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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

소녀의 병은 독감.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탓에 몸이 한계에 달한 탓이었다.
     
   잠에 든 아이가 색색이며 내뱉은 숨결은 아직도 뜨뜻하다.
     
   양 볼은 불그스레 달아오르고, 고통스러운 듯 미간이 쉴 새 없이 꿈틀댄다.
     
   “흐으….”
   “이 아이도 게이트 난민일까요?”
     
   아이의 신음을 들은 스님들이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게이트가 나타나고, 세상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뒤 한국 역시 엄청난 혼란을 겪어왔다.
     
   게이트 대응에 성공한 나라로 손꼽히지만, 그렇다고 피해를 완전히 막은 건 아니었다.
     
   아직도 수복하지 않은 땅이 상당하며 죽어간 사람 역시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작고 귀여운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건지.
     
   가족을 잃고 절에 들어온 스님들이 많았던 만큼, 방 안은 침울한 기색으로 가득했다.
     
     
   다 식은 죽을 들고 있던 자명 스님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의 과거를 헤아리는 건, 우리 같은 중생이 할 일이 아니니. 다만 내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체력이 빨리 돌아오길 바라야겠구나.”
   “스님의 능력으로 더 도울 방법은 없는 겁니까?”
     
   한 젊은 스님의 물음에 자명 스님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게 내 한계이니. 상처와 감기는 낫게 해줄 수 있으나, 체력만큼은 자연히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사실, 스님들 이상으로 착잡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명 스님이었다.
     
   불도를 닦아오며 그간 여러 후회를 해 왔지만,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내 오만으로 이 아이가 혼자 얼마나 고생했을꼬.’
     
   두 달간 폭염, 장마 등 온갖 궂은날이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책감이 치밀었다.
     
     
   이 작은 아이가 그간 뭘 먹고 살아왔을지.
     
   잠은 어디서 자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를 만나진 않았는지.
     
   눈을 감고 염주를 돌리던 자명 스님이 힘겹게 입을 연다.
     
   “고기를 좀 구해와야겠구나. 그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을 테니, 영양이 많으면서도 기름지지 않은 것으로 말이다.”
     
   입맛이 씁쓸하다.
     
   그러나 후회는 무용하다.
     
   과거의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을지언정, 현재는 현재일 뿐이다.
     
   “그리고… 당분간 아가는 내가 돌볼 테니, 각자 할 일을 허투루 하지 말거라.”
     
   자명 스님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더 이상의 번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스님들은 군말 없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다 큰 장정들이 우르르 모여 저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아이가 기절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자명 스님께서도 쉬셔야 하니, 남은 시간에는 저희가 번갈아 가며 아이를 돌보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그렇게 거처에서 벗어난 스님들이 멀찍이 떨어져 둥글게 모여 섰다.
     
   귀가 밝은 자명 스님조차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리였다.
     
     
   “그럼, 아이를 돌보는 건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해인 스님. 가장 최근에 승려가 된 20대의 젊은 사내다.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이를 돌보는 피곤한 일을 맡기기 딱 좋은 체력이 넘치는 사내이기는 한데.
     
   “해인아. 네 몸을 보거라. 아이가 깨어나자마자 기절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문제는 그 체력이 너무 좋다는 점이다.
     
   범죄와 전쟁하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거대한 덩치.
     
   풀만 먹고 어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였기에,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해인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푹 숙인 게 안타까워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두 번째로 나선 건, 30대인 도윤 스님이다.
     
   그 역시 가족을 잃고 최근에 승려가 된 자로 세 살배기 자식을 돌본 경험을 갖춘 프로 아버지라 할 수 있는데.
     
   “도윤아… 너, 너는 네 몸부터 돌보는 게 어떻겠느냐.”
     
   이번에는 해인과 정반대로, 너무나도 호리호리한 게 문제였다.
     
   매일 같이 죽은 자식을 떠올리며, 저만 살아남았다며 자책하는 와중에 삼시세끼를 제대로 챙겨 먹을 리 없었다.
     
   결국 도윤 역시 콧물을 훌쩍이며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쯤 되니, 서로 나서겠다던 스님들 역시 중재가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나선 게 바로 자명 스님과 더불어 본 사찰에서 가장 나이 지긋한 70대의 무애 스님이었다.
     
   “허허. 고민과 번뇌가 그득하니, 다들 아직 수양이 부족한가 보구나.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지 않는 자가 어찌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단 말이더냐.”
     
   흠칫.
     
   의욕에 앞서던 스님들이 조용히 고개 숙인 채 무애 스님의 말을 경청했다.
     
   “베풂을 하면서도 무주상 할 때야말로 참된 보시이니. 이타에는 순서가 없다지만, 자리즉이타라 하였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남을 이롭게 하는 법.”
     
   그런데….
     
   “모두 제 할 일에 집중하며 진정으로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 내 모습을 돌아보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말이, 좀.
     
   굉장히 편의적인 해석만 얘기하는 게, 누가 봐도 사심이 그득해 보였다.
     
   가만히 듣다 못한 60대의 진성 스님이 슬그머니 끼어들어왔다.
     
   “자리즉이타, 자리후이타, 이타즉자리. 자리에 대한 해석은 순서와 방법의 문제에 따라 다른 법이 아닙니까.”
   “…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젊은 스님들은 멍하니 반쯤 성불해가고 있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뜻이다.
     
   남을 돕는 게 먼저인지, 저를 돕는 게 먼저인지.
     
   이 모든 건 결국 개인의 해석과 생각에 달린 법이었다.
     
   “무애 스님께서도 아이를 이렇게 좋아하신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냥 아이를 번갈아 돌보도록 하지.”
     
   진성 스님의 비수에 무예 스님이 쿨럭쿨럭 헛기침을 터뜨렸다.
     
   결국 그 역시 오랜만에 손주 같은 귀여운 아이를 돌보고 싶다는 욕망에 움직였던 건 마찬가지였으니.
     
   이렇게 열 명의 스님은 방장께서 자리를 비우셨을 때, 하루 한 번씩 번갈아가며 아이를 돌보기로 약속했다.
     
   9월 10일, 10명의 스님들이 한 약속.
     
   십승공약(十僧共約)이 체결된 것이었다.
     
     
     
   *
     
     
     
   걱정했던 것과 달리 소녀는 반나절을 꼬박 자고 멀쩡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어… 어어…?”
     
   소녀가 가장 먼저 느낀 건 포근함이었다.
     
   분명, 마지막 기억은 계곡 아래로 빠진 거였는데.
     
   풀숲이나 이불 한 장 따위로는 비교할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그 위로 볼을 부비던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킨다.
     
   바로 아래로 두툼한 깔개가 깔려 있다.
     
   무엇보다 난생처음 보는 방 안이라는 사실이었다.
     
     
   “납치!”
     
   설마 지하의 선교자들이 그녀를 찾아낸 것일까?
     
   혼자였다면 모르겠지만, 미아까지 잡혀있게 둘 수는 없다!
     
   소녀가 앙증맞은 두 주먹을 그러쥐고는 맞은편에 선 적을 노려본다.
     
   “아가, 너무 겁내지 말거라.”
     
   굉장히 독특한 말투의 노인이다.
     
   보통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들의 말투라면 ‘쯧쯧’으로 시작해서 ‘어린놈의 자식이’로 추임새를 넣고, ‘어서 해 봐!’라는 식의 명령조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과 다르다는 건….
     
   헉!
     
   설마 노인들의 대빵인 건가?!
     
   소녀가 마른침을 꿀떡 삼킨다.
     
   여차하면 소원을 빌겠지만, 큰 소원은 그만큼 큰 대가를 요한다.
     
   미아의 몸을 그런 식으로 소모할 생각은 없다.
     
     
   “이, 이노옴! 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소녀는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력했던 노인의 말투를 따라 했다.
     
   “….”
     
   비록 가녀리고 벌벌 떨리는 목소리였던지라, 제 생각처럼 위엄 넘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소녀는 맞은편의 노인이 겁에 질렸다고 생각하며, 쉭쉭- 앙증맞은 주먹을 휘두른다.
     
   “나, 나를 납치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
     
   자명 스님은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카피바라가 주먹을 휘두른다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아이가 어색하게 어른을 연기하는 기묘한 광경에 허허헛- 하고 평소 같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물고 노력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소녀는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됐다!
     
   무서운 노인이 더 무서운 날 보고 겁에 질렸어!
     
   한층 기세등등해진 소녀가 슬금슬금 노인의 곁을 돌아 문 쪽을 향한다.
     
   “이, 이번 한 번 만큼은 봐주마!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이번에는 주먹을 휘두르진 않는다.
     
   거리가 가까워졌으니 주먹에 맞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남에게 폭력을 행하고, 아프게 하는 건 죄악이니까.
     
   그렇게 소녀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선 순간이었다.
     
     
   통, 통, 통통-
     
   뭔가를 치는 듯한 시원한 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온다.
     
   분명 집 밖으로 탈출했다고 생각했는데.
     
   시선을 돌려보자, 소녀는 여전히도 실내였다.
     
   오히려 전에 있던 작은 방은 비교할 수도 없는 커다란 공간이었고.
     
   그 가운데는 누렇게 질린 오동통한 아저씨가 무슨 죄라도 저질렀는지 양 손을 번쩍 든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눈과 입술이 호선을 그린 게 엄청나게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동상의 앞.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열 명의 사내가 왠 동그란 나무 알을 두드리며 뭔지 모를 주문을 읊조리는 모습.
     
   “…히이익! 사… 사이비다!! 이교도! 이단!!”
     
   전도자들에게 말로만 듣던 사특한 이교도들임이 틀림없었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탈출할 수 있을까?
     
   소녀가 이도 저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어! 아가!”
   “아가? 그 아가?”
   “아가가 깨어났구나!”
     
   휙-!
     
   열 명의 반들반들한 사내가 일순간에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번쩍!
     
   곳곳에 환히 밝혀진 촛불과 LED 등이 번들번들한 머리에 반사되었고.
     
   “아…….”
     
   너무나도 이교도적인, 두려운 광경에 소녀가 께꼬닥 쓰러져 내렸다.
     
   “아가!!”
     
   다행히 뒤따라 나온 자명 스님이 받아준 덕분에 딱딱한 맨바닥에 쓰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예불을 중간에 멈추다니, 수양이 부족하구나. 그렇게 과한 관심을 보이니 아이가 이리 놀라지!”
     
   아이의 귀여운 행동에 마음이 풀어져있던 만큼, 깜짝 놀란 자명 스님의 잔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저 어린 나이에 홀로 산 속을 떠돌며 살아가던 것부터 뭔가 특이한 과거를 지녔으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어른을 따라하는 듯한 말투나, 주먹부터 드는 폭력적인 행동.
     
   그리고 어른을 의심부터 하고 보는 반응으로 보아 상당히 험한 삶을 살아왔음이 분명했다.
     
   “알겠느냐? 다들 아가를 대하는 데, 너무 과하지 않도록 신경 쓰도록 하거라. 아가의 시선에 너희가 얼마나 커 보일지 생각하고 행동하란 말이다.”
     
   그날.
     
   스님들 사이로 한 가지 불문율이 생겼다.
     
   아가를 마주할 때는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마주쳐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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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병은 독감.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탓에 몸이 한계에 달한 탓이었다.

잠에 든 아이가 색색이며 내뱉은 숨결은 아직도 뜨뜻하다.

양 볼은 불그스레 달아오르고, 고통스러운 듯 미간이 쉴 새 없이 꿈틀댄다.

“흐으….”

“이 아이도 게이트 난민일까요?”

아이의 신음을 들은 스님들이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게이트가 나타나고, 세상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뒤 한국 역시 엄청난 혼란을 겪어왔다.

게이트 대응에 성공한 나라로 손꼽히지만, 그렇다고 피해를 완전히 막은 건 아니었다.

아직도 수복하지 않은 땅이 상당하며 죽어간 사람 역시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작고 귀여운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건지.

가족을 잃고 절에 들어온 스님들이 많았던 만큼, 방 안은 침울한 기색으로 가득했다.

다 식은 죽을 들고 있던 자명 스님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의 과거를 헤아리는 건, 우리 같은 중생이 할 일이 아니니. 다만 내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체력이 빨리 돌아오길 바라야겠구나.”

“스님의 능력으로 더 도울 방법은 없는 겁니까?”

한 젊은 스님의 물음에 자명 스님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게 내 한계이니. 상처와 감기는 낫게 해줄 수 있으나, 체력만큼은 자연히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사실, 스님들 이상으로 착잡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명 스님이었다.

불도를 닦아오며 그간 여러 후회를 해 왔지만,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내 오만으로 이 아이가 혼자 얼마나 고생했을꼬.’

두 달간 폭염, 장마 등 온갖 궂은날이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책감이 치밀었다.

이 작은 아이가 그간 뭘 먹고 살아왔을지.

잠은 어디서 자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를 만나진 않았는지.

눈을 감고 염주를 돌리던 자명 스님이 힘겹게 입을 연다.

“고기를 좀 구해와야겠구나. 그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을 테니, 영양이 많으면서도 기름지지 않은 것으로 말이다.”

입맛이 씁쓸하다.

그러나 후회는 무용하다.

과거의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을지언정, 현재는 현재일 뿐이다.

“그리고… 당분간 아가는 내가 돌볼 테니, 각자 할 일을 허투루 하지 말거라.”

자명 스님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더 이상의 번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스님들은 군말 없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다 큰 장정들이 우르르 모여 저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아이가 기절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자명 스님께서도 쉬셔야 하니, 남은 시간에는 저희가 번갈아 가며 아이를 돌보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그렇게 거처에서 벗어난 스님들이 멀찍이 떨어져 둥글게 모여 섰다.

귀가 밝은 자명 스님조차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리였다.

“그럼, 아이를 돌보는 건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해인 스님. 가장 최근에 승려가 된 20대의 젊은 사내다.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이를 돌보는 피곤한 일을 맡기기 딱 좋은 체력이 넘치는 사내이기는 한데.

“해인아. 네 몸을 보거라. 아이가 깨어나자마자 기절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문제는 그 체력이 너무 좋다는 점이다.

범죄와 전쟁하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거대한 덩치.

풀만 먹고 어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였기에,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해인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푹 숙인 게 안타까워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두 번째로 나선 건, 30대인 도윤 스님이다.

그 역시 가족을 잃고 최근에 승려가 된 자로 세 살배기 자식을 돌본 경험을 갖춘 프로 아버지라 할 수 있는데.

“도윤아… 너, 너는 네 몸부터 돌보는 게 어떻겠느냐.”

이번에는 해인과 정반대로, 너무나도 호리호리한 게 문제였다.

매일 같이 죽은 자식을 떠올리며, 저만 살아남았다며 자책하는 와중에 삼시세끼를 제대로 챙겨 먹을 리 없었다.

결국 도윤 역시 콧물을 훌쩍이며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쯤 되니, 서로 나서겠다던 스님들 역시 중재가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나선 게 바로 자명 스님과 더불어 본 사찰에서 가장 나이 지긋한 70대의 무애 스님이었다.

“허허. 고민과 번뇌가 그득하니, 다들 아직 수양이 부족한가 보구나.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지 않는 자가 어찌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단 말이더냐.”

흠칫.

의욕에 앞서던 스님들이 조용히 고개 숙인 채 무애 스님의 말을 경청했다.

“베풂을 하면서도 무주상 할 때야말로 참된 보시이니. 이타에는 순서가 없다지만, 자리즉이타라 하였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남을 이롭게 하는 법.”

그런데….

“모두 제 할 일에 집중하며 진정으로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 내 모습을 돌아보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말이, 좀.

굉장히 편의적인 해석만 얘기하는 게, 누가 봐도 사심이 그득해 보였다.

가만히 듣다 못한 60대의 진성 스님이 슬그머니 끼어들어왔다.

“자리즉이타, 자리후이타, 이타즉자리. 자리에 대한 해석은 순서와 방법의 문제에 따라 다른 법이 아닙니까.”

“…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젊은 스님들은 멍하니 반쯤 성불해가고 있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뜻이다.

남을 돕는 게 먼저인지, 저를 돕는 게 먼저인지.

이 모든 건 결국 개인의 해석과 생각에 달린 법이었다.

“무애 스님께서도 아이를 이렇게 좋아하신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냥 아이를 번갈아 돌보도록 하지.”

진성 스님의 비수에 무예 스님이 쿨럭쿨럭 헛기침을 터뜨렸다.

결국 그 역시 오랜만에 손주 같은 귀여운 아이를 돌보고 싶다는 욕망에 움직였던 건 마찬가지였으니.

이렇게 열 명의 스님은 방장께서 자리를 비우셨을 때, 하루 한 번씩 번갈아가며 아이를 돌보기로 약속했다.

9월 10일, 10명의 스님들이 한 약속.

십승공약(十僧共約)이 체결된 것이었다.

*

걱정했던 것과 달리 소녀는 반나절을 꼬박 자고 멀쩡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어… 어어…?”

소녀가 가장 먼저 느낀 건 포근함이었다.

분명, 마지막 기억은 계곡 아래로 빠진 거였는데.

풀숲이나 이불 한 장 따위로는 비교할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그 위로 볼을 부비던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킨다.

바로 아래로 두툼한 깔개가 깔려 있다.

무엇보다 난생처음 보는 방 안이라는 사실이었다.

“납치!”

설마 지하의 선교자들이 그녀를 찾아낸 것일까?

혼자였다면 모르겠지만, 미아까지 잡혀있게 둘 수는 없다!

소녀가 앙증맞은 두 주먹을 그러쥐고는 맞은편에 선 적을 노려본다.

“아가, 너무 겁내지 말거라.”

굉장히 독특한 말투의 노인이다.

보통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들의 말투라면 ‘쯧쯧’으로 시작해서 ‘어린놈의 자식이’로 추임새를 넣고, ‘어서 해 봐!’라는 식의 명령조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과 다르다는 건….

헉!

설마 노인들의 대빵인 건가?!

소녀가 마른침을 꿀떡 삼킨다.

여차하면 소원을 빌겠지만, 큰 소원은 그만큼 큰 대가를 요한다.

미아의 몸을 그런 식으로 소모할 생각은 없다.

“이, 이노옴! 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소녀는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력했던 노인의 말투를 따라 했다.

“….”

비록 가녀리고 벌벌 떨리는 목소리였던지라, 제 생각처럼 위엄 넘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소녀는 맞은편의 노인이 겁에 질렸다고 생각하며, 쉭쉭- 앙증맞은 주먹을 휘두른다.

“나, 나를 납치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

자명 스님은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카피바라가 주먹을 휘두른다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아이가 어색하게 어른을 연기하는 기묘한 광경에 허허헛- 하고 평소 같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물고 노력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소녀는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됐다!

무서운 노인이 더 무서운 날 보고 겁에 질렸어!

한층 기세등등해진 소녀가 슬금슬금 노인의 곁을 돌아 문 쪽을 향한다.

“이, 이번 한 번 만큼은 봐주마!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이번에는 주먹을 휘두르진 않는다.

거리가 가까워졌으니 주먹에 맞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남에게 폭력을 행하고, 아프게 하는 건 죄악이니까.

그렇게 소녀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선 순간이었다.

통, 통, 통통-

뭔가를 치는 듯한 시원한 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온다.

분명 집 밖으로 탈출했다고 생각했는데.

시선을 돌려보자, 소녀는 여전히도 실내였다.

오히려 전에 있던 작은 방은 비교할 수도 없는 커다란 공간이었고.

그 가운데는 누렇게 질린 오동통한 아저씨가 무슨 죄라도 저질렀는지 양 손을 번쩍 든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눈과 입술이 호선을 그린 게 엄청나게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동상의 앞.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열 명의 사내가 왠 동그란 나무 알을 두드리며 뭔지 모를 주문을 읊조리는 모습.

“…히이익! 사… 사이비다!! 이교도! 이단!!”

전도자들에게 말로만 듣던 사특한 이교도들임이 틀림없었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탈출할 수 있을까?

소녀가 이도 저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어! 아가!”

“아가? 그 아가?”

“아가가 깨어났구나!”

휙-!

열 명의 반들반들한 사내가 일순간에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번쩍!

곳곳에 환히 밝혀진 촛불과 LED 등이 번들번들한 머리에 반사되었고.

“아…….”

너무나도 이교도적인, 두려운 광경에 소녀가 께꼬닥 쓰러져 내렸다.

“아가!!”

다행히 뒤따라 나온 자명 스님이 받아준 덕분에 딱딱한 맨바닥에 쓰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예불을 중간에 멈추다니, 수양이 부족하구나. 그렇게 과한 관심을 보이니 아이가 이리 놀라지!”

아이의 귀여운 행동에 마음이 풀어져있던 만큼, 깜짝 놀란 자명 스님의 잔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저 어린 나이에 홀로 산 속을 떠돌며 살아가던 것부터 뭔가 특이한 과거를 지녔으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어른을 따라하는 듯한 말투나, 주먹부터 드는 폭력적인 행동.

그리고 어른을 의심부터 하고 보는 반응으로 보아 상당히 험한 삶을 살아왔음이 분명했다.

“알겠느냐? 다들 아가를 대하는 데, 너무 과하지 않도록 신경 쓰도록 하거라. 아가의 시선에 너희가 얼마나 커 보일지 생각하고 행동하란 말이다.”

그날.

스님들 사이로 한 가지 불문율이 생겼다.

아가를 마주할 때는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마주쳐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Don’t Die, It’s Not Your Body

Don’t Die, It’s Not Your Body

죽지 마, 네 몸이 아니야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you deserve to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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