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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EP. 20

     

   무너져 내린 벽.

   뒤집어진 바닥과 천장.

     

   그저 공허했다. 아니, 공허하다 표현하기에는 부정한 기운이 가득 채워진 장소였기에 오히려 거북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건 도대체…?’

     

   갑작스럽게 찾아온 풍경의 변화에 나는 서서히 차오르는 심장 박동을 의식하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폭발로 기억이라도 잃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착각도 잠시.

   멀지 않은 복도의 끝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정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힘이 다한 듯 기력이 없는 누군가의 음성.

   소리를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한 때 거대한 영광이 함께 했을 법한 초라한 문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뚜벅.

     

   ‘어?’

     

   나는 순간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의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걸어지는 낯선 걸음이었다.

     

   [……그러합니다.]

     

   속삭임은 두 사람의 대화로 이어졌다. 의식만 남아 허공을 떠다닌다는 감각이 나를 지배했지만 나는 서서히 이 불쾌한 감각에 적응하고 있었다.

     

   나는 열린 문을 지나 방의 내부로 들어섰다.

     

   젊다 못해 어려 보이기까지 하는 기사.

   그리고 이미 반쯤은 떨어져 나간 왕좌에 앉은 노인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쿨럭! 쿨럭!…… 자네 왔는가.]

     

   나와 눈이 마주친 노인이 몇 차례 기침을 하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예. 왕이시여.]

     

   그리고 결코 나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의 입을 통해 왕에게 전달되었다.

     

   ‘여기는…… 파티장인가?’

     

   우리가 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 ‘노야’라는 왕을 만났던 그 파티장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내 시선은 아래로 떨어졌다.

     

   [도시의 아이들을 모두 모아라. 그리고 그대가 말한 계획을 시행하라.]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어진 노인의 말에 자연스레 응답했고 고개를 듦과 동시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으으…]

     

   누군가가 앓는 소리와 함께 마치 영상이 페이드아웃되듯 주변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한다.

     

   [엄마…! 엄마!]

   [아… 안 갈래요! 제발요! 같이 있을래요!]

     

   이번에는 광장이었다. 무너진 석상들과 말라비틀어진 나무들, 반쯤 헐어 버린 가지각색의 건물들이 나의 시야를 장악한다.

     

   기사들의 손에 붙잡힌 아이들이 부모의 손길을 떠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이의 부모들은 눈물을 흘렸다.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고 자신의 혈육을 바라보며 혼절하는 어미도 보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왕명을 받든 기사를 거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만…’

     

   부모와 아이들이 생이별한다는 것. 어릴 적 보육원에서 자란 나로서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만해……!’

     

   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가득 채운 슬픔을 공감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메말랐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감정과는 반대로 나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다 아이들을 위한 일이다! 그대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왕의 권한으로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도시의 아이들을 성으로 데려와라.

     

   빛이 닿는 모든 곳의 아이들을.

     

   그 모든 핏덩이를 왕궁으로 인도해라.

     

   비가 내렸다. 부모들의 원한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눈에 맺힌 피눈물은 무심히도 비와 함께 씻겨 내려간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나의 시야가 도시를 벗어나 성의 꼭대기를 서서히 향했다.

     

   ‘어?’

     

   그런데 그곳에서 익숙한 푸른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탑의 1층으로 진입할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포탈.

     

   거리가 멀어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토끼가 열어줬던 그 포탈이 맞았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

     

   “허억!”

     

   누군가의 기억. 각종 영상 매체에 나오던 전생 체험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금 전 내가 경험했던 누군가의 삶을 곱씹으며 나의 손을 바라봤다.

     

   나의 손안에는 빛바랜 채 바스러지는 ‘메모리얼 피스’가 있었다.

   완전히 그 힘을 잃은 듯,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보석에 이해할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이 느껴진다.

     

   “아저씨 어디 아파요?”

     

   뒤에 있던 한가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불에 둘둘 말려 있는 아이 또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니 이 환상을 본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한가민에게 내가 보았던 것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탑 1층의 배경과 똑 닮았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던 장소.

   도시의 아이들을 데려가던 기사들과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기억 속의 나까지.

     

   “그거…… 설마 여기 이야기예요?”

   “아마도.”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지만 확실히 그 배경은 탑 1층과 같아도 너무 똑같았다.

     

   “납치는 또 뭐예요? 왕이 말한 계획은 또 뭐고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확실한 건…”

     

   이 성 어딘가에 탑의 2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있다.

     

   “2층으로 가는 길… 생각보다 쉽게 찾을지도 모르겠어.”

     

   환상 속의 기억에서 본 포탈은 굉장히 불쾌한 감각을 이끌어 냈다.

   세뇌에 당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느꼈던 감각. 아마도 내 마력과 ‘빠른 납득’이 일종의 저주와 충돌할 때 생기는 현상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얘는 어쩌죠?”

     

   내가 고민을 하고 있으니 한가민이 짧게 턱짓하며 이불에 돌돌 말린 아이를 가리켰다.

     

   언제부턴가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 솔직히 말해 정보를 얻어내기는커녕 짐 덩이만 늘어난 상황이 아닌가 싶었다.

     

   그저 입단속만 시키기고 보내주기에는 찝찝함이 앞섰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을 하려니 그 방법도 막막하기만 하다.

     

   “힝……”

     

   그때 꼬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간절한 표정과 꼼지락거리는 입술을 보니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저기… 이것 좀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꼬마가 불편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한가민이 얼마나 야무지게 묶어 놨는지 슬슬 울상이 되어가는 것을 보니 좀 측은한 마음도 든다.

     

   “가민아 풀어 줘.”

   “네? 나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떠들면 어쩌시려고요?”

   “괜찮아. 얘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니까.”

     

   아이의 붉은 눈을 보니 환상 속에서 발버둥 치던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부모와 떨어지게 된 아이들. 왕의 목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아이가 우리에게 피해를 끼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감사합니다.”

     

   의외로 아이는 우리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아이 또한 우리의 대화를 다 들었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울게요. 아, 그리고…”

     

   슬슬 몸을 포박하던 이불이 벗겨지자 아이가 살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이름 기억났어요.”

     

   예상치 못한 수확. 이때 우리는 1층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꼬마 하나를 우리의 편으로 영입할 수 있었다.

     

   ***

     

   로랑 사가르.

     

   탑 1층의 주민인 동시에 성에서 일하는 시녀인 로랑은 당연하게도 성의 내부 사정에 대해 아주 빠삭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 기억났다! 저 친구 이름은 클라라예요! 바느질을 아주 잘하죠!”

     

   “손님들 숙소는 보통 3층부터 5층까지고요 식당은 저기! 2층 복도 끝이에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성에 비밀 통로가 되게 많거든요? 노야의 방으로 가는 길도 있는데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우리는 로랑의 안내를 받아 성 곳곳을 자유로이 탐방했다.

     

   처음에는 박조철이나 다른 동료들의 세뇌를 먼저 풀어볼 생각도 했지만 막상 성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니 사람들을 구하는 건 나중 일로 미루는 게 옳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뭐 하는가. 복도를 걷고 조금 싸돌아다니기 시작하면 다시 바보가 되는 것을.

     

   이미 눈앞의 로랑도 반쯤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고 함께 숙소에서 출발했던 한가민 또한 이미 ‘이히힛!’하는 경박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 뒤를 따르던 중이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도착한 왕실 연무장.

     

   나는 내 앞뒤로 반쯤 맛이 간 두 친구를 이끌고 병사들이 훈련 중이던 연무장으로 조심스레 입장했다.

     

   “연무장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가 들어서자 병사들의 수련을 담당하고 있던 기사가 내게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자세히 보니 탑의 1층에 도착한 나를 성까지 안내했던 기사다. 하지만 당황스러웠던 점은.

     

   ‘가족인가…?’

     

   폰 그레고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내가 봤던 환상 속에 있던 그 기사와 쏙 빼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환상 속 그 기사가 아버지를 소개시켜 줬다면 딱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싶은 외모. 하지만 내 잡생각은 이어진 기사의 말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아… 그냥 구경이 하고 싶어서요. 검술 수련을 하는 건 처음 보거든요.”

   “그렇습니까? 흐음… 별로 구경할 만한 수준은 아닐 텐데요.”

     

   나는 세뇌가 완전히 풀린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한가민과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씨익.

   흠칫.

     

   “……아, 예예, 뭐 구경하고 가시죠.”

     

   사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곳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빠른 납득(C-)’이 발동됩니다.]

     

   [상태이상 ‘환각(C-)’에 저항합니다.]

   [상태이상 ‘세뇌(D+)’에 저항합니다.]

   [상태이상 ……

   [상태이상 ……

     

   역시.

     

   연무장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가진 ‘빠른 납득’ 스킬이 마치 가방 속 손톱깎이를 발견한 공항 금속탐지기마냥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무장 중심에는 기가 막히게도 어린아이만한 크기의 조각상 하나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확실히 비슷한 느낌이네.’

     

   환상 속에서 그 포탈을 봤을 때와 흡사한 기운이 저 조각상에서 느껴졌다. 근데 저렇게 큰 것도 스킬 없었으면 못 봤으려나?

     

   “음음…… 여기 자리 좋네.”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겼지만 나는 일단 내가 세워둔 계획에 착수하기로 했다.

   적당한 나무 의자를 끌어와 병사들이 나를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자 내 옆으로 다가온 한가민이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히힛. 아저씨. 왜 앞에 앉아요? 옆에 앉는 게 더 잘 보일 거 같은데.”

     

   한가민의 말에 나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 ‘내가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닌 ‘병사들이 나를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앉은 상황이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앉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흐음… 생각보다 별로네.”

     

   움찔.

   움찔.

     

   혼잣말인척 중얼거린 한마디에 몇몇 병사들이 검을 휘두르다 말고 어깨를 들썩였다.

     

   ‘효과가 있나?’

     

   병사들이 반응을 본 나는 그들의 검술을 대놓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지적에 조금 더 가까웠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시비걸러 왔는데.

     

   “아… 칼 저렇게 잡는 거 아닌데.”

     

   “아… 저렇게 맥아리가 없어서야 과일이나 썰겠나.”

     

   “아… 괜히 기대했나.”

     

   당연히 나는 검술에 대해 일자무식한 사람이었다. 검도는커녕 살면서 요리용 식칼 말고는 잡아본 기억도 없으니 안 다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뭔가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해야 더 화가 치솟는 법.

   그리고 나의 기대에 부응한 몇몇 병사들이 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거참 시끄럽네.”

   “조용히 좀 하쇼.”

     

   병사들의 인상이 서서히 험악해진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처음 보는 적개심이라는 감정. 그리고 그런 분노가, 특히 남자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순간 생기는 불변의 법칙 하나가 있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 번 보여주시든가.”

     

   즉, 꼬우면 니가 해 봐.

     

   “아, 그래도 돼요?”

     

   나는 한 병사의 말에 흔쾌히 주변에 있던 목검을 하나 집어 들고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세뇌 때문인지 계속해서 싱글벙글하던 한가민조차 일순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내가 진짜로 다가가자 몇몇 병사들이 얼굴에 불만과 조소를 띄운 채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 번만 제대로 걸려 봐라 싶은 악독한 표정. 음, 조금 기분 나쁜데.

     

   하지만 나는 이제 그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처음부터 내가 노린 것은 병사들의 검술도, 그들의 자존심도 아니었으니까.

     

   ‘일단 저건 박살내고 봐야겠다.’

     

   사람만 한 사이즈의 조각상.

     

   앞일이 어찌 되건 저건 실수(?)로 부숴보는 게 미래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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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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