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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게이트가 나타나고 세상이 엉망이 되어버렸음에도 선진국은 선진국이었다.
     
   서울은 오염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과거의 원상태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그 대표적인 성과가 눈앞의 웅장한 경복궁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오톨도톨한 벽돌과 군청색의 기와.
     
   발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아무리 돌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와… 투박한 게 되게 오래된 건물인가 봐요!”
     
   아차.
     
   그런데 역사적 지식이 없는 소녀가 보기엔 그저 오래된 건물일 뿐이다.
     
   서울 곳곳에 삐죽빼죽 튀어나온 교회 십자가를 보고 ‘아앗! 우릴 따라한 이단들!’이라며 외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그래. 600년이나 전에 지어진 곳이지.”
   “600년이요?!”
     
   깜짝 놀란 소녀가 제자리서 펄쩍 뛰어올랐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듯, 가방 안에서 뽁! 하고 참새 머리가 솟아났다.
     
   짹!
     
   안타깝게도 소녀는 참새 가족의 불만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이에 한번 놀라고.
     
   600년이나 되었다는 이야기에 다시 한번 놀랐다.
     
     
   600년이라니!
     
     
   그 정도면… 어, 그 정도면….
     
     
   고심하던 소녀가 슬그머니 길드장을 올려다본다.
     
   “아앗! 길드장님이 열두 번 죽을 시간이네요!”
   “……음.”
     
   맞는 말이긴 한데.
     
   또 묘하게 남은 수명을 50살로 정확히 계산해서.
     
   소녀가 악의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길드장이었다.
     
   쫑쫑대며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자그마한 파란색 머리통.
     
   그 안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아이한테 상식이란 걸 가르칠 수 있을까.
     
   고심하며 길드장의 미간이 살포시 찌그러졌다.
     
   정작 소녀는 난생처음인 도시 구경에 신나 하기 바빴다.
     
     
   어떻게 건물이 저렇게 넓을 수 있는 걸까?
     
   저런 걸 평범한 사람이 지을 수 있을 리 없다.
     
   “옛날 사람들은 엄청난 거인이었나요?”
   “아니.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헉! 어쩌면 고대에도 저희처럼 신께 선택받은 각성자들이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아니, 각성은 게이트가 나타난 10년…”
     
   “길드장님! 저건 무슨 옷인가요? 막! 오뚜기 같아요!”
     
   두툼한 한복 치마를 바라보던 소녀가 열심히 추측해 본다.
     
     
   아하!
     
   “아! 다들 다리가 엄청 두꺼운가 봐요!”
   “……하.”
     
   아.
     
   소녀의 발랄함에 현기증이 일어나는 건 공중이나 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서 있으려니, 쫑쫑거리며 돌아와 손을 꼭 붙잡아 당기며 재잘대는 소녀.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무표정함에도 쉬이 지치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본의 아니게 주변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 사람 청성 길드장 아닌가?”
   “엥? 그 바쁜 사람이 있을 리 없을… 줄 알았는데 진짜네?!”
     
   다른 무엇보다 길드장과 소녀의 외모가 문제였다.
     
   길드장은 남들보다 머리 한 개는 더 달린 쭉 뻗은 키에 새까만 정장 차림이고.
     
   소녀는 염색으로 저런 색이 나올지 싶은 푸르고 기다란 머리를 흩날리고 있으니.
     
   한복투성이인 사람들 사이에서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길드장님! 혹시 저 안에도 들어가 볼 수 있나요?”
     
   얼마나 신났는지 길드장의 손을 잡아 흔들며 소녀가 광화문을 가리켰다.
     
   “와… 저 애는 딸인가? 너무 귀엽다….”
     
   안타깝게도 이 이상 여유 부릴 순 없을 듯했다.
     
   사진이라도 함께 찍으려는지 슬금슬금 다가오는 시민들.
     
   길드장에겐 그런 사람들의 주책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청성 길드장이 결혼했었나?”
   “아니? 그러니까 더 궁금한 거지!”
     
   그 혼자였다면 문제없겠지만.
     
   ‘안 그래도 상처 많은 아이니, 조심하는 게 맞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들이 소녀의 앞에서 아빠냐고 얘기라도 꺼냈다간 괜히 소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릴 가능성이 컸다.
     
   길드장은 어쩔 수 없이 경복궁은 포기하기로 했다.
     
     
   “미안한데 내가 점심을 안 먹어서, 경복궁은 나중에 가도 괜찮겠나?”
   “아, 그럼요!”
     
   분명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히려 길드장의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아쉬움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듯한 반응이었다.
     
     
   “끼니는 제때 챙겨 먹어야 해요. 그래야 건강할 수 있거든요.”
     
   미아가 그러지 않았던가.
     
   다른 건 몰라도 삼시세끼 밥은 제발 배부르게 챙겨 먹으라고.
     
   길드장님은 덩치도 커다래서 분명 밥을 많이 먹어야 할 거다.
     
   소녀는 근처에 밥을 먹을 곳이 있나 휙,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길드장은 그런 소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때는 제 또래 아이처럼 순진무구하면서.
     
   또 어떤 때는 어른보다도 더 포기가 빠르고, 꼼꼼하고 배려심이 넘치는구나.
     
   길드장은 슬그머니 염동력을 이용해 앞서가던 소녀를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에? 으에에?!”
     
   깜짝 놀란 소녀가 버둥대던 때.
     
   “발 차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음식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나.”
     
   그대로 손을 뻗어 소녀를 안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랑 부딪힐 일이 없도록 팔뚝 위에 걸터앉힌 뒤.
     
   “이런 건 어른에게 맡기는 거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시민들, 은근슬쩍 사진을 찍어대는 이들을 무시한 채.
     
   다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놀이공원에서 놀고 있을 비서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이어지는 사이 지이잉- 소녀의 빤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저씨 그건 뭐예요?’라는 물음이 환상처럼 들려온다.
     
   이런, 젠장. 정신병인가?
     
   흠칫하면서도 길드장은 순순히 스마트폰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스마트폰이다. 멀리 있는 사람과 연락하기 위한 물건이지.”
     
     
   헉!
     
   깜짝 놀란 소녀는 길드장의 탄탄한 팔이 떨려올 정도로 온몸을 휘청였다.
     
   멀리 있는 사람과 연락할 수 있는 물건이라니!
     
   이거야말로 신께서 내려주신 물건이잖아!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미아와도 연락할 수 있으려나?
     
   아니! 신님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일지도 모른다!
     
   흥분한 소녀가 헥, 헤엑-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럼! 그럼! 신, 신님하고도 연락할 수 있나요?!”
     
   어지간해서는 소녀의 동심을 위해주려던 길드장조차 이번만큼은 거짓말할 수 없었다.
     
   기약 없는 희망은 오히려 사람을 비탄에 빠뜨리는 법.
     
   “아니. 상대방 역시 스마트폰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연락처를 알아야 통화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상대가 거절한다면 통화는 불가능하지.”
     
   그러자 고개를 갸웃한 소녀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소원을 빌면 되려나…?”
     
   오감이 민감한 길드장 역시 똑똑히 알아들었지만, 굳이 아는 척하진 않았다.
     
   아직 소녀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한 데다, 때맞춰 연결음이 끊기며 비서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소녀가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속삭이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름의 배려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통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악! 잠깐만! 길드장님한테 전화 왔어! 여보세요? 길드장님? 여보세요…?”
     
   예상했던 대로 놀이공원에 가 있는 듯 소란스러운 잡음이 섞여 들려왔다.
     
   상당히 즐겁게 보내고 있는 모양이지.
     
   뿌듯해진 길드장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나름대로는 직원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경복궁 근처에 아이가 좋아할 만한 간식을 파는 곳이 있나?”
   “어… 네…? 자, 잠시만요!”
     
     
   다 같이 출장이나 다녀오라고 놀이공원 티켓을 보내주시더니, 갑자기?
     
   갑작스러운 전화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깜짝 놀랐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잠깐.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지금 길드장님이 또 아이가 좋아할 만한 걸 찾아달라고 하신 거지?
     
     
   여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던 무감함의 극치.
     
   그런 그가 선물을 포장하고, 간식거리를 찾을 정도인 아이는 대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 길드장님이 저희도 모르게 자식을 숨겨놨던 건 아닐까, 고민하게 될 정도였다.
     
   다행히 이런 뜬금없는 부탁에도 유능한 비서들은 금세 SNS와 인터넷을 뒤져 평가가 꽤 괜찮은 한 간식 집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멀지 않은 곳에 탕후루 전문점이 있어요. 주소는 톡으로 보내놓을게요.”
   “수고한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면 길드장님이 이토록 신경 쓰는 아이가 누군지 직접 볼 기회가 생기겠지?
     
     
   안타깝게도 이런 비서진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길드장님? 이건 뭔가요?”
   “탕후루다. 과일 겉면에 설탕을 녹여 굳힌 간식이지.”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탕후루 꼬치를 보며 소녀가 신나게 눈을 빛냈다.
     
   사치스러운 걸 싫어하면 어떡하나, 과일을 싫어하진 않겠지 등등.
     
   걱정이 싹 씻겨 내려갈 정도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에 길드장 역시 곧장 한도 무제한 블랙 카드를 꺼내 내밀며 주문했다.
     
   “종류별로 하나씩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수억 단위조차 일시불로 결제할 수 있는 카드로 기껏 해 봤자 몇만 원짜리 탕후루를 구매하는 데 긁은 것이었다.
     
     
   이렇게 반응이 좋은 데 왜 안타까운 일이냐 하면….
     
   ‘생각해 보니 이 나이대 애들도 스마트폰은 하나씩 가지고 다니지 않았나. 같이 나온 김에 하나 사주는 게 좋겠군.’
     
   VVIP 프리패스 입장권을 얻은 대가인지, 소녀를 보고 싶다던 욕심의 대가인지.
     
   길드장은 저 자신이 굉장히 직원 친화적이라고 생각해 오던 것조차 잊은 듯.
     
   열심히 놀고 있을 비서진들에게 끊임없이 연락을 보냈다.
     
   타인에게 대리 개통을 해줘도 되는지.
     
   아이들이 쓰기 좋은 스마트폰 기종이 있는지.
     
   이외에도 같이 사줘야 하는 게 있는지, 근처에 괜찮은 대리점이 있는지 등등.
     
   […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오팔폰이 좋을 것 같아요. 아이의 손이 작다면 오팔 미니. 손이 크다면 일반 버전이나 플러스 버전을 사주시면 될 거예요.]
     
   “흐음….”
     
   오팔폰이라.
     
   기기 한 대에 200만 원이 넘는 프리미엄 스마트폰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근처 편의점 쇼핑하는 것만큼이나 저렴한 가격이었다.
     
   뭣보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떨어져 있는 소녀가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당할 걸 생각하니 다른 허접한 물건을 주는 건 범죄나 다름없는 짓.
     
   비싼 건 좋은 거다.
     
   그러니 그냥 제일 비싼 걸 사줘야겠다.
     
   ‘플러스…. 오팔 프로 맥스 16. 이걸 사주면 되겠군.’
     
   그렇게 길드장이 열심히 쇼핑하는 사이.
     
     
   “포장 나왔습니다!”
     
   소녀는 어느새 양손 가득 포장된 탕후루 봉투를 받아 들고 있었다.
     
   워낙 체구가 작은 탓인지 휘청거리며 불안한 모습이었다.
     
   “가자.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지. 맘껏 구경하면서 먹어도 된다.”
     
   길드장은 곧장 봉투를 뺏어 들며 탕후루 꼬치 하나를 꺼내 올렸다.
     
   “사과!”
     
   이번에 뽑힌 건 녹색 빛의 사과가 통으로 굳혀진 사과 탕후루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내일 오전 8시다음화 보기

게이트가 나타나고 세상이 엉망이 되어버렸음에도 선진국은 선진국이었다.

서울은 오염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과거의 원상태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그 대표적인 성과가 눈앞의 웅장한 경복궁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오톨도톨한 벽돌과 군청색의 기와.

발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아무리 돌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와… 투박한 게 되게 오래된 건물인가 봐요!”

아차.

그런데 역사적 지식이 없는 소녀가 보기엔 그저 오래된 건물일 뿐이다.

서울 곳곳에 삐죽빼죽 튀어나온 교회 십자가를 보고 ‘아앗! 우릴 따라한 이단들!’이라며 외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그래. 600년이나 전에 지어진 곳이지.”

“600년이요?!”

깜짝 놀란 소녀가 제자리서 펄쩍 뛰어올랐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듯, 가방 안에서 뽁! 하고 참새 머리가 솟아났다.

짹!

안타깝게도 소녀는 참새 가족의 불만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이에 한번 놀라고.

600년이나 되었다는 이야기에 다시 한번 놀랐다.

600년이라니!

그 정도면… 어, 그 정도면….

고심하던 소녀가 슬그머니 길드장을 올려다본다.

“아앗! 길드장님이 열두 번 죽을 시간이네요!”

“……음.”

맞는 말이긴 한데.

또 묘하게 남은 수명을 50살로 정확히 계산해서.

소녀가 악의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길드장이었다.

쫑쫑대며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자그마한 파란색 머리통.

그 안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아이한테 상식이란 걸 가르칠 수 있을까.

고심하며 길드장의 미간이 살포시 찌그러졌다.

정작 소녀는 난생처음인 도시 구경에 신나 하기 바빴다.

어떻게 건물이 저렇게 넓을 수 있는 걸까?

저런 걸 평범한 사람이 지을 수 있을 리 없다.

“옛날 사람들은 엄청난 거인이었나요?”

“아니.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헉! 어쩌면 고대에도 저희처럼 신께 선택받은 각성자들이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아니, 각성은 게이트가 나타난 10년…”

“길드장님! 저건 무슨 옷인가요? 막! 오뚜기 같아요!”

두툼한 한복 치마를 바라보던 소녀가 열심히 추측해 본다.

아하!

“아! 다들 다리가 엄청 두꺼운가 봐요!”

“……하.”

아.

소녀의 발랄함에 현기증이 일어나는 건 공중이나 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서 있으려니, 쫑쫑거리며 돌아와 손을 꼭 붙잡아 당기며 재잘대는 소녀.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무표정함에도 쉬이 지치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본의 아니게 주변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 사람 청성 길드장 아닌가?”

“엥? 그 바쁜 사람이 있을 리 없을… 줄 알았는데 진짜네?!”

다른 무엇보다 길드장과 소녀의 외모가 문제였다.

길드장은 남들보다 머리 한 개는 더 달린 쭉 뻗은 키에 새까만 정장 차림이고.

소녀는 염색으로 저런 색이 나올지 싶은 푸르고 기다란 머리를 흩날리고 있으니.

한복투성이인 사람들 사이에서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길드장님! 혹시 저 안에도 들어가 볼 수 있나요?”

얼마나 신났는지 길드장의 손을 잡아 흔들며 소녀가 광화문을 가리켰다.

“와… 저 애는 딸인가? 너무 귀엽다….”

안타깝게도 이 이상 여유 부릴 순 없을 듯했다.

사진이라도 함께 찍으려는지 슬금슬금 다가오는 시민들.

길드장에겐 그런 사람들의 주책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청성 길드장이 결혼했었나?”

“아니? 그러니까 더 궁금한 거지!”

그 혼자였다면 문제없겠지만.

‘안 그래도 상처 많은 아이니, 조심하는 게 맞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들이 소녀의 앞에서 아빠냐고 얘기라도 꺼냈다간 괜히 소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릴 가능성이 컸다.

길드장은 어쩔 수 없이 경복궁은 포기하기로 했다.

“미안한데 내가 점심을 안 먹어서, 경복궁은 나중에 가도 괜찮겠나?”

“아, 그럼요!”

분명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히려 길드장의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아쉬움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듯한 반응이었다.

“끼니는 제때 챙겨 먹어야 해요. 그래야 건강할 수 있거든요.”

미아가 그러지 않았던가.

다른 건 몰라도 삼시세끼 밥은 제발 배부르게 챙겨 먹으라고.

길드장님은 덩치도 커다래서 분명 밥을 많이 먹어야 할 거다.

소녀는 근처에 밥을 먹을 곳이 있나 휙,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길드장은 그런 소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때는 제 또래 아이처럼 순진무구하면서.

또 어떤 때는 어른보다도 더 포기가 빠르고, 꼼꼼하고 배려심이 넘치는구나.

길드장은 슬그머니 염동력을 이용해 앞서가던 소녀를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에? 으에에?!”

깜짝 놀란 소녀가 버둥대던 때.

“발 차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음식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나.”

그대로 손을 뻗어 소녀를 안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랑 부딪힐 일이 없도록 팔뚝 위에 걸터앉힌 뒤.

“이런 건 어른에게 맡기는 거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시민들, 은근슬쩍 사진을 찍어대는 이들을 무시한 채.

다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놀이공원에서 놀고 있을 비서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이어지는 사이 지이잉- 소녀의 빤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저씨 그건 뭐예요?’라는 물음이 환상처럼 들려온다.

이런, 젠장. 정신병인가?

흠칫하면서도 길드장은 순순히 스마트폰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스마트폰이다. 멀리 있는 사람과 연락하기 위한 물건이지.”

헉!

깜짝 놀란 소녀는 길드장의 탄탄한 팔이 떨려올 정도로 온몸을 휘청였다.

멀리 있는 사람과 연락할 수 있는 물건이라니!

이거야말로 신께서 내려주신 물건이잖아!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미아와도 연락할 수 있으려나?

아니! 신님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일지도 모른다!

흥분한 소녀가 헥, 헤엑-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럼! 그럼! 신, 신님하고도 연락할 수 있나요?!”

어지간해서는 소녀의 동심을 위해주려던 길드장조차 이번만큼은 거짓말할 수 없었다.

기약 없는 희망은 오히려 사람을 비탄에 빠뜨리는 법.

“아니. 상대방 역시 스마트폰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연락처를 알아야 통화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상대가 거절한다면 통화는 불가능하지.”

그러자 고개를 갸웃한 소녀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소원을 빌면 되려나…?”

오감이 민감한 길드장 역시 똑똑히 알아들었지만, 굳이 아는 척하진 않았다.

아직 소녀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한 데다, 때맞춰 연결음이 끊기며 비서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소녀가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속삭이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름의 배려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통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악! 잠깐만! 길드장님한테 전화 왔어! 여보세요? 길드장님? 여보세요…?”

예상했던 대로 놀이공원에 가 있는 듯 소란스러운 잡음이 섞여 들려왔다.

상당히 즐겁게 보내고 있는 모양이지.

뿌듯해진 길드장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나름대로는 직원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경복궁 근처에 아이가 좋아할 만한 간식을 파는 곳이 있나?”

“어… 네…? 자, 잠시만요!”

다 같이 출장이나 다녀오라고 놀이공원 티켓을 보내주시더니, 갑자기?

갑작스러운 전화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깜짝 놀랐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잠깐.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지금 길드장님이 또 아이가 좋아할 만한 걸 찾아달라고 하신 거지?

여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던 무감함의 극치.

그런 그가 선물을 포장하고, 간식거리를 찾을 정도인 아이는 대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 길드장님이 저희도 모르게 자식을 숨겨놨던 건 아닐까, 고민하게 될 정도였다.

다행히 이런 뜬금없는 부탁에도 유능한 비서들은 금세 SNS와 인터넷을 뒤져 평가가 꽤 괜찮은 한 간식 집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멀지 않은 곳에 탕후루 전문점이 있어요. 주소는 톡으로 보내놓을게요.”

“수고한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면 길드장님이 이토록 신경 쓰는 아이가 누군지 직접 볼 기회가 생기겠지?

안타깝게도 이런 비서진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길드장님? 이건 뭔가요?”

“탕후루다. 과일 겉면에 설탕을 녹여 굳힌 간식이지.”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탕후루 꼬치를 보며 소녀가 신나게 눈을 빛냈다.

사치스러운 걸 싫어하면 어떡하나, 과일을 싫어하진 않겠지 등등.

걱정이 싹 씻겨 내려갈 정도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에 길드장 역시 곧장 한도 무제한 블랙 카드를 꺼내 내밀며 주문했다.

“종류별로 하나씩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수억 단위조차 일시불로 결제할 수 있는 카드로 기껏 해 봤자 몇만 원짜리 탕후루를 구매하는 데 긁은 것이었다.

이렇게 반응이 좋은 데 왜 안타까운 일이냐 하면….

‘생각해 보니 이 나이대 애들도 스마트폰은 하나씩 가지고 다니지 않았나. 같이 나온 김에 하나 사주는 게 좋겠군.’

VVIP 프리패스 입장권을 얻은 대가인지, 소녀를 보고 싶다던 욕심의 대가인지.

길드장은 저 자신이 굉장히 직원 친화적이라고 생각해 오던 것조차 잊은 듯.

열심히 놀고 있을 비서진들에게 끊임없이 연락을 보냈다.

타인에게 대리 개통을 해줘도 되는지.

아이들이 쓰기 좋은 스마트폰 기종이 있는지.

이외에도 같이 사줘야 하는 게 있는지, 근처에 괜찮은 대리점이 있는지 등등.

[…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오팔폰이 좋을 것 같아요. 아이의 손이 작다면 오팔 미니. 손이 크다면 일반 버전이나 플러스 버전을 사주시면 될 거예요.]

“흐음….”

오팔폰이라.

기기 한 대에 200만 원이 넘는 프리미엄 스마트폰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근처 편의점 쇼핑하는 것만큼이나 저렴한 가격이었다.

뭣보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떨어져 있는 소녀가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당할 걸 생각하니 다른 허접한 물건을 주는 건 범죄나 다름없는 짓.

비싼 건 좋은 거다.

그러니 그냥 제일 비싼 걸 사줘야겠다.

‘플러스…. 오팔 프로 맥스 16. 이걸 사주면 되겠군.’

그렇게 길드장이 열심히 쇼핑하는 사이.

“포장 나왔습니다!”

소녀는 어느새 양손 가득 포장된 탕후루 봉투를 받아 들고 있었다.

워낙 체구가 작은 탓인지 휘청거리며 불안한 모습이었다.

“가자.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지. 맘껏 구경하면서 먹어도 된다.”

길드장은 곧장 봉투를 뺏어 들며 탕후루 꼬치 하나를 꺼내 올렸다.

“사과!”

이번에 뽑힌 건 녹색 빛의 사과가 통으로 굳혀진 사과 탕후루였다.


           


Don’t Die, It’s Not Your Body

Don’t Die, It’s Not Your Body

죽지 마, 네 몸이 아니야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you deserve to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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