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부끄러운 잠입이 끝나고, 우리는 궁으로 복귀했다.
그녀와 나 모두 그날은 서로 얼굴 볼 자신이 없어 다음날이 되어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
“…….”
물론 하루 만에 기억이 사라지진 않았기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만 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누굴 목표로 해야 할지 후보군은 대충 추렸는데, 다들 하나같이 나름 권세가 있는 이들이라 지금까지처럼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
“…그래요.”
마리아는 내가 말을 걸자 눈을 피하며 못내 대답했다. 슬쩍 움직여 눈을 맞추면 반대로 피하는 게, 역시 어제의 사건이 그녀에겐 꽤 크게 다가온 것 같았다.
“하나같이 장·차관 정도는 하는 사람들이죠. 물론 제 앞에서 그들이 예의를 차려야 하는 건 분명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 말에 고분고분 따를 이유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감찰단이 결론을 내리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어.”
“느긋하게 하나씩 정보를 캐낼 여유는 없지요. 알고 있어요.”
그녀는 고민했다.
“…역시, 그럼 그들을 전부 불러서 한 번에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게 가능하겠어?”
부른다고 순순히 올 사람들이 아니었다. 황실에 대한 존중이니 뭐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들이 그만큼 바쁜 사람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장차관쯤은 되는 사람들이고, 작위 귀족이라면 못해도 제국의회나 귀족계의 최상층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그쯤 되면 일분일초 지나가는 시간 자체가 엄청난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한 번에 불러낸다는 건, 아무리 마리아라 하더라도 어려웠다.
애초에 그들은 황제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내 지적에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요.”
“무슨 명분이라도 있는 거야? 대주교님으로도 힘들 텐데.”
그녀는 내 지적에 오히려 살짝 웃었다.
“아무튼,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명분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
마리아가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선언하고 이틀 후, 우리는 황궁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진짜, 물고 태어나는 숟가락이 최고긴 하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말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러죠?”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이었기에 경어를 쓰며 마리아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오늘 여기서 벌어지는 연회의 호스트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마리아지만, 내가 이런 자리에서 마리아의 파트너로 알려져 있었기에 세트 메뉴로 딸려왔다.
“진짜 다 불러내는 데 성공했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리아는 그걸 또 들었는지 콧대를 세우고 말했다.
“말했잖아요? 거부할 수 없을 거라고.”
한창 시종들을 지휘하며 마지막으로 연회장의 상태를 점검하는 마리아 곁에서 참석하는 사람들의 명부를 살폈다. 우리가 목표로 했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전부 들어가 있었다.
아니, 오늘 이 연회장에는 팔츠에서 나름 힘 좀 쓴다는 사람은 전부 모여들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면, 답은 간단했다.
“아바마마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돈을 기부하신 자선단체에서 황궁을 빌려 벌이는 연회에, 과연 권력에 민감한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어렵겠지요….”
나라도 이들과 같은 상황이면 못 빠져나갈 거다. 아니, 정치적으로 그렇게
하물며 황제가 돈을 넣기 전에 이미 이 단체에 이름을 올린 귀족의 면면도 다들 화려했다.
욤에게 부탁해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도 참석시켰고, 그 외에도 여러 귀족가가 참여했다. 물론 그중 일부가 울름 남작의 비리 사건에 휘말려 자발적 근신에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거야 이곳 수도에선 왕왕 있는 일이었기에 다들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가 참여한 이후로 자선단체에 제발 받아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이 참가인 명부였다.
“재상급이나 황실 빼면 진짜 올 사람은 다 왔군요.”
재상들은 애초에 이런 행사에 참가할 군번이 아니고, 황실의 경우 마리아가 주최하는 자선행사에 다른 이들이 끼어드는 건 관습적으로 도의를 어기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걸 감안하면, 올 사람은 전부 다 온 것과 다름없었다.
마리아는 적당히 지시를 마치고 나를 돌아봤다.
“그래서, 분명히 외워뒀죠?”
“물론입니다.”
오늘 이 연회의 목적은 겉으로는 자선단체의 발족식이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목표로 한 사람들을 전부 불러들여서 과연 누가 이 일의 핵심일지를 검증해내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그런걸 드러낼 만큼 허술한 사람은 애초에 그런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들 당연히 티를 내지 않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신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목소리, 확실하게 기억했죠?”
“물론입니다.”
우리에겐, 목소리와 실루엣 분이라지만 증거가 있었다.
수정구 자체의 내용만으로는 감찰단에 보내도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찍힌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혀내기 위한 정보는 충분히 제공해주었다.
목소리와 체형. 그 두 가지만 있어도 개인을 특정해내기엔 충분했다.
마법을 이용한 조작은 없다는 마리아의 확언이 있었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이 다음부터는, 지난번 귀족들의 저택을 털 때와 똑같았다.
마리아가 연회장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내가 각 귀족의 수행원을 확인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하실에서 본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다.
혹시라도 그들 중에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했다.
‘감찰단에 자기 사람을 꽂았다는 걸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에요. 고위 귀족이 다른 사람에게 그걸 드러낼 정도면, 확고한 신뢰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해요.’
그녀의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보통 대놓고 자기 약점이 될만한 걸 공유할 정도면 항상 자기 눈에 닿는 범위에 있는 측근으로 쓰기 마련이었다. 특히 이렇게 대놓고 주요 정치인들이 다 모이는 자리라면 더더욱.
마리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귀족들이 입장을 시작함과 동시에, 우리도 팔짱을 끼고 전장으로 임했다.
――
“하하하! 전하께서 이리 빈민 구제에 관심이 많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 나라의 황족으로서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수도에서는 물산이 넘쳐흐르는 시대에 배곯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고귀한 핏줄을 이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힘써야 할 일 아니겠어요.”
“전하와 같은 분이 황녀이신 것이 이 나라의 홍복일 것입니다.”
“별말씀을.”
연회장은 살벌했다. 아니, 연회장 자체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정확히 말하면, 누가 봐도 황후 파벌에 명확하게 줄을 대고 있는 이들과 마리아가 나누는 대화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 나눈 대화도 결국 해석하면 너희는 넘쳐흐르는 돈으로 파벌 놀이나 하고 있냐는 지적에 세력도 한미한 황녀 따위가 우리를 견제하려 하냐고 받아친 것이었다.
물론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대부분은 서로 좋게 좋게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원래 어딜 가더라도 꼭 미꾸라지 한 마리씩은 있기 마련이었다. 황후 파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도 이곳에 모인 사람의 면면이 워낙 쟁쟁한 탓에 곧장 돌아가진 못했다. 그래서 적당히 서로 몇 마디 치고받고 나면 다시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튼, 노고가 많으시겠습니다. 부디 제 자금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의 선행이 내일의 행운이 되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서로 날 선 말을 주고받은 것이 무색하게 훈훈하게 대화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나는 더더욱 정치판에는 너무 깊이 몸담지 말자는 다짐을 다지게 됐다.
저렇게 얼굴에 철판 깔고 대화 나누는 걸 보면, 여간 무서운 게 아니다. 저러면서 나중에는 뒤에서 서로 등에 칼 꽂는다는 거 아냐.
호러 장르가 다른 게 아니었다. 이게 바로 호러 영화지.
하여튼, 마리아와 나는 팔짱을 끼고 서로 파트너임을 드러내며 연회에 참석한 귀빈들과 한 차례 쭉 인사를 나눴다.
이제 본격적으로 따로 움직일 차례였다.
“믿고 있을게요.”
“맡겨 두라고.”
다시 정쟁의 한복판으로 향하는 마리아를 배웅하고 수행원들이 모이는 곳으로 향했다.
보통은 이들도 제 주인과 함께 있겠지만, 이곳에선 그럴 수 없었다. 특히 마리아가 있는 곳은 자리한 VIP룸은 들어간 이들의 지위가 워낙 엄청난 탓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별도의 공간에 머물러야 했다.
별도의 공간이라 해봐야 일반 연회장이었지만.
“오오! 곧 부마가 되실 분 아닙니까.”
“…안녕하십니까.”
시작부터 굉장히 세게 펀치를 맞았다. 이 사람들은 보고 들은 대로 말하는 거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브란덴 선제후의 셋째 아드님이라 들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건 저희 영지에서 나는 영약인데, 남성성에 굉장히 좋은 물건이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보실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와 결혼 예정이라는 소문이 퍼진 건지, 내게 줄을 대려는 사람이 잔뜩 몰려왔다. 그들을 적당히 돌려보내며 주변을 살폈다.
‘젠장, 이래서야 목표를 관찰할 수가 없는데.’
한동안 인파에 둘러싸여 쩔쩔맸다.
이런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으니,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힘으로 떨쳐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당황해하며 빠져나갈 틈만 모색하고 있으니, 인의 장막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잠시 비켜주시겠습니까.”
“앗, 예.”
욤이었다.
수도에서 목에 힘 좀 준다는 뷔르템부르크 후작가의 장남 아니랄까 봐, 어지간한 가문 사람들은 다들 얌전히 물러났다.
물론 여전히 내게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나도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자리를 좀 비워도 되겠습니까?”
“예, 예….”
욤이 절반 정도를 치워준 덕에 수월하게 나머지 절반도 밀어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욤과 인사를 나눴다.
“덕분에 살았다.”
“별말씀을.”
또 사람들이 몰려들까, 나는 곧장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수행원들이 따로 모여 시간을 보내는 곳이 잘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자세한 내막은 밝힐 수 없었기에 적당히 둘러대며 자리에 앉았다.
욤을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부적처럼 쓰는 것 같아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목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나중에 꽤 귀한 몬스터 부산물 하나 선물해주기로 약속하고, 적당히 대화를 나누며 수행원들을 살폈다.
그들 역시 그들의 주군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고위급 인사라고 볼 수 있었기에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다들 같은 테이블에 동석한 사람들끼리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몇몇은 아예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두루두루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흠.”
그런데, 그중 유독 이상한 사람들이 몇 있었다.
다른 이들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저 묵묵히 제 앞에 놓인 음식을 해치울 뿐인 사람들이 있었다.
명백히 이상했다.
어느 판이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인맥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뜬금없는 친분을 통해 막힐 일이 통과되고 통과될 일이 막히는 경우가 흔한 것이 세상 이치였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저렇게 침묵한다고?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아직 초짜라 여기 모인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걸 급이 되지 못하는 이들이거나, 혹은 그럴 필요가 없는 포지션을 잡은 이들이거나.
무능한 경우는 애초에 고민하지 않았다.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이들은, 애초에 여기 따라올 만큼 측근으로 기용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내 시선이 더욱 그들에게 쏠렸다. 누가 어떤 경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유심히 살펴봐야 할 이들이 그들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내 시선은 유독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익숙했다.
얼굴이 익숙하다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 체형은 익숙했다. 옷의 품이 넓긴 했지만, 움직이며 드러나는 윤곽만으로도 사람의 체형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언제나 상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했고, 그렇기에 이런 걸 구분하는 건 경력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할 수 있게 되는 일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탓에 키를 알긴 어려웠지만, 저 체형은 딱 지난번 하수도에서 본 사람과 비슷했다.
“욤.”
“예?”
“잠깐 얼굴 좀 보고 올 사람이 있어서. 잠시 일어날게.”
“상관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용의자에게로 향했다.
뚜벅뚜벅 걸어갔다.
갑자기 이 연회장의 주인공 중 한명이 다가가자, 수행원들은 다분히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멈춰섰다.
그 역시 술잔을 내려두고 날 쳐다봤다.
천천히, 그 얼굴을 뇌리에 새기며 물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대답 없이 한참 시간을 끌었다.
“어디서, 한 번 만난 적 있는 것 같아서.”
재차 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그 목소리는 내가 수정구를 몇번이나 반복 재생하며 들은 그 목소리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