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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27화. 나를 섬겨라.
     
     
     
     
     
     
     
     
   강호와 리사, 레이나, 그리고 사토시와 인데르는 이정훈의 안내를 받아 뉴캐슬의 상층부로 올라갔다.
     
   “그런데, 왜 뉴캐슬이죠?”
     
   이동 중 평양의 상황 전반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듣던 중, 리사가 성의 이름에 관해 물었다.
     
   “그, 성주님께서 EPL의 뉴캐슬 팀의 찐 팬이라….”
   “정말요?!”
     
   대답을 하면서도 민망해하는 이정훈에게 리사는 놀라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정말 단순하고 직관적인 이름이었네요.”
     
   레이나도 동의했다.
     
   “그러게. 난 또 무슨 새로운 시대를 연다느니, 신시대의 중심이 되겠다느니, 그런 포부 같은 게 있는 이름인 줄 알았더니, 정말 축구팀 이름이야?”
     
   강호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며 따라 걸었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성은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며 기능성 등, 허투루 대충 쌓아 만든 게 아니었다.
     
   ‘전문가의 솜씨 같은데. 이런 건축물을 한 달 만에?’
     
   의문 외에 이정훈의 다른 설명들도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차원문이 열리던 날, 거짓말처럼 시간이 멈췄다고 했다.’
   
   딱 1분.
   물속에 빠진 기분 같았고, 무중력 상태인 우주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폭발이나 지진, 혹은 지하철이나 댐 붕괴 같은 우려했던 재난은 없었다.
   단, 발전소 시설이나 방송 시스템 등은 전부 멈춰 섰다.
     
   설명이 한창 이어질 때, 인데르가 작게 호응했다.
     
   “차원 균열 현상이네. 그건 다른 쪽 차원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강호도 궁금한 걸 물었다.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 수가 줄어든 건 아닙니다.”
     
   손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티도 나지 않고 조금씩 줄었다는 것이다.
     
   “나라가 이렇게까지 됐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레이나의 혼잣말에 이정훈이 대꾸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무 일 없었던 건 아닙니다. 차원문에서 발산하는 에너지가 도시를 황폐화시킨 거니까요.”
     
   물론 그건 차원문이 열린 서울과 그 일대에만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그 외 지역은 화선지에 먹물 스며들 듯 스르륵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당연히 서울의 직접적인 피해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차원문을 통해 그 너머의 존재들이 지구로 들어왔다.
     
   “발표가 있었어요.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그러니 안심하라고.”
   “누가 왜 그런 계약을?”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자신을 ‘신의 대리인’이라고만 말했어요.”
     
   신의 대리인.
     
   그게 단체인지 개인인지, 어떻게 인류의 대표성을 갖고 이세계와 계약을 맺은 건지,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그나마 다행인 건, 이종족이 살생하지 않는다는 계약 조건을 준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잘못됐음을 절감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계약의 허술함이 곧 드러났다.
   바로 살생의 주체가 그들만 아니면 되는 것이었다.
     
   “살생 주체라니? 그러면 그들 말고 누가 사람을 죽였단 건가?”
     
   그 질문에 이정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다시피 지구에서 하루에 질병, 혹은 사고로 죽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차원문을 넘어온 존재들은 그런 사망자들을 부활시켜서 자신들의 수족으로 삼았다.
   바로 그들이 사람들을 공격했고, 그건 약정 위반이 아니었다.
     
   “약정이 강제력이 있기는 한 건가?”
   “물론 그렇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 차원문은 조건 없이 곧장 파괴된다고 했다.
   차원문이 파괴돼 닫혀버리면 이쪽으로 건너와 있는 존재들도 동시에 자동 소멸한다.
     
   “그럼, 저쪽으로 넘어간 인간은요? 아무 잘못도 없이 같이 죽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양방향 차원문이 일방으로 전환된다고 들은 것 같아요.”
     
   그냥 도로 같은 개념이었다.
   1차선이지만 서로 교행할 수 있는 곳과, 일방통행으로 정해지는 차이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게,”
     
   조약 자체가 파괴됐기 때문에 이세계에서는 더 이상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굳이 그 위험한 곳엘 목숨 걸고 들어갈 이유가 없게 된다.
     
   “그러면, 지금 상황은 약정 위반이 아니고, 반대로 인간은 그 약정 때문에 저들을 공격도 못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레이나가 기가 차다는 듯 묻자 어쩔 수 있겠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인간의 수는 줄고, 언데드는 늘고….”
     
   그 말을 들은 누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하지만, 종 보관소에서는, 그 흑염체 같던 다크앱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는데, 그건 해당 되는 게 아닌가?”
     
   또다시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말에, 이정훈이 화들짝 놀랐다.
     
   “흐, 흑염체요? 그게 종 보관소에도?”
   “어? 알아요?”
   “네. 물리적인 파괴가 없었음에도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게 다 그것 때문이었어요!”
     
   차원문이 열리자마자 그게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군, 경, 청와대, 방송국 등 전쟁 나면 가장 먼저 타격 목표가 되는 곳들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그러면 그게 살생 아닌가요?!”
     
   감정이 잔뜩 실린 리사의 반문에 이정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 세계에서 온 존재가 아니래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는 중입니다.”
   “아니 뭐 그런….”
     
   강호는 주로 경청에 집중했다.
   들으며 여러 가능성을 빠르게 조합해 보고는 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됐는지 내내 궁금했기에, 일부 의문이 풀리는 것이 흥미롭기까지 했다.
     
   그런 대화가 한창일 때 이정훈이 걸음을 멈췄다.
     
   “여깁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벨을 누르니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묵직하게 열렸다.
     
   기이이이.
   그그그그그.
     
   잠시 후, 들어간 이정훈이 아닌 다른 사내가 일행을 안내했다.
   안에는 돔구장 크기의 공간이었다.
     
   “와. 이게 실내라고?”
     
   그리고 방 저 끝 단상 위에 정말 중세 시대에나 볼 법한 화려한 용좌가 있었고, 그곳에 검은 레깅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강호는 더욱 유심히 그녀를 살펴봤다.
     
   ‘박시연.’
     
   그녀 뒤로 많은 남자들이 일렬로 서서 그녀를 보위하고 있었는데, 면면이 너무 잘생기고 키도 크고 훤칠했다.
   꼭 한강호 열 명을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경호원들인가?”
     
   레이나의 혼잣말과 동시에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음성처럼 소리가 쩌렁 울렸다.
     
   “어서 오너라. 내 성에 온 걸 환영한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가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그 생경한 감각 때문에 그녀의 독특한 말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 가까워져 보니 상당히 요염한 인상의 여자였다.
     
   쌍꺼풀 없는 눈이 길게 찢어져 있었고, 속눈썹은 짧고 짙었다.
   그 눈매나 눈빛이 사람의 마음을 꽉 움켜쥐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또한 지점토로 살짝 만져 놓은 것 같은 코와 얇고 붉은 입술도 색한 인상을 줬다.
     
   “꼭 일본 춘화에 나오는 여자 같습니다.”
     
   사토시의 중얼거림에 강호는 그만 인정해 버렸다.
     
   ‘그러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기생 같은 외모.’
     
   어쨌든, 지금 함께 있는 서구식 미인과는 다른 한국식, 혹은 동양형 미인이었다.
   다만 뒤따르는 의문은,
   지금까지 듣던 것과는 너무 다른 그녀의 이미지에 일행은 조금 당혹감을 느꼈다.
     
   ‘너무 한쪽 말만 듣고 악마화한 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못생긴 건 죄악이야. 반대로, 아름다운 것은 선이다.”
     
   갑작스러운 말 뒤로,
     
   “너. 맘에 든다. 내 시중을 들어라.”
     
   강호를 콕 찍어 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여자들도 예쁘니까 이곳에서 지낼 자격이 있다. 단, 노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후루룩 내뱉고는 계속해서 귀를 의심케 하는 말들을 이어갔다.
     
   “일단, 타고 온 장갑차는 내게 상납하는 진상품으로 받아두겠다.”
     
   정말로 자신을 성주, 여왕,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이에요. 굳이 따져 나누자면.”
     
   강호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곁에 있던 리사가 여자의 진단명을 말했다.
   사토시가 중얼거렸다.
     
   “그냥, 또라이군요?”
     
   듣고 있던 주변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단상 위로 올라가 있던 이정후가 여자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곧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자세히 보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
     
   마른 몸맨데, 그녀의 가슴골이 훅 들어간 모습이 또렷했다.
     
   “마른 거유!”
     
   옆에서 들려온 사토시의 감탄에 강호는 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랐다.
     
   마침 여자가 강호를 지목해 말했다.
     
   “거기, 키 크고 몸 좋고 잘생긴 애. 한강호라고? 각성자라고 하던데.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느냐?”
   “…….”
     
   강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능력을 보여줄 필요는 느꼈다.
     
   파츠츠.
     
   특정 범위 한정이 아닌, 몸 전체에 번개가 튀어 올랐다.
   확실히 처음보다 그 위력이 강력해지기도 했고, 힘의 컨트롤이 가능해져 꽤 멋진 장면을 연출해 보여줄 수 있었다.
     
   오오.
   와.
     
   저들 측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박시연은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다.
     
   “꽤 아름다운 효과구나. 마음에 들어. 너는 나를 섬겨라.”
   “…….”
     
   강호의 대답이 없는 것이 무시라고 느꼈는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강조했다.
     
   “이곳에서 내 명령은 절대적이다. 복종하지 않으면 추방이다.”
     
   분위기가 훅 달라졌다.
   굉장한 압박감과 함께 그녀의 몸 주변으로 자주색 연무가 피어올랐다.
     
   “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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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나를 섬겨라.

강호와 리사, 레이나, 그리고 사토시와 인데르는 이정훈의 안내를 받아 뉴캐슬의 상층부로 올라갔다.

“그런데, 왜 뉴캐슬이죠?”

이동 중 평양의 상황 전반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듣던 중, 리사가 성의 이름에 관해 물었다.

“그, 성주님께서 EPL의 뉴캐슬 팀의 찐 팬이라….”

“정말요?!”

대답을 하면서도 민망해하는 이정훈에게 리사는 놀라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정말 단순하고 직관적인 이름이었네요.”

레이나도 동의했다.

“그러게. 난 또 무슨 새로운 시대를 연다느니, 신시대의 중심이 되겠다느니, 그런 포부 같은 게 있는 이름인 줄 알았더니, 정말 축구팀 이름이야?”

강호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며 따라 걸었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성은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며 기능성 등, 허투루 대충 쌓아 만든 게 아니었다.

‘전문가의 솜씨 같은데. 이런 건축물을 한 달 만에?’

의문 외에 이정훈의 다른 설명들도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차원문이 열리던 날, 거짓말처럼 시간이 멈췄다고 했다.’

딱 1분.

물속에 빠진 기분 같았고, 무중력 상태인 우주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폭발이나 지진, 혹은 지하철이나 댐 붕괴 같은 우려했던 재난은 없었다.

단, 발전소 시설이나 방송 시스템 등은 전부 멈춰 섰다.

설명이 한창 이어질 때, 인데르가 작게 호응했다.

“차원 균열 현상이네. 그건 다른 쪽 차원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강호도 궁금한 걸 물었다.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 수가 줄어든 건 아닙니다.”

손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티도 나지 않고 조금씩 줄었다는 것이다.

“나라가 이렇게까지 됐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레이나의 혼잣말에 이정훈이 대꾸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무 일 없었던 건 아닙니다. 차원문에서 발산하는 에너지가 도시를 황폐화시킨 거니까요.”

물론 그건 차원문이 열린 서울과 그 일대에만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그 외 지역은 화선지에 먹물 스며들 듯 스르륵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당연히 서울의 직접적인 피해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차원문을 통해 그 너머의 존재들이 지구로 들어왔다.

“발표가 있었어요.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그러니 안심하라고.”

“누가 왜 그런 계약을?”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자신을 ‘신의 대리인’이라고만 말했어요.”

신의 대리인.

그게 단체인지 개인인지, 어떻게 인류의 대표성을 갖고 이세계와 계약을 맺은 건지,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그나마 다행인 건, 이종족이 살생하지 않는다는 계약 조건을 준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잘못됐음을 절감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계약의 허술함이 곧 드러났다.

바로 살생의 주체가 그들만 아니면 되는 것이었다.

“살생 주체라니? 그러면 그들 말고 누가 사람을 죽였단 건가?”

그 질문에 이정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다시피 지구에서 하루에 질병, 혹은 사고로 죽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차원문을 넘어온 존재들은 그런 사망자들을 부활시켜서 자신들의 수족으로 삼았다.

바로 그들이 사람들을 공격했고, 그건 약정 위반이 아니었다.

“약정이 강제력이 있기는 한 건가?”

“물론 그렇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 차원문은 조건 없이 곧장 파괴된다고 했다.

차원문이 파괴돼 닫혀버리면 이쪽으로 건너와 있는 존재들도 동시에 자동 소멸한다.

“그럼, 저쪽으로 넘어간 인간은요? 아무 잘못도 없이 같이 죽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양방향 차원문이 일방으로 전환된다고 들은 것 같아요.”

그냥 도로 같은 개념이었다.

1차선이지만 서로 교행할 수 있는 곳과, 일방통행으로 정해지는 차이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게,”

조약 자체가 파괴됐기 때문에 이세계에서는 더 이상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굳이 그 위험한 곳엘 목숨 걸고 들어갈 이유가 없게 된다.

“그러면, 지금 상황은 약정 위반이 아니고, 반대로 인간은 그 약정 때문에 저들을 공격도 못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레이나가 기가 차다는 듯 묻자 어쩔 수 있겠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인간의 수는 줄고, 언데드는 늘고….”

그 말을 들은 누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하지만, 종 보관소에서는, 그 흑염체 같던 다크앱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는데, 그건 해당 되는 게 아닌가?”

또다시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말에, 이정훈이 화들짝 놀랐다.

“흐, 흑염체요? 그게 종 보관소에도?”

“어? 알아요?”

“네. 물리적인 파괴가 없었음에도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게 다 그것 때문이었어요!”

차원문이 열리자마자 그게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군, 경, 청와대, 방송국 등 전쟁 나면 가장 먼저 타격 목표가 되는 곳들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그러면 그게 살생 아닌가요?!”

감정이 잔뜩 실린 리사의 반문에 이정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 세계에서 온 존재가 아니래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는 중입니다.”

“아니 뭐 그런….”

강호는 주로 경청에 집중했다.

들으며 여러 가능성을 빠르게 조합해 보고는 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됐는지 내내 궁금했기에, 일부 의문이 풀리는 것이 흥미롭기까지 했다.

그런 대화가 한창일 때 이정훈이 걸음을 멈췄다.

“여깁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벨을 누르니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묵직하게 열렸다.

기이이이.

그그그그그.

잠시 후, 들어간 이정훈이 아닌 다른 사내가 일행을 안내했다.

안에는 돔구장 크기의 공간이었다.

“와. 이게 실내라고?”

그리고 방 저 끝 단상 위에 정말 중세 시대에나 볼 법한 화려한 용좌가 있었고, 그곳에 검은 레깅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강호는 더욱 유심히 그녀를 살펴봤다.

‘박시연.’

그녀 뒤로 많은 남자들이 일렬로 서서 그녀를 보위하고 있었는데, 면면이 너무 잘생기고 키도 크고 훤칠했다.

꼭 한강호 열 명을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경호원들인가?”

레이나의 혼잣말과 동시에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음성처럼 소리가 쩌렁 울렸다.

“어서 오너라. 내 성에 온 걸 환영한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가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그 생경한 감각 때문에 그녀의 독특한 말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 가까워져 보니 상당히 요염한 인상의 여자였다.

쌍꺼풀 없는 눈이 길게 찢어져 있었고, 속눈썹은 짧고 짙었다.

그 눈매나 눈빛이 사람의 마음을 꽉 움켜쥐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또한 지점토로 살짝 만져 놓은 것 같은 코와 얇고 붉은 입술도 색한 인상을 줬다.

“꼭 일본 춘화에 나오는 여자 같습니다.”

사토시의 중얼거림에 강호는 그만 인정해 버렸다.

‘그러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기생 같은 외모.’

어쨌든, 지금 함께 있는 서구식 미인과는 다른 한국식, 혹은 동양형 미인이었다.

다만 뒤따르는 의문은,

지금까지 듣던 것과는 너무 다른 그녀의 이미지에 일행은 조금 당혹감을 느꼈다.

‘너무 한쪽 말만 듣고 악마화한 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못생긴 건 죄악이야. 반대로, 아름다운 것은 선이다.”

갑작스러운 말 뒤로,

“너. 맘에 든다. 내 시중을 들어라.”

강호를 콕 찍어 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여자들도 예쁘니까 이곳에서 지낼 자격이 있다. 단, 노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후루룩 내뱉고는 계속해서 귀를 의심케 하는 말들을 이어갔다.

“일단, 타고 온 장갑차는 내게 상납하는 진상품으로 받아두겠다.”

정말로 자신을 성주, 여왕,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이에요. 굳이 따져 나누자면.”

강호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곁에 있던 리사가 여자의 진단명을 말했다.

사토시가 중얼거렸다.

“그냥, 또라이군요?”

듣고 있던 주변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단상 위로 올라가 있던 이정후가 여자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곧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자세히 보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

마른 몸맨데, 그녀의 가슴골이 훅 들어간 모습이 또렷했다.

“마른 거유!”

옆에서 들려온 사토시의 감탄에 강호는 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랐다.

마침 여자가 강호를 지목해 말했다.

“거기, 키 크고 몸 좋고 잘생긴 애. 한강호라고? 각성자라고 하던데.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느냐?”

“…….”

강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능력을 보여줄 필요는 느꼈다.

파츠츠.

특정 범위 한정이 아닌, 몸 전체에 번개가 튀어 올랐다.

확실히 처음보다 그 위력이 강력해지기도 했고, 힘의 컨트롤이 가능해져 꽤 멋진 장면을 연출해 보여줄 수 있었다.

오오.

와.

저들 측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박시연은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다.

“꽤 아름다운 효과구나. 마음에 들어. 너는 나를 섬겨라.”

“…….”

강호의 대답이 없는 것이 무시라고 느꼈는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강조했다.

“이곳에서 내 명령은 절대적이다. 복종하지 않으면 추방이다.”

분위기가 훅 달라졌다.

굉장한 압박감과 함께 그녀의 몸 주변으로 자주색 연무가 피어올랐다.

“읏!”


           


I Memorized the Disaster Man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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