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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1

   EP.81

     

   고대 중국의 병법서로 잘 알려진 손자병법 36계에는 진화타겁(珍火打劫)이라는 말이 있다.

     

   뭐… 간단히 말하자면 불 속으로 뛰어들어 약탈을 한다는 말인데, 적이 위기에 처했을 때를 틈타 공격을 하는 것을 의미.

     

   그리고 우리가 행한 게릴라전은 혼란에 빠진 적들을 치고 아주 효율적으로 치고 빠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한 수였다.

     

   “이, 이거 조금 비겁한 느낌인데요…?”

   “기분 탓입니다.”

     

   대부분이 마법으로 어색하게 물 위를 떠다니며 공격과 수비를 하는데, 우리가 땅을 얼리고 우르르 뛰어가서 맹공을 퍼부으면 어떻게 깃발을 사수할 방법이 없는 것.

     

   이성적인 판단을 잘 내리는 편인 남궁천호가 뭔가 민망하다는 느낌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으니 아주 훌륭한 계책이 아닐까 싶었다.

     

   깃발을 지키지 못한 좌표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그리고 어느새 단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깃발 Lv.30]

     

   [깃발의 단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깃발을 강탈해도 능력치가 상승하지 않습니다.]

     

   “와우.”

     

   끝끝내 이뤄낸 말도 안 되는 쾌거.

   어인을 제외한 모두의 전력을 깎아 먹은 호수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선물을 가져다준 셈이 되었다.

     

   그렇게 남게 된 좌표는 고작 셋.

     

   어인들이 속한 크리티아스의 좌표와 신성국의 좌표, 그리고 내가 속한 지구의 좌표였다.

     

   “허억… 이제 끝이야?”

   “아직… 아직 남았어……”

     

   약 닷새간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한 채 달려온 플레이어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사람들이 질린 표정으로 남아 있는 적들을 돌아봤다.

   각자 플레이어들도 많이 탈락하고 필드도 좁혀질 대로 좁혀져 이제는 소규모의 패싸움 정도로 느껴지는 상태.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가려 애를 써도 그 셋 중에 가장 불리한 좌표는 우리였다.

     

   “저기도… 깃발 레벨은 최대치로 올린 것 같죠?”

     

   어인들은 당연히 물에서 사는 종족이니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신성국의 기사들.

   처음에는 성녀의 버프로 물 안에서도 호흡을 하며 싸우던 기사들이 이제는 대놓고 물 위를 걸으며 검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이래서 개인전에서 건진 보물들이 중요하다고 했던 거군.’

     

   토끼가 지구의 플레이어들에게 보물 5개를 건지면 욕심을 부리지 말고 바로 귀환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단체전에서 보물의 효용성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높았고 시간이 지나고 깃발이 만렙을 찍게 되니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 이제 어떡해요?”

     

   깃발의 주인답게 몸에서 빛이 반짝이던 한가민이 나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짝수도 아니고 홀수. 그것도 단 세 개의 좌표만 남은 상황이라 움직임이 더욱 신중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하나를 더 제압한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만약 깃발을 빼앗는 것에 추가적인 성장이 있을 것이라면 내가 탈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달려들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성장이 멈춘 지금부터는 그저 먼저 싸우는 것 자체가 손해인 상황.

     

   하지만 그렇게 길고 긴 대치가 이어지자, 피로해지는 것은 우리들뿐만이 아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현재 상황을 지루해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재밌는 이벤트를 원합니다.]

     

   늘 그렇듯 성좌들은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플레이어들의 성장을 보며 그들의 충돌을 즐기는 관음증 환자들. 그리고 이맘때쯤이면 나타나는 성좌가 하나 있었으니.

     

   [‘전쟁과 싸움밖에 모르는 자’가 대장전을 제시합니다.]

     

   매번 전투와 관련된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성좌의 물음에 남은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교차했다.

     

   적색 기사 랜든, 어인 진영의 청린, 그리고 나.

     

   [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의견에 동의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의견에 반대합니다.]

     

   성좌들의 의견이 갈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의외였던 점은.

     

   [‘전쟁과 싸움밖에 모르는 자’가 너희들 의견은 안 궁금하다고 말합니다.]

     

   이벤트 진행자가 우리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전쟁과 싸움밖에 모르는 자’가 특정 플레이어의 의견을 묻습니다.]

   [이벤트 임무가 도착합니다.]

     

   띠링.

     

   —

   『대장전』

     

   주제 : ?

   난이도 : ?

     

   설명 : 한 좌표에서 한 명의 대표를 뽑아 전투를 진행합니다.

     

   임무 : 최후의 1인이 되십시오.

     

   보상 : 단체전 승리

   실패 페널티 : 없음

     

   ※ 원치 않는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

     

   대장전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나를 향한다.

     

   개인전의 활약으로 가장 많은 보물을 획득한 사람, 그리고 아이템을 떠나서 그냥 이곳에서 가장 강한 사람.

     

   나는 메시지를 잠시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지금 남아있는 인원을 생각하면 우리가 다른 좌표들에 비해 불리한 상황이다. 그러니 내가 이 의견을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받아들인다.”

     

   [대장전을 승낙하셨습니다.]

   [다른 좌표의 투표가 진행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내가 대장전을 승낙하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저 두 좌표가 받아들일까 하는 것.

     

   사실 그들이 지금 상황에서 대장전을 승낙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우선 두 좌표 모두 지구 좌표의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인원도 많고 전체적인 전투 밸런스 자체가 좋은 편.

     

   게다가 어인들에게 호수는 충분히 안정적인 장소였으니, 오합지졸에 가까운 우리와 패싸움을 하는 게 대장전 보다는 오히려 유리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승낙한다.”

   “나도 대장전을 받아들이지.”

     

   [대장전이 성사됩니다.]

   [지금부터 대장이 탈락하면 그 좌표의 패배로 간주되며 깃발은 회수됩니다.]

     

   청린에 이어 신성국의 랜든까지 큰 고민 없이 대장전을 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삼파전에 우리 셋은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갔다.

     

   누군가는 물을 가로질러서, 누군가는 물 위를 걸어서.

   그리고 누군가는 재깍재깍 얼어붙는 얼음 위를 천천히 걸어서.

     

   “적색 기사여, 나를 기억하나?”

     

   세 사람이 모여 한 자리에 서게 되자, 청린이 랜든을 보며 물음을 던졌다.

     

   “기억한다.”

     

   무심한 랜든의 말투. 그는 청린이 그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어인들과 그쪽 신성국 사이에 있었던 일은?”

   “3층에 올라온 첫날을 말하는 것인가?”

     

   끄덕.

     

   그들의 대화가 이어지자 나는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 둘이 이렇게 대화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왠지 모르게 어마어마한 위화감이 드는 일이었다.

     

   첫날 서로 유혈사태를 일으킬 뻔했던 신성국과 크리티아스의 어인들.

   게다가 그 어인들 중, 가장 인간을 혐오하는 청린이 랜든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도, 그가 뭔가를 물었다고 꼬박꼬박 대꾸를 해주는 랜든도 이상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크리티아스의 청린이 신성국의 적색 기사에게 동맹을 청하는 바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우리들은 물론이거니와 신성국의 기사들도, 심지어 그것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어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심인가?”

     

   청린의 말에 랜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어인들은 우리를 싫어하지 않았나? 갑자기 동맹이라니 신뢰할 수 없군.”

   “왕께서 내린 명령이다.”

     

   청린의 말에 나는 금린을 돌아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굳은 얼굴. 하지만 내가 무언가 묻고 싶은 게 많다는 것을 인식한 것인지 녀석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강자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나약한 지도자의 표본이 아니겠습니까.”

     

   저 녀석이 저런 강단이 있는 녀석이었던가?

     

   “김시인… 당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워 감사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당신을 끊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정상에 설 수 없다는 것도 당신을 보며 느꼈습니다.”

   “동맹…이었던 거 같은데? 이거 배신 아니야?”

   “호수에 번개 쏘셨잖습니까. 피차일반입니다.”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박할 여지가 없네.

     

   청린이 랜든을 바라본다.

   그리고 랜든은 그의 제안을 들은 이후,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성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성국의 대표. 그들의 여왕.

   그리고 잠시 후, 성녀의 고개가 끄덕여졌고 랜든이 청린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녀께서 그리하라 하셨다. 그대들과의 임시 동맹을 동의하겠다.”

     

   두 좌표의 대장격 플레이어가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성녀가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지 우리에게 소리쳤다.

     

   “저희의 동맹이 불합리하다 여기신다면 대장전을 물리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양심이 찔리는 착한 여인이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그저 양보가 아닌 ‘혼자서 감당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은근한 무시를 내포하고 있었다.

     

   “거기, 성녀님.”

   “……?”

     

   낮게 깔린 나의 목소리에 그녀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내가 마음먹고 당신한테 달려들면 거기 있는 기사들이 나 막을 수 있어?”

     

   나의 말에 그녀가 당황한 듯 미간을 좁힌다.

   나쁘지 않은 응수. 하지만 성녀와 기사들이 싸그리 무시를 당한 상황을 본 랜든이 조심스레 입을 열며 나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대의 좌표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가 다 달려들면 그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지킬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살기가 등등한 그의 말에 한가민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하지만 랜든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 할 수 있어.”

     

   무표정을 고수하던 랜든이 당황한 감정을 내비친다.

     

   “너희들 다 덤벼도 지킬 수 있다고.”

     

   패배 따위를 상정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튜토리얼부터 이어져 온 나의 신념이었고 1층과 2층을 겪어오며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은 굳은 의지였다.

     

   [‘전쟁과 싸움밖에 모르는 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나는 뒤를 돌아 지구 좌표의 플레이어들을 돌아봤다.

   긴장된 얼굴. 하지만 그 안에는 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다녀올게요.”

     

   검을 뽑은 나는 그렇게 결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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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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