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

커버접기

게임이 얼마나 많은 콘텐츠를 제공하든, 언젠가는 전부 고갈되기 마련이다.

슈퍼에고 온라인. 그 이름에 걸맞게 자아를 충족할 온갖 모험으로 가득 찬 자유도 높은 RPG 게임.

나는 이 게임의 속칭 고인물 유저로, 한창 콘텐츠 부족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적어도 5년은 바라보고 내놓은 걸 내가 2년 만에 싹싹 긁어먹은 거지만, 애초에 구조상 경쟁을 부추긴 걸 어쩌겠는가. 이쪽은 그저 개발자의 의도대로 열심히 게임을 즐겼을 뿐이다.

이처럼 즐길 거리에 굶주린, 아예 색다른 무언가를 찾아본다는 선택지를 잊은 악귀들의 말로는 대부분 비슷하다. 특히 유즈맵을 비롯한 마땅한 대체재가 없는 경우엔.

[튜토리얼 존에 입장합니다.]

기행을 통한 자급자족.

컷씬의 메커니즘을 파악해서 NPC와의 난데없는 엽기 사진 촬영을 겸하고, 원래라면 피해 다녀야 맞을 귀신 누나를 농락하며 지나가는 족족 엉덩이를 때려주는 등.

목마른 놈이 직접 우물을 파는 거다. 지금, 튜토리얼 몹한테 죽어보려는 나처럼.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허수아비. 레벨 1. 머리고 몸통이고 지푸라기로 범벅에, 정수리 한가운데에 작은 낫 하나가 박힌.  겉모습에서부터 게임 내 최약체의 위엄을 풍기는 몬스터.

튜토리얼이 끝난 이후에는 마주칠 일도 없고, 뉴비 유입도 슬슬 줄어드는 추세라 사실상 잊혀진 존재지만. 곧 있으면 자그마치 서버 랭킹 1위를 해치울 녀석 되시겠다.

한때는 나름 ‘저항도 못 하고 처맞으며 개 쩌는 신음소리 내는 금발 미인’ 같은 낚시성 게시글의 주역이었는데.

그마저도 길드 건물에 비치된 데미지 측정용 허수아비의 인기에 밀려 금세 묻혀버렸다. 코디도 가능한 애라 의인화 팬아트가 쏟아져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지.

[스킬 ‘일심동체’를 발동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스킬을 건다.

앞서 언급한 길드 내 허수아비가 극딜 뽕 맛을 위한 디버프 뿐만아니라, 어째선지 버프까지 받는다는 점에서 고안한 방법이었다.

[‘허수아비’와 HP를 공유합니다.]

내 캐릭터와 스킬 대상인 허수아비의 HP가 한데 모이고, 다시 반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나뉘었다.

이걸로 얘는 게임에서 가장 체력 높은 튜토리얼 허수아비다.

[스킬 ‘디스펠 리저렉션’을 발동합니다.]

[‘허수아비’가 일시적으로 ‘저주’ 계열 스킬을 반사합니다.]

일명 무지개 반사까지 걸어주는 것으로 조건은 다 갖춰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스킬 하나만 더 걸면.

긴장된 손가락으로 마지막 단축키 버튼을 눌렀다. 뭐 이렇게까지 깊게 몰입하냐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스킬 ‘페인 쉐어링’을 발동합니다.]

[스킬 ‘페인 쉐어링’이 ‘디스펠 리저렉션’에 의해서 반사되었습니다.]

됐다. 자신의 HP를 소모하여 상대에게 동일한 데미지를 주는 스킬, 페인 쉐어링이 허수아비를 통해 시전되었다.

각자의 HP가 똑같은 속도로 줄어든다. 동반 자살을 노리는 건가 싶겠지만, 허수아비의 체력은 기존 수치가 홀수였던 터라 내 캐릭터보다 1이 더 높은 상태.

이대로 간다면 허수아비는 실피를 남기고 버텨내어, 손수 나를 죽인 것으로 판정될 것이었다.

[캐릭터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렇게. 생성 이래 단 한 번도 죽어본 적 없는 마검사 ‘아이’는 최약체 허수아비에 의해 쓰러졌다.

이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념글로 말미암아 수많은 찬사를 받을 것이다.

[히든 업적 달성! ‘최약체 몬스터한테도 지는 허~접♡︎’]

[달성 인원 1명]

“히든 업적? 그럼 이거 설마, 운영진들도 다 간파한 부분이었단 말야?”

빠르게 스샷부터 찍었다.

줄곧 영상을 찍던 와중이었지만, 달성 인원 1명이라는 문구에 따른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업적 달성 인원이라는 거, 서버 통합으로 책정하는 거였지. 아마···?”

그러니까 전 서버 유일, 세계 최초라는 소리였다.

이건 념글이 문제가 아니다. 최소가 실베각이다.

소식을 들은 방송인들이 여러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 보려 하겠고, 잘하면 외국 커뮤니티에도 퍼 날라지겠지.

기본적으로 좆목질과 네임드화가 금기시된 갤에서도 거즘 한 달은 유명인 행세가 가능할 것이다.

[히든 업적 최초 달성 보상이 지급됩니다.]

“오! 최초 달성이라고 보상도 주나 보네.”

뭘 주려나. 아직 게임에는 구현 안 된 전용 탈 것?

성능 구린 기념 모자를 줘도 자랑용으로는 제법 나쁘지 않을 텐데.

[‘슈퍼에고 온라인’에 빙의됩니다.]

여러 기대감을 깨부수고 의미 모를 문장이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문장은, 화면이 아니라 현실의 눈앞에서 출력돼 있었다.

“뭐? 비, 빙의···?”

파앗-

모니터에서 성능상 나올 수가 없는 밝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한 건 이미 늦은 시점. 의자에서 급히 일어나 도망쳐본들, 빛이 방 전체를 장악한 지 오래였다.

“으, 으아악···!!”

문고리를 잡아보기도 전에, 인식할 새도 없이 빛에 의해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의미 없는 비명에 불과했다.

* * *

“어, 으음···”

낯선 천공이다. 방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듯, 뻥 뚫린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간질였다.

차츰 돌아오는 의식에 맞춰 진해지는 풀 내음. 다른 것보다도, 지푸라기들이 주범이지 싶었다.

“웬, 지푸라기가···”

바닥을 받쳐 몸을 일으켜 세우고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짚었다. 만져지는 건, 지푸라기였다.

“어?”

시선을 스치며 떨어져 내리는 그것들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자. 몸 안에서도 동일한 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푸라기다.

“어? 어어···?”

핸드폰은커녕 거울 비스무리한 것도 없었으매. 눈에 밟힌 근처 개울가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짧은 거리를 넘어져서 기고, 구르고. 남들이 봤다면 필시 무언가에 홀린 사람일 거라 추측했으리라.

“크윽···으으.”

가는 내내, 이성으로는 진작 알았다. 정황적 증거가 해답을 내리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몸은, 헝겊과 지푸라기로 이루어진 몸은. 기어코 수면에 얼굴을 비춰보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하였다.

“이, 이건···”

마카로 대충 휘갈긴 듯한, 무슨 원리로 보고 듣는지조차 의문인 눈코입.

나무막대기로 구성한 뼈대.

손을 대신하여 매달린 장갑.

이게,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허수아비잖아···.”

반발 심리로 둘러본 주변은 온통 꽃밭 천지. 슈퍼에고 온라인의 초보자 구역, 시자쿠마우르의 상징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이어서, 깨어났던 위치로 시야를 옮기면. 내 캐릭터가 죽었을 당시 걸쳤던 템들이 마구잡이로 떨어져 있었다.

이쯤 되니 더는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게임 속에 빙의되었다. 나는,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겨우 게임에서 업적 하나 달성했을 뿐인데 대뜸 빙의라니, 이게 말이 되나.

그것도 하필이면 이딴 허수아비한테. 빙의시킬 거면 최소한 사람으로라도 해주던가.

[<미정>] Lv. 1 – 튜토리얼 허수아비

[HP:11]

[MP:5]

[STR:1]

[VIT:1]

혹시나 해서 열어본 스테이터스는 역시나 처참했다. 설정집에서 본 수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없던 다리가 돋아나고, 관절을 움직일 수 있게 변한 거에 감사해야 할 수준.

이래서야 공략법 하나 안 밝혀진 기존과는 완전 딴판의 캐릭터로 제약플레이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게···

‘왜, 말로만 들으면 재밌을 거 같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꼴이 되고도, 골수 게이머 정신은 버릴 수가 없나 보다.

실없는 발상의 전환을 하고 나니 긴장은 다소 풀렸다. 의지가 샘솟았다.

‘그래, 나 이 게임 잘하잖아. 이깟 허수아비래도 문제없어. 힘을 키워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거야.’

설령 방법이 없다고 해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또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이 세계에서라면. 분명 이전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파밍부터 하자.”

곧장 드랍템 지대로 향했다.

견적을 보아하니 다른 건 제하고 딱 장비들만 떨어진 듯하다. 실험을 위해 임시로 낀 것들이라 하나같이 고만고만.

“레벨이 올라도 직업 제한에 막힐 거 생각하면 차라리 이게 낫나? 거래 불가도 달려들 있었으니···.”

이런 와중에도 몰아치는 착용 불가의 향연 속, 유일한 무제약 장비인 검은색 로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체를 숨기기에 용이해 보이는 것이, 현재로선 그림의 떡인 다른 물건들보단 차라리 나았다.

“I···키는 없고, 인벤토리?”

[장비][소비][퀘스트][캐시][기타]

┏                                            ┓

┗                                            ┛

자신을 부르는 의지에 인벤토리 창이 응하였다. 텅텅 빈, 정겹기까지 한 각 기본 50칸짜리 UI.

남은 것들은 전부 여기에 저장했다. 훗날에 상황 봐서 직접 쓰거나 팔거나 해야겠다.

“다음은···”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여태까지의 내 행동을 일종의 튜토리얼 과정으로 인식한 것일까.

끝마침과 동시에 닉네임 설정창이 떠올랐다. 인벤토리도 그렇고, 본래의 시스템은 아마 거의 그대로 작동하는 것이리라.

“아이. 아이로 할게.”

[이름이 설정되었습니다.]

[아이] Lv.1 – 튜토리얼 허수아비

망설임이나 고민은 필요 없었다.

오픈 첫날에 부리나케 튜토리얼부터 끝내고 선점한 두 글자짜리 레어닉. 나를 가상에서나마 최강자로 일컬어지게끔 해준 이름이다.

[시자쿠마우르] – 영혼이 이끌리는 곳 <·현재 위치>

“지역 이름도, 구성도 그대로네. 좋았어.”

부슥-

정수리에 꽂힌 낫을 뽑아 들었다.

[길 안내를 시작합니다.]

향하는 장소는 밀밭.

“그럼, 가볼까.”

허수아비의 방식대로, 강해질 시간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제목부터가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인데 정작 웹소설의 튜토리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롤로그가 없이 1화부터 시작한다는 점이 이제 와서 보니 좀 그렇네요. 뭐어···웹소설 고인물이신 우리 독자님들이시라면 프롤로그는 스킵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다음화 보기


           


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