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르템부르크 후작가는, 황족과 선제후들을 제외하면 제국에서 제일가는 명문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메른 공작을 제외한 다른 공작위를 전부 선제후들이 겸임하는 상황에, 포메른 공작가도 작위에 비해 가문의 역사와 권위는 조금 부족한 편이었기에 아마 그들도 동의할 것이다.
애초에 전통적으로 남부의 명가로 군림해온 그 명성 덕에 그들이 이곳 팔츠에서도 정치적으로 꽤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 이에 대한 반박은 곧 후작가의 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가문의 뒷배만으로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은 딱 그 정도까지라고 봐도 무방해요.”
“지금 욤이 받는 대접은 지금까지 저들이 이뤄낸 성과의 보답이라는 거지?”
“맞아요.”
마차 안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필기가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편리할 줄이야.
“욤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솔직히 잘 몰라요. 매번 절 귀찮게 하던 사람이라는 것 정도일까요. 공적으로도 그가 전면에 나선 건 후작이 영지로 내려간 요 근래의 일이었고요.”
“그런데?”
“하지만 뷔르템부르크 후작가가 황후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공중에 글자를 띄웠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사건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그 모든 사건의 공통점은, 황후 파벌과 뷔르템부르크 후작이 갈등을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좀 많은데?”
“어쩔 수 없죠. 지방 출신들이 합류하긴 했다지만, 근본적으로 황후파는 수도 귀족 세력이에요. 지방 귀족들과는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요.”
“과연.”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종종 말 탄 유목민 한 번 상대해본 적 없는 쫄보들이 동부의 사정을 왈가왈부한다고 욕하던 걸 종종 들어본 적 있었다.
모든 이권이 동부에 집중된 우리 가문도 이런 상황인데, 곳곳에 영지와 작위를 가진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는 어떨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까지 사고가 다다르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러면 영지를 교환하자는 게 합리적 제안처럼 보이는데?”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영지가 흩어져 황후파의 정책과 자주 충돌하는 상황이라면, 이참에 영지를 교환해 월경지를 정리하고 깔끔하게 합쳐주자는 말이 나올 법했다.
거기에 원래 영지의 몇 배가 되는 영지를 얹어주겠다고 한다면, 그건 배려의 의미로 보일 수도 있었다.
법적으로도 문제는 없었다.
새로운 작위를 만들고 평민을 귀족으로 만드는 건 황제의 권리일지 몰라도, 자기 영지와 작위를 처분하는 건 귀족들의 자유였으니까.
“만약 뷔르템부르크 후작이 단순한 지방 영주로 남을 생각이었다면,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을 거예요. 뷔르템부르크 후작의 영지가 워낙 커서 늘어난 땅을 다 합쳐도 원래의 두배는 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작은 땅은 아니니까요.”
마리아의 말에서, 나는 어째서 욤이 우리에게 도와달라 했는지, 어째서 사사건건 대립하던 황후파에게 로비를 해가며까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후작가는 중앙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지.”
“바로 그거예요.”
내 말이 옳다는 듯 공중에 뜬 글자들이 일그러져 원을 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은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건 결국 후작가도 더는 황후파에 손을 벌릴 이유가 없는 이상 그들의 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뜻 아냐?”
“맞아요.”
“그럼 대주교 때처럼 은밀히 뒤에서 공작을 펼쳐도 소용없는 거 아냐?”
이번만큼은, 마리아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주 중요해요.”
“???”
의아해하는 내게, 마리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에게는, 저조차 갖지 못한 게 하나 있거든요.”
그녀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다음날이 되어서였다.
――
“빌 경! 빌 경!”
투다다다!
고양이도 아니고, 사람이 우다다 달려와 내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이것 좀 보세요!”
검술은 좀 부족해도 체력은 자신있어하는 기사 요나스가 헉헉거리며 내게 신문을 건넸다.
신문?
갑자기 신문은 왜.
물론 신문이라고 현대의 그것과 비슷한 건 아니고, 종이 몇 장에 굵직한 소식 몇 개 실어둔 것에 가깝긴 했지만, 나름 여기서는 전국의 소식을 받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만큼 비쌌기에 쓸데없는 돈 안 쓰기로 소문난 요나스가 왜 이걸 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의문은 첫 장을 펼쳐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뭐?”
‘뷔르템부르크 후작가의 후계자, 어전에서 궁정백을 들이받다!’
자세한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다. 다뤄야 할 일은 많고 지면은 부족한 탓에 전후사정이 어떤지는 거의 묘사하지 않고, 현장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만 짤막하게 소개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게 첫장 상부에 대놓고 박혀있다는 것부터 편집부가 이걸 얼마나 중요한 이슈로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리아!”
나는 곧장 마리아에게 달려갔다. 사실 달리진 않았다. 어차피 바로 옆방이고, 서로 방음이 개뿔도 안돼서 그냥 방에서 부르면 답이 돌아왔거든.
“아, 들으셨어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방에 들어오며 물었다.
“어, 어어? 어어.”
아니, 근데 우리 일단 좀 나가서 얘기할까?
그런 말을 하려 했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탁자에 자리 잡았다.
“말씀드렸죠? 그에겐 저도 없는 게 있다고.”
그제야 깨달았다.
“조정에 들어가 말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었구나.”
그보다 일단은 내 방 말고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마리아가 들어오니 마리아를 따라 시녀들이 쭉 밀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다과가 준비되고 검이나 이런저런 개인용품이 널브러져 있던 방이 화사해졌다.
마리아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차를 홀짝였다.
“이제부터, 욤 공자는 매일같이 황후 파벌이 하려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 거예요.”
“지금껏 계속 그래온 거 아니었어?”
“실무단계에서 그러는 것과 아바마마의 앞에서 그러는 건 차이가 크죠.”
그녀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건 신호탄이에요.”
“신호탄?”
“황후파가 이곳 팔츠에서 가장 세력이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조정이 그들 세상인 건 아니에요. 아니, 애초에 아바마마께서 정정하신 이상,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반수를 넘길 수 없어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하다못해 전제군주국이었다면 모를까, 나름 귀족들의 지지를 모아 선제후 투표를 통해 즉위하는 황제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여론을 관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황제가 중립을 지키고 있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중립을 지킨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믿고 이런 후계 싸움에서 숨을 죽이는 이들도 있을 게 분명했다.
“제 큰 오라버니가 태자로서 버티고 있고, 황후 파벌의 패악질에 질린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뷔르템부르크 후작이 황후를 직접 공격할 순 없겠지만, 그 세력을 상대하기엔 충분해요.”
어차피 종국에는 선제후들의 투표를 거쳐야 하기에 태자의 자리가 갖는 권위가 적어도 제국에선 땅에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태자가 갖는 의미 자체는 그대로였다.
결국 태자란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황후가 공격적으로 선제후를 포섭하지 못하는 데는, 이미 황제가 태자를 내세우며 자신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낸 것도 한몫했다.
제아무리 황후라도, 황제에게 직접 거역하는 건 어려웠으니까.
“욤을 내세워 조정에서 승부를 보려는 거구나.”
하긴, 어차피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황후의 파벌을 캐고 다녀도 결국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들어내는 파급력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마리아도 울름 남작을 쫓아낼 때 감찰단의 힘을 빌린 거였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리아는 내 생각을 부정했다.
“아뇨? 그건 아닌데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결국 마무리는 우리 손으로 지어야죠.”
“하지만, 그럼 왜 욤을 내세운 거야?”
내 질문에, 마리아는 살짝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제가 왜 굳이 다른 평범한 귀족들이 아닌, 뷔르템부르크 후작가의 후계자의 협력을 얻어서야 이렇게 나섰다고 생각하세요?”
“그러게…?”
생각해보면 조정에 들어갈 수 있는 관료는 많았다. 이곳은 팔츠였고, 팔츠에서 지위가 좀 높은 귀족들은 전부 관료라 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 시대에 수도에 거주하는 모든 귀족은 잠재적 관료였다.
설령 자신이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갑자기 관료의 숫자가 부족하면 천거를 받든 돈으로 관직을 사든 해서 끌려 올라가는 게 제국의 관료제였다. 이건 지구의 평균이랑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돈으로 권력을 만들어내는 연금술 매관MAGIC, 참 익숙한 향취잖아.
말이 셌지만, 결국 요지는 마음만 먹으면 이런 작전은 굳이 고위 귀족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마리아는 끝까지 답을 하지 않고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킬 뿐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건, 바로 다음 날, 황제가 없이 이뤄진 조정에서 육탄전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난 이후였다.
욤과 황후 파벌의 사람이 감찰단의 구성을 두고 논쟁을 벌이다 몸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었다. 그 뒤로도, 욤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황후 파벌과 이런저런 이유로 싸움을 벌여 조정에서 파행이 벌어진다는 소문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런 와중에도 황제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성실히 움직였기에 행정이 멈추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릴 수는 없었다.
“자, 이제 시간은 충분히 벌었네요.”
당연하지만, 감찰 결과가 나오는 건 몇 주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움직이죠.”
마리아는 한참 뒤로 밀린 데드라인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날 바라봤다.
“우리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박쥐아저씨?
정치판은 문외한이라 그저 소식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기에 마리아의 말에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
마리아는 내 표정을 보며 피식 웃고 내 허리춤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지만, 기사의 허리춤을 가리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진 않았다.
“파벌 싸움이 한순간에 격화됐어요. 이미 다들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탄핵하려고 난리를 치겠죠. 증거를 모으기 위해서는 다소 과격한 방법을 쓰는 것도 서슴지 않을 거예요.”
“아.”
이번에는 나도 웃을 수 있었다.
“그건 또, 내가 잘하는 일인데.”
탐관오리의 저택을 터는 의적 노릇은, 이미 몇 차례 해본 적 있는 일이었다.
한동안 푹 쉰 태도가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켤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