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렇단 말이지?”
“예, 보스.”
Z 시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메가는 제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얼마 전 기업 교류 파티에서 만났던 연주자. 이블스의 레갈리아가 데려온 파트너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각 도시의 대기업 재벌들이 한 번 듣는 것만으로 홀딱 반해버린 기적의 예술가. 달에서 춤추듯 내려온 천재 피아니스트. 라에몬에 대한 정보를.
‘그 녀석이 납치를 한 번 당했고, 이블스가 그걸 되찾기 위해 1억 달러 넘는 돈을 썼다라…….’
이는 수용소에 갇힌 빌런과 그 당시 금액 이체를 실시간으로 확인했던 은행 직원을 통해 사실임을 확인했다. 제아무리 이블스 기업이라고 할 지라도 모든 걸 완벽히 숨길 수는 없었다. 하물며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는 더더욱.
인질을 구하기 위해 1억 달러를 썼다는 건 퍽 놀라운 일이었다. 인질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 지 없을 지 모르는 납치범에게 그만한 돈을 보내준다는 건 대기업 회장으로서도 도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보냈다는 점. 그리고 그 금액이 대기업 회장으로서도 맘대로 융통하기 곤란한 1억 달러나 된다는 점. 아무리 생각해도 일개 예술가 하나에게 쓰기엔 너무나 커다란 돈이라는 점은 한 가지 사실을 암시했다.
바로 라에몬의 정체.
“……그렇군. 그 녀석이 바로-.”
이블스 기업은 최근 말도 안 되는 과학적 성과를 내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사이즈로 어지간한 최신형 컴퓨터보다 뛰어난 연산 능력을 갖춘 회로나 벌써부터 ABC상 수상이 확정되었다는 말을 듣는 반중력 장치가 그것이다.
이전까지의 이블스 기업도 E 시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대기업이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미싱 링크가 이어졌다.
“그 기술의 개발자였어.”
이블스 기업이 꽁꽁 숨겨놓는 과학자.
라에몬의 정체를 파악한 오메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빈틈을 보였구나! 드디어!”
레갈리아가 미쳐 숨기지 못 한 빈틈. 우연과 우연이 겹쳐 드러나게 된 그 틈을 오메가가 운 좋게 파악하고 선점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낸 오메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다른 이들이 이 사실을 알아낼 수 없도록 정보를 차단하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간단하게 증인이었던 빌런 애송이들과 은행 직원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탐정’ 같은 녀석들이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증인 녀석들의 기억을 지우도록.”
“예, 알겠습니다. 보스.”
“그리고 E 시의 시장과 약속을 잡아라. 공식적으로 방문하겠단 약속을.”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일정을 정리한 오메가는 한시라도 빨리 그 남자를 만날 순간을, 그리고 그를 자신의 도시로 데려올 순간을 고대했다.
* * *
“엉? 에이트 아니양-?”
“레비탄 씨?”
“레비땅이라고 불러줭!”
악의 조직 본부 로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악의 조직으로 출근한 레비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부업으로 경찰직을 맡고 있으며 악의 조직쪽으로는 어지간해선 먼저 발을 내딛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부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엥-! 너무행! 마치 내가 볼 일이 없으면 얼굴도 들이밀지 않는 사람인 것마냥…… 휴가를 받았지롱!”
“아- 휴가를 받으셨군요.”
레비탄은 그리 말하며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악의 조직에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며 손으로 V를 그렸다. 그 근면성실한 모습에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대체 어느 누가 휴가날에 성실하게 출근을 한단 말인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그냥 집구석에서 쉬어도 그녀가 휴가를 받았단 사실을 아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을 텐데!
워커홀릭도 이런 워커홀릭이 없었다. 내가 입을 떡 벌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레비탄은 싱글벙글 웃으며 트레이드마크인 토끼귀를 쫑긋거렸다.
“에이트도 같이 놀랭?”
“놀고 싶긴 하지만…… 저랑 가면 재미 없을 걸요? 비라 씨도 호위로 껴야하고.”
“그럼 비라도 같이 놀면 되징!”
레비탄은 본인의 소중한 휴가를 나 같은 거와 노는 데 소비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과연 조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싸 중의 인싸였다.
여자가 저렇게까지 권유하는 데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도 못된 일.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비라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과연 비라도 이 답답한 악의 본부를 벗어나 햇볕을 쬘 수 있단 사실에 반색했다.
“레비땅이랑 같이? 그럼 뭐 문제 없지!”
둘은 곧장 탈의실로 향해서 순식간에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연구실에서 입던 복장 그대로 로비에서 대기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은 내 복장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트. 정말 그러고 놀 생각이양?”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다른 옷 없니?”
레비탄과 비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러 갈 때가 아니었넹.”
“우선 백화점부터 가자.”
“……예?”
백화점이라는 말에 순간 끔찍한 생각이 나를 덮쳤다. 과연 내 예측대로 둘은 나를 데리고 쇼핑몰로 향했으며, 나는 그곳에서 두 사람의 등신대 인형이 되어주어야만했다.
옷 갈아입히기 인형. 두 사람을 상대하며 수십 번 넘게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한 끝에야 그녀들이 만족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 부족행!”
“음…… 그렇지만 이 정도면 딱 합격선이라고 할까.”
둘은 자신의 취향대로 꾸며진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넘어갔다. 지옥 같던 쇼핑이 끝나고, 드디어 자유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럼 이제 집으로…….”
“무슨 소리야? 놀러 나왔으니 이제부터 신나게 놀아야지. 안 그래?”
“아….”
몇 시간 내내 옷만 갈아입던 나는 뒤늦게서야 본부를 나선 이유에 대해 떠올렸다. 오늘은 레비탄의 휴가였고 그녀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본부를 나왔더랬다…….
정말이지 고문에 가까운 시간을 겪느라 본초의 목적마저 까먹을 뻔했다. 한숨을 내쉬며 이제 어디로 갈 거냐고 묻자, 레비탄은 기왕 백화점에 온 김에 자신들의 옷이나 사겠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오면 귀찮으니깡! 온 김에 우리 것도 쇼핑하장!”
“오- 역시 레비땅! 똑똑한데?”
“으아…….”
그렇게 여성들의 쇼핑을 구경하고, 내 눈으로는 대체 뭐가 다른 건지 일절 구분할 수 없는 옷을 비교하며 칭찬하고, 아까 갔었던 가게에 또 다시 들려 내려놓았던 옷을 또 다시 입어보고, 발에 땀띠가 나도록 빨빨 돌아다니고…….
다시금 몇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풀려난 나는 카페 테이블에 축 늘어졌다. 남들이 보면 눈이 돌아갈 만한 미녀 둘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지만 전혀 좋은 시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결코 아니었다.
“레비땅 덕분에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좋네. 얘는 영 연구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니까?”
“그랭? 그럼 내일도 올깡?”
“그럴까?”
“……내일도?”
“응! 내 휴가는 일주일이니깡!”
나는 레비탄의 휴가가 일주일이나 된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일정을 내일도 똑같이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절망했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 아파서 쓰러지고 싶을 지경…… 그러나 그럴 수도 없다. 꾀병이라도 부렸다간 보스가 얼굴에 흉터 가득한 뒷세계 의사를 다시금 불러들일 것이요, 한달음에 달려온 의사는 내가 꾀병을 부린다는 걸 곧바로 눈치챌 것이다.
“하아…….”
“반갑습니다.”
그렇게 한숨만 주구장창 내뱉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모습을 나타낸 사내가 대뜸 제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자신의 원래 자리가 그곳이라는 것마냥 자연스러웠기에, 비라와 레비탄의 반응도 한 수 늦었다.
“─에이트!”
“피행-!”
비라가 나를 끌어안고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레비탄이 눈앞에 앉은 사내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안경 쓴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레비탄의 발차기를 막아낸 뒤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당장 저 정장 입은 사내가 품속에서 권총이라도 꺼내들까 나도 시계를 향해 손을 내뻗는 가운데─ 사내는 품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오메가 인더스트리】
「이사 뮤」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메가 인더스트리?”
레비탄이 그 이름을 보고 흠칫 놀라는 가운데, 나는 뮤가 건넨 명함을 받은 뒤 위장으로 쓰이는 명함을 꺼내들었다.
[만물수리점]
라에몬
T.0X-XXXX-XXXX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에이트 씨.”
“……그게 누구죠?”
“숨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 알고 왔으니까요. 당신이 환상의 연주자 라에몬임과 동시에 이블스 기업의 과학자라는 사실까지.”
뮤는 그리 말하며 제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안경에 반사된 태양빛이 반짝이며 그의 얼굴을 빛나게 만들었다.
태양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뮤는 제게 제안했다.
“─에이트 씨. 저희 오메가 인더스트리로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스카우트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저희는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야! 에이트!”
내 말에 비라가 기겁하며 노려보는 가운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비라를 바라보았다. 내가 뭐 넘어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몸값 정도는 들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원래 자신의 몸값을 평가받는 건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이다.
그리고 물론 나 또한 직장인이었다. 내가 인의를 져버리고 오메가 인더스트리로 훌쩍 떠나버리지는 않겠지만 거기서 제시한 금액을 듣고 보스에게 으스댈 수는 있는 거 아닌가?
내 긍정적인 태도를 확인한 뮤는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금액을 적은 뒤 내게 내밀었다.
화면 속 금액을 확인한 나는 표정을 굳혔다.
뮤는 그 얼굴을 보고 충격받은 것이라 생각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어떠신가요. 지금 받는 대우보다는 훨씬─.”
“─부족한데요.”
“……예?”
놀랍게도.
뮤가 업계 최고의 대우라며 제시한 금액은 현재 내가 받는 금액과는 자릿수 자체가 달랐다.
그것도 몇 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