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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황제를 알현하는 당일 아침. 이번 방문객도 예고 없이 돌연 들이닥쳤다.

“기상해라. 폐하를 만나 뵙기 전 꽃단장이 있을 예정이니, 다들 잠에서 깨도록.”

어제 일정을 듣기는 했다지만. 요즘 황실은 노크 안 하는 게 유행인가.

“다들 잘 잤어?”

하는 의문은 이즈리 기사단장 옆에서 폴짝대는 료나에 의해 잠식되었다.

얼마 안 있어서 레이헴이 헐레벌떡 잡아간 거 보면 우리 만나려고 몰래 나왔나 보다.

료나 황녀의 탄식을 지켜보며, 레이헴과는 가볍게 고개로 인사를 나누었다. 건강한 모습을 직접 보니 마음이 놓인다.

“마리아. 인제 그만 일어나.”

“우으음···마리아 1시간만 더어···.”

그건 아무리 봐도 ‘조금만 더’의 기준을 가볍게 뛰어넘지 않았니.

잠에서 깨라고 번쩍 들었더니만, 그대로 내 머리 위에 아기 새처럼 자리를 잡은 마리아를 마구 흔들었다.

“으. 으. 으. 으. 으. 오. 빠. 마. 리. 아. 깼. 어. 어.”

진작 그럴 것이지.

이제야 눈을 반, 아니 그녀 기준으로 다 뜬 마리아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상황을 인지했다.

“···마리아 이미 예뻐.”

“우리 예쁜 꼬마 아가씨, 폐하를 만나기 위해 더 예뻐질 시간이에요♪︎”

“오, 오빠아. 마리아 팔려 가아···!”

한층 더 귀여워져서 돌아올 마리아에게 멋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걱정 마렴. 제국의 노예 제도는 오빠 손으로 100년 전에 폐지했단다.

“···?”

마리아를 보내고, 잠시 앉아서 쉬려는데.

이즈리 기사단장을 더불어 아직 방에 남은 이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어···기사단장님? 설마 저도 하는 겁니까?”

천으로 이루어진 얼굴을 보이며 가만 놔둬 줄 것을 어필했다.

설마 마카로 눈썹이라든가 그려서 덧댈 건 아닐 거 아냐.

“걱정하지 마라. 자네는 머리만 간단히 다듬을 거니까.”

“머리만요?”

“그래. ‘단장’은 이미 내가 하고 있지 않나.”

“···.”

“···.”

웬만하면 웃어줬을 텐데. 너무 의외의 인물이기도 했고,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이 아니라 대처에 늦어버렸다.

지금 와서 웃어봤자 맥이는 꼴밖에 안 되겠지. 다행히 그녀가 불쾌함을 내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과하지. 내가 워낙 딱딱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 이를 풀어보려 여러 시도를 해보는 중에 실수를 범했다.”

“아뇨, 미안해하실 것까지야···.”

“거기. 폐하와의 알현이 끝나면 부단장에게 단장실로 오라 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농담을 추천해 준 범인은 부단장인가. 상관을 놀려먹을 정도면 충분히 유한 분위기 같은데.

어린 나이에부터 군기가 바짝 들어 고생 꽤나 하는 모양이다.

“잠시 딴 길로 샜군. 더 지체되기 전에 소개하지. 이쪽은 황실의 전문 정원사다.”

“안녕하십니까.”

화제를 갈무리한 이즈리가 새로운 인물을 앞세웠다.

여기서 대뜸 나한테 정원사를 소개해준다라. 설마 싶긴 한데···아니지?

“자네의 머리를 맡아줄 거다.”

“잘못 들었습니다?”

이런 미친. 군인 아니랄까 봐, 지푸라기 다듬는답시고 멀쩡히 일하던 정원사를 데려오네.

당황 한 점 없는 정원사의 기세에 더 놀랐다. 아니 왜 당신은 이게 당연하다는 듯 납득하고 앉은 건데.

‘마리아···살려줘.’

정원용 가위가 짹짹 교차하며 엄습해 왔다. 와중에 소리는 또 참새랑 비슷하네.

이미 팔려 간 마리아가 나를 구원하러 오는 일은 없었다.

* * *

-“지푸라기 손질은 처음이라 많이 어렵군요···.”

어려우면 건드리지나 말던가.

다행히 떨어져 나간 지푸라기는 HP를 회복하면 보충되는 식이라 살았다. 하마터면 이 나이에 머리를 심을 뻔했네.

“그러고 보니 기사단장님. 폐하 앞에선, 당연히 로브를 쓰고 있으면 안 되겠죠···?”

“그래.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자네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은 이번 알현에서 제외됐으니.”

“그렇군요···다행입니다.”

그래도 역시 이런 부분에서는 알아서들 잘한다니까.

“마리아. 마리아는 폐하께 어떤 걸 청할 거야?”

“마리아는 단장 언니 통해서 미리 말해놨어. 뭔지는 비밀.”

“비밀이야? 오빠한테도?”

“응. 비밀.”

마리아가 양손으로 입을 탁 막으며. 고개를 아예 다른 쪽으로 돌려 절대 안 알려줄 것임을 드러냈다.

저번에 옷 사줄 때는 자기 속옷 취향도 귀띔해 줬던 애가. 그새 이즈리랑 말을 놓은 것보다도 의외였다.

대체 뭘 주문했길래.

“설마 오빠 갖다 버리고 새로 하나 장만하려고?”

“그건 절대 아냐!”

마리아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색으로 버럭 소리쳤다.

그녀도 뒤늦게 놀란 것인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마리아가, 소리쳐서 미안해···.”

“···오빠야말로,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해.”

“둘 다 엄숙해라. 여긴 황궁이다.”

우리는 서로 어색해진 채 걸었다. 딱히 심각하게 싸운 건 아니니, 나중에 잘 풀어봐야겠다.

황제에게 뭘 청했나 하는 부분도···원체 사소한 게 아니고서야 결국에는 밝혀질 테고.

“폐하를 알현할 귀빈들을 모셔왔다.”

“넵. 전달하겠습니다!”

어느덧 문만 사이에 두고 황제의 코앞에까지 도달했다.

현실이라면 게임이랑은 느낌이 확연히 다를 줄 알았는데, 그다지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세 걸음쯤 뒤에서 나를 따라오다가 멈춰 서면 그때 충의의 자세를 취하면 된다.”

“네.”

“생각보다 침착하군. 전에도 폐하를 만나 뵌 적이 있나?”

“아뇨, 완전히 처음입니다.”

“···마리아도 처음.”

그 조상이랑 줄창나게 겸상하기는 했다.

황제라는 게 이게, 처음 만나는 거랑 이후 친해지는 거나 좀 어렵지. 나중 가면 그만한 퀘스트 싸개가 없다.

끼이익-

무례한 생각에 경고하듯 문이 활짝 열렸다.

화려한 빛 아래. 기사와 대신들이 옆을 메우고 도열한 길 끝으로, 황제와 황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4기사단장, 사성황로 이즈리 파 체스트. 제국의 지존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는 충의의 자세.

햄버거 대표 브랜드 네 곳과 진행한 콜라보 이벤트 덕에 그닥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게 당연할 사람들 앞에서 대사도 없이 하는 거야 쉽지.

“기사단장 이즈리 파 체스트와 귀빈들은 고개를 들라.”

명에 따라 고개를 들자 이쪽, 그중에서도 내게 집중된 시선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대놓고 둘러볼 수는 없지만 신기함, 거리낌, 혐오 등. 자신을 향하는 시선은 유독 잘 알아채는 법.

익숙한 일이다. 그보다 중요한 용무에 집중하자.

“이즈리. 못 본 새에 가슴이 좀 더 커진 거 같구나. 이제 I는 되나?”

“저번에 폐하께서 직접 재주신 이후로는 아직 새로 측정한 바가 없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수치를 최신화하여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신, 저게 무슨 말이에요. 직접 재줬다니?”

“부인···! 그, 그게···만지진 않았소! 줄자로만 재줬다오!”

‘역시나.’

마리아한테 들은 것도 있고. 진한 금발에, 코와 턱에 수북한 수염. 생긴 게 100년 전 조상과 판박이더니만.

취향까지 완벽히 빼다박았다. 어떻게 마누라한테 잡혀사는 것까지 똑같냐.

“제대로 속옷도 입히고 했소!!”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시나요?”

그렇다 보니 황후 쪽으로 더 눈길이 갔다.

‘엘프잖아?’

백발에 가까운 연한 금발과, 투명하다 싶은 흰 피부. 긴 귀. 분명한 엘프의 특징이었다.

인간이 엘프랑 이어지기는 하늘의 별 따기일 텐데. 이즈리랑 비슷한 체구(가슴 제외)로 보아 누가 적극적으로 

구애했을지는 뻔했다.

“크, 크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지.”

“당신, 나중에 봐요.”

“···우선 기사단장 이즈리에게는 대금화 10개와 훈장을 수여하겠다.”

“폐하의 은혜에 황송하옵니다.”

황제의 능청으로 이야기는 어떻게든 제자리로 회귀할 수 있었다. 황후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는 웃음을 삼켰다. 인원은 대부분 바뀌었을 텐데도, 여기는 여전하구나 싶어서.

“모험가 아이와 마리아 가르마토아에게도 각각 대금화 10개와 훈장을 내리겠다.”

“폐하의 은혜에 황송하옵니다.”

“황송하옵니다.”

“여기에 더해.”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 황제의 무엇이든 주문하세요.

앞서 한화로 치면 개당 약 1억 원에 해당하는 대금화보다도, 이게 진짜였다.

“모험가 아이여. 짐에게 원하는 한 가지를 추가로 말하라. 필리아 제국의 황제, 나 크라임 페 도로리콘이 가능한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선택지를 고르는 게 아니라 무려 내용을 직접 타이핑하게끔 한 게임 내 유일한 이벤트.

장난으로 욕 썼다가 처형당한 놈도 있었다. 리스폰한 이후로도 제도 근처에는 발도 못 붙이게 됐더랬지.

“저는 황궁의 서고를 이용하고 싶습니다.”

“폐하, 안 되옵니다! 마수를 어찌 신성한 황궁의 서고에 들인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탈취당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뜻을 밝히기가 무섭게 주변 대신들이 합심하여 반발의 목소리를 높였다.

제국의 모든 역사, 대륙의 모든 정보가 집대성한 장소. 황궁의 서고.

아니꼬운 것과는 별개로 기겁해서 말리는 게 이해는 간다. 저 중에 한 번도 못 가본 놈도 많겠거니와.

“그만.”

허나 이는 황제의 짧은 한마디에 바로 사그라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국의 일인자. 황권이 강한 대표적인 국가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황제의 권한으로 모험가 아이와 마리아 가르마토아에게 황궁 서고를 이용할 권리를 부여하겠다. 당분간 황실에 머물면서 원하는 만큼 서적을 열람토록 하라.”

““폐하···!!””

‘단순히 한 번 이용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자유롭게 드나들게 해준다고?’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밝히지. 필리아 제국 황실은 아이, 그대의 존재를 인정하노라. 허나 아직은 이를 대대적으로 밝히기에는 이른바. 그대의 명성이 드높아지길 기다리겠다.”

‘···!’

다시 말해 당장에 몬스터의 존재를 대대적으로 감싸주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니.

훗날 내가 이름을 날리게 되고, 그러고 나서 정체가 드러나면 그때 황실에서도 나서 지지해 주겠다는 것.

기대도 안 한 보상을 약속받았다. 역시 황실하고는 일단 친해지고 봐야 한다니까.

‘이름을 날리기도 전에 돌아가는 게 내 바람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알현 이벤트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당신은 이리로 와요.”

“부인, 귀는 놔주시오···! 나 아프오! 부인···!!”

“부단장. 부디 각오하고 있기를 바라지.”

성황리···맞겠지?

황제와 기사단장의 퇴장에 다른 이들도 우르르 제 갈 길을 찾아 나섰다.

몇몇 시선을 좀 받기는 했지만, 황제의 지지 선언을 들은 마당에 별 감흥도 안 들었다.

툭툭-

“응?”

“···오빠. 아까는···”

“마리아. 내일 동화책이라도 읽어줄까?”

“···. 응···!”

내일부터는 서고의 모든 ‘빙의’에 관한 서적을 뒤져보려고 한다.

그래도 이 소녀를 위해 책 몇 권 읽어줄 정도의 여유는 있으리라. 아무렴, 황제도 느긋하게 찾아보라 하지 않았던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러분은 아득히 높은 상사가 개드립을 쳤을 때 타이밍 맞춰 어색하지 않게 웃어줄 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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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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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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