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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사람들은 허구에서나 현실에서나 자극적인 이야기를 갈구한다. 다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갈리는데.

작품을 볼 때는 다양하게 취향이 나뉘는 편이나. 현실로 한정하면 대부분 선악 구분이 명확한 걸 선호한다.

선인은 철저하게 비호하고, 악인은 무자비하게 깎아내릴 수 있는 그런.

“다들 도망쳐···난, 조종당하고 있어···!”

겁에 질린 아카데미생에게로 내지른 주먹을 코앞에서 멈추었다.

이어 무언가에 저항하듯 부들부들 떨며, 괴로운 목소리로 일러준다.

나는 위험하지 않은 착한 허수아비라고. 나쁜 건 목걸이를 채운 악독한 여펨아을 영주라고.

“괘, 괜찮아요···?”

마침 고르기도 순진무구한 학생을 잘 골라잡았는지 물기 찬 걱정이 되돌아왔다.

저 문양은, 후작가 영애인가. 옳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윽, 끄아아악!! 어서, 가···! 다시 정신이···”

“고, 곧 교수님이 오실 거예요. 조금만 힘내요···!”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연기는 제대로 먹혀든 거 같아 어떻게든 참아냈다.

이걸로 됐다. 저 소녀는 이제 소동이 잠식되면 나는 단순 피해자라며 옹호하고 나서줄 것이다.

허수아비는 저항하려 했다는, 사건 당사자인 후작가 영애의 생생한 증언. 예속의 목걸이라는 물증.

이거라면 선악 구도는 분명하게 판가름 나. 모든 화살이 영주에게로 향하리라.

“허수아비가 난동을 피운다는 게 여기인가?”

교수도 딱 타이밍 좋게 등장했다.

중간 텀이 생기면 아직 못 빠져나간 학생들한테 겁이라도 더 줘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훈련장에 나타난 교수는 한 명. 검술 쪽을 전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흑발 남성이었다.

‘내가 뭐 아카데미 전복 위기 수준으로 날뛴 것도 아니고, 때마침 공강이던 교수만 우선 온 거겠지.’

다른 교수들 수업까지 중지하고 더 몰려오지 않게. 적당히 합만 맞추면서 시간을 끌자.

상대가 허리춤에 찬 검을 드는 것에 대응해, 나의 소울웨폰인 낫. 그리고 황궁 서고 지하실 내려갈 때 슬쩍 꽁쳐뒀던 횃불을 각각 거머쥐었다.

[‘농기구’와 ‘횃불’의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버프:‘농민 봉기’가 발동되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신분 및 지위가 높을수록 스탯이 상승합니다.]

파아아아-!!

순식간에 불어난 막대한 스탯이 기운으로써 발산되어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상대는 훗날 제국의 기둥이 될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명문 아카데미 교수. 그에 반해 나는 최근 인권마저 박탈당한 아카데미 연습용 비품.

거의 뭐 지금 쓰라고 있는 수준의, 적절하기 짝이 없는 버프였다.

“저런 걸···죽이지 말고 제압해서 목걸이만 풀라고? 학생 부탁이라지만 참···”

와. 저런 언질까지 해주고 갔구나. 감동이다.

원래부터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나도 저 교수가 최대한 안 다치게끔 노력해 봐야겠다.

[허수아비류 – 쥐불놀이]

화륵-! 부웅부웅- 콰앙-!!

너무 가만히만 있으면 이상해 보일 것이기에. 횃불을 통한 자발적 쥐불놀이로 선공을 가하였다.

‘일단 이 정돈 어렵지 않게 받아내는 듯하고. 반대로 내가 밀릴 걱정 역시 안 해도 되겠어.’

교수가 검신을 내려 일순 대치를 풀었다가. 안으로 파고들며 검을 크게 회전해, 역으로 위에서 내려쳐 왔다.

카앙-!

여기까지를 기준으로 그에게 내리는 평가는 A급 모험가 중~하위.

아카데미물에서 주·조연 학생들 띄워주기용으로 희생되는 전투력 측정기 역할, 그쯤으로 연상됐다.

[허수아비류 – 물레방아]

척, 번쩍-

휘어진 날을 검면에 걸어, 교수째로 들어다 뒤로 넘겼다.

제아무리 아카데미 교수일지라도 낫을 든, 하물며 허수아비를 상대해 봤을 리가 없을 터.

당황한 표정이 그려진 얼굴이 그대로 밑바닥으로까지 떨어졌다.

콰앙-!

“큭···!”

교수가 지면과 충돌해 떠오른 몸을 허공에서 돌려 자세를 바로잡았다.

거칠게 퉤 뱉은 침에 피는 섞여 있지 않다. 이대로만 가자.

학생들은 차마 안 건드렸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키우기 위해 당신이 대신 희생 좀 합시다.

전직 S급 모험가에게 한 수 배울 기회에, 겸사겸사 악인도 처벌하고. 서로 좋잖아?

“후우···.”

숨을 한 번 고른 교수는 반대편 허리춤에서 검을 하나 마저 뽑았다.

학생의 요청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었지만, 그럴 처지가 안 됨을 깨달은 것.

‘그러고 보니 무기 조합에 따른 부가효과, 유저가 아니어도 적용이 될까?’

문득 궁금해져 이번에도 먼저 달려들었다.

캉- 캉- 카랑- 카앙-!!

확실히 검이 하나였을 적보다는 눈에 띄게 공격적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을 입증하듯, 양손으로 쉴 새 없이 공세를 이어 나가 방어할 필요 자체를 없애겠다는 마인드.

이쪽에서 무기로 써먹지도 못하는 횃불이 손 하나를 차지한 것도 원인 중에 하나렸다.

‘여기서 좀 더 끌어야지.’

마리아가 픽업하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나로선 이 수준이 딱 적당하다.

전투가 늘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숨겨둔 역량들도 각자 개방하고, 더욱 치열해질 텐데. 그러면 실력 차를 막론하고 부상의 위험도가 급격하게 치솟는다.

만일 점마가 한 방 노리겠답시고 무리했다가 팔이라도 다쳐봐라. 다른 걸 떠나서 예속됐다는 설정 유지에 상당한 차질이 생긴다.

‘죽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종당하던 놈이 갑자기 봐줄 수도 없고.’

그러니 현재의 이 페이스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는 것이 최선.

더불어 저 교수의 기억에도 괴한과의 생사결보단 대련으로 치부하고 넘길 단순 해프닝. 그 정도로 남는 게 아무래도 좋지 않겠나.

‘근데 이 새끼가?’

좋은 흐름이라고 여기기가 무섭게. 리스크를 감수하고 결정타를 먹이려던 정황이 방금 막 포착됐다.

이는 일단 ‘위협을 느껴 애초에 피하기로 판단했다’, 대충 그런 전제를 가정하고 물러나 무마하였다.

버티기만 해도 어련히 지원이 와줄 것을, 뭘 그리 서두르는지. 하여튼 간에 계획대로 되는가 싶다가도 사소한 부분들에서 꼭 말썽이다.

보니까 저거, 온갖 걸 고려하느라 자기도 모르게 본인 선에서 막아야 한다고 무작정 결론지은 거다.

‘안 되겠다.’

판 자체를 뒤엎어야 쓰겠다.

저 성급한 놈이 금세 다시 돌격해 오기 전에, 감각을 열어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인기척이 대다수. 수업은 정상 진행 중이야.’

그 외 특이 사항은 딱히 없음을 확인 후. 몸을 숙여 지면에 낫을 꽂았다.

[허수아비류 – 물레방아(開) 범람하는 물결]

“···!!”

쿠과아아-!

평탄한 바닥이 한껏 들어 올려지는 동시에 부스러지며. 교수를 휘어잡아 이리저리 흔들었다.

뒤집히고, 부딪치고, 튕겨져서. 그는 재해와도 같은 벽 앞에 감히 대항할 엄두도 못 냈다.

덥석-

이런 태풍에 휘말린 나비 같은 사내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 덕에 난방향 저공비행도 멈추고, 오히려 안정돼 보이는 것이. 그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여실히 알려주었다.

[허수아비류 – 모내기]

콰앙-

언제까지고 부모처럼 지켜줄 수는 없으니, 엄하게 내리꽂았다.

너무 원망은 마라. 나는 쉬엄쉬엄 가려고 했는데,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예기치 못하게 치명상을 입는 것보단 일방적으로 처맞는 게 안전성 면에선 차라리 나을 거다.

[허수아비류 – 잡초 뽑기]

거꾸로 처박힌 장정을 당근 캐듯 뽑아 던졌다.

흡사 걸레짝처럼 펄럭이는 것에 비해, 힘 조절에 심혈을 기울인지라 상태는 제법 괜찮다.

“후우···후···.”

‘···왔다.’

교수는 숨을 몰아쉬며, 끝까지 놓치지 않은 검을 다시 내밀었고.

나는 싸움을 끝낼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탁- 타닥-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서로를 향해 달렸다.

사정은 달라도, 그 또한 전투가 막바지에 다다른 것임을 본능적으로 안 것이라.

[허수아비류 – 수확]

카- 캉-

낫에 가격당한 검 두 개가 나란히 떨어져 나갔다.

무기를 잃은 검사는 겸허히 패배를 받아들이며 제 최후를 기다렸고.

투웅-

승기를 쥔 허수아비는 돌연 나타난 하얀 기사의 일격에 날아가며, 씨익 미소 지었다.

콰앙-

“···?”

점차 걷혀가는 모래 먼지를 지나. 허수아비를 단숨에 제압한 한 소녀가 걸음을 옮겼다.

교수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그 자리에 굳은 채. 멍하니 소녀를 바라봤다.

‘진짜 엄청 빨리 왔네. 외부인 출입 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최대한 서둘러서 왔다는 게 뻔히 보여, 그저 대견스럽고 고맙다.

마침내 코앞에 이른 소녀. 마리아는 예속의 목걸이를 손에 쥐어 강제로 계약을 파기했다.

탁-

“구해줘서 고마워. 마리아.”

예속이 풀리자. 살기를 전부 꺼트린 허수아비는 다정히 소녀를 껴안았다.

“마리아 한 건 해결.”

마리아가 품에 안긴 그대로 몸을 돌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교수에게로 ‘브이’를 해 보였다.

이리하여, 마리아는 사악한 영주의 아카데미 침공을 막아낸 공로자가 되었다. 고난에 굴하지 않고 소중한 가족을 지켜낸,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소중한 동료 덕분에 세뇌(아님)를 극복하다니, 정말 감동적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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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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