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를 모두 끝마치고 다시금 원래 자리로 복귀했을 때.
이전과 달리 감탄과 놀라움 가득한 시선들이 나를 맞이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요. 지금 주변 사람들 눈빛 안 보이세요? 당신, 이거 하나로 몸값 엄청 올린 거라고요.”
가장 먼저 내게 말을 걸었던 리제는 아예 대놓고 칭송에 가까운 칭찬을 내뱉고 있었다. 퍽 멋쩍은 일이었지만 내가 누구인지 오해시키는 일에는 성공한 듯 했다.
나를 실력있는 피아니스트쯤으로 오해한 리제는 호기심 가득 담긴 말투로 물었다.
“그나저나 라에몬 씨. 뭐 하는 사람이신가요? 제가 예술계쪽으로 나름 발이 넓은 편인데, 라에몬 씨 같은 기재가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일반인입니다. 레갈리아 회장님께 후원을 좀 받는.”
“……일반인이라고요?”
“예.”
그리 말하자 리제는 그게 말이나 되느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나는 당당했다. 그녀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일반인이라면 일반인이지.
* * *
“─그럼 다음 번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기업 회장들과의 담화를 끝낸 레갈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곧장 몸을 돌렸다. 사고를 치고서 태연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는 과학자에게 다가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피아노 연주를 끝낸 즉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엄연히 이블스 기업의 회장이요 회장으로서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여럿 있었으니까. 이 파티도 업무의 연장이었다.
후계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장소로 다가가자, 그녀를 본 이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스리슬쩍 물러섰다. 그들에게 있어 레갈리아는 가까우면서도 머나먼 존재다. 동년배인 그들은 아직 알이었지만 이쪽은 스스로 움직이는 거인이라는 점에서.
“그 반도체는 10년 이내로 완성하는 게 불가능할 거 같은데요?”
“흠- 그럼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을 거 같은가?”
“글쎄요. 저라면 대충─.”
과학자는 태평하게 후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실이 레갈리아의 심기를 거슬렀다. 자신은 본인 때문에 다른 기업가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데, 본인은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고 있단 말인가?
레갈리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과학자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접근을 깨달은 과학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네.”
“아, 제 후원자님께서 오셨군요. 회장님. 오늘의 공연은 어떠셨습니까?”
태연하게 연기를 시작한 과학자를 보며 레갈리아는 눈빛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언제부터 그런 재주가 있었나?
─왜 말도 안 하고 멋대로 나댄 건가?
─사고 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과학자는 그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 한 건지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다.
“회장님께서도 오늘 공연이 만족스러우셨나보군요? 하기야- 오늘 연주한 게 지금껏 들려드리지 않은 신곡이긴 했습니다.”
“……그래. 놀라긴 했네.”
정말이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대뜸 그런 자리에는 왜 나선단 말인가?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실력이 별로라서 혹평을 받았더라면 어떻게 할 셈이었지? 무어라 변명하려고?
과학자는 그런 일은 전혀 생각하지 못 했는지, 아니면 그런 걸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자신이 넘쳤는지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본인의 실력을 증명했다.
덕택에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그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뿐. 레갈리아에게는 그게 더 골치아팠다.
“돌아가면 다시 한 번 그 연주를 듣고 싶을 정도로.”
속뜻도 알아듣지 못 하는 과학자에게 굳이 이 말을 번역해주자면.
돌아가서 두고 보자는 말이었다.
파티가 끝났다.
모두가 각자의 도시로 돌아가는 가운데, 리제는 차량 안에서 눈을 감고 오늘 밤 들었던 소나타에 대해 떠올렸다.
마치 밤하늘 보름달이 떠오르는 감미로운 음율이 그녀의 귓가에 일렁거린다. 한 번 들었던 연주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기억에 의지하여 콧노래를 불러보지만 어딘가 어설프다. 앨범이 있다면 구해서 듣고 싶거늘 자작곡이라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녀가 오늘 밤 들은 곡은 이제 어디 가서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곡이라는 뜻이었다. 그 연주가를 데려와 연주시키는 게 아니라면야.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지.’
리제는 오늘 만났던 연주가. 그러니까 레갈리아 회장이 데려온 파트너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의 유혹에도 쉬이 넘어오질 않았다. 그녀의 살결만 보고서 그녀에게 모든 걸 바치는 남자가 줄 서 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놀라운 일이요.
하물며 그녀의 유혹이 단순히 그녀가 가진 매력이 아니라 능력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 능력을 회피한 거지?’
지금껏 그녀의 능력을 회피한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밖에 없었다.
그녀의 초능력을 무시할 정도로 강대한 초능력을 지녔거나.
아니면 물건이 서지 않을 정도로 늙은, 성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은 노인이거나.
혹은 남자를 좋아하는 동성애자이거나.
그 경우를 제외하면 그녀의 매혹에서 벗어난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는 같은 여자를 상대로도 통할 정도였으니─ 성인 남성이 그녀의 능력을 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동성애자도 아닌 것 같은 게, 가까이 달라붙었을 때 그가 가슴골로 보냈던 뜨거운 시선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곧바로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그건 수컷 특유의 본능 섞인 눈빛이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도 않던데…….’
단 한 번도 없었던 예외적인 상황.
그녀는 의외의 상황에 호기심을 느꼈다.
‘갖고 싶다.’
도시 하나를 대표하는 대기업의 후계자로서, 지금껏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어온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갖고 싶은 데 손에 들어오지 않는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짝사랑이라는 게, 안달남이라는 게 이런 걸까.
리제는 오늘 들었던 연주곡을 되새김질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 되새김질할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 * *
성명 : 리제Rize
초능력 : 매혹
설명 : 뱀처럼 상대방을 옭아맨다. 한 번 물리면 벗어날 수 없다.
* * *
“─과학자여. 혹시 자네는 목숨이 두 개인가?”
“네?”
“왜 그렇게 나대는 건가 정말-!”
본부로 돌아온 나는 레갈리아에게 잔소리를 들어야만했다. 솔직히 말해서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녀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그냥 얌전히 여의 곁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데! 거기서 연주는 왜 하는가 대체!”
“아니 그야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제 정체를 궁금해하면 안 되니까…….”
“그럼 대충 적당히 유명한 곡이나 칠 것이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연주를 해서는-!”
“유명한 곡인데요…….”
지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곡인데- 그 말을 들은 레갈리아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살기 가득 어린 시선을 느낀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 이 정도도 하면 안 된다 이거지…….
정말이지 이 세계로 와서 가장 골머리 앓은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지구와 이 세계의 간격. 과학도 예술도 아무거나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게 골치가 아프다.
“아무튼 자네. 여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지는 않겠지?”
“글쎄요…… 뭘 모르시는지를 모르니.”
“모두 다 말하게!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운동을 잘 한다거나! 아무튼 남들보다 잘하는 건 모두!”
“그림도 못 그리고 운동도 못 합니다. 맨몸으로 자동차보다 빨리 달리는 녀석들을 어떻게 이깁니까?”
“다른 건? 부디 나중에 사고치지 말고 미리 얘기 좀 해달란 말일세!”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는 레갈리아.
혼나는 와중에 할 말은 아니지만 아이가 투정 부리는 거 같아서 귀여웠다.
그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라도 한 듯, 보스는 순간 위압감을 내뿜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집중하게나. 한 눈 팔 정도로 여유로운가 보지?”
“……넵. 잘못했습니다.”
“하아- 정말이지. 재밌어보인다고 줍는 게 아니었는데…….”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레갈리아는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시계는 어느덧 새나라 어린이가 꿈나라로 돌아갈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전신을 짓누르는 피로감을 억지로 이겨내고 제게 한소리 했던 것이리라.
눈꺼풀을 이겨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걸 어린아이가 해낸다는 게 어찌나 힘든 일인지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부턴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다음 날.
비가 미친듯이 쏟아지는 날.
푹 젖은 아일레가 징징거리며 연구실로 찾아왔다.
“진짜아아…! 과학자 씨…! 무기, 무기 좀 만들어주세요!”
“……대뜸 와서는 그게 무슨 소리야? 왜 푹 젖은 생쥐꼴이고?”
“그게에…!”
아일레가 말하길.
미친듯이 달리는 폭주차 하나가 그녀 근처를 스쳐 지나가며 물웅덩이를 흩뿌렸다고 한다. 물에 젖은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고 마법소녀로 변신해서 복수하려고 했을 땐 이미 시야에서 멀리 사라져버린 뒤였다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물 좀 맞았다고 복수를 하려고 하니…….”
“그치마안…! 화 안 나세요…!? 같은 동료가 물에 맞았는데에…!”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지만, 무기를 만들어서 복수할 정도는 아니지.”
그러나 아일레는 제 손으로 복수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부들거렸다. 그녀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때마다 그녀가 입은 치마요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방울져 떨어졌다.
이대로 있다간 감기에 걸릴까- 한시빨리 샤워실로 보내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돌아온 아일레는 여전히 분노에 절여져 있었다.
옆에서 얌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비라는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거 빌런 같은데?”
“빌런? 이 도시는 빌런이 없지 않나요?”
“다른 도시에서 활동하는 놈이거든.”
모스피드Mospped.
슈퍼카를 타고 미친듯이 내달리는 빌런이라고 한다.
신호요 중앙선 같은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고 그저 달리기만 하는 미친놈이라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무슨 슈퍼카 타고 돌아다니는게 빌런이에요?”
“뒤지게 빨라서 못 잡거든. 걔 초능력이 운전이라는 소리도 있어.”
“어떻게 초능력이 운전…….”
빌런이 된 이유요 지금껏 잡히지 않은 이유까지 황당하지 않은 게 하나 없었지만, 아일레에게는 다른 듯 했다. 자신이 빌런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들은 아일레는 내게 열렬하게 주장했다.
“과, 과학자 씨…! 빌런, 빌런이래요!”
“응. 나도 들었어.”
“일개 빌런한테 능욕…! 이건 악의 조직으로서의 치욕…! 부, 분명 프라이드를 지키라고 하셨잖아요…!”
얼마 전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들고 와서 반격하는 아일레를 보며, 나는 애들 앞에서 입조심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돌아온다. 괜히 옛날 사람들이 입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한 게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일레를 바라보았다.
만일 내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앞으로 내 말을 전부 무시하고 다닐 가능성이 컸다. 아이들은 원래 작고 사소한 거 하나로 크게 삐지는 법이었으니까.
“복수하고 싶다 이거지?”
“네, 네에-!”
“꼭 무기가 아니여도 괜찮지?”
“네, 에?”
“그런 애들을 폭력으로 때려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들은 바로는 그 빌런은 미치광이 속도광.
그런 종류의 놈들은 단순히 폭력으로 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걔네들 영역에서 짓밟아 줘야지.”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보스가 사고치지 말라고 한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뭐, 이 정도는 사고 측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사고는 내가 아니라 아일레가 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