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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3

23화. 나는 어떤가요?
     
     
     
     
     
     
   * * *
     
   강호는 펼쳐놓은 지도 위에 X자를 그었다.
     
   스윽, 슥.
     
   “세 번째 마을도 아무 일 없었다. 하지만 분명 리치와 죽은 자들이 움직인 방향은 남쪽이야.”
     
   강호가 손가락으로 자신이 예측한 이동 방향을 스윽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던 레이나가 제 의견을 말했다.
     
   “아무 일 없다는 건 다행인 일이니, 계속 이렇게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강호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모든 마을을 다 돌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럴 수도 없고.”
     
   분명 어디선가는 이전에 본 그런 끔찍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을 거라는, 그러니 서둘러 한 곳이라도 그 참상을 막자는 말이었다.
     
   “한 소령. 너무 과몰입 상태 같아. 잠깐 머리 좀 식히게.”
     
   인데르가 조용히 다독이며 말했다.
   강호는 별말 없이 상황판 앞을 벗어나 소파에 몸을 묻었다.
     
   털썩.
     
   ‘정말 막을 방법이 없을까?’
     
   사실 더 솔직한 고민은 다른 것이었다.
   만약 리치와 맞부닥치게 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기억, 감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지만, 또 생각해 보면 안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도 강해졌다. 계속 성장하고 있고.’
     
   강호는 가까이에 있는 두 사람의 능력치를 더듬어 살폈다.
     
   [이름]: 레이나 디아즈.
   […]: ……
   [특성]: 집행자. 레인저.
   [등급]: Lv. 16.
   [강화]: 40%
   [속성]: 투명화. 가속화. 피부 경질화(硬質化/Hardening).
   [전문 기술]: 소멸. 양손 특화.
   [기본 효과]: 오염저항(독 내성)
   [보조 기술]: 원소 추출. 도약. 경계.
   [제한 효과]: 풀스윙.
     
   그녀는 확실히 등급 향상이 빨랐다.
   그리고 강호의 속성 내용에 있는 ‘오염저항(독 내성)’이 기본 효과로 새롭게 생겼다.
     
   ‘도약과 맞바꾼 거겠지.’
     
   최근에는 제한 효과까지 생겼다.
   이름은 상당히 직관적이었지만, 저 능력이 어떻게 생긴 건지는 의문이었다.
     
   [이름]: 리사 아즈벨.
   […]: ……….
   [특성]: 원소 술사.
   [등급]: Lv. 13
   [강화]: 20%
   [속성]: 4대 원소(화염 특화).
   [전문 기술]: 원소 형질 변환.
   [기본효과]: 절연막. 인화점(引火點.Flash Point) 제어.
   [보조 기술]: …….
   [제한 효과]: 화염 보호막.
     
   볼 때마다 강해지는 것 같더니, 등급이 꽤 올랐다.
   그녀도 제한 효과가 새롭게 생겼다.
     
   ‘글자 그대로라면, 꽤 유용한 기술을 얻었군.’
     
   비록 제한이 걸려있는 액티브 속성이지만,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팀 전술에도 큰 도움이 될 거로 기대했다.
   그녀 스스로 방어가 가능해진다면, 사토시를 공격 전술로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강호는 두 사람의 능력을 다 살피고 나서 세 번째 마을 순찰 과정과 결과를 정리했다.
   그리고 경황이 없어 그때까지 공유하지 못했던 재난 매뉴얼 내용을 설명했다.
     
   “인데르 박사님 말씀처럼, 안 될 것도 없는 것 같네요.”
     
   이세계와 이종족, 특히 언데드에 관한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리사가 한 말이었다.
     
   “에일리언도 오고, 프레데터도 올 수 있는데, 언데드라고 오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하지만, 그건 영화고….”
     
   레이나의 앓는 소리에 사토시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지금까지, 영화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어왔잖습니까.”
   “…….”
     
   레이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대화 주제는 다음 날 일정으로 옮겨갔다.
   마치 회의처럼 의견을 나누다 보니 비교적 꼼꼼하게 우선순위를 정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너무 늦었으니, 그만 쉬는 게 좋겠군.”
     
   인데르가 자리를 맺음 했다.
   하지만 강호는 리치를 만난 이후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신경이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다.
     
   “장갑차 외벽에 방어막 두르는 것 잊지 말고. 난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높은 음역대의 외침이 귀를 쨍 하고 울렸다.
     
   “강호씨!”
   “또 혼자서!”
     
   왜 자꾸 위험을 도맡냐는 두 여자의 반발과 다르게 다른 두 남자는 이견이 없어 보였다.
   다만 인데르가 걱정을 내비쳤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어떻겠나? 내일이면 목적지인 평양에 도착해서 할 일이 많을 텐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문득 리사와 레이나의 얼굴이 눈에 확 각인 됐다.
   강호는 단호한 마음과 다르게 멈칫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많이 지쳐 보이는군.’
     
   사지나 다름없는 종 보관소를 살아나와서도 하루도 쉬질 못했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과 마음이 지치다 못해 피폐해질 지경이었다.
     
   ‘내 감정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
     
   강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죠. 이번 마을은 지상에 올라와 살펴본 곳 중에 가장 안전했으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 모두의 표정에 편안함이 깃들었다.
   그걸 본 강호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강요한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다들 날 믿고 따라와 주었으니까.’
     
   잠깐 생각했다.
   정말 오늘은 쉬어도 되는 걸까.
   괜히 입이 앙다물어졌다.
     
   “레이나, 사토시, 그리고 보안요원들과 경비원들.”
     
   갑자기 제 이름이 호명된 사람들이 살짝 긴장했다.
     
   “나와 함께 장갑차 주변에 임시 방책과 철책 설치 좀 도와주지. 그 후에 작은 파티를 했으면 하는데.”
   “……?”
   “……!”
     
   생각지도 못한 강호의 말에 모두 어리둥절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마주 봤다.
   한동안 숨소리조차 나질 않았다.
   그 잠깐의 정적이 강호는 불편했다.
     
   ‘내가 괜한 소릴 했나.’
     
   하지만 그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파티?!”
   “와아아!”
   “오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지하 격납고를 빠져나왔을 때만큼의 환호에 오히려 강호가 놀랐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이 놓치고 있는 걸 깨달았다.
     
   ‘생존했으나 살아있음을 느낄 시간이 없었구나.’
     
     
   신이 나고 흥이 오른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철책과 방책을 세웠다.
   그리고 장갑차를 구조물처럼 활용해 넓은 마당이 만들어졌다.
   위로는 타프와 조명이 걸렸다.
     
   “오, 제법 그럴듯한데?!”
   “멋져요!”
     
   어두운 밤에 카페테라스 같은 멋진 파티 장소가 만들어졌다.
   빠르게 일이 끝나 곧바로 조촐한 파티가 시작됐다.
     
   “와인에 보드카라니!”
   “이 술은 다 어디서 난 거야?”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사토시가 빈 마을 돌 때마다 조금씩 챙겨왔데.”
   “오, 역시. 가장 인간미 넘치는 우리 영웅. 하하.”
     
   멀찌감치에서 제 이름이 들리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사토시는 빙그레 웃으며 탕비실로 갔다.
     
   ‘영웅이라니….’
     
   그는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커다란 상업용 냉장고 깊이 손을 집어넣었다가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으으.
     
   플라스틱 박스가 딸려 나왔고, 박스 안에는 각종 소주와 맥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병을 만져보니 아주 차가웠다.
     
   “소맥, 이거면 영웅 소리 들어도 되겠지. 히힛.”
     
     
   강호는 술을 제법 잘 마셨다.
   어디 가서 취해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기도 했다.
   특히 얼음 위에 위스키를 부어 차갑게 즐기는 온더락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술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분위기 깨지 않도록 적당히 맞춰는 줘야겠지.’
     
   그는 잔 하나를 손에 쥐고 돌아다니며 술 대신 사람들이 마음껏 웃고 떠드는 모습을 즐겼다.
     
   “히잉, 한강호! 강호씨!”
     
   조금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특히 레이나의 애교는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잘생기면 다야?! 나 좀 보라고오~. 나도 꽤 매력적이지 않앙?”
     
   강호의 팔짱을 끼며 딱 들러붙자, 팔꿈치에 닿는 물컹한 느낌과 귓가에 스미는 뜨거운 숨결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술에 취해 눈동자가 반쯤 풀려 게슴츠레 하니, 히스패닉계 미녀 특유의 색한 매력이 물씬 풍겼다.
     
   ‘제복만 안 입었지, 지금까지 내내 완벽한 여군 같던 레이나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술에 약한 것도, 평소 볼 수 없었던 애교도 강호에게는 너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호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레이나를 찾고 난리가 났다.
     
   “어때요? 기분 좋았나요?”
     
   레이나에게서 벗어나니 이번엔 리사였다.
     
   “응? 뭐가?”
   “왜요. 레이나, 매력적이잖아요?”
   “음, 매력적이더군.”
   “그러니까, 좋았냐고요.”
   “…….?”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뭘 따지는 건지 알지 못했지만, 강호는 막연하게나마 자신에 뭔가를 잘못했구나 싶었다.
     
   ‘술 안 마시는 걸 들킨 건가?’
     
   사실 강호는 그보다 다른 걸 더 놀라워하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리사는 꽤 많은 술을 마셨다.
   강호가 돌아다니며 몇 번이고 보고 확인했다.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던 이들은 벌써 녹다운이 되어 뻗어있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내가 대작해도, 장담 못하겠는데.’
     
   주당 리사라니.
   레이나의 애교 주사만큼이나 의외였다.
   평소 차분하고 얌전하고 냉철한 그녀에게 허당미 이상으로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리사의 주량이 압권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도 조금은 취해있었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강호가 레이나와 꼭 붙어 다정하게 대화 나누는 걸 보고 열이 확 올랐던 것이다.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구.’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강호에게 와락 안겼다.
   그러자 팔꿈치가 느꼈던 뭉클함보다 더 엄청난 쿠션감이 강호의 명치 주변을 풍만하게 덮었다.
     
   “나는 어떤가요?”
     
   강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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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나는 어떤가요?

* * *

강호는 펼쳐놓은 지도 위에 X자를 그었다.

스윽, 슥.

“세 번째 마을도 아무 일 없었다. 하지만 분명 리치와 죽은 자들이 움직인 방향은 남쪽이야.”

강호가 손가락으로 자신이 예측한 이동 방향을 스윽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던 레이나가 제 의견을 말했다.

“아무 일 없다는 건 다행인 일이니, 계속 이렇게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강호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모든 마을을 다 돌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럴 수도 없고.”

분명 어디선가는 이전에 본 그런 끔찍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을 거라는, 그러니 서둘러 한 곳이라도 그 참상을 막자는 말이었다.

“한 소령. 너무 과몰입 상태 같아. 잠깐 머리 좀 식히게.”

인데르가 조용히 다독이며 말했다.

강호는 별말 없이 상황판 앞을 벗어나 소파에 몸을 묻었다.

털썩.

‘정말 막을 방법이 없을까?’

사실 더 솔직한 고민은 다른 것이었다.

만약 리치와 맞부닥치게 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기억, 감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지만, 또 생각해 보면 안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도 강해졌다. 계속 성장하고 있고.’

강호는 가까이에 있는 두 사람의 능력치를 더듬어 살폈다.

[이름]: 레이나 디아즈.

[…]: ……

[특성]: 집행자. 레인저.

[등급]: Lv. 16.

[강화]: 40%

[속성]: 투명화. 가속화. 피부 경질화(硬質化/Hardening).

[전문 기술]: 소멸. 양손 특화.

[기본 효과]: 오염저항(독 내성)

[보조 기술]: 원소 추출. 도약. 경계.

[제한 효과]: 풀스윙.

그녀는 확실히 등급 향상이 빨랐다.

그리고 강호의 속성 내용에 있는 ‘오염저항(독 내성)’이 기본 효과로 새롭게 생겼다.

‘도약과 맞바꾼 거겠지.’

최근에는 제한 효과까지 생겼다.

이름은 상당히 직관적이었지만, 저 능력이 어떻게 생긴 건지는 의문이었다.

[이름]: 리사 아즈벨.

[…]: ……….

[특성]: 원소 술사.

[등급]: Lv. 13

[강화]: 20%

[속성]: 4대 원소(화염 특화).

[전문 기술]: 원소 형질 변환.

[기본효과]: 절연막. 인화점(引火點.Flash Point) 제어.

[보조 기술]: …….

[제한 효과]: 화염 보호막.

볼 때마다 강해지는 것 같더니, 등급이 꽤 올랐다.

그녀도 제한 효과가 새롭게 생겼다.

‘글자 그대로라면, 꽤 유용한 기술을 얻었군.’

비록 제한이 걸려있는 액티브 속성이지만,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팀 전술에도 큰 도움이 될 거로 기대했다.

그녀 스스로 방어가 가능해진다면, 사토시를 공격 전술로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강호는 두 사람의 능력을 다 살피고 나서 세 번째 마을 순찰 과정과 결과를 정리했다.

그리고 경황이 없어 그때까지 공유하지 못했던 재난 매뉴얼 내용을 설명했다.

“인데르 박사님 말씀처럼, 안 될 것도 없는 것 같네요.”

이세계와 이종족, 특히 언데드에 관한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리사가 한 말이었다.

“에일리언도 오고, 프레데터도 올 수 있는데, 언데드라고 오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하지만, 그건 영화고….”

레이나의 앓는 소리에 사토시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지금까지, 영화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어왔잖습니까.”

“…….”

레이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대화 주제는 다음 날 일정으로 옮겨갔다.

마치 회의처럼 의견을 나누다 보니 비교적 꼼꼼하게 우선순위를 정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너무 늦었으니, 그만 쉬는 게 좋겠군.”

인데르가 자리를 맺음 했다.

하지만 강호는 리치를 만난 이후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신경이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다.

“장갑차 외벽에 방어막 두르는 것 잊지 말고. 난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높은 음역대의 외침이 귀를 쨍 하고 울렸다.

“강호씨!”

“또 혼자서!”

왜 자꾸 위험을 도맡냐는 두 여자의 반발과 다르게 다른 두 남자는 이견이 없어 보였다.

다만 인데르가 걱정을 내비쳤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어떻겠나? 내일이면 목적지인 평양에 도착해서 할 일이 많을 텐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문득 리사와 레이나의 얼굴이 눈에 확 각인 됐다.

강호는 단호한 마음과 다르게 멈칫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많이 지쳐 보이는군.’

사지나 다름없는 종 보관소를 살아나와서도 하루도 쉬질 못했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과 마음이 지치다 못해 피폐해질 지경이었다.

‘내 감정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

강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죠. 이번 마을은 지상에 올라와 살펴본 곳 중에 가장 안전했으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 모두의 표정에 편안함이 깃들었다.

그걸 본 강호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강요한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다들 날 믿고 따라와 주었으니까.’

잠깐 생각했다.

정말 오늘은 쉬어도 되는 걸까.

괜히 입이 앙다물어졌다.

“레이나, 사토시, 그리고 보안요원들과 경비원들.”

갑자기 제 이름이 호명된 사람들이 살짝 긴장했다.

“나와 함께 장갑차 주변에 임시 방책과 철책 설치 좀 도와주지. 그 후에 작은 파티를 했으면 하는데.”

“……?”

“……!”

생각지도 못한 강호의 말에 모두 어리둥절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마주 봤다.

한동안 숨소리조차 나질 않았다.

그 잠깐의 정적이 강호는 불편했다.

‘내가 괜한 소릴 했나.’

하지만 그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파티?!”

“와아아!”

“오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지하 격납고를 빠져나왔을 때만큼의 환호에 오히려 강호가 놀랐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이 놓치고 있는 걸 깨달았다.

‘생존했으나 살아있음을 느낄 시간이 없었구나.’

신이 나고 흥이 오른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철책과 방책을 세웠다.

그리고 장갑차를 구조물처럼 활용해 넓은 마당이 만들어졌다.

위로는 타프와 조명이 걸렸다.

“오, 제법 그럴듯한데?!”

“멋져요!”

어두운 밤에 카페테라스 같은 멋진 파티 장소가 만들어졌다.

빠르게 일이 끝나 곧바로 조촐한 파티가 시작됐다.

“와인에 보드카라니!”

“이 술은 다 어디서 난 거야?”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사토시가 빈 마을 돌 때마다 조금씩 챙겨왔데.”

“오, 역시. 가장 인간미 넘치는 우리 영웅. 하하.”

멀찌감치에서 제 이름이 들리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사토시는 빙그레 웃으며 탕비실로 갔다.

‘영웅이라니….’

그는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커다란 상업용 냉장고 깊이 손을 집어넣었다가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으으.

플라스틱 박스가 딸려 나왔고, 박스 안에는 각종 소주와 맥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병을 만져보니 아주 차가웠다.

“소맥, 이거면 영웅 소리 들어도 되겠지. 히힛.”

강호는 술을 제법 잘 마셨다.

어디 가서 취해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기도 했다.

특히 얼음 위에 위스키를 부어 차갑게 즐기는 온더락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술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분위기 깨지 않도록 적당히 맞춰는 줘야겠지.’

그는 잔 하나를 손에 쥐고 돌아다니며 술 대신 사람들이 마음껏 웃고 떠드는 모습을 즐겼다.

“히잉, 한강호! 강호씨!”

조금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특히 레이나의 애교는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잘생기면 다야?! 나 좀 보라고오~. 나도 꽤 매력적이지 않앙?”

강호의 팔짱을 끼며 딱 들러붙자, 팔꿈치에 닿는 물컹한 느낌과 귓가에 스미는 뜨거운 숨결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술에 취해 눈동자가 반쯤 풀려 게슴츠레 하니, 히스패닉계 미녀 특유의 색한 매력이 물씬 풍겼다.

‘제복만 안 입었지, 지금까지 내내 완벽한 여군 같던 레이나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술에 약한 것도, 평소 볼 수 없었던 애교도 강호에게는 너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호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레이나를 찾고 난리가 났다.

“어때요? 기분 좋았나요?”

레이나에게서 벗어나니 이번엔 리사였다.

“응? 뭐가?”

“왜요. 레이나, 매력적이잖아요?”

“음, 매력적이더군.”

“그러니까, 좋았냐고요.”

“…….?”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뭘 따지는 건지 알지 못했지만, 강호는 막연하게나마 자신에 뭔가를 잘못했구나 싶었다.

‘술 안 마시는 걸 들킨 건가?’

사실 강호는 그보다 다른 걸 더 놀라워하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리사는 꽤 많은 술을 마셨다.

강호가 돌아다니며 몇 번이고 보고 확인했다.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던 이들은 벌써 녹다운이 되어 뻗어있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내가 대작해도, 장담 못하겠는데.’

주당 리사라니.

레이나의 애교 주사만큼이나 의외였다.

평소 차분하고 얌전하고 냉철한 그녀에게 허당미 이상으로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리사의 주량이 압권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도 조금은 취해있었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강호가 레이나와 꼭 붙어 다정하게 대화 나누는 걸 보고 열이 확 올랐던 것이다.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구.’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강호에게 와락 안겼다.

그러자 팔꿈치가 느꼈던 뭉클함보다 더 엄청난 쿠션감이 강호의 명치 주변을 풍만하게 덮었다.

“나는 어떤가요?”

강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꿀꺽.


           


I Memorized the Disaster Manual

I Memorized the Disaster Manual

Status: Ongoing
When a disaster strikes, I know what to do. Only I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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