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다행히 무사했다.
애초에 빌헬름이 검을 꽂지 않고 손을 쓴 이유가 마리아가 다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문제를 일으켰다.
“많이 충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많이 안 좋으신가?”
“신체에 이상이 있진 않으십니다. 다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피칠갑을 한 손이 사람의 몸을 뚫고 나오는 광경은 안 그래도 그간 여러 사건을 통해 깎여나가고 암습으로 움츠러든 정신에 치명적이었다. 마리아는 하루가 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치유사가 말하길 그녀가 늦어도 며칠 안으로는 깨어날 거라고 했지만, 문제가 된 건 그게 아니었다.
“…예?”
빌헬름은 마틸다의 말에 귀를 의심해야 했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가씨의 방에서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시녀들은 빌헬름에게 마리아의 방에 머물면서 호위를 해주길 부탁했다. 마리아가 정신을 잃어 최소한의 저항을 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시녀들이 함께한다고 해봐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에 마틸다와 시녀들은 합리적인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반대로도 적용됐다. 빌헬름이 마리아의 방에 머무른다면, 빌헬름이 무얼 하든 저택의 인원 중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음에도 시녀들은 빌헬름에게 마리아의 근접 경호를 요구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을리가요.”
이건 신뢰의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귀족가의 일이었다. 누구보다 더 믿을 수 있다고 기밀을 맡긴 부하에 의해 폭로가 일어나고, 평생을 함께한 가신에게 금고를 맡겼다가 가산이 털리는 게 세상 이치였다.
빌헬름은 아직 모르지만, 심지어 황녀에 대한 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당신을 믿는 수밖에.”
마틸다는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빌헬름은, 마틸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간 지켜본바, 마틸다는 황녀를 마치 자식과도 같이 대하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딸아이의 생사를 생판 모르는 남자의 손아귀에 쥐여준다는 게 걱정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빌헬름은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고 부담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만약에라도 이 일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그에 대해서도 이상한 소문이 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빌헬름은 자신의 무력함에 분루를 보이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마리아의 침대 옆에서 그녀를 경호했다.
낮에는, 그나마 이런저런 이유로 시녀들이 오가니 별로 부담되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되어 누구도 오가지 않는 시간대가 되자, 빌헬름은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방에, 사람이라고는 기절해 있는 귀족 영애와 자신뿐. 처신을 조금만 잘못하더라도 누명을 쓰기 딱 좋았다.
물론 시녀들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건 확답을 받긴 했지만, 빌헬름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켕기는 일을 만드는 게 더 꺼려졌다. 결국 그는 어느 쪽에서 적이 침입하거나 비수가 날아와도 막아낼 수 있는 곳으로 의자를 옮겼다.
창문을 닫아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방에서, 그는 촛불조차 켜지 않고 칼을 쥔 채 가만히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이 애의 부모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때의 마리아는 아직 성인이 되기 2년도 더 전이었기에, 아직 앳된 티를 다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표정과 행동거지가 나이대와는 꽤 차이가 났기에 깨어있을 때는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제야 빌헬름은 마리아의 부모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는 데 신경이 쓰였다.
마리아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꼭꼭 숨기고 있었기에 마틸다와 시녀들은 혹시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조차 절대 입에 담지 않았다. 물론 말해준다 하더라도 빌헬름은 몰랐을 테지만, 이들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빌헬름은 그 답을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마.”
벌떡.
마리아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빌헬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어났어?”
갈등이 터진 이후, 빌헬름은 마리아에게 대놓고 반말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귀족이 많다지만, 까놓고 자신보다 신분 높은 사람 손꼽아봐야 얼마나 되겠냐는 생각이었다.
시녀들은 내심 웃음을 터트렸고, 마리아는 가족을 제외하면 난생처음 당해보는 하대에 당황했지만, 누구도 빌헬름의 무례를 정정할 수 없었다. 물론 시녀들은 할 생각도 없었다.
빌헬름은 마리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1위계 마법으로 초에 불을 붙이고 그 불빛 아래에서 마리아의 얼굴과 맥박을 확인했다.
“이런, 잠꼬대였나.”
그래도 기절해서 숨만 겨우 쉬던 때보다는 나아진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며 빌헬름은 물러나려 했다.
그때, 마리아가 빌헬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빌헬름은 손을 빼지 못했다.
“엄마, 가지 마….”
가까이 다가갔기에 그는 마리아의 말을 코앞에서 들을 수 있었다.
“엄마…, 유모….”
문장이 이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빌헬름도 귀족으로서의 지식이 부족한 거지, 눈치가 없진 않았다.
“계속, 곁에….”
뜨문뜨문 내뱉는 말이었지만, 빌헬름도 이쯤 되면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모종의 이유로 어머니와 이별한 건 분명했다. 그리고 보통 이 세계에서, 모종의 이유는 대부분 사별을 의미했다. 단서가 부족해 확신은 어려웠지만, 어느 쪽이든 어머니와의 이별은 어린 나이의 아이가 겪기엔 힘든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빌헬름은 자신을 붙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붙잡는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거기 담긴 간절함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살짝 인상을 쓰고 끙끙거리던 마리아는, 자기보다 훨씬 큰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 쥐자 표정을 풀었다.
“엄마….”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 미미하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윽고 나지막한 숨소리만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빌헬름은 결국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선 채로 계속 마리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침이 되어 시녀들이 들어올 때까지, 계속.
―――
마리아가 깨어난 건, 그다음 날 새벽이었다.
“으, 으으음….”
며칠 동안 내리 누워있었기에 눈을 뜨는 것도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제대로 뭘 먹지도 못했고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기에 온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찌뿌둥했다.
하지만 며칠을 내리 잔 탓에 정신은 또 말똥말똥해져서, 그녀는 어떻게든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아, 일어나셨구먼.”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빌헬름의 얼굴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여기가 그녀의 방인 것은 확실한데, 자신의 침대 앞에 빌헬름이 있었다. 심지어 방에는 그녀와 빌헬름,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황녀가 오해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렇다면 이어질 그녀의 반응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꺄아아아아악!”
비명이 저택을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변에서 기다리던 마틸다와 시녀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왔다.
“이, 이 자가 감히 제 방에…!”
어느새 침대의 반대편 끝까지 도망가 빌헬름을 삿대질하는 마리아를 보며 마틸다는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푸훗.”
“뭐, 뭐 하는 거야?! 이 남자가 무도하게 내 침실에 침입했다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마리아의 말에, 마틸다는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아하하하하!”
시녀장과 황녀는 그렇게 한편의 코미디를 찍고 있는 와중, 빌헬름은 눈을 깜빡였다.
“…감히? 무도?”
나, 선제후의 아들인 거 밝히지 않았었나? 그럼에도 저런 말을 한다고?
의아함에 눈만 깜빡이던 빌헬름의 두뇌가, 마침내 해답을 도출했다.
누군진 몰라도, 저 영애가 작위를 이어받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런 신분임에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이 나라에 오직 한 부류밖에 없었다.
“…황족?”
그제야 빌헬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말을 들은 시녀들은 그대로 굳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들은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틸다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미 침실까지 끌어들였다.
경호를 위해서라지만, 어쨌거나 밖에서 보기에 부적절한 행위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떤 경우에도 소문은 퍼져선 안 됐다. 이쪽에서 소문을 퍼트릴 일은 없었으니, 단속해야 할 건 빌헬름 쪽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에게 협박을 하기에는 마틸다는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빌헬름이 자발적으로 입조심을 하도록 하기로 했다.
“맞아요. 이분은 황제 폐하의 차녀, 마리아 호프부르크 황녀님이시랍니다.”
신분을 밝히는 건, 그 일환이었다.
비록 가문 안에서는 찬밥신세라지만, 그 신분이 갖는 힘은 어디 가지 않았다. 선제후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 황족의 신분이었다.
“…세상에.”
그렇기에 확답을 들은 빌헬름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러니까, 자신은 황녀 앞에서 선제후의 아들입네 하고 뻗대며 반말이나 찍찍 뱉었다는 것 아닌가. 제아무리 빌헬름이라도 그게 개인의 안위에 영 좋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안심시킨 건, 마틸다에게 전후 사정을 전부 전해 들은 마리아였다.
“…됐어요. 이제 와서 예의 차린다고 그간의 무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저를 지켜준 공으로 무례를 허락했다고 치도록 할게요.”
“그, 그렇습니까….”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잡히지만 않도록 하세요. 그건 저도 어떻게 못 해 드리니까.”
빌헬름이 황녀에게 반말을 하게 된 계기가 된 일이었다.
―――
그 후로도 경호는 계속 이어졌다.
같은 방에서 지내며, 빌헬름은 몇 번이고 암살의 위기로부터 마리아를 지켜주었다. 물론 지난번과 같은 직접적인 살해 시도는 없었지만, 이런저런 경로로 마리아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빌헬름이 마리아에게 물었다.
“이거, 황제에게 어떻게 못 따져? 아무리 궁중암투가 무섭다고 해도, 황녀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이렇게 많은 게 맞아?”
그의 질문에, 마리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당하는 사람이 잘못한 거예요. 이런 일은.”
워낙 가족 간의 사이가 좋고, 브란덴 변경백이 일대를 단단하게 틀어쥐고 있었기에 그는 잘 경험하지 못했지만, 귀족의 세가 강하고 일대가 풍요로운 곳에서는 정치적 모략이 일상적이었다.
하물며 황족끼리도 마찬가지였다. 수도 안에 있을 때는 정치적으로 서로 팔다리를 자르려 들고, 수도에서 벗어난 이들은 물리적으로 팔다리를 자르려 들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귀족을 죽였다고 의심받는 와인, 마차, 테라스의 삼신기는 이세계에서도 절찬리에 활약 중이었다.
마리아는 빌헬름이 알 거라고 상상도 못 하고 있지만, 잠꼬대에서 그녀의 가정사를 알아낸 빌헬름은 그걸 듣고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지구에서라면 아직 고등학생쯤이나 됐을 청소년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그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그녀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해주기로 했다.
“이건 어때?”
“…저거, 뭘 하는 건가요?”
그녀를 데리고 시장을 돌았다. 암살자의 위험에 시녀들은 불안해했지만, 빌헬름의 적극적인 설득에 허락했다.
“…다시 떠!”
“자신만만하게 가져오시더니, 너무 쉽지 않나요?”
보드게임을 비롯해 여럿이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알려주었다. 셋 이상의 인원이 필요한 건 마틸다를 껴서 진행했었다.
“가, 가지 마요. 어머니, 어머니….”
“…….”
악몽을 꾸거나 천둥번개가 치는 날, 두려워 떠는 마리아의 곁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며 가까워졌다.
마리아는, 어머니와 유모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마음의 공백이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틸다가 노력해주긴 했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함께해온 두 사람의 그림자가 워낙 컸기에 빈 공간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빌헬름은 바로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여러 겹의 잠금장치로 잠긴 문을 성큼성큼 당당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마리아는, 그런 행복한 나날이 영원히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지기 전까지는.
―――
“…….”
분명 훈훈한 과거 회상이었을진대, 어째 마지막에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6위계 마법사의 분노는 대기 중을 흐르는 마력의 흐름조차 뒤틀 정도였기에 빌헬름과 말은 이유 모를 오한에 움찔 떨어야 했다.
마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기분이 풀어졌다.
‘그래요. 어쨌든, 지금은 빌이 제 앞에 있어요.’
2년이다. 2년 동안 마리아는 빌헬름을 되찾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그녀가 수도로 돌아가 황녀로서 황제의 명령을 수행한 것은 결국 이날을 위한 준비였다.
이제, 많은 준비가 끝났다.
아바마마에게 혼약을 허락받았고, 감히 내뺄 수 없도록 소문도 퍼트렸다. 무엇보다, 이렇게 또다시 도망치는 걸 기어이 붙들고 따라잡았다.
“잃는 건, 이미 많이 해봤어요.”
“응? 뭐라고 했어?”
한창 말과 투닥거리던 빌헬름이 되물었다. 마리아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두번 다시 놓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다짐하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성국의 깃발이 펄럭이는 성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