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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8

   EP.168

     

   도산검림의 비고는 ‘량’의 일생을 담고 있었다.

     

   내가 검과 천월신공으로 세상에 대한 나의 심상을 구현해냈듯 ‘량’ 또한 그의 깨달음을 이 비고에 담아 후대에게 전했던 것이다.

     

   ‘물론 그걸 너무 알기 어렵게 마련한 게 문제였지만.’

     

   세상은 ‘량’이라는 무인을 그저 무림의 공적이며 세상에 반항하다 죽은 초라한 무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타인의 무공을 훔치고 힘을 쫓으며 결국에는 영웅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실패한 인물.

     

   하지만 당시의 고수들이나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인들은 량의 행보가 현 무림의 평화를 가져다준 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의 세상은 전쟁과 피의 역사만이 가득한 하나의 지옥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무인들이 협을 잃어버린 채 오직 힘을 갈망하며 이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이 친구였던 자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뒤적이던 지옥.

     

   그리고 그 지옥이 멸망할 때가 되어서야 나타난 난세의 영웅이 바로 무림의 공적을 자처했던 ‘량’이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도산검림의 비고는 당시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이곳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처음 화향루에서 아명을 만났을 때, 그 아이는 비고에 고수들이 감쳐둔 금은보화와 그들이 사용했던 보검 따위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 또한 아명이 손님에게 들었던 하나의 소문이었고 그 말인 즉, 비고에 들어와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비고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비고에 대단한 무기 같은 건 없었지.”

     

   명검은커녕 비급이라고 불릴 만한 무공도 없었다. 그저 어디에서나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기초 무공서나 야한 책 따위가 꽂혀 있었을 뿐.

     

   결국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낸 전쟁의 끝에 남는 것은 허무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저벅.

     

   나는 허름한 비고의 문을 젖히며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천장에 박힌 자잘한 야명주가 빛을 발하고 있고 그 아래로 줄줄이 펼쳐진 수십 개의 책장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소림, 화산, 무당, 종남, 해남, 점창, 아미, 청성, 개방, 남궁, 제갈, 모용, 황보, 팽, 당……”

     

   량이 만났던 이름난 고수들.

     

   그중에는 한 문파의 장문인이 있었고 한 세가의 가주가 있었으며 그들을 따르는 크고 작은 조직들의 문주와 방주가 있었다.

     

   량은 처음에 불화를 일으키는 모든 무인들을 암살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그들의 무공을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중에서도 비기나 오의라고 불릴 만한 무공들을 모조리 빼돌렸다. 그것이 전쟁의 씨앗을 모조리 불태울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무인들은 그들의 무공을 도둑맞자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기존에 적이었던 세력들을 의심하며 총공세를 가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본 ‘량’은 두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이렇게 다 뒤져 버렸으면 좋겠다.

     

   무인은 검으로 말한다. 내가 천월신공을 통해 나의 삶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듯 당시의 고수들 또한 자신들의 무공의 묘리를 통해 삶을 내비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훔친 무공을 익혔겠지.”

     

   나의 머릿속에 ‘량’이 남겼던 일지의 글귀가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무공을 훔쳤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련을 시작했다.」

     

   그가 훔친 것은 그저 강해지기 위한 무공의 기술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의 역사. 한 문파의 시작과 끝. 그 무공을 창안했을 시조의 심상을 훔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는 의미였다.

     

   저벅. 저벅.

     

   나는 다음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전의 층과 달리 장문이나 가주 정도가 아닌 그 문파의 최고수의 이름들이 나열된 책장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신을 지우고 그들의 역사를 자신의 검에 담았다……”

     

   량은 다른 문파의 무공을 수련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무당의 양의신공을 수련하며 그들의 ‘조화’를 깨달았고 개방의 타구봉법을 연구하며 ‘무상과 허무’를 깨달았다.

     

   화산의 매화검에서는 ‘개화’를,

   소림의 역근경에서는 ‘부동과 인내’를,

   남궁의 제황검에서는 ‘청렴과 소신’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신들이 바라야 할, 그리고 나아가야 할 목표요.」

     

   당대의 천하제일인은 량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선대의 가르침과 묘리를 잊고 엇나가는 자가 어찌 감히 올바른 신념과 굳은 결의를 가지고 똑바로 나아가는 자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저벅. 저벅. 저벅.

     

   다음 층에는 하나의 병장기로 무위의 끝을 본 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검劍 도刀 창槍 궁弓 조爪 비琵 등.

     

   그것이 검법이든 음공이든 독공이든 암기든 상관없었다. 량은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의 무공으로 그들을 상대했고 그들이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대단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제대로 괴물이었군.”

     

   모든 무인들의 기록이 자신들의 업적과 은근한 자랑거리 따위로 시작해 하나의 깨달음으로 끝을 맺었다.

     

   「井底之蛙.」

     

   정저지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깨달음을 그들 모두가 량을 만난 이후 한마음 한뜻으로 느낀 것이다.

     

   그들은 ‘량’을 따르기로 했다. 강해지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자들이 그 목표의 끝에 다다른 사내를 보았는데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의 시선이 량의 기록이 담긴 마지막 계단을 향했다.

     

   끊이지 않는 피바람과 전쟁뿐이었던 세상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고 끝내 그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자.

     

   하지만 세상이 기억하는 량은 전쟁을 끝낸 영웅이 아니라 무림에 전무후무한 위기를 가져온 공적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지난번에는 따뜻했던 4층의 분위기가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간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작은 발광체들이 보관함과 동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이 보관함도 멀쩡하진 않군.”

     

   반짝이는 세상에서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량의 기록. 그의 보관함은 마치 불에 이미 다 태워진 나무를 깎아 만든 듯 여기저기에 그을음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그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읽었다.

     

   현 무림이 썩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유일한 자. 그는 마지막에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남기지 말라고 했겠지.”

     

   나는 량이 무공을 익히며 얻은 깨달음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내가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그러한 묘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었기 때문.

     

   하지만 요 며칠간 량의 뜻을 깨닫기 위해 노력했기에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한 사람의 영웅만으로는 올바른 세상이 만들어질 수 없다.

   세상이란 결국 그곳을 살아가는 모두의 것.

   스스로 빛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모인다면 그보다 더 나은 세상은 없다.

     

   쓸쓸하게 남은 보관함과는 달리 천장에 박힌 무수한 발광체들은 저마다의 빛을 발하며 이곳 4층을 밝히고 있었다.

     

   “흐음.”

     

   왠지 쓸쓸한 마음 뒤로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사랑하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뒤틀린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투사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의 땅은 아니지만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천하제일인 량’의 보관함을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의 세상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었고 그의 행보를 눈앞에서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러한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이어진 한동안의 묵념.

     

   그리고 이내, 작은 알림이 내 귓가를 울렸다.

     

   ***

     

   띠링.

     

   [성좌 ‘장막 뒤의 감시자’가 당신에게 감사를 느낍니다.]

   [도산검림의 주인 ‘장막 뒤의 감시자’에게 선행을 베푸셨습니다.]

     

   뜬금없이 떠오른 하나의 메시지에 나는 얼떨떨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보조 임무를 내린 것이 ‘장막 뒤의 감시자’였는데 그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임무가 클리어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묵념을 끝내고 메시지를 바라보는 동안 아래층의 계단을 통해 흰 도복에 금빛 장삼을 입은 성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한가! 후우! 오랜만, 일세!”

     

   이번에도 급하게 달려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의 모습.

     

   그런데 내가 량의 기록을 너무 인상 깊게 읽었던 탓인지, 이 신성한 공간에 저런 누추한 성좌가 발을 들이는 게 영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어어, 지금 자네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 마치 저런 천박한 녀석이 왜 이런 신성한 곳에? 같은 표정이야.”

     

   이놈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이다지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걸까.

     

   “어, 지금은 들켰다는 표정인데. 실망일세.”

     

   이런 미친.

     

   나는 혹시나 녀석이 독심술을 가진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번에도 녀석이 다가온다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이 성좌의 특성인지 그냥 놈이 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는 녀석이기에 긴장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게나. 자네한테 줬던 임무를 클리어한 것 같아서 보상을 주려고 왔을 뿐이니까!”

   “보상? 설마 선행을 열 번 하라는 그 임무 보상을 말하는 건가?”

     

   나의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치 ‘그것 말고 다른 임무도 있었나?’하며 깊게 고민하는 듯한 눈치.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맞네. 그거.”

   “왜? 아직 선행이 한 번 남았을 텐데?”

   “허허, 이 친구 메시지 내가 보낸 거 못 봤나? 내가 감사를 표했잖아. 이해가 안 되면 내용을 다시 읽어보게. 나는 분명히 ‘11층에 거주하는 10명’이라고 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렇게 멋대로 클리어를 해 줄 것 같았으면 진작 싸인을 해줬을 때 하나 채워줬으면 좀 좋아.

     

   “멋대로 군.”

   “하핫. 원래 내가 좀 그렇다네. 내 세상인데 내 마음이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감사를 한 건 아니니 그건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가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처음이었거든. 량을 이토록 진심으로 알아가려 했던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눈빛.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럴만한 사람이었으니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그것만으로도 존경받을 가치가 있었다.

     

   타인을 위해 시간을 희생하는 자, 열정을 희생하는 자, 목숨을 희생하는 자. 그 누구도 무시 받을 이유가 없었고 사랑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장막 뒤의 감시자가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다.

     

   “역시…… 후후, 내가 자네의 1호 팬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군.”

   “헛소리.”

     

   나의 코웃음에 그가 잠시 키득거리더니 장삼에 손을 넣어 지난번에 찢어간 두루마리의 반절을 꺼내 들었다.

     

   11층 임무의 마지막 단계.

     

   나는 그가 건네는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넘겨받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퇴고를 하다 보니 늦었습니다! 지각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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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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