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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100년의 세월이 지난 황궁의 서고. 그사이 더욱 방대해진 양의 문헌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축구장은 비교도 안 될 넓이를, 지나다닐 공간만 남겨두고 모조리 책장으로 채웠다. 그것도 천장이 안 보일 지경의 높이를 층층이.

원래 책이라면 질색을 하고, 웅장함에서 오는 압박감을 느끼지는 못하는 편인데. 내가 이 세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매번 체감하게 된다.

“여러분들이시군요···. 당분간 저희 서고, 를 이용하실···분들이.”

변함없이 입구 코앞에 배치된 데스크에서 한 소녀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곳의 서고관, 세피로트···라고 합니다.”

짐작대로 내가 알던 전임자, 디아 피 위키와는 별개의 인물.

디아가 상큼한 분위기의 소녀였다면, 이쪽은···뭐랄까.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흑발 더벅머리에, 마주치면 그대로 빨아들일 듯한 블랙홀 같은 눈. 작은 얼굴을 반 이상 잡아먹는 동그란 안경까지. 전형적인 음침 미소녀를 여기 앉혀놓은 형색이었다.

게임에 등장했다면 아마 책장 사이에 숨어서 건너편 사람들이 본인을 주제로 대화하는 걸 엿들으며 자위하는 식의 팬아트가 쏟아져 나오지 않았을까.

“저희 서고는 24, 시간 운영하고 있으니···아무 때나 편하게, 오셔서 이용하시면···됩니다.”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가급적 안 왔으면 좋겠다는 기색.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있는 걸 보자면 동질감이 들다 못해 불쌍해서라도 자리를 피해주고 싶어진다.

“혹시 서고의 모든 빙의 관련 서적을 찾아봐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렇다면야 돌아가는 것까진 무리고, 빠르게 용무를 마치게끔 노력할 수밖에.

서고관을 탐색기로 쓰는 건 본래 기피되는 사항이지만, 이편이 서로에게 이롭지 않겠는가.

“네. 잠시만···기다려주세요.”

군말 없이 들어주는 거 보면 확실히 그렇다. 아니면 그냥 선임에 비해서 얘가 덜 깐깐한 걸 수도 있고.

세피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 한 권을 껴안은 채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크리소스···에와도···오노마토페, 야···.”

‘저렇게 늘여 말해도 영창이 되는구나.’

푸른 빛이 세피로트로부터 솟아나 서고의 여러 책장으로 뻗어나갔다.

저거 도중에 건드리면 다 떨어지고 책을 소중히 대하라며 돌연 보스전에 돌입하던데, 얘는 어떠려나. 애가 순박한 것이, 자꾸만 비교가 돼서 자꾸만 확인하고픈 욕구가 생긴다.

뭐, 현재 가장 절실한 보상은 저 책들의 정보니까. 굳이 목숨 걸고 검증에 나서지는 않았다.

저래 보여도 나름 황궁 서고관의 주인. 그것만으로도 대마법사의 경지라는 증거다. 강한 것도 강한 거고.

‘황궁 직속 고위 공무원을 어떻게 때려.’

어찌저찌 이긴다손 쳐도 다음 상대는 기사단장들이 될 거다.

게임상으로도 기사단장 중에서 극히 일부에게만 내려지는 칭호인 황로가 셋일 때도 황금세대다 뭐다 그랬는데. 지금은 자그마치 사성황로, 넷이라네?

본캐의 기량을 되찾으면 모를까. 지금 그랬다간 무릎 꿇고 우리 마리아라도 살려달라 빌어야 한다.

“이하, 13권의 책들이···손님께서 찾으시는 것, 들이라···사료돼요.”

“네. 감사합니다.”

잡념으로 시간을 때우는 새에 손 위로 모인 13권의 책. 많다면 많고, 서고의 규모를 생각하면 적은 양.

건네받은 책들을 들고 데스크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마리아도 읽고 싶은 책이나, 오빠가 이따 읽어줬으면 하는 책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와. 뛰거나 시끄럽게 하면 안 된다?”

“응. 마리아 착한 아이야.”

마리아가 맡겨만 두라는 무표정을 지은 후에 어린이 코너로 향했다. 평소에 원체 얌전한 애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겠지.

그러면 어디···이 중에 내가 처한 상황의 실마리가 될 열쇠가 있을 것인가. 떨리는 마음으로 첫 번째 책을 펼쳤다.

「나는 오리너구리에 빙의되었다.」

바로 덮었다.

‘쉽지 않겠네···.’

* * *

이후에도 빙의 마법의 기초라든가, 소설보다는 그럴듯한 책이 여럿 있었지만. 요 며칠 이렇다 할 진전은 없었다.

‘공간 이동’, ‘차원 이동’ 등의 키워드로 바꿔봐도 마찬가지. 아예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마법은 전무했다.

그렇게 허탕만 이어지는 나날. 지루하다 못한 마리아가 료나 황녀랑 놀러 나가는 날도 허다했다.

“근데 오빠는 정확히 뭘 찾고 있는 거야?”

자세한 내막을 알려주지 못하는 점이 컸다. 사정을 말해주면···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할 수도, 반대로 떠나려 하지 말아 달라며 애원할지도 모른다.

“···오빠도 비밀.”

“우우···.”

치사한 어른이라서 미안해. 하지만 당장으로선, 밝히기가 두려웠다.

“나중에 말해줄게. 약속.”

“···마리아도 나중에, 말해줄게. 약속.”

손가락을 걸고 나면. 다시 막막하기 그지없는 활자 지옥과의 씨름이다.

키워드를 또 갈아야 하나. 아니···애초에 여기 해결책이 있기는 할까?

황제가 느긋하게 찾으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진짜로 무한정 질척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슬슬 억제되던 반발의 분위기도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마당에.

‘안 되겠다.’

“오빠?”

“마리아. 따라와 봐.”

극단의 조치를 위해 세피로트에게로 직행했다.

그녀는 쟤가 왜 벌써 일로 오나 싶은 표정. 나도 그동안은 접촉을 최소한으로 했었는데, 정면승부를 택하겠다.

“서고관님. 실례가 안 된다면 지하실의 서적 열람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네···? 지하실···이요?”

웬만해선 개방은커녕 언급조차 쉬쉬하던 황궁 서고의 지하실.

마지막으로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지하실에도 없으면 진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거다.

“지하실, 이라니···저는 처음 듣는 얘기네요···. 서고에 지하실 같은, 건. 없어요···.”

“아. 혹시 폐쇄한 건가요?”

“아뇨···. 애초부터 없었, 어요···.”

쉽게 들어주지는 않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어째 반응이 허락은 고사하고 지하실의 존재를 모르는 눈치다.

‘디아 얘 설마, 인수인계를 안 한 건가?’

맙소사. 단순 관리자로 그치는 게 아니라, 황궁의 서고 그 자체라고도 불릴 애가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른다니.

인수인계를 안 했든, 피치 못할 사정이 벌어졌었든. 이건 심각한 문제다.

“···잠시만요.”

또한,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스읍. 이쪽이었나.”

“저기···지금 뭘, 하시는···”

빚을 질 것도 각오했건만. 오히려 제국의 소실된 자료를 대량으로 찾아준다?

관계 역전도 이런 역전이 없다. 주변의 경계 어린 눈빛들도 조금은 줄어들리라.

‘찾았다.’

딱 한 번, 디아가 지하실을 열어주었던 바로 그 자리.

발로 툭툭 건드리자 인식 저해로 가려졌던 마법진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뭣······!”

서고의 주인이자, 대마법사인 자신도 전혀 몰랐던 사실에 놀라운지 탄성을 내뱉는 세피로트.

이는 인지하느냐에 달린 사안이라 일절 전해 듣지 못했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마리아, 마나 좀 빌려줄래?”

“응. 마리아 손 잡아.”

“데히스코. 세사마.”

부족한 MP를 마리아한테서 가불받아, 바닥에 각인된 마법을 발동했다.

찰칵- 찰칵-

두어 번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리고.

쿠구구구-!!

작은 진동과 함께 바닥이 열렸다.

과연 대마법사의 솜씨. 100년이 지나도 멀쩡히 잘만 작동한다.

“어, 어어···.”

세피로트는 이 광경이 그저 놀라운지 이제는 뭐라 말도 못 꺼냈다.

하긴, 어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웬 허수아비가 황궁 서고의 숨겨진 지하실 문을 열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봐요, 있죠?”

거만한 표정 한 번 지어준 뒤에, 마리아를 데리고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다.

“자, 잠깐···!”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 해명은 나중이다. 일단은 필요한 것부터 찾자.

자체 발광하던 디아를 대신할 횃불과 기억에 의존하며. 어두운 길목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마리아.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응. 마리아 눈 좋아.”

길은 쓸데없이 길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서고관이 연중무휴로 지키는 것만으로도 방비는 충분하다는 듯.

훔쳐봤던 비밀번호까지 냉큼 입력해 단숨에 보관실 문까지 열었다. 부디, 작은 단서라도 발견되기를.

“···?”

오랜만에 들어선 지하실 내부는···그새 용도가 많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먼저 입구를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피규어 중심의 여러 굿즈들로 가득했다. 역대 황로로 추정되는 이들이 대부분. 저기 이즈리 피규어도 보였다.

그리고 반대쪽은···사진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메이드복을 입은 사진, 고양이 귀를 착용하고 애교부리는 사진, 얼굴을 가리고 속옷만 입고 찍은 사진···별 게 다 총집합한.

사진 속의 주인공은 현시대의 서고관, 세피로트였다.

“오. 대박.”

바로 마리아의 눈을 가리고 돌아섰다. 돌아서니 그 앞엔, 뒤늦게 쫓아온 세피로트가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다.

“아.”

“···그, 그래서···제가 지하실은, 없다고···없다고, 그랬는데···.”

“변태 언니.”

“뿌에에에에에에엥. 흐웁, 후에에엥···!!”

세피로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가 여자 울렸어.”

아니 누가 봐도 마리아 네가 막타친 거잖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래도 이 작품 정도면 어디 가서 숨길 정돈 아니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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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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