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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아가! 그게 무슨 말이냐! 때리다니!”
     
   설마 길드장이 ‘아이는 맞으면서 배워야지!’라고 말하기라도 했던 건가?
     
   자명 스님의 흉흉한 눈초리에 길드장이 다급히 변명한다.
     
   “저희가 아이들을 때리며 가르칠 일은 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교육을 받게 될지, 어떻게 교육받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소녀가 대뜸 ‘직접 만나지 않고도 수업을 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 안 때려요? 안 때리고도 교육이 되나요?’라고 물을지 누가 알았을까.
     
   길드장 역시 상당히 당황한 듯 답지않게 횡설수설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어른들의 반응에조차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죠.”
     
   어른들이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소녀는 지하에서 들어왔던 목소리를 따라 말한다.
     
   “각성자들은 하나같이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기에 폭급하고 제멋대로다. 그래서 그들 역시 하나의 인간이라는 걸 각인하기 위해 폭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소녀뿐만 아니라 지하의 학생들이 규칙처럼 듣던 이야기들이었다.
     
   조곤조곤한 말투, 귀가 간질거리는 귀여운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내용이었다.
     
   당연히 말뿐인 교육이 아니었다.
     
   -“아아! 진정 전능신께 선택받은 아이가 여기 있구나!”
     
   소녀 역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며 사랑의 매를 맞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미아를 탈출시켜 주기 전까지만 해도, 미아 역시 이런 폭행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여성 신도들에게는 신을 보여주겠다며 정체 모를 지하실로 끌고 간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일.
     
     
   소녀의 증언에 투덕대던 길드장과 자명 스님이 슬그머니 입을 다문다.
     
   조금 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이 아이.
     
   가끔 말하는 투가 사이비 종교인들을 닮을 때가 있다.
     
   심지어 그저 외운 문장을 내뱉는 게 아니라, 지극히 공감한다는 듯한 반응이 선명하다.
     
   저 말도 안 되는 걸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요? 신께서 저희에게 이런 힘을 내려주셨는데, 그 힘을 자랑하고, 제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건 신성모독이잖아요? 타락한 천사가 날개를 뺏긴 것처럼, 언젠가 저희도 힘을 뺏길지도 모르잖아요?”
     
   동그란 눈망울을 초롱거리며, 흠흠- 추임새를 끼워 넣으며.
     
   공감을 요하듯 자명 스님과 길드장을 번갈아 바라본다.
     
     
   “하아….”
     
   결국 두 사람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뜯어고쳐줘야 할까.
     
   지금 아무리 길게 얘기해봤자 효과도 없을 테고.
     
   또다시 의미없는 논쟁만 이어질 게 뻔했기에 길드장은 결국 회피를 택했다.
     
   “수업에 필요한 자료는 제 길드원을 시켜 빠르게 배달 드리겠습니다. 원래도 스님께 인사만 드리고 가려 했는데, 슬슬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아저씨? 혹시 아저씨도 그 능력을 이기적으로…”
     
   제 말을 무시했다는 걸 눈치챈 소녀가 다급히 불만을 내비쳤지만.
     
   “아, 그렇지. 내가 바쁜 자네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어.”
     
   자명 스님의 지원 사격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크흠, 해인아. 아가 좀 데리고 있거라. 난 길드장님과 함께 오염지를 정화하고 와야겠구나.”
   “예! 누구도 털끝 하나 못 건들게 하겠습니다!”
     
   답이 없을 것만 같던 상황의 상당히 다급한 마무리였다.
     
     
     
   *
     
     
     
   이후 되돌아온 자명 스님은 예정대로 모금을 위한 강연을 진행했고, 하루가 흘렀다.
     
   길드장이 허튼 약속을 했던 건 아닌 듯 다음 날 아침 일찍 묵직한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헉, 헉… 허억…”
   “여기 물 좀 드십시오.”
     
   이 산 중턱까지 택배가 올 리는 없었으니, 당연하게도 청성 길드원이 직접 들고 온 것이었다.
     
     
   가장 먼저 신난 건 스님들이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우르르 쏟아져 나와 택배를 반겼다.
     
   길드장이 뭘 이렇게 보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드디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던가!
     
   “드디어 우리 꼬맹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겠군요.”
   “음. 청성 길드의 수업이라면 믿을 수 있지.”
     
   게이트 오염 소식으로 심각해졌던 스님들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아가에게 이교도 소리 들을 일은 없겠지!
     
   무엇보다 이교도들의 방식이라 기겁하면서도 매번 가르치는 것만큼은 확실히 습득하던 소녀였다.
     
   그런 아이가 제대로 교육받는다면 우리나라의 손꼽는 영재가 될지 누가 알까?
     
   “다들 각오들 단단히 하게. 괜히 아가에게 이상한 편견 심지 않도록 주의하고. 수업 중일 때는 목탁도 무음으로 두드리란 말이야.”
   “그 정도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래. 해인아. 가라. 가서 책임지고 아가에게 그 ‘인터넷 강의’라는 걸 가르쳐주거라.”
   “예! 다녀오겠습니다!”
     
     
   해인 스님이 거대한 상자를 들고 다급히 소녀의 방으로 향한다.
     
   얼마나 신났는지 성난 듯 부푼 근육 위로 핏줄이 울룩불룩 솟아난다.
     
   소녀가 ‘와! 핏줄이 이렇게 튀어나와 있으면, 칼에 베이면 어떡해요?’라고 묻던 바로 그 핏줄이었다.
     
     
   괜히 오소소 소름이 돋은 해인은 소녀를 깜짝 놀라게 해 줄 겸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다.
     
   그렇게, 슬그머니 방문을 연다.
     
   게이트 오염으로 외출이 금지되어 할 일이 없었는지, 딱딱한 원목 바닥 위 대자로 널브러진 꼴이 한눈에 들어온다.
     
   “으에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맨발을 꿈틀대며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고.
     
   그런 소녀의 곁에는 백구와 누렁이 역시 몸을 말고 잠에 들어 있다.
     
   참새 가족은 소녀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로 떠 올랐다가, 내려오길 반복했는데.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에 해인은 저도 모르게 큭큭 웃음을 흘렸다.
     
     
   동굴에 울리는 듯한 나지막한 웃음에 소녀가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킨다.
     
   그러며 반사적으로 지하에 있을 때 입에 익은 안내 멘트를 내뱉었다.
     
   “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행히 해인은 말 속에 담긴 그런 미묘한 어투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소녀의 앞으로 상자를 내려놓으며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꼬맹아. 네 거니까 네가 열어봐.”
   “…네? 이게 왜 제 거예요?”
     
   소녀는 어리둥절했다.
     
   저 종이 상자가 뭐기에 해인 스님이 저렇게 기대하는 걸까?
     
   아! 혹시?
     
   “이게 앞으로 제가 살게 될 집인가요?”
     
   다리 뻗고 잘 정도는 아니었지만, 잘 쪼그려 앉는다면 소녀에게 딱 맞는 크기.
     
   지하에 있을 때와 달리 밥값을 못하는 그녀에겐 감지덕지인 공간이었다.
     
   “뭐? 네가 고양이도 아니고, 누가 박스를 집으로 줘?”
     
   해인은 재밌는 농담이라는 듯 웃었지만….
     
   “네? 죄를 짓고, 신께 버림받은 사람들이요. 박스에서 살지 않나요?”
     
   이내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대체.
     
   저 꼬마는 어떤 과거를 갖고 있기에 꺼내는 말마다 함정이 섞여 있는 걸까.
     
   평소 말을 곱게 하는 스님들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대화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수준의 압박감이라니, 역시 우리 꼬맹이는 천재야.’
     
   한층 기대감이 차올랐다.
     
     
   “아니야. 자, 테이프 뜯어줄 테니까 직접 확인해 봐.”
     
   해인은 쾅-! 주먹을 휘둘러 상자를 우그러뜨리며 테이프를 부욱 뜯어냈다.
     
   흐물흐물해진 상자 너머로 웬 고급스러운 또 다른 상자가 하나 들어 있다.
     
   소녀의 성향을 눈치챈 길드장이 나름 심혈을 기울여 고른 물건들이었다.
     
     
   “에이, 거짓말은 나빠요. 이런 게 제 거일리 없어요.”
     
   이렇게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제 것일 리 없다.
     
   당황한 소녀가 두손 두발을 저으며 물러나려 했지만, 해인은 이럴 때를 대비해 스님들에게 받아온 대책을 알고 있었다.
     
   “어제 길드장님께 뭘 드렸다며. 그 보답으로 온 거니까 네 게 맞아.”
   “아……?”
     
   타인에게 뭔가를 받는 걸 믿지 않는 소녀.
     
   그러나, 정당한 거래만큼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런 스님들의 분석대로 소녀는 군말하는 대신 상자 안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지이익- 작은 상자 안에는 샤프와 색연필, 노트와 책 등이 가득 들어 있었고.
     
   “이거 어떻게 열어요?”
   “……아니 진짜 비싼 것도 보내주셨네.”
     
   내부의 고급스러운 상자는 오팔 사의 프리미엄 노트북.
     
   사정이 좋지 않은 사찰에서는 수리비조차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사실 물욕과 사치를 멀리하는 스님들에겐 피해야 할 물건이기도 했다.
     
   노트북의 표면을 쓰다듬던 소녀가 손끝을 파르르 떨며 기함했다.
     
   “와, 딱딱한데 부들부들해요!”
     
   뭐, 그래도 꼬맹이가 좋아하면 됐다.
     
   꼬맹이는 동자승이 아니라 그저 구출된 평범한 아이니까.
     
   이 정도 사치는 즐겨도 되겠지.
     
     
   “이걸로 앞으로 수업을 들으면 돼.”
   “네? 어떻게요…?”
     
   해인은 기다렸다는 듯, 충전기를 꽂고 노트북의 덮개를 열었다.
     
   “노트북 안 써봤지?”
   “노트? 북?”
     
   역시나.
     
   불상조차 처음 봤다던 소녀가 이런 최신 문물을 알 리가 없지.
     
   다행히 길드장 역시 그 사실을 예상한 듯, 친절한 설명서가 동봉돼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따라가면서 가르쳐주면 될 거다.
     
     
   “자, 봐. 노트북은 이 물건의 이름이야. 이렇게 이 버튼을 누르면 노트북이 켜져.”
     
   전원 버튼을 누르자 새까맣던 화면 위로 오팔 로고가 떠오른다.
     
   “와… 마법인가요?”
     
   아무것도 없던 곳에 보석을 소환하다니!
     
   이 기계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임이 틀림없다!
     
   “해인 스님, 그럼 이걸 계속 누르면 보석이 계속 나오나요?”
     
   신난 소녀가 손을 뻗어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투다다다 연타한다.
     
   “어어…!”
     
   픽, 꺼졌다가 다시금 픽 떠오르는 화면.
     
   그러나 노트북을 껐다 켠다고 로고가 증식하는 일은 없었다.
     
   이러다 혹시나 노트북이 고장 날세라 해인이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저장된 화면을 불러오는 거야. 사진 같은 거지.”
   “아하! 그럼 없던 게 생긴 건 아니었던 거네요?”
     
   “후우… 그, 그래.”
     
     
   노트북을 켜는 것만으로도 벌써 진이 빠진다.
     
   그러나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소녀를 위해 배경 화면에 미리 앱을 등록시켜 두어서 클릭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클릭? 클릭이 뭐예요?”
     
   이런 망할.
     
   당연히 마우스를 처음 쥔 소녀가 그걸 알 리가 만무했다.
     
   결국 해인은 그날 남은 일정을 모두 뒤로하고는 소녀를 가르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 봐. 이게 클릭이라는 거야.”
     
   달칵- 마우스를 누른다.
     
   “그리고 이렇게 움직이면, 이게 따라 움직이거든?”
     
   그렇게 인터넷 창을 켰다가 끈 뒤.
     
   “이제 해 봐.”
     
   소녀의 앞으로 마우스를 들이민다.
     
     
   “아! 이제 알겠어요!”
     
   그제야 소녀는 곧잘 따라 했다.
     
   지능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곧장 인터넷 창을 띄워 올린다.
     
   그러고는 해인이 워낙 빠르게 끈 탓에 궁금하게 넘어갔던 글자를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이 아줌마는 무료로 해줌니다! 뭘 무료로 해 주나요?”
   “아, 안, 아니! 미친! 아니야!”
     
   이런 씨발!
     
   머리 깎고 스님이 된 뒤 끊었던 걸걸한 욕설이 튀어나온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노트북을 세팅했기에 첫 화면을 빙구로 해둔 거야?!
     
     
   해인은 다급히 노트북을 닫았다.
     
   “꼬맹아, 자, 잠깐만 기다려 봐.”
     
   이대로는 안 된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노트북을 챙겨 들어 나갔다.
     
   꼬맹이를 가르쳐주는 건 즐겁고, 행복한 일이지만.
     
   이러다가 ‘네게 성을 알려주겠다!’ 같은 일이 일어났다간 무덤에도 못 묻힐 정도로 잘근잘근 얻어터질 게 뻔했다.
     
   그래서 그냥 똑똑하신 법진 스님에게 이 공을 넘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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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그게 무슨 말이냐! 때리다니!”

설마 길드장이 ‘아이는 맞으면서 배워야지!’라고 말하기라도 했던 건가?

자명 스님의 흉흉한 눈초리에 길드장이 다급히 변명한다.

“저희가 아이들을 때리며 가르칠 일은 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교육을 받게 될지, 어떻게 교육받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소녀가 대뜸 ‘직접 만나지 않고도 수업을 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 안 때려요? 안 때리고도 교육이 되나요?’라고 물을지 누가 알았을까.

길드장 역시 상당히 당황한 듯 답지않게 횡설수설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어른들의 반응에조차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죠.”

어른들이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소녀는 지하에서 들어왔던 목소리를 따라 말한다.

“각성자들은 하나같이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기에 폭급하고 제멋대로다. 그래서 그들 역시 하나의 인간이라는 걸 각인하기 위해 폭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소녀뿐만 아니라 지하의 학생들이 규칙처럼 듣던 이야기들이었다.

조곤조곤한 말투, 귀가 간질거리는 귀여운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내용이었다.

당연히 말뿐인 교육이 아니었다.

-“아아! 진정 전능신께 선택받은 아이가 여기 있구나!”

소녀 역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며 사랑의 매를 맞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미아를 탈출시켜 주기 전까지만 해도, 미아 역시 이런 폭행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여성 신도들에게는 신을 보여주겠다며 정체 모를 지하실로 끌고 간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일.

소녀의 증언에 투덕대던 길드장과 자명 스님이 슬그머니 입을 다문다.

조금 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이 아이.

가끔 말하는 투가 사이비 종교인들을 닮을 때가 있다.

심지어 그저 외운 문장을 내뱉는 게 아니라, 지극히 공감한다는 듯한 반응이 선명하다.

저 말도 안 되는 걸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요? 신께서 저희에게 이런 힘을 내려주셨는데, 그 힘을 자랑하고, 제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건 신성모독이잖아요? 타락한 천사가 날개를 뺏긴 것처럼, 언젠가 저희도 힘을 뺏길지도 모르잖아요?”

동그란 눈망울을 초롱거리며, 흠흠- 추임새를 끼워 넣으며.

공감을 요하듯 자명 스님과 길드장을 번갈아 바라본다.

“하아….”

결국 두 사람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뜯어고쳐줘야 할까.

지금 아무리 길게 얘기해봤자 효과도 없을 테고.

또다시 의미없는 논쟁만 이어질 게 뻔했기에 길드장은 결국 회피를 택했다.

“수업에 필요한 자료는 제 길드원을 시켜 빠르게 배달 드리겠습니다. 원래도 스님께 인사만 드리고 가려 했는데, 슬슬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아저씨? 혹시 아저씨도 그 능력을 이기적으로…”

제 말을 무시했다는 걸 눈치챈 소녀가 다급히 불만을 내비쳤지만.

“아, 그렇지. 내가 바쁜 자네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어.”

자명 스님의 지원 사격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크흠, 해인아. 아가 좀 데리고 있거라. 난 길드장님과 함께 오염지를 정화하고 와야겠구나.”

“예! 누구도 털끝 하나 못 건들게 하겠습니다!”

답이 없을 것만 같던 상황의 상당히 다급한 마무리였다.

*

이후 되돌아온 자명 스님은 예정대로 모금을 위한 강연을 진행했고, 하루가 흘렀다.

길드장이 허튼 약속을 했던 건 아닌 듯 다음 날 아침 일찍 묵직한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헉, 헉… 허억…”

“여기 물 좀 드십시오.”

이 산 중턱까지 택배가 올 리는 없었으니, 당연하게도 청성 길드원이 직접 들고 온 것이었다.

가장 먼저 신난 건 스님들이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우르르 쏟아져 나와 택배를 반겼다.

길드장이 뭘 이렇게 보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드디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던가!

“드디어 우리 꼬맹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겠군요.”

“음. 청성 길드의 수업이라면 믿을 수 있지.”

게이트 오염 소식으로 심각해졌던 스님들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아가에게 이교도 소리 들을 일은 없겠지!

무엇보다 이교도들의 방식이라 기겁하면서도 매번 가르치는 것만큼은 확실히 습득하던 소녀였다.

그런 아이가 제대로 교육받는다면 우리나라의 손꼽는 영재가 될지 누가 알까?

“다들 각오들 단단히 하게. 괜히 아가에게 이상한 편견 심지 않도록 주의하고. 수업 중일 때는 목탁도 무음으로 두드리란 말이야.”

“그 정도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래. 해인아. 가라. 가서 책임지고 아가에게 그 ‘인터넷 강의’라는 걸 가르쳐주거라.”

“예! 다녀오겠습니다!”

해인 스님이 거대한 상자를 들고 다급히 소녀의 방으로 향한다.

얼마나 신났는지 성난 듯 부푼 근육 위로 핏줄이 울룩불룩 솟아난다.

소녀가 ‘와! 핏줄이 이렇게 튀어나와 있으면, 칼에 베이면 어떡해요?’라고 묻던 바로 그 핏줄이었다.

괜히 오소소 소름이 돋은 해인은 소녀를 깜짝 놀라게 해 줄 겸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다.

그렇게, 슬그머니 방문을 연다.

게이트 오염으로 외출이 금지되어 할 일이 없었는지, 딱딱한 원목 바닥 위 대자로 널브러진 꼴이 한눈에 들어온다.

“으에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맨발을 꿈틀대며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고.

그런 소녀의 곁에는 백구와 누렁이 역시 몸을 말고 잠에 들어 있다.

참새 가족은 소녀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로 떠 올랐다가, 내려오길 반복했는데.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에 해인은 저도 모르게 큭큭 웃음을 흘렸다.

동굴에 울리는 듯한 나지막한 웃음에 소녀가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킨다.

그러며 반사적으로 지하에 있을 때 입에 익은 안내 멘트를 내뱉었다.

“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행히 해인은 말 속에 담긴 그런 미묘한 어투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소녀의 앞으로 상자를 내려놓으며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꼬맹아. 네 거니까 네가 열어봐.”

“…네? 이게 왜 제 거예요?”

소녀는 어리둥절했다.

저 종이 상자가 뭐기에 해인 스님이 저렇게 기대하는 걸까?

아! 혹시?

“이게 앞으로 제가 살게 될 집인가요?”

다리 뻗고 잘 정도는 아니었지만, 잘 쪼그려 앉는다면 소녀에게 딱 맞는 크기.

지하에 있을 때와 달리 밥값을 못하는 그녀에겐 감지덕지인 공간이었다.

“뭐? 네가 고양이도 아니고, 누가 박스를 집으로 줘?”

해인은 재밌는 농담이라는 듯 웃었지만….

“네? 죄를 짓고, 신께 버림받은 사람들이요. 박스에서 살지 않나요?”

이내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대체.

저 꼬마는 어떤 과거를 갖고 있기에 꺼내는 말마다 함정이 섞여 있는 걸까.

평소 말을 곱게 하는 스님들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대화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수준의 압박감이라니, 역시 우리 꼬맹이는 천재야.’

한층 기대감이 차올랐다.

“아니야. 자, 테이프 뜯어줄 테니까 직접 확인해 봐.”

해인은 쾅-! 주먹을 휘둘러 상자를 우그러뜨리며 테이프를 부욱 뜯어냈다.

흐물흐물해진 상자 너머로 웬 고급스러운 또 다른 상자가 하나 들어 있다.

소녀의 성향을 눈치챈 길드장이 나름 심혈을 기울여 고른 물건들이었다.

“에이, 거짓말은 나빠요. 이런 게 제 거일리 없어요.”

이렇게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제 것일 리 없다.

당황한 소녀가 두손 두발을 저으며 물러나려 했지만, 해인은 이럴 때를 대비해 스님들에게 받아온 대책을 알고 있었다.

“어제 길드장님께 뭘 드렸다며. 그 보답으로 온 거니까 네 게 맞아.”

“아……?”

타인에게 뭔가를 받는 걸 믿지 않는 소녀.

그러나, 정당한 거래만큼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런 스님들의 분석대로 소녀는 군말하는 대신 상자 안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지이익- 작은 상자 안에는 샤프와 색연필, 노트와 책 등이 가득 들어 있었고.

“이거 어떻게 열어요?”

“……아니 진짜 비싼 것도 보내주셨네.”

내부의 고급스러운 상자는 오팔 사의 프리미엄 노트북.

사정이 좋지 않은 사찰에서는 수리비조차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사실 물욕과 사치를 멀리하는 스님들에겐 피해야 할 물건이기도 했다.

노트북의 표면을 쓰다듬던 소녀가 손끝을 파르르 떨며 기함했다.

“와, 딱딱한데 부들부들해요!”

뭐, 그래도 꼬맹이가 좋아하면 됐다.

꼬맹이는 동자승이 아니라 그저 구출된 평범한 아이니까.

이 정도 사치는 즐겨도 되겠지.

“이걸로 앞으로 수업을 들으면 돼.”

“네? 어떻게요…?”

해인은 기다렸다는 듯, 충전기를 꽂고 노트북의 덮개를 열었다.

“노트북 안 써봤지?”

“노트? 북?”

역시나.

불상조차 처음 봤다던 소녀가 이런 최신 문물을 알 리가 없지.

다행히 길드장 역시 그 사실을 예상한 듯, 친절한 설명서가 동봉돼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따라가면서 가르쳐주면 될 거다.

“자, 봐. 노트북은 이 물건의 이름이야. 이렇게 이 버튼을 누르면 노트북이 켜져.”

전원 버튼을 누르자 새까맣던 화면 위로 오팔 로고가 떠오른다.

“와… 마법인가요?”

아무것도 없던 곳에 보석을 소환하다니!

이 기계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임이 틀림없다!

“해인 스님, 그럼 이걸 계속 누르면 보석이 계속 나오나요?”

신난 소녀가 손을 뻗어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투다다다 연타한다.

“어어…!”

픽, 꺼졌다가 다시금 픽 떠오르는 화면.

그러나 노트북을 껐다 켠다고 로고가 증식하는 일은 없었다.

이러다 혹시나 노트북이 고장 날세라 해인이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저장된 화면을 불러오는 거야. 사진 같은 거지.”

“아하! 그럼 없던 게 생긴 건 아니었던 거네요?”

“후우… 그, 그래.”

노트북을 켜는 것만으로도 벌써 진이 빠진다.

그러나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소녀를 위해 배경 화면에 미리 앱을 등록시켜 두어서 클릭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클릭? 클릭이 뭐예요?”

이런 망할.

당연히 마우스를 처음 쥔 소녀가 그걸 알 리가 만무했다.

결국 해인은 그날 남은 일정을 모두 뒤로하고는 소녀를 가르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 봐. 이게 클릭이라는 거야.”

달칵- 마우스를 누른다.

“그리고 이렇게 움직이면, 이게 따라 움직이거든?”

그렇게 인터넷 창을 켰다가 끈 뒤.

“이제 해 봐.”

소녀의 앞으로 마우스를 들이민다.

“아! 이제 알겠어요!”

그제야 소녀는 곧잘 따라 했다.

지능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곧장 인터넷 창을 띄워 올린다.

그러고는 해인이 워낙 빠르게 끈 탓에 궁금하게 넘어갔던 글자를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이 아줌마는 무료로 해줌니다! 뭘 무료로 해 주나요?”

“아, 안, 아니! 미친! 아니야!”

이런 씨발!

머리 깎고 스님이 된 뒤 끊었던 걸걸한 욕설이 튀어나온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노트북을 세팅했기에 첫 화면을 빙구로 해둔 거야?!

해인은 다급히 노트북을 닫았다.

“꼬맹아, 자, 잠깐만 기다려 봐.”

이대로는 안 된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노트북을 챙겨 들어 나갔다.

꼬맹이를 가르쳐주는 건 즐겁고, 행복한 일이지만.

이러다가 ‘네게 성을 알려주겠다!’ 같은 일이 일어났다간 무덤에도 못 묻힐 정도로 잘근잘근 얻어터질 게 뻔했다.

그래서 그냥 똑똑하신 법진 스님에게 이 공을 넘길 생각이었다.


           


Don’t Die, It’s Not Your Body

Don’t Die, It’s Not Your Body

죽지 마, 네 몸이 아니야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you deserve to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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