 들은 그는 뒤처리를 사제들에게 맡기고, 곧장 나와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요나스조차 밖에 놔둔 채, 그는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다.
“필요하신 건, 무엇이든 말씀하시지요.”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정갈하고 차분했지만, 그 눈엔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가 묘사한 범인의 얼굴은, 울름 남작과 완벽히 일치했다. 그리고 울름 남작은 황후 파벌의 행동대장으로 강력히 의심받는 사람이었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황후 파벌은, 고아원을 통해 대주교의 약점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통해 대주교의 약점을 찾으려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그들은, 고아원을 범죄자 소굴로 만들어 대주교와 성당 그 자체에 흠결을 내려 하고 있었다.
“황후의 파벌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팔츠 교구, 아니, 제국 내의 황금십자교의 자산을 얼마든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대주교가 애매한 협력 관계를 넘어 완벽하게 우리의 편으로 넘어오게 만드는 데는 차고 넘치는 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