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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

갑작스럽게 이뤄졌던 시험이 끝나고 며칠이 흘렀다.
     
   소녀는 처음과 달리, 이 가상현실에 대한 경계심이 눈에 띄게 사라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이교도들의 인신 공양을 위해 붙잡힌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다행히 이 가상현실은 꿈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원한다면 언제든 마음대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고 해서 바로 접속을 종료하려 하니.
     
   “신입생 친구! 그래도 수업은 다 끝나고 나가야죠!”
     
   혼나버렸다.
     
     
   …아무 때나 나가도 된다고 했으면서.
     
   “흥.”
     
   이교도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물론, 불퉁한 속내와 달리 소녀는 얌전히 강의에 집중했다.
     
   악마가 찾아올지 모른다던 미아의 경고를 쉬이 잊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막 강의가 끝난 후에야 소녀는 잃어버렸던 미소를 되찾았다.
     
     
   헤헤, 오늘은 오랜만에 아참이랑 놀아줘야지!
     
   드디어 공부에서 해방이다!
     
   와! 자유다!
     
     
   한껏 신난 소녀가 막 접속을 종료하려던 찰나였다.
     
   계속 눈치를 살피던 김성영이 후다닥 다가와 말했다.
     
   “야! 우, 우리 오늘 모여서 놀기로 했는데 너, 너도 같이 갈래?”
     
   왠지 모르게 머리가 번들번들하고, 피부에도 광이 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딴에는 좋은 인상을 주겠다고 열심히 꾸미고 온 것이었다.
     
     
   “…나?”
     
   정작 소녀는 그런 김성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더 있는데?!”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신 부모님을 놀리고, 대놓고 적의를 비추지 않았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에 김성영이 다급히 변명했다.
     
   “그건… 그냥 장난이었지. 너도 그렇잖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다른 아이들에게 언뜻 듣기론 소녀를 직접 만나게 되면 현실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겠다며 호언장담했다던데.
     
   사람을 죽이고도 장난이라고 넘길 생각이었던 건가?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한다.
     
   조급하던 김성영과 달리 마치 잘못한 아이를 훈계하는 듯한 말투였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도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 있는 법이야.”
     
     
   사람은 살아가며 죄를 지을 수 있다.
     
   태어나기 위해 제 어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부터가 인간의 원죄.
     
   중요한 건, 제 잘못에 속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였다.
     
   교단에서 교육받았던 기준에 따르면 죄를 짓고도 참회하지 않는 김성영은 ‘써먹지 못할 인간’에 속하는 이.
     
   당연한 상식인만큼 그를 대하는 반응이 여지없이 싸늘한 건 당연했다.
     
   “잘못했으면 사과부터 해야 해.”
     
     
   정작 김성영은 소녀의 진심 어린 충고조차 한 귀로 듣고 흘릴 뿐이었다.
     
   그야… 눈앞에서 저 예쁜 머릿결이 팔랑이는데 어떻게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겠어?
     
   목소리만 해도 가수나 배우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싱그러운데 어떻게 고개 젓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예쁠까?
     
   헤-
     
   소녀를 파티에 초대하겠다던 애초의 생각은 이미 잊어버린 듯, 김성영이 멍하니 소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새하얀 피부에 파란 머릿결, 그리고 노란 눈동자.
     
   마치 신이 ‘완벽’을 빚어놓은 것만 같은 외모였다.
     
   그간 저 말고도 소녀에게 다가가려는 녀석들을 막느라 얼마나 피곤했는지.
     
   김성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소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새하얗고 말랑해 보이는 것만큼이나 보드라운 촉감이었다.
     
   그렇게-
     
   “너는… 교만하고 음탕한 아이구나.”
     
   소녀에게 혼나버렸다.
     
     
   “어…? 어……? 나, 나 말이야?”
     
   교만하고 음탕하다고? 그게 무슨 말인데?
     
   음탕은… 변태 같다는 건가?
     
   김성영이 뻣뻣하게 굳어 있을 때, 소녀는 친절히 대답해 주는 대신 조용히 접속을 종료했다.
     
   사르륵 빛이 되어 사라지는 신형.
     
   “어, 야! 야! 대답은 하고 가야지!”
     
   뒤늦게 당황한 김성영이 불러보지만, 접속을 종료한 사람에겐 닿지 못할 목소리였다.
     
   “푸핫! 천하의 김성영이 이렇게 까이네?”
   “닥쳐!”
     
   “그렇게 처음부터 잘 좀 대해주지 그랬냐?”
   “씨, 씨발… 제 새끼 이름을 ‘죄인’이라 짓는 미친 인간이 어딨냐고!”
     
   솔직히 이 말만큼은 다른 학생들 역시 지극히 동감했다.
     
   부모가 소녀의 외모와 능력을 질투한 게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이름이었으니.
     
   그들 중 그 누구도 소녀가 저 자신을 ‘죄인’이라 칭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막 가상현실 강의를 끝내고 소녀가 복귀하던 때였다.
     
   “아가. 혹시 끝났느냐? 잠깐만 나와보려무나.”
     
   기다렸다는 듯 자명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연히 나타난 게 아니었는지 창호지에 드리운 그림자가 정신 사납게 왔다갔다 한다.
     
   “아! 자명 스님…!”
     
   소녀는 곧장 주인을 반기는 백구처럼 벌떡 나가려다가 주춤 제자리에 멈춰 섰다.
     
     
   “흥….”
     
   솔직히, 소녀는 스님이 미웠다.
     
   처음 절에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주고, 아침에는 깨워주고.
     
   점심과 저녁에마저 곁에서 함께 식사해 주셨으면서!
     
   요즘엔 통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마치 교단에서 그녀를 담당하던 선각자분들이 숱하게도 바뀌어 나갔던 때와 같았다.
     
   다들 나 같은 죄인하고는 오래 있기 싫다는 거겠지.
     
   “아가…?”
     
     
   배부른 투정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한창 속죄해야 할 몸으로 배부르게 먹고, 등 따스하게 잘 수 있는 게 스님 덕이라는 걸 안다.
     
   스님 역시 이교도들의 일로 여러모로 바쁘신 거겠지.
     
   다 안다.
     
   다 아는데….
     
   ‘그래도, 혼자 있는 건 싫어.’
     
   소녀가 무릎을 모아 앉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전등으로 환하게 밝은 방 안이었음에도 새까맣게 물드는 시야.
     
   마치 두 눈을 잃었을 때, 혼자 방 안에 방치되었을 때가 떠오르는 어둠이다.
     
   “아가, 들어가마.”
     
   손끝이 간질거려 온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배부르게 투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돌아가신 부모님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만나 뵐 수 있도록.
     
   한시라도 빨리 남은 죄를 덜어내고 죽어야 한다.
     
   까득- 소녀가 멍하니 손톱을 물어뜯던 때.
     
     
   “아가. 우리 아가가 왜 이리 울고 있을꼬….”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자명 스님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렸다.
     
   폭- 한 손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머리통이 뜨끈하다.
     
   이 작은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리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걸까.
     
   ‘나는 죄인이다….’
     
   중얼거리던 소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음에도 스님은 모른 척, 푸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 혼자 있어서 서운했느냐?”
     
   매번 화나 있던, 혹은 무뚝뚝하던 교단 사람들과 달리 마음이 절로 푸근해지는 웃음.
     
   소녀는 괜히 간질거리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러면 어른이 말하는데 어디서 고개를 돌리냐는 쓴소리가 돌아오겠지….
     
   “아가. 그리도 슬프면 오늘 외출은 못 하겠구나?”
     
     
   잠깐!
     
   외출? 외출이라고?!
     
   “…녜?”
     
   휙-! 고개를 돌린 소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명 스님을 바라본다.
     
   안 그래도 요즘 오염이니 뭐니, 문제라고 외출을 금지당한 소녀였다.
     
   스님들께 선물해 줄 버섯도 따지 못하고, 심지어 참새 가족들은 소녀를 매정하게 버려둔 채 저희끼리 짹짹거리며 산세를 누벼댔다.
     
   교단에서야 눈도 멀었고, 팔다리도 잘린 상태였기에 외출하지 못해도 그러려니 해야 했는데.
     
   한 번 자유의 즐거움을 맛보고 나니 답답함에 온몸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그 격렬한 반응에 자명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길드장님은 기억하느냐?”
   “네. 이 노트북을 선물해 주신 분이요?”
     
   “그래. 그 녀석이 널 좀 만나보고자 한다는구나.”
     
     
   소녀는 금세 길드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주 새까만 사람이었지?
     
   까만 옷, 까만 바지, 까만 머리….
     
   그리고 되게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이었어.
     
   솔직히 사찰의 스님들에 비해 날카로운 인상에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그나마 거부감이 적은 건, 그녀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스님은 안 가요?”
     
   소심한 물음에 자명 스님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내렸다.
     
   “허허 나는 해야 할 게 많단다. 우리 아가가 편히 지내려면 손봐야 할 게 많단다.”
     
   그렇게 바쁜 것보단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게 더 좋은데….
     
   입술을 달싹거리던 소녀는 말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투정 부리지 말자.
     
   나는 지금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
     
   나중에, 내가 지은 죄를 모두 씻어낸 뒤에 스님을 도와드리기로 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다행히 소녀의 생각이 더 깊어질 새는 없었다.
     
   “미안하네,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강의 중인 걸 알고 왔던 거니 문제없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정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일 줄이야.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정장 차림의 기다란 사내가 서 있으니, 소녀는 내심 당황했다.
     
   “자네가 아이를 이렇게 챙겨주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이.”
   “…절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허허허, 아가를 잘 부탁하네.”
     
     
   자명 스님이 슬그머니 소녀의 등을 떠밀었다.
     
   “가 보려무나.”
     
   소녀는 그제야 주춤주춤, 고개를 한참은 들어야 얼굴이 보이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왠지 모르게 그의 곁으로 갈수록 주변이 서늘해지는 느낌.
     
   기운을 폴폴 흩뿌리고 다닐 정도로 전능 신께 사랑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식으로 인사한 적은 없었던가. 이성환이다. 부족하지만 청성 길드의 길드장을 맡고 있지.”
     
   무뚝뚝한 목소리에조차 소녀의 긴장감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녀와 같이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니 나쁜 사람일 리 없으니까.
     
   설령 나쁜 사람이더라도 그녀처럼 제대로 속죄하는 사람이겠지.
     
   소녀가 슥- 손을 뻗어 길드장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거칠거칠하고 아주 커다란 손아귀다.
     
   이 손으로 뺨을 맞으면 아플 텐데, 길드장님께 맞을 일이 없게 주의해야겠다.
     
   “저는, 이름이 없어요. 스님들은 꼬맹이, 아가라고 불러주셨어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이미 들은바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길드장은 굳은살투성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각에 애써 터져 나오려던 한숨을 삼켰다.
     
   “그래, 가자. 스님께 듣기로 사찰에 온 뒤로 놀러 나간 적이 없다고.”
   “네…!”
     
   왠지 모르게 신난 듯 한층 높아진 소녀의 목소리.
     
   “뭘 해 보고 싶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해 줄 수 있다.
     
   그게 청성 길드장이 지닌 힘.
     
   정작 소녀의 부탁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도시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요.”
     
   무슨 생각인지, 또래 아이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침잠한 두 눈빛.
     
   길드장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소녀에 대한 건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가면 될 일이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내일 4시다음화 보기

갑작스럽게 이뤄졌던 시험이 끝나고 며칠이 흘렀다.

소녀는 처음과 달리, 이 가상현실에 대한 경계심이 눈에 띄게 사라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이교도들의 인신 공양을 위해 붙잡힌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다행히 이 가상현실은 꿈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원한다면 언제든 마음대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고 해서 바로 접속을 종료하려 하니.

“신입생 친구! 그래도 수업은 다 끝나고 나가야죠!”

혼나버렸다.

…아무 때나 나가도 된다고 했으면서.

“흥.”

이교도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물론, 불퉁한 속내와 달리 소녀는 얌전히 강의에 집중했다.

악마가 찾아올지 모른다던 미아의 경고를 쉬이 잊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막 강의가 끝난 후에야 소녀는 잃어버렸던 미소를 되찾았다.

헤헤, 오늘은 오랜만에 아참이랑 놀아줘야지!

드디어 공부에서 해방이다!

와! 자유다!

한껏 신난 소녀가 막 접속을 종료하려던 찰나였다.

계속 눈치를 살피던 김성영이 후다닥 다가와 말했다.

“야! 우, 우리 오늘 모여서 놀기로 했는데 너, 너도 같이 갈래?”

왠지 모르게 머리가 번들번들하고, 피부에도 광이 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딴에는 좋은 인상을 주겠다고 열심히 꾸미고 온 것이었다.

“…나?”

정작 소녀는 그런 김성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더 있는데?!”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신 부모님을 놀리고, 대놓고 적의를 비추지 않았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에 김성영이 다급히 변명했다.

“그건… 그냥 장난이었지. 너도 그렇잖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다른 아이들에게 언뜻 듣기론 소녀를 직접 만나게 되면 현실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겠다며 호언장담했다던데.

사람을 죽이고도 장난이라고 넘길 생각이었던 건가?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한다.

조급하던 김성영과 달리 마치 잘못한 아이를 훈계하는 듯한 말투였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도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 있는 법이야.”

사람은 살아가며 죄를 지을 수 있다.

태어나기 위해 제 어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부터가 인간의 원죄.

중요한 건, 제 잘못에 속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였다.

교단에서 교육받았던 기준에 따르면 죄를 짓고도 참회하지 않는 김성영은 ‘써먹지 못할 인간’에 속하는 이.

당연한 상식인만큼 그를 대하는 반응이 여지없이 싸늘한 건 당연했다.

“잘못했으면 사과부터 해야 해.”

정작 김성영은 소녀의 진심 어린 충고조차 한 귀로 듣고 흘릴 뿐이었다.

그야… 눈앞에서 저 예쁜 머릿결이 팔랑이는데 어떻게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겠어?

목소리만 해도 가수나 배우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싱그러운데 어떻게 고개 젓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예쁠까?

헤-

소녀를 파티에 초대하겠다던 애초의 생각은 이미 잊어버린 듯, 김성영이 멍하니 소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새하얀 피부에 파란 머릿결, 그리고 노란 눈동자.

마치 신이 ‘완벽’을 빚어놓은 것만 같은 외모였다.

그간 저 말고도 소녀에게 다가가려는 녀석들을 막느라 얼마나 피곤했는지.

김성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소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새하얗고 말랑해 보이는 것만큼이나 보드라운 촉감이었다.

그렇게-

“너는… 교만하고 음탕한 아이구나.”

소녀에게 혼나버렸다.

“어…? 어……? 나, 나 말이야?”

교만하고 음탕하다고? 그게 무슨 말인데?

음탕은… 변태 같다는 건가?

김성영이 뻣뻣하게 굳어 있을 때, 소녀는 친절히 대답해 주는 대신 조용히 접속을 종료했다.

사르륵 빛이 되어 사라지는 신형.

“어, 야! 야! 대답은 하고 가야지!”

뒤늦게 당황한 김성영이 불러보지만, 접속을 종료한 사람에겐 닿지 못할 목소리였다.

“푸핫! 천하의 김성영이 이렇게 까이네?”

“닥쳐!”

“그렇게 처음부터 잘 좀 대해주지 그랬냐?”

“씨, 씨발… 제 새끼 이름을 ‘죄인’이라 짓는 미친 인간이 어딨냐고!”

솔직히 이 말만큼은 다른 학생들 역시 지극히 동감했다.

부모가 소녀의 외모와 능력을 질투한 게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이름이었으니.

그들 중 그 누구도 소녀가 저 자신을 ‘죄인’이라 칭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막 가상현실 강의를 끝내고 소녀가 복귀하던 때였다.

“아가. 혹시 끝났느냐? 잠깐만 나와보려무나.”

기다렸다는 듯 자명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연히 나타난 게 아니었는지 창호지에 드리운 그림자가 정신 사납게 왔다갔다 한다.

“아! 자명 스님…!”

소녀는 곧장 주인을 반기는 백구처럼 벌떡 나가려다가 주춤 제자리에 멈춰 섰다.

“흥….”

솔직히, 소녀는 스님이 미웠다.

처음 절에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주고, 아침에는 깨워주고.

점심과 저녁에마저 곁에서 함께 식사해 주셨으면서!

요즘엔 통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마치 교단에서 그녀를 담당하던 선각자분들이 숱하게도 바뀌어 나갔던 때와 같았다.

다들 나 같은 죄인하고는 오래 있기 싫다는 거겠지.

“아가…?”

배부른 투정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한창 속죄해야 할 몸으로 배부르게 먹고, 등 따스하게 잘 수 있는 게 스님 덕이라는 걸 안다.

스님 역시 이교도들의 일로 여러모로 바쁘신 거겠지.

다 안다.

다 아는데….

‘그래도, 혼자 있는 건 싫어.’

소녀가 무릎을 모아 앉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전등으로 환하게 밝은 방 안이었음에도 새까맣게 물드는 시야.

마치 두 눈을 잃었을 때, 혼자 방 안에 방치되었을 때가 떠오르는 어둠이다.

“아가, 들어가마.”

손끝이 간질거려 온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배부르게 투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돌아가신 부모님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만나 뵐 수 있도록.

한시라도 빨리 남은 죄를 덜어내고 죽어야 한다.

까득- 소녀가 멍하니 손톱을 물어뜯던 때.

“아가. 우리 아가가 왜 이리 울고 있을꼬….”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자명 스님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렸다.

폭- 한 손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머리통이 뜨끈하다.

이 작은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리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걸까.

‘나는 죄인이다….’

중얼거리던 소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음에도 스님은 모른 척, 푸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 혼자 있어서 서운했느냐?”

매번 화나 있던, 혹은 무뚝뚝하던 교단 사람들과 달리 마음이 절로 푸근해지는 웃음.

소녀는 괜히 간질거리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러면 어른이 말하는데 어디서 고개를 돌리냐는 쓴소리가 돌아오겠지….

“아가. 그리도 슬프면 오늘 외출은 못 하겠구나?”

잠깐!

외출? 외출이라고?!

“…녜?”

휙-! 고개를 돌린 소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명 스님을 바라본다.

안 그래도 요즘 오염이니 뭐니, 문제라고 외출을 금지당한 소녀였다.

스님들께 선물해 줄 버섯도 따지 못하고, 심지어 참새 가족들은 소녀를 매정하게 버려둔 채 저희끼리 짹짹거리며 산세를 누벼댔다.

교단에서야 눈도 멀었고, 팔다리도 잘린 상태였기에 외출하지 못해도 그러려니 해야 했는데.

한 번 자유의 즐거움을 맛보고 나니 답답함에 온몸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그 격렬한 반응에 자명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길드장님은 기억하느냐?”

“네. 이 노트북을 선물해 주신 분이요?”

“그래. 그 녀석이 널 좀 만나보고자 한다는구나.”

소녀는 금세 길드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주 새까만 사람이었지?

까만 옷, 까만 바지, 까만 머리….

그리고 되게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이었어.

솔직히 사찰의 스님들에 비해 날카로운 인상에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그나마 거부감이 적은 건, 그녀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스님은 안 가요?”

소심한 물음에 자명 스님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내렸다.

“허허 나는 해야 할 게 많단다. 우리 아가가 편히 지내려면 손봐야 할 게 많단다.”

그렇게 바쁜 것보단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게 더 좋은데….

입술을 달싹거리던 소녀는 말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투정 부리지 말자.

나는 지금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

나중에, 내가 지은 죄를 모두 씻어낸 뒤에 스님을 도와드리기로 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다행히 소녀의 생각이 더 깊어질 새는 없었다.

“미안하네,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강의 중인 걸 알고 왔던 거니 문제없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정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일 줄이야.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정장 차림의 기다란 사내가 서 있으니, 소녀는 내심 당황했다.

“자네가 아이를 이렇게 챙겨주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이.”

“…절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허허허, 아가를 잘 부탁하네.”

자명 스님이 슬그머니 소녀의 등을 떠밀었다.

“가 보려무나.”

소녀는 그제야 주춤주춤, 고개를 한참은 들어야 얼굴이 보이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왠지 모르게 그의 곁으로 갈수록 주변이 서늘해지는 느낌.

기운을 폴폴 흩뿌리고 다닐 정도로 전능 신께 사랑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식으로 인사한 적은 없었던가. 이성환이다. 부족하지만 청성 길드의 길드장을 맡고 있지.”

무뚝뚝한 목소리에조차 소녀의 긴장감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녀와 같이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니 나쁜 사람일 리 없으니까.

설령 나쁜 사람이더라도 그녀처럼 제대로 속죄하는 사람이겠지.

소녀가 슥- 손을 뻗어 길드장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거칠거칠하고 아주 커다란 손아귀다.

이 손으로 뺨을 맞으면 아플 텐데, 길드장님께 맞을 일이 없게 주의해야겠다.

“저는, 이름이 없어요. 스님들은 꼬맹이, 아가라고 불러주셨어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이미 들은바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길드장은 굳은살투성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각에 애써 터져 나오려던 한숨을 삼켰다.

“그래, 가자. 스님께 듣기로 사찰에 온 뒤로 놀러 나간 적이 없다고.”

“네…!”

왠지 모르게 신난 듯 한층 높아진 소녀의 목소리.

“뭘 해 보고 싶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해 줄 수 있다.

그게 청성 길드장이 지닌 힘.

정작 소녀의 부탁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도시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요.”

무슨 생각인지, 또래 아이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침잠한 두 눈빛.

길드장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소녀에 대한 건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가면 될 일이니까.


           


Don’t Die, It’s Not Your Body

Don’t Die, It’s Not Your Body

죽지 마, 네 몸이 아니야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you deserve to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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