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백의 저택이 털렸다.
제아무리 궁정백 본인이 버티고 선다 해도, 결국 사용인과 사병들이 버텨주지 않으면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가 수도의 귀족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비텔스바흐 가문이 당할 정도면 우리라고 안전하지 않은 거 아냐?”
“마리아 전하의 약혼자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심지어 후작가가 도왔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더욱 불안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로 탄핵 러시가 이어지긴 했다지만, 그거야 정쟁이 거세지면 언제나 일어나는 일종의 전통이었다. 귀족이란 자원은 한 번 쓰고 사라지는 소비재가 아니라 죽을 정도의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어차피 한동안 자숙하다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결국 정쟁이란 일종의 턴제 싸움이라, 내가 잘 나갈 때 조정을 장악해 해 먹는 게 목적이지 상대를 아예 죽여버리는 건 고귀한 귀족들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기본적으로 상대가 칼을 뽑아 들어도 우리 쪽의 방패, 그러니까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귀족과 고위 귀족들이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 대귀족 중 하나인 궁정백이 이번에 목이 달아났다.
물리적으로 목이 달아났다는 건 아니었다. 사실 비유적으로도 아직 목이 달아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냥 저택이 털려 주요 자료들이 감찰단으로 넘어간 것뿐, 아직 사건의 결론이 나진 않았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탄핵당할 건수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걸 털린 이상 시간의 문제지 실각은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러면, 균형을 위해서라도 황하 폐하를 지지해야 할 것 같은데….”
“황실이 너무 강해져서야 곤란하지. 귀족의 신성한 권리는 언제나 존중받아야만 한다.”
욤이 걱정하던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빌헬름이 마리아와 한배를 탔다는 건 마리아 본인이 열심히 소문을 퍼뜨렸기에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빌헬름이 직접 나섰다는 건, 결국 황녀가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황녀님이 나선 거라면 결국 후계자 싸움 아니오?”
그리고 마리아가 자신했던 것도 여기 있었다.
“궁정백이 몰락하는 건 좀 아쉽긴 한데, 결국 궁정백도 황후 폐하를 뒤에 업고 있던 건 똑같지 않나.”
“아직은 중립을 지켜야 할 것 같네만.”
황녀가 직접 이번 일에 개입하긴 했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황실이 직접 개입했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결국 본인들도 황후를 빽으로 업은 덕에 팔츠 정계를 틀어쥘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물론 욤도 그렇고, 태자의 파벌도 그렇고 여러 세력이 합심해 황후파를 공격하긴 했지만, 애초에 그러고도 황제의 총신들이 움직이지 않아 세력만 따지고 보면 반황후 연합이 황후파보다 세력이 적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황후파가 세력을 믿고 여기저기서 깽판을 친 것이 있기에 그들을 향한 사교계의 민심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내가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고마웠다.”
그리고 이미 목적은 이뤘다는 듯 뷔르템부르크 후작가가 손을 털고 나가자 그런 분위기가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감찰단이 본격적으로 팔츠 전역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
감찰단이 표적이 된 귀족가를 들쑤시기 시작하며 수도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오늘은 이 집에서 심각한 비리가 드러나고, 어제는 저 집에서 음침한 범죄가 발각되고, 내일은 내 집이 털릴지도 모른다.
황후파의 귀족들은 다들 부디 자신이 감찰단의 생사부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기를 바라며 숨죽인 채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도가 완전히 침묵에 잠긴 건 아니었다. 황후파가 수도 정계의 절반을 잠식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나머지 절반은 황후파와는 상관이 없는 이들이라는 의미였다.
“하하하! 요새 아주 날씨가 좋은 것 같습니다.”
“어제오늘은 낮 동안 내내 비가 오지 않았습니까?”
“내 기분이 좋으면 그게 좋은 날씨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연회야말로 아직 황후가 수도를 전부 장악하지 못했다는 걸 방증했다.
이번 연회는 마리아 황녀가 열지는 않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모두 이 연회의 주인공이 마리아라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이런 특별한 명분도 없는 시기에 갑자기 황실 명의로 연회가 열린다면, 그건 보통 그즈음에 기쁜 일이 있었던 황실 인원이 돈을 지원해 우회적으로 연회를 열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딱히 연회의 주최자라 할 만한 사람이 없음에도 마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상석에 자리했고, 귀족들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 이 연회는, 사실상 마리아의 승전 연회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리고, 승전 연회에는 보통 따라오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
전리품이었다.
“…잘도 저질러 주었구나.”
“어머니만 할까요.”
황후는 표독한 눈초리로 마리아를 노려보았다. 마리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황후를 맞이했다.
어차피 한바탕 칼부림은 끝난 뒤였고, 이 연회가 벌어지는 곳은 황궁이었다. 황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설령 궁정백이 잘려 나갔다 해도, 나를 따르는 이들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네가 선제후 가문을 이용해 아무리 칼부림을 벌인다 하더라도 결국 너를 뒷받침하는 세력은 한미하기 그지없을진대, 네가 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더냐?”
그래서 그럴까. 황후는 오히려 더욱 역정을 냈다. 품위 유지라거나, 혹은 얕잡아보여지는 등의 문제가 있기에 이런 자리에서 소리를 치진 않았지만, 적어도 마리아에게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 황후의 발작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어마마마라고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존심을 박박 긁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황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추해요.”
그리고, 그 한마디가 그녀의 심장에 대못을 꽂았다.
“뭐, 뭐라고!”
황후가 고함쳤다.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황후가 황급히 태도를 고쳤지만, 이미 사람들은 그녀가 한 말을 모두 들은 뒤였다.
황후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마리아를 노려봤다.
“마리아, 내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아느냐? 이 경쟁이 이걸로 끝난 것 같더냐?”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시죠. 이미 감찰단에 어머니의 손발이 다 묶이지 않으셨나요?”
“…주님께 맹세컨데,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의 일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해주마.”
“어머, 그런 말씀을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마리아는 눈웃음을 치며 황후의 경고에 응답해주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주님께 전해드릴 대주교께서 어머니를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조롱이었다. 그제야 황후는 마리아가 뒷일이고 뭐고 이 자리에서 자신이 분해하는 장면을 다른 이들에게 과시할 생각 말고는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훌륭하게 그 역할에 임해주고 있다는 것도.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려왔다. 어차피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정상적인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황후는 눈에서 빔이라도 나올 듯 마리아를 노려보다 뒤돌았다.
“…이만 가봐야겠구나.”
“안녕히 가시지요.”
황후를 배웅하는 마리아의 표정에는, 통쾌함이 가득했다.
반대로 내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거야?”
“뭐가요?”
마리아는 후련한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지난 몇 년간 쌓인 악감정을 모두 털어놨는지 피부에 약간 윤기도 도는 것 같았다. 이건 그냥 화장을 해서 그런 건가?
아무튼, 내가 염려하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황후의 말도 일리는 있어. 분명 이번에 궁정백을 탄핵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대거 물갈이되며 한동안 황후가 무언가를 할 동력 자체를 상실한 건 맞지만, 그것도 일시적이야. 팔츠에서 그녀의 세력 자체를 축출해내지 못한 이상, 결국 몇 달 안에 그녀의 파벌은 부활할 수밖에 없어.”
내가, 이 나라의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황후를 손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단순히 내가 선제후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자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수도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나는 굳이 황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는 뒤탈 걱정 없이 황후의 콧대를 꺾겠다는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떠나더라도 여전히 수도에서 살아야 했다. 이유야 많지만, 사실 제일 큰 이유는 수도에 있는 것이 수도 바깥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하기 때문도 있었다.
이전에는 수도가 위험하다고 지방에 머물던 마리아였기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적당히 자기 몸을 지킬 방법만 있다면 오히려 수도에서 버티는 게 정치적 공세를 버티기 쉽다는 뜻이었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건 황족이기에 누리는 특권 덕이었다. 그런데 황후가 그 특권을 폐기하려 든다면, 수도에 머무르지 않는 한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황족이 기반도 없이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잃으면 목숨을 잃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지금부터 파벌을 만든다고 해도 황후가 자신의 영향력을 복구하는 것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리고 이렇게 되면 곤란했다.
아무리 나라도, 정말로 위기에 놓인 마리아를 두고 떠날 순 없었다. 적어도 사람 된 도리로서 그래서는 안 됐다.
어쩌면 이걸 노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괜찮아요.”
그리고 그녀의 말에 순간 모든 긴장이 풀렸다.
“그래? 다행히-”
미리 방책을 마련해 뒀다면, 나도 안심하고 튈 수 있었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찰나, 마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한동안, 팔츠를 떠나 있을 생각이에요.”
“…뭐?”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순간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들 제가 당신을 내세워 정계를 헤집는 걸 걱정하고 있잖아요. 걱정을 잠재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제가 이곳을 떠나있는 것 아니겠어요?”
“아니,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데 그 방법이란 게 이게 맞아?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었어?”
워낙 당당하게 말해서 뭔가 다른 수라도 있는 줄 알았다. 애초에 이 문제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것도 마리아였고, 그러면서 문제없다고 했던 것도 그녀 아니었던가.
황실이 귀족간의 다툼에 직접 끼어드는 건 언제나 상황을 불문하고 저항이 있는 것 정도야 나도 알고 있었다. 귀족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어느 한쪽을 편들어 끝내는 건 당장 우리 가문도 기겁하며 반항할 게 분명했으니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성과로 이걸 뒤집거나, 아니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명분이라도 갖고 있는 줄 알았다.
“수도에서 제가 움직이는데 제약이 걸리는 게 문제라면, 애초에 제가 수도에 없으면 걱정할 필요 없는 문제 아닌가요?”
“그으…, 렇지…?”
어라.
이상하다.
이거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논리인데.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인망을 얻어야 하고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건, 평생 그곳에 눌러앉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죠. 하지만 어차피 더는 거기 머물면서 그 사람들과 얼굴 볼 일 없다면, 그런 문제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너무 익숙해서 마치 내가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은 말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당신이 해준 말이잖아요?”
이건 내가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으니까.
그녀는 나조차 처음 보는,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차피 당신 또 여행길에 오를 텐데, 돈 관리해줄 사람 한 명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요?”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안 그래요? 그 많은 돈을 한순간에 다 날려 먹으신 기사님?”
업보 청산의 시간은, 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