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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뜬금없던 방송 시작과 같은 전조 없는 재빠른 방송 종료였다.
     
   양조야 강사는 딱딱하게 굳은 길드장을 힐끗 확인하고는 휴우… 겨우 식은땀을 닦아 내렸다.
     
   와…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조, 조금만 더 늦었으면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바르르 어깨를 떨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강사인데.
     
   내가 왜 여기서 길드장님이랑 심리 상담하고 있는 거지?
     
   어, 이거 월권 아닌가?
     
   일단 야매잖아?
     
   그러나 현자타임도 잠시였다.
     
     
   ‘불쌍하잖아.’
     
   처음 소녀를 볼 때만 해도 길드장님이 신경 써 달라고 했던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쁜 외모를 갖고도 선뜻 친구들에게 말 한 번 걸지 못하는 소녀.
     
   무슨 관심, 선물을 받아도 흠칫 놀라며 거리를 벌리던 소녀.
     
   가상현실, 컴퓨터를 처음 써 본다는 듯 허둥지둥 대던 소녀.
     
   …그 모든 모습을 보고도 측은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이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양조야 강사의 목표가 소녀의 환한 웃음을 보는 거였을까.
     
   아, 물론 목각 인형이나 빌런을 상대할 때처럼 살기등등한, 어디 살인귀라도 올라온 것만 같은 흉흉한 미소는 제외다.
     
   안 그래도 정상적인 상식을 지니지 못한 아이라는 건 일고 있었는데, 설마 거기서 빌런을 처형할 줄이야.
     
   “…고생했다. 기기를 멈추고 아이를 데려오지.”
     
     
   사실 빌런을 처형하는 것까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워낙 악독한 놈들이 많은 세상이 아닌가.
     
   추후 ‘더 히어로’에도 등장할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빌런.
     
   녀석은 제 영체 능력을 이용해 시민의 겉가죽을 빼앗고,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겨 다니는 등의 기상천외한 행각을 해 보였다.
     
   그렇기 죽은 각성자와 무고한 시민만 백여 명.
     
   이후 극악무도한 빌런을 확인 사살하는 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 되었는데.
     
   문제는 소녀가 빌런을 확인 사살하는 방법이었다.
     
   단순히 총을 쏘는 거였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손속이 너무 독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녹여 죽이다니.
     
   부글부글 피가 끓어 오르며 녹아내리던 빌런의 모습.
     
   어지간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푸쉬익- 가상현실 기기의 연결이 종료되며 소녀가 비틀대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헤헤… 어땠어요? 제가 악마를 죽였어요!”
     
   게임일 뿐이었지만 워낙 생동감이 넘쳤던 탓일까.
     
   소녀는 싱글벙글 폴짝대며 길드장에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현실의 악마를 죽이는 것도 허락해 주실 거죠? 아! 그리고 인터넷 너머에도 악마가 아닌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떤 아저씨랑 만났는데…!”
     
   종알종알 열심히도 제 얘기를 꺼내 드는 소녀.
     
   길드장과 강사가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으리라고는 추호도 눈치채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소녀의 눈빛은 처음 악마라는 단어를 듣고 미쳤던 때와 달리,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맑고 깨끗했다.
     
   즉 빌런을 죽인 걸로 세뇌가 풀렸다는 이야기다.
     
   길드장은 애써 터져 나오려던 한숨을 삼켰다.
     
     
   젠장.
     
   세뇌가 한 번 드러나면 악마를 죽여야만 풀리는 건가.
     
   끔찍하리만치 악독한 세뇌였다.
     
   “피곤하진 않나? 가상 현실이라고 해도 능력을 그렇게 쓴 이상 피로가 쌓였을 거다.”
     
   주제를 돌리기 위한 이야기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슬쩍 손발을 내려다보니 손톱 발톱은 멀쩡하고.
     
   피를 꽤 썼는데도 탈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와, 역시 이교도들의 기술력은 대단해!
     
   이런 식으로 훈련을 받으니까, 이교도들이 센 거겠지?
     
   [미친년이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 진짜 뒤지고 싶어?!]
     
     
   아차.
     
   어쩐지 그렇게 능력을 남발했는데도 미아가 안 나오나 했다.
     
   나중에 한꺼번에 혼내려고 그랬던 거구나…?
     
   기세등등하던 소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리 숙였다.
     
   “쉬러 갈게요…….”
     
   미아한테 엄청 혼나겠지?
     
   그러나 그녀의 몸을 다치게 한 건 사실이었고, 그런 죄를 저질러놓고 모른척할 수는 없었다.
     
   교단에서도 그랬지.
     
   아무리 성자 취급받던 소녀라고 해도 상벌은 확실히 구분해 왔다.
     
   그럼, 평소처럼 채찍으로 등을 맞을까?
     
   아, 맞다.
     
   미아의 몸이라 체벌은 안 되는데.
     
   끙끙 소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심했다.
     
   대체 어떻게 속죄해야 미아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
     
     
   “그래. 그럼, 일단 좀 쉬고 있어라. 음료라도 시켜주마.”
     
   길드장의 시선이 멀뚱히 서 있던 자매에게로 향했다.
     
   “어… 저희가 시키나요?”
   “그럼 내가 시키나?”
     
   나쁜 길드장….
     
   빼먹을 돈이 없어서 부하 직원의 돈을 빼어?
     
   이거 사내 괴롭힘이야, 불공정 뭐시기라고!!
     
   한유연이 속으로 씩씩대는 사이, 한다연은 보다 빠른 판단으로 곧장 소녀에게 다가갔다.
     
   번쩍!
     
   작은 체구답게도 가벼운 몸무게에 소녀는 옆구리가 잡힌 채로 바둥대며 들어 올려진다.
     
   “으아아!”
   “우리 아가는 살 좀 찌워야겠네?”
     
   나, 난 속죄하러 가야 하는데!
     
   그런 소녀의 속내도 모른 채, 한다연은 그대로 소녀를 품 안으로 껴안아 들었다.
     
   포옥 안기는 소녀.
     
   “히이… 가, 가슴이 닿아요…! 음란해요…!”
     
   음욕! 음욕의 악마! 완전 릴리스! 아스모데우스!!
     
   “후후. 푹신해서 좋지?”
     
   그렇게 가슴도 작고, 마음도 작은 한유연이 투덜대며 소녀가 좋아할 법한 12가지의 생과일 음료와 과자를 우다다 장바구니에 담아 넣고 있을 때였다.
     
     
   -“잠깐 나 좀 보지.”
     
   길드장은 양조야 강사를 데리고 방을 옮겼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가상 현실 방은 염동력으로 완전히 봉인해 둔 채, 남들이 엿들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든 뒤에야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이가 교단의 세뇌 피해자인 것 같다.”
   “교단…!”
     
   전능신을 믿는 이들 이외에는 모두가 이교도이니, 오만하게도 그 어떤 특별한 이름도 없이 교단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다.
     
   즉 엔간히 미친놈들이라는 건데.
     
   “그, 교단 놈들은 토벌된 게 아닌가요?”
     
   언제나 느긋하던 양조야 강사조차 표정을 굳히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은 놈들이 있는 모양이다.”
     
   길드장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풀어 얘기했다.
     
   일종의 등가교환 계열의 능력.
     
   그 외로 신체 강화 계열까지 지닌 이레귤러라는 것.
     
   더불어 세뇌의 키워드가 악마라는 이야기에는….
     
   “아, 저도 의심 가는 게 하나 있어요.”
   “교육 중에 이상한 반응이라도 보였나?”
     
   “네. 제 초능력을 쓸 때마다 눈동자의 모양이 바뀌었어요.”
   “그렇다면… 번개로 인한 불꽃, 혹은 천벌, 그리고 지속해서 번쩍이는 섬광 역시 세뇌의 키워드일 수 있겠군.”
     
   이처럼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이번 경험을 통해 소녀의 반응 범위를 확신할 수 있었단 점이었다.
     
   “악마라는 직접적인 키워드가 없어도 아이가 악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에게는 세뇌가 발동되는 것 같다.”
     
   그쯤 되니 길드장과 양조야 강사는 누구 할 것 없이 이마를 짚은 채 깊은 한숨을 터뜨렸다.
     
   특별한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완전히 소녀의 생각과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었으니.
     
   솔직히 말해 평범한 진상들조차 악마로 판정받고, 살인이 일어났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저 작은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등가교환이라는 능력이 탐났던 걸 거다.”
     
   이대로라면 소녀가 자유를 얻어 사회로 돌아간다 한들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건 불가능했다.
     
   “직원들의 반응은 어떻지?”
   “솔직히 매우 안 좋아요.”
     
   그 예시가 바로 청성 길드원의 반응이었다.
     
     
   익명 사내 게시판을 달구는 뜨거운 감자.
     
   [조금 전에 더 히어로 방송 본 사람?]
     
   마지막에 그거 빌런 녹여서 죽인 거야?
     
   – ㅇㅇ프레임 단위로 끊어 보니까 산성 액체 같음
   –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잔인한 걸 보여준 거지?
   – 뭔진 몰라도 뭔가 시험하려는 거 아닐까?
   – 사내에 빌런이 숨어 있는 듯
     
     
   [10살 소녀인 내가 사실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놀랍게도 모두 사실이다.
     
   – 뭐 AI로 만든 캐릭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웃으면서 다른 사람을 녹여 죽일 수가 있지?
   – 다른 건 몰라도 빌런 되기 딱 좋은 성향이긴 한 듯
     
     
   [염산 테러 꼬마 정체 추측해 봤다]
     
   약 30분간 사내 방송이 진행됨. 즉 마음대로 사내 방송을 켜고 제재받지 않은 위치여야 함. 여기에 해당하는 건 길드장님과 각 공략대 팀장들뿐임.
     
   그런데 팀장급이 방송을 열 수 있다고 해도 결국 길드장님의 허가가 없으면 진행은 불가능함. 독단 행동이었으면 처벌받는 건 물론 방송도 바로 꺼졌겠지. 마지막에 꺼진 건 아이가 생각보다 더 잔인한 손속을 보여서일 가능성이 큼.
     
   마침 오늘 점심쯤 길드장님이 웬 꼬마애를 데리고 본사에 들어왔다고 함.
     
   인챈트 능력에 신체 강화 능력. 사람을 죽이는 단호한 손속과 뛰어난 전투 능력과 판단력. 여러모로 어렸을 때부터 살육 병기로 길러진 느낌이었음.
     
   이번 방송은 이 꼬마의 데뷔를 위해 민심을 살펴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 분석추
   – 이게 맞으면 난 반대임. 사람 목숨을 쉽게 아는 녀석이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됨.
   – ㅇㅇ일단 저 잔인한 성정이 빌런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똑같다는 게 문제임.
   – 이번에는 길드장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
     
     
   소녀는 명백히 악인을 향해야만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건 진실을 아는 길드장과 양조야 강사만이 아는 사실로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확인을 위해 얼굴을 가렸던 게 다행이었다.
     
   소녀의 정체가 밝혀진 채 다른 사람들과 마주쳤다면 모두 껄끄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테니.
     
   어쩌면 극단적으로 소녀를 몰아붙이거나, 더 강해지기 전에 죽이겠다며 덤벼드는 빌런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
     
     
   “음… 그럼 어쩌실 생각이세요?”
     
   그에 길드장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아이의 능력이 밝혀지는 건 필연적이다. 이대로 가면 빌런은 물론 교단 놈들과도 부딪히게 되겠지.”
     
   교단의 세뇌를 고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태 세뇌당한 이들 대부분은 자살이나 타살 등, 결국 죽어서야 자유가 될 수 있었으니.
     
   “청성 길드 소속의 아이와 청성 길드에 통제받는 아이. 이 정도 차이만 둬도 사람들은 알아서 잘 오해해 줄 거다.”
   “아…!”
     
   이렇게 된 이상 소녀의 신분을 두 개로 나누기로 했다.
     
     
   잔혹한 성정을 가졌지만, 능력이 뛰어나기에 길드에 통제받는 빌런 사냥꾼인 소녀.
     
   반대로 부모를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능력을 인정받아 길드의 일원이 된 꿈 많은 소녀.
     
   그 차이는 가면이었다.
     
   “마침 이럴 때 쓸만한 아이템도 하나 있지.”
     
   『페르소나』
     
   게이트 보스를 쓰러뜨리고 얻은 것으로, 쓸데가 없어 창고 자리만 차지하던 아이템이었다.
     
   착용자의 숨겨진 내면에 따라 외형은 물론 분위기마저 바꿔주는 것으로 정체를 숨기기엔 최적이었다.
     
     
   “음….”
     
   상아로 만든 듯 새하얗고 매끈한 표면.
     
   천장 조명을 투과하는 반달 모양의 눈과 입의 구멍.
     
   솔직히 귀여운 소녀가 쓰는 물건이라 하기에는 꽤 소름 끼치게 생긴 모습이었다.
     
   소녀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저 귀여운 얼굴을 가리는 건 죄악이야!
     
   양조야 강사가 더듬더듬 가면을 씌우지 않을 이유를 읊었다.
     
     
   “그. 가면을 씌워도 체구나 행동은 달라지지 않잖아요?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챌 텐데. 그럼 굳이 불편하게 가면을 씌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이 역시 길드장이 의도한 부분이었다.
     
   아, 소녀의 귀여운 얼굴 어쩌구하는 내용이 아니라 이렇게 허술한 점이 의도한 부분이었다.
     
   “굳이 정체를 캐려는 놈들이 있다면 좋은 의도는 아닐 거다. 우린 그로써 불온한 의도로 아이의 정체를 캐려는 놈들을 일차적으로 거를 수 있지.”
     
   이 정도만 해도 허접한 놈들은 어련히 걸러질 거다.
     
   청성의 힘이, 길드장과 같은 S급 각성자의 힘이 있으니.
     
   “마찬가지로 아이의 신변을 원하는 교단 같은 놈들. 그런 놈들은 굳이 사랑받는 청성 길드의 소녀를 건드릴 필요가 없어지지. 시민들이 껄끄러워하는 페르소나가 됐을 때 처리하면 더 쉬울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소녀를 어떻게 설득해서 이 페르소나 가면을 씌우냐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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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던 방송 시작과 같은 전조 없는 재빠른 방송 종료였다.

양조야 강사는 딱딱하게 굳은 길드장을 힐끗 확인하고는 휴우… 겨우 식은땀을 닦아 내렸다.

와…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조, 조금만 더 늦었으면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바르르 어깨를 떨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강사인데.

내가 왜 여기서 길드장님이랑 심리 상담하고 있는 거지?

어, 이거 월권 아닌가?

일단 야매잖아?

그러나 현자타임도 잠시였다.

‘불쌍하잖아.’

처음 소녀를 볼 때만 해도 길드장님이 신경 써 달라고 했던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쁜 외모를 갖고도 선뜻 친구들에게 말 한 번 걸지 못하는 소녀.

무슨 관심, 선물을 받아도 흠칫 놀라며 거리를 벌리던 소녀.

가상현실, 컴퓨터를 처음 써 본다는 듯 허둥지둥 대던 소녀.

…그 모든 모습을 보고도 측은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이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양조야 강사의 목표가 소녀의 환한 웃음을 보는 거였을까.

아, 물론 목각 인형이나 빌런을 상대할 때처럼 살기등등한, 어디 살인귀라도 올라온 것만 같은 흉흉한 미소는 제외다.

안 그래도 정상적인 상식을 지니지 못한 아이라는 건 일고 있었는데, 설마 거기서 빌런을 처형할 줄이야.

“…고생했다. 기기를 멈추고 아이를 데려오지.”

사실 빌런을 처형하는 것까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워낙 악독한 놈들이 많은 세상이 아닌가.

추후 ‘더 히어로’에도 등장할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빌런.

녀석은 제 영체 능력을 이용해 시민의 겉가죽을 빼앗고,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겨 다니는 등의 기상천외한 행각을 해 보였다.

그렇기 죽은 각성자와 무고한 시민만 백여 명.

이후 극악무도한 빌런을 확인 사살하는 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 되었는데.

문제는 소녀가 빌런을 확인 사살하는 방법이었다.

단순히 총을 쏘는 거였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손속이 너무 독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녹여 죽이다니.

부글부글 피가 끓어 오르며 녹아내리던 빌런의 모습.

어지간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푸쉬익- 가상현실 기기의 연결이 종료되며 소녀가 비틀대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헤헤… 어땠어요? 제가 악마를 죽였어요!”

게임일 뿐이었지만 워낙 생동감이 넘쳤던 탓일까.

소녀는 싱글벙글 폴짝대며 길드장에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현실의 악마를 죽이는 것도 허락해 주실 거죠? 아! 그리고 인터넷 너머에도 악마가 아닌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떤 아저씨랑 만났는데…!”

종알종알 열심히도 제 얘기를 꺼내 드는 소녀.

길드장과 강사가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으리라고는 추호도 눈치채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소녀의 눈빛은 처음 악마라는 단어를 듣고 미쳤던 때와 달리,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맑고 깨끗했다.

즉 빌런을 죽인 걸로 세뇌가 풀렸다는 이야기다.

길드장은 애써 터져 나오려던 한숨을 삼켰다.

젠장.

세뇌가 한 번 드러나면 악마를 죽여야만 풀리는 건가.

끔찍하리만치 악독한 세뇌였다.

“피곤하진 않나? 가상 현실이라고 해도 능력을 그렇게 쓴 이상 피로가 쌓였을 거다.”

주제를 돌리기 위한 이야기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슬쩍 손발을 내려다보니 손톱 발톱은 멀쩡하고.

피를 꽤 썼는데도 탈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와, 역시 이교도들의 기술력은 대단해!

이런 식으로 훈련을 받으니까, 이교도들이 센 거겠지?

[미친년이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 진짜 뒤지고 싶어?!]

아차.

어쩐지 그렇게 능력을 남발했는데도 미아가 안 나오나 했다.

나중에 한꺼번에 혼내려고 그랬던 거구나…?

기세등등하던 소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리 숙였다.

“쉬러 갈게요…….”

미아한테 엄청 혼나겠지?

그러나 그녀의 몸을 다치게 한 건 사실이었고, 그런 죄를 저질러놓고 모른척할 수는 없었다.

교단에서도 그랬지.

아무리 성자 취급받던 소녀라고 해도 상벌은 확실히 구분해 왔다.

그럼, 평소처럼 채찍으로 등을 맞을까?

아, 맞다.

미아의 몸이라 체벌은 안 되는데.

끙끙 소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심했다.

대체 어떻게 속죄해야 미아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

“그래. 그럼, 일단 좀 쉬고 있어라. 음료라도 시켜주마.”

길드장의 시선이 멀뚱히 서 있던 자매에게로 향했다.

“어… 저희가 시키나요?”

“그럼 내가 시키나?”

나쁜 길드장….

빼먹을 돈이 없어서 부하 직원의 돈을 빼어?

이거 사내 괴롭힘이야, 불공정 뭐시기라고!!

한유연이 속으로 씩씩대는 사이, 한다연은 보다 빠른 판단으로 곧장 소녀에게 다가갔다.

번쩍!

작은 체구답게도 가벼운 몸무게에 소녀는 옆구리가 잡힌 채로 바둥대며 들어 올려진다.

“으아아!”

“우리 아가는 살 좀 찌워야겠네?”

나, 난 속죄하러 가야 하는데!

그런 소녀의 속내도 모른 채, 한다연은 그대로 소녀를 품 안으로 껴안아 들었다.

포옥 안기는 소녀.

“히이… 가, 가슴이 닿아요…! 음란해요…!”

음욕! 음욕의 악마! 완전 릴리스! 아스모데우스!!

“후후. 푹신해서 좋지?”

그렇게 가슴도 작고, 마음도 작은 한유연이 투덜대며 소녀가 좋아할 법한 12가지의 생과일 음료와 과자를 우다다 장바구니에 담아 넣고 있을 때였다.

-“잠깐 나 좀 보지.”

길드장은 양조야 강사를 데리고 방을 옮겼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가상 현실 방은 염동력으로 완전히 봉인해 둔 채, 남들이 엿들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든 뒤에야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이가 교단의 세뇌 피해자인 것 같다.”

“교단…!”

전능신을 믿는 이들 이외에는 모두가 이교도이니, 오만하게도 그 어떤 특별한 이름도 없이 교단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다.

즉 엔간히 미친놈들이라는 건데.

“그, 교단 놈들은 토벌된 게 아닌가요?”

언제나 느긋하던 양조야 강사조차 표정을 굳히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은 놈들이 있는 모양이다.”

길드장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풀어 얘기했다.

일종의 등가교환 계열의 능력.

그 외로 신체 강화 계열까지 지닌 이레귤러라는 것.

더불어 세뇌의 키워드가 악마라는 이야기에는….

“아, 저도 의심 가는 게 하나 있어요.”

“교육 중에 이상한 반응이라도 보였나?”

“네. 제 초능력을 쓸 때마다 눈동자의 모양이 바뀌었어요.”

“그렇다면… 번개로 인한 불꽃, 혹은 천벌, 그리고 지속해서 번쩍이는 섬광 역시 세뇌의 키워드일 수 있겠군.”

이처럼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이번 경험을 통해 소녀의 반응 범위를 확신할 수 있었단 점이었다.

“악마라는 직접적인 키워드가 없어도 아이가 악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에게는 세뇌가 발동되는 것 같다.”

그쯤 되니 길드장과 양조야 강사는 누구 할 것 없이 이마를 짚은 채 깊은 한숨을 터뜨렸다.

특별한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완전히 소녀의 생각과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었으니.

솔직히 말해 평범한 진상들조차 악마로 판정받고, 살인이 일어났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저 작은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등가교환이라는 능력이 탐났던 걸 거다.”

이대로라면 소녀가 자유를 얻어 사회로 돌아간다 한들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건 불가능했다.

“직원들의 반응은 어떻지?”

“솔직히 매우 안 좋아요.”

그 예시가 바로 청성 길드원의 반응이었다.

익명 사내 게시판을 달구는 뜨거운 감자.

[조금 전에 더 히어로 방송 본 사람?]

마지막에 그거 빌런 녹여서 죽인 거야?

– ㅇㅇ프레임 단위로 끊어 보니까 산성 액체 같음

–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잔인한 걸 보여준 거지?

– 뭔진 몰라도 뭔가 시험하려는 거 아닐까?

– 사내에 빌런이 숨어 있는 듯

[10살 소녀인 내가 사실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놀랍게도 모두 사실이다.

– 뭐 AI로 만든 캐릭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웃으면서 다른 사람을 녹여 죽일 수가 있지?

– 다른 건 몰라도 빌런 되기 딱 좋은 성향이긴 한 듯

[염산 테러 꼬마 정체 추측해 봤다]

약 30분간 사내 방송이 진행됨. 즉 마음대로 사내 방송을 켜고 제재받지 않은 위치여야 함. 여기에 해당하는 건 길드장님과 각 공략대 팀장들뿐임.

그런데 팀장급이 방송을 열 수 있다고 해도 결국 길드장님의 허가가 없으면 진행은 불가능함. 독단 행동이었으면 처벌받는 건 물론 방송도 바로 꺼졌겠지. 마지막에 꺼진 건 아이가 생각보다 더 잔인한 손속을 보여서일 가능성이 큼.

마침 오늘 점심쯤 길드장님이 웬 꼬마애를 데리고 본사에 들어왔다고 함.

인챈트 능력에 신체 강화 능력. 사람을 죽이는 단호한 손속과 뛰어난 전투 능력과 판단력. 여러모로 어렸을 때부터 살육 병기로 길러진 느낌이었음.

이번 방송은 이 꼬마의 데뷔를 위해 민심을 살펴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 분석추

– 이게 맞으면 난 반대임. 사람 목숨을 쉽게 아는 녀석이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됨.

– ㅇㅇ일단 저 잔인한 성정이 빌런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똑같다는 게 문제임.

– 이번에는 길드장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

소녀는 명백히 악인을 향해야만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건 진실을 아는 길드장과 양조야 강사만이 아는 사실로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확인을 위해 얼굴을 가렸던 게 다행이었다.

소녀의 정체가 밝혀진 채 다른 사람들과 마주쳤다면 모두 껄끄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테니.

어쩌면 극단적으로 소녀를 몰아붙이거나, 더 강해지기 전에 죽이겠다며 덤벼드는 빌런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

“음… 그럼 어쩌실 생각이세요?”

그에 길드장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아이의 능력이 밝혀지는 건 필연적이다. 이대로 가면 빌런은 물론 교단 놈들과도 부딪히게 되겠지.”

교단의 세뇌를 고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태 세뇌당한 이들 대부분은 자살이나 타살 등, 결국 죽어서야 자유가 될 수 있었으니.

“청성 길드 소속의 아이와 청성 길드에 통제받는 아이. 이 정도 차이만 둬도 사람들은 알아서 잘 오해해 줄 거다.”

“아…!”

이렇게 된 이상 소녀의 신분을 두 개로 나누기로 했다.

잔혹한 성정을 가졌지만, 능력이 뛰어나기에 길드에 통제받는 빌런 사냥꾼인 소녀.

반대로 부모를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능력을 인정받아 길드의 일원이 된 꿈 많은 소녀.

그 차이는 가면이었다.

“마침 이럴 때 쓸만한 아이템도 하나 있지.”

『페르소나』

게이트 보스를 쓰러뜨리고 얻은 것으로, 쓸데가 없어 창고 자리만 차지하던 아이템이었다.

착용자의 숨겨진 내면에 따라 외형은 물론 분위기마저 바꿔주는 것으로 정체를 숨기기엔 최적이었다.

“음….”

상아로 만든 듯 새하얗고 매끈한 표면.

천장 조명을 투과하는 반달 모양의 눈과 입의 구멍.

솔직히 귀여운 소녀가 쓰는 물건이라 하기에는 꽤 소름 끼치게 생긴 모습이었다.

소녀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저 귀여운 얼굴을 가리는 건 죄악이야!

양조야 강사가 더듬더듬 가면을 씌우지 않을 이유를 읊었다.

“그. 가면을 씌워도 체구나 행동은 달라지지 않잖아요?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챌 텐데. 그럼 굳이 불편하게 가면을 씌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이 역시 길드장이 의도한 부분이었다.

아, 소녀의 귀여운 얼굴 어쩌구하는 내용이 아니라 이렇게 허술한 점이 의도한 부분이었다.

“굳이 정체를 캐려는 놈들이 있다면 좋은 의도는 아닐 거다. 우린 그로써 불온한 의도로 아이의 정체를 캐려는 놈들을 일차적으로 거를 수 있지.”

이 정도만 해도 허접한 놈들은 어련히 걸러질 거다.

청성의 힘이, 길드장과 같은 S급 각성자의 힘이 있으니.

“마찬가지로 아이의 신변을 원하는 교단 같은 놈들. 그런 놈들은 굳이 사랑받는 청성 길드의 소녀를 건드릴 필요가 없어지지. 시민들이 껄끄러워하는 페르소나가 됐을 때 처리하면 더 쉬울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소녀를 어떻게 설득해서 이 페르소나 가면을 씌우냐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Don’t Die, It’s Not Your Body

Don’t Die, It’s Not Your Body

죽지 마, 네 몸이 아니야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you deserve to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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