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하수도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침묵했다.
그 상태로 기다리고 있으니, 흐릿한 인영이 우리가 숨은 곳 근처로 다가왔다. 우리는 아예 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 숨었기에 다행히 들키진 않았지만, 이곳이 워낙 조용하고 소리가 울리는 곳인지라 작은 소리만 내도 들킬 것이 분명했다.
긴장으로 온몸의 근육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인지 조금 꼼지락거렸다.
또각, 또각.
그들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마리아는 수정구를 가동했다. 아주 작은, 마리아와 딱 달라붙어 있기에 겨우 느낄 수 있었던 진동과 함께 수정구가 그들의 모습을 비췄다.
누군지 알수 없는, 아마 성인 남성쯤 되지 않을까 하는 사람 셋이 신중하게 서로를 확인했다.
“하늘?”
“파도.”
“빨강.”
암구호로 서로를 확인한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히 다들 무사했던 모양이구료.”
“젠장, 울름 남작, 자신만만해서 까불더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하필 황녀를 직접 도발할 건 뭐란 말입니까. 그럴 거면 들키지나 말지.”
아무래도 황후 파벌의 일원인 것 같았다. 남작과 황후의 연결고리를 증명해줄 좋은 증거가 될지도 모를 이들의 등장에 마리아의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아마 조금 흥분한 모양이지.
“에휴, 이미 지나간 일로 더 떠들어서 뭐 하겠습니까. 그보다, 여긴 확실히 안전한 것 맞겠지요?”
“요 며칠간 살펴봤지만, 여길 확인한 이들은 없습니다. 아마 남작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게 아니겠습니까?”
“그걸로는 좀 부족한데, 혹시 감찰단에 연줄 없소?”
서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유독 침묵을 지키던 사람에게 물었다.
“…감찰단에서도 이곳을 알아냈다는 소식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애초에 감찰단이 집중하는 부분은, 이런 접견 장소가 아니라 장부에 나온 가문들이니까요.”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한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
저 사람, 지금 태연하게 감찰단에 자기 사람이 꽂혀있다는 걸 시인하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어쨌든, 반드시 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직감했다.
워낙 어두워 얼굴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윤곽으로 체형이나마 겨우 살필 수 있었다.
호리호리하지만, 가냘프진 않았다. 키는 나보다 약간 작은 것이, 이 세계의 평균을 고려하면 꽤나 큰 편이었다.
목소리는, 확실히 남자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마리아에게 물었다.
‘마법 중에 목소리 변조에 대한 마법이 있어?’
목소리를 낼 순 없었기에 손가락으로 마리아의 손등에 글자를 적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내 손등에 답했다.
‘있긴 하지만, 쓰이진 않았어요. 마력의 유동이 느껴지지 않아요.’
마법에 재능이 뛰어난 마리아조차 이렇게 답할 정도라면, 정말 마법이 쓰이지 않은 것일테지.
그렇다면, 저 사람은 확실하게 남자였다. 그 체형을 확실하게 머리에 새겨두었다.
“다행이구려. 아무튼, 그럼 안심하고 본론으로 넘어가 보겠소이다.”
다른 두 명의 사람은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래서, 부탁한 물건은 어떻게 가져오셨소?”
“음, 여기 있소.”
심상찮음이 절로 느껴지는 남자가 궤짝 같은 것을 건넸다.
‘여길 밀거래에 이용하는 건가.’
과연, 마리아의 말대로였다. 황후 파벌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마 이곳이 굉장히 안전한 장소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자기네 사람들끼리 거래한다는 전제하에, 떳떳하지 못한 물건을 주고받기에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겠지.
다만 신기한 건, 궤짝을 받은 사람이 자기가 물건을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넘어갔다는 거다.
이건 둘 중 하나였다. 이런 것조차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신중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다거나.
그리고, 적어도 이 경우에 한해서는 후자가 확실했다. 이들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에 암구호로 상대를 식별한 이후로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분명하다. 저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황후 파벌의 중심에 보다 더 접근한 사람인 건 확실해.’
감찰단에 지인이 꽂혀있어 그쪽을 통해 감찰단 내부 소식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가진 사람이다. 만약 이 사람조차 말단이라면, 그냥 황후가 눈 달린 피라미드로 세상을 조종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대로 덮칠까?’
마리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부했다.
‘상대가 누군질 모르겠어요. 말하는 것만 보면 다들 작위를 가진 귀족인 건 분명한데….’
쯧.
속으로 혀를 찼다.
이미 수정구를 통해 비밀스런 장소에서 접선하는 것 자체는 증거를 확보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저들을 제압하면 현행범으로 바로 황제에게 배달해버릴 수 있겠지.
하지만, 상대가 귀족이라는 게 문제였다.
정확히는, 귀족 중 마법사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마리아는 어지간한 마법사들보다 강하긴 했다. 하지만, 도달한 경지에 비해 전투 능력이 조금 떨어지긴 했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 중에는 마법과 관련된 부서에 일하는 이들이 있어 안 그래도 마법사의 비중이 높은 귀족 집단 중에서도 더욱 비중이 높았다.
만약 저들 중에 전투에 능한 4위계나 5위계 마법사만 있어도, 이렇게 제한된 공간에서는 충분히 도주가 가능했다.
그리고 만약 놓치면, 그는 저들은 더욱 꽁꽁 제 정체를 숨기겠지.
마법으로 빛을 뿜어 수정구에 저들의 얼굴을 기록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도 위험부담은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렇게까지 했는데 여기서 저들을 바로 제압하지 못하면, 황후 파벌은 기를 쓰고 증거를 지워낼 거다.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는,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며 빠져나가지 못할 덫을 마련하고 일망타진해야 한다는 게 마리아의 설명이었다.
“음, 물건도 받았겠다. 요새 워낙 정세가 흉흉하니 나는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소.”
궤짝을 받은 사람은, 그대로 바로 돌아갔다.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소?”
남은 사람이 요주의 인물에게 물었다.
“아쉽게도 부탁하신 약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자잘한 실수는 여럿 찾긴 했지만, 이걸로 귀하의 가주를 무너뜨리기엔 부족합니다.”
“쯧, 그 인간, 여간 철저한 게 아니군.”
…패륜아?
하여튼, 패륜아인지 패륜아 지망생인지 모를 사람이 되물었다.
“그럼 그건 됐고, 약은 어떻게 됐소?”
“그건 이미 댁으로 보냈습니다. 항상 보내던 그곳으로요.”
“음, 그 정도면 됐소. 쯧, 아쉽구먼.”
“공께서 이리 열정적으로 폐하를 위해 노력 중이신데, 머지않은 미래에 보답이 있지 않겠습니까?”
“말뿐이라도 고맙소.”
패륜아는 그렇게 말하곤 손을 휘휘 저으며 돌아갔다. 이제 요주의 인물만이 남았다. 그는 다른 이들이 모두 떠나간 상황에서도 돌아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런 젠장, 대체 언제 돌아가는 거야?’
안 그래도 마리아와 계속 이렇게 딱 붙어있어서 곤란한데,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진짜 엄청 많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속으로 욕을 뱉으며 기다리던 찰나였다.
“이제 나오시지요.”
그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리아의 몸도 딱딱하게 굳었다.
들킨 건가?
어째서?
우리의 흔적은 꼼꼼하게 다 지웠을 텐데? 혹시 야간투시의 마법 같은 거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게 있다면 마리아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온갖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짝 긴장했는지 살짝 떠는 마리아의 몸을 끌어안고 진정시키며 가만히 기다렸다.
“흠, 일은 잘 처리했군.”
‘하아.’
한숨이 절로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정말 다행히도, 우리 말고도 일행이 또 있었는지, 어둠 속에 숨어있던 사람이 걸어 나왔다. 저곳은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오자마자 불을 켜고 다 확인했던 곳이었다.
그때는 확실하게 사람이 없었으니, 저 사람은 틀림없이 아까 들어온 세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이만하면, 저들도 이탈할 생각은 않겠지요?”
“이미 우리가 주는 선물에 일상을 의존하는 이들이네. 지금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협력하겠지.”
“하지만, 생각보다 감사의 강도가 강해지면 어떡할까요?”
“걱정 말게. 그 부분은 각하께서 적당히 손봐주실 테니.”
그 말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도 못 한 단서가 튀어나왔다.
각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관료들 중 대신 소리 들을 사람이나 그와 맞먹는 위상을 가진 작위(대부분 백작 이상의)를 가진 이들 정도였다.
물론 이곳 팔츠에 각하 소리 들을 사람이 한두 명인 건 아니었다. 제국의 중심이니만큼, 각하 소리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꽤 많긴 했다. 아마 이들만 추려도 스물 남짓은 가볍게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같은 각하 소리 듣는 사람들이라도 다 격이 같은 건 아니었다.
‘제국백 소리 듣는 사람조차도 말단으로 부려 먹히던 파벌이야.’
심지어 황제 직속 기구인 감찰단이 나서서 움직이는 감사의 범위를 조정할 수 있을 권세를 가진 사람은, 각하 소리 듣는 사람 중에서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수색의 범위가 확 줄어든다고 할 수 있었다.
마리아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연신 내 손등을 두드렸다.
다행히 새로 등장한 사람은 그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따라온 것뿐인지, 저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팔을 풀었다.
“자, 이제 이 기분 나쁜 곳을 나가자고.”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리아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걸 깨달았다. 간단한 1위계 마법으로 작은 광구(光球)를 만들었다.
“…마리아?”
마리아는, 어째선지 팔을 가슴께로 딱 웅크리고 수정구를 감싸 쥔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야,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이건 중대 사항이었다. 바로 마리아의 앞으로 돌아가 여기저기 상태를 살폈다. 적어도 옷 위로 드러나는 이상은 없었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마리아는 그런 내게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호, 혹시, 제 심장 고동이 다 느껴졌었나요…?”
“응? 그야 그렇지. 근데 그게 왜?”
내 말에, 마리아는 더욱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게, 저, 저도 빌의 맥박이 느껴져서….”
그 말에, 나도 내 얼굴에 피가 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긴장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리, 진짜 엄청나게 부끄러운 자세로 숨어 있었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