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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

“···휴가를 황궁에서 보내다가 쫓겨나서 여기로 오셨다고요?”

“네···. 덜 급해서 나중으로 밀렸던 문서를 처리하려고 했는데···.”

진정으로 안타까움에 고개를 푹 숙이는 이즈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디에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단장이라는 사람이 부하들 눈치 보이게 휴가 중에도 펜을 쥐는 워커 홀릭 모먼트? 아니면 휴가 좀 즐기라 내보냈다고 온다는 장소가 왜 여기인지에 대한 의문?

어느 쪽도 못 했다. 전자는 황실에서도 설득에 실패해서 얘가 지금 여깄는 거고, 후자는 기사단장한테 친구 없음 선언을 시키는 미래가 뻔히 그려졌기에.

근데 저런 양반이 부단장은 왜 팬 거야.

“예, 뭐. 그럼 오신 김에 편하게 있다 가세요.”

“네. 고마워요.”

“···.”

“···.”

고작 3초의 정적이 흘렀건만 진한 답답함을 자아냈다. 이즈리가 같은 조건에서 내 장모님이었어도 이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았으리라.

확신이 섰다. 이 인간, 놀 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논다는 개념 자체를 모른다. 이 기세라면 끝까지 앉아만 있다 가겠지.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마리아를 쳐다봤으나, 그녀는 모르는 체하였다. 이즈리가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우리끼리의 휴식을 방해받은 거에 삐진 모양.

아스트레아한테는 눈길을 안 줬다.

“그대, 뭔가 무례한 생각을 하는 것 같구나?”

천마랍시고 이런 쪽 눈치만 빨라선.

“어쩔 수 없네요. 단장님, 이번 휴가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드릴게요.”

“와아. 정말요?”

아무튼 간에, 이건 나한테도 좋은 기회다.

애당초 호위 의뢰를 맡을 적부터. 이런 황족이나 기사단과의 친분을 노리지 않았던가.

이미 갈 곳 잃고 떠돌 때 우리부터 떠올리는 수준이 되었으니. 잘만 하면 훗날 동료로 영입 가능할지도 모른다.

‘14살이랬으니 황로 자리는 올해 아니면 내년에 정년퇴직할 테고, 그때 기사단장직도 같이 내려놓는 경우가 많으니까.’

“저는 뭐부터 하면 될까요?”

‘살다 살다 기사단장 휴가 계획도 다 짜주네.’

순간 친목 도모를 명분 삼아 이즈리의 스탯도 뺏어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행사로 벌어들인 거 합친 것보다 훨씬 짭짤할 거란 계산에.

물론 빠르게 기각했다. 기사단장 상대로 목숨 걸고 배짱 장사를 하는 건 미친 짓이고, 현재로선 차기 동료 후보니까.

그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황궁으로 가죠.”

일에 미친 기사단장님에게, 일터가 놀이터로 변하는 건 순전히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알려주자.

그러는 김에 황실 대신들에게 그녀와의 친분 과시도 같이.

* * *

저 멀리, 황궁 입구를 수호하는 경비병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는 게 보였다.

기껏 쉬라고 등 떠밀었더니만 하루도 안 지나서 돌아온 것에 1차, 이즈리의 사복 차림을 본 것에 2차, 그래서 갑옷과 달리 가슴 부분이 터지려 하는 옷에 3차로 놀란 듯했다.

“추, 충성!”

“충성. 수고들이 많으세요!”

“···?”

거기에 이즈리는 4차 폭격을 가하였다.

안 그래도 황궁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 같더라니. 저들조차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나 보다.

경비병들은 얼떨떨한 상태로 문을 개방하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시선이 이쪽으로 따라왔다.

“경계를 서는 중에는 언제나 긴장을 놓지 않을 수 있도록. 황궁에서의 경계 임무 소홀은 황족 모독에 준하는 중죄에 해당한다.”

“며, 며, 명심하겠습니다!!!”

“갑자기 멈춰서 죄송해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헤헤. 다시 갈까요?”

‘와. 이걸 자유자재로 켜고 끌 수가 있네.’

하급자에게 충고하는 근엄 기사였다가, 단숨에 순딩이 소녀로 돌아오는 이즈리.

단순 구경하는 입장이었기에. 일행 셋 모두가 오 하고 감탄할 수 있었다.

“마리아, 저 언니의 어느 쪽이 진짠지 모르겠어.”

“그러게나 말이다···.”

태어나자마자 입대하지는 않았을 테니, 헤실헤실한 쪽이 본모습이긴 할 텐데.

“아스트레아. 네 원래 말투는 어땠냐?”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느니라.”

“천마이기 전부터 그따구로 말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이 몸은 천마로서 다시 태어난바. 이 몸에게 천마 이전의 과거 따위는 없는 것이니라.”

그래. 어느 게 진짜고 가짜고 뭐 그리 중요하겠어. 본인들이 좋다면 그걸로 된 거지.

어차피 나이 먹고 나면 어련히 알아서들 그만둘 일종의 추억이다. 딱히 경험담은 아니고 내 친구 얘기다.

* * *

쾅-!

“히이이익···!!”

갑자기 열린 문에 세피로트가 번쩍- 자세를 일으키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읽던 책은 확실하게 덮고는. 소동물을 연상케 하는 가련한 몸 떨림을 구사하였다.

“4, 4기사단···장님? 여긴 어쩐, 일···로?”

“서고관 세피로트.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잠겨있지도 않은 애먼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인물은 4기사단장. 이즈리 파 체스트.

규격 외 존재인 1기사단장을 제외, 현 황로 중 최고참인 그녀는 근처에 보이기만 해도 극심한 불안 유발제이거늘.

파격적인 등장에 더해 다짜고짜 압박을 가하니. 세피로트는 저항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왜 그러세···요오. 저는 아무, 아무 잘못도···안 했는···”

그래도 대견스럽게 제 의견을 피력하다. 세피로트는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방금까지 읽던, 지금도 자신이 소중하게 쥐고 있는 야설. 혹여 이거 때문인 걸까.

마침 등장하는 히로인이 여기사이기는 하다. 심지어 주인공한테 능욕당하는 내용으로 한가득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고? 겉면은 진작에 평범한 가죽 커버로 바꿔놨다. 게다가 그녀는 방금 들어오지 않았나. 최근에 마주친 기억도 흐릿하다.

“발뺌할 셈인가?”

“히끅···.”

그런 머릿속 합리화는 이즈리의 추가적인 한 마디에 가벼이도 깨져버렸다.

“서고관. 지금 손으로 잡고 있는 그게 뭐지?”

“채, 책인···데요.”

세피로트는 결심했다. 만일 이즈리가 안에 내용을 보여보라 하면 눈 딱 감고 책을 불태우리라고.

이는 사실상 자백이나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직접적인 관측은 당하지 않는다. 책은 글귀 하나하나 전부 외웠으니 복원하면 된다.

“그렇다. 서고관은 그래서 내게 책잡힌 거다.”

“···. ···네?”

세피로트는 발동 직전까지 갔던 마법을 갈무리했다.

그러고도 곧장 상황이 분간되지를 않아, 얼빠진 표정으로 그저 이즈리를 응시했다.

“푸하하하하-!!”

“풉. 푸픕.”

“아아 정말이지, 저 처자는 재능 넘치는 것이니라.”

삼인방이 나타나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고 나서야. 세피로트는 비로소 속았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우으, 우으으···.”

“서고관님, 앞으로는 통신구 안 꺼져 있기를 바라요. 그럼 이만!”

이번만큼은 진짜로 마법이 날아올지 모른다 직감했을까.

주동자임이 분명한 허수아비는 할 말만 남기고는 잽싸게 자리를 이탈했다.

“어···제가 너무 심했던 걸까요. 저는 서고관이 이런 장난을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

차선책으로 홀로 남은 이즈리한테라도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급변한 캐릭터성에 그럴 여력이 싹 사라졌다.

“손에 땀 나신 것 좀 봐···죄송해요. 휴가 끝나고 다시 제대로 사과드리러 올게요. 선물이랑 같이!”

“아, 그···”

세피로트는 입장부터 퇴장까지 충격적이었던 이즈리를 떨떠름하게 눈에 담았다.

“···이거, 땀 아닌···데.”

평화를 되찾은 서고. 그곳의 주인은 휴지를 뽑아 손을, 이어서 책 겉표지를 닦았다.

끈적해서 잘 안 닦였다.

* * *

“덕분에, 오늘은 정말로 재밌었어요.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할지.”

“나중에 저희를 위해서 칼 한 번 들어주시렵니까?”

그날 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한 방에 모여 소소한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함께 황궁 비밀통로 탐험까지 하고 나니, 서로 농담도 주고받을 만치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비밀통로는 대체 뭐였을까요. 밖으로 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황궁 전체로 뻗어 있다니···. 설마 누군가 역모를 꾸미고 만들었던 건···?”

“2대 이전의 선황이신 길티 페 도로리콘께서 황태자 시절에 손수 만드신 거예요.”

“과연.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하신 거겠죠?”

진실은 수업 땡땡이치려고 나랑 합작해서 만든 거지만. 적어도 당사자 입장에선 중대 사항이 맞았으니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줬다.

“아 맞다. 아이, 잠시 마리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물건이 아니야.”

“예쁘게 쓰고 돌려주세요.”

“헉.”

“네. 금방 갔다 올게요.”

끼이익-

방을 나서 문을 닫고. 이즈리는 말없이 복도를 몇 걸음 걸었다.

그렇게 방까지 소리가 안 전해지게 적당히 멀어졌을 때.

“마리아 가르마토아.”

“···응.”

첫 마디로 소녀 이즈리가 아닌, 기사단장 이즈리가 하는 말임을 똑똑히 밝힌다.

마리아는 그녀가 자신을 지목할 시점부터 얼추 짐작하고 있었기에. 의문을 품지 않고 대꾸하였다.

“녀석이 꼬리를 밟혔다.”

“···!”

“잠깐. 아직 명확한 신상이 확보된 건 아니다. 그러니, 우선은 S급 승급 시험에 집중하도록.”

“···응.”

마리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드디어 녀석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 그놈만을 노리고 키워온 힘을, 마침내 목적에 맞게 발휘할 수 있다.

“고마워. 마리아한테 알려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아니. 진짜로 갈 데가 마땅찮아서 온 거야. 방금 알려준 건 겸사겸사···”

“···.”

마리아가 한쪽 볼을 부풀리곤 이즈리의 어깨를 툭툭- 하고 쳤다.

돌아가선 오빠의 품을 독차지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우리 귀여운 세피로트와 저는 공통점이 하나 있답니다. 제가 안경 쓴 거유 음침 미소녀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바로 직장에서 산다는 거예요! 집이 직장이라 퇴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네요. 키보드를 놓으면 그게 곧 퇴근인데, 다시 키보드를 쥐면 바로 출근을 해 버려요. 그럴 때마다 세피로트 애가 맛이 간 게 조금은 이해가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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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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