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0
페이비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 아이들의 낙서가 그려져 있는 누런색의 벽. 어느 하나 멀쩡한 것이 없는 낡은 가구들.
바람이 불어 안으로 들어올 때면 먼지와 함께 퀘퀘한 냄새가 퍼지고 식사 시간이 가까운 주방에선 웃음소리보다 고함과 비명소리가 더 많이 들리던 곳.
어렸던 페이비에게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장소. 고아원.
원래라면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이 뛰노는지라 한시도 조용할 틈이 없던 이 곳은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이 곳에 머무르던 모든 사람들이 페이비를 남기고 떠나가버린 것처럼.
“어떠냐. 페이비?”
기이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페이비는 뒤편에서 들려온 자상하고도 따스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색의 티끌 하나 없이 말끔했으며 앞으로 내밀어진 손에는 저 멀리서 보더라도 느낄 수 있는 온기가 서려 있었고 그 얼굴에는 신성한 빛이 서려 감히 페이비가 지켜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빛났다.
“아르마디님.”
아르마디님? 페이비는 자신의 내뱉은 말에 의문을 느끼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 분은 아르마디님이잖아. 수많은 신들의 주가 되시는 분이며 이 세상에 공평히 사랑을 흩뿌리시는 분.
내가 여태까지 모셔왔으며 앞으로도 모실 위대한 신.
페이비. 네가 그걸 의심하면 어쩌잔 거야?
“그대와 대화를 하기 위한 장소로 그대가 어릴 적 머무르던 고아원의 풍경을 골랐다마는 마음에 드느냐?”
“아르마디께서 이 곳을 재현하신 건가요?”
“그래.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이지 않나.”
아르마디의 말은 옳았다. 이 고아원은 페이비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장소였다.
성녀라는 과업을 얻기 전에 그녀가 순수히 웃을 수 있었던 장소. 친구들과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놀 수 있었던 곳.
지금도 가끔 꿈을 꿀 때면 고아원에서 뛰어다닐 적을 떠올리곤 했으니 이 곳이 소중하지 않으면 어느 곳이 그녀에게 소중할까.
“오랜만에 보는 풍경일 테니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느냐?”
“…제가 아르마디님과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까요? 이미 제 모든 기도를 들으셨겠지만 저는 옳은 인간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질투하고 그녀가 무너지기를 바랐다. 잘못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악신의 사도와 거래를 하고 말았다.
이외에도 페이비가 저지른 수많은 부덕이 그녀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거늘 위대한 주신되시는 분과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 리가 없다.
페이비가 두 손을 끌어 모은 채 고개를 숙이자 아르마디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따스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일해 온 성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눌 자격이 없다면 그 누구에게 자격이 있을까.”
“그렇지만.”
“내 이전에 말을 해두지 않았던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후에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행동을 고칠 수 있는가.”
“그렇지. 그러니 그대가 옳지 못하다 이야기하지 말라. 그대에겐 아직 기회가 남아 있지 않은가.”
자비로우신 이시여. 이 불경하고 불온한 자마저도 용서해주고 품 안에 품어 주시니 저는 너무도 행복하여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자. 움직이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꾸나. 할 말이 많지 않으냐.”
아르마디가 자신의 손을 내밀자 페이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붙잡았다.
아아. 아르마디시여. 제 믿음에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해주시는 거군요. 제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군요.
만일 이것이 꿈이라면 평생 깨어나지 않기를. 영원히 이 꿈속에 머물려 아르마디의 곁에 머무를 수 있기를.
속으로 그리 생각을 하던 페이비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지만 고개를 저으며 그를 무시했다.
그녀가 그토록 만나고파 하던 존재가 그 옆에 있는데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
‘페이비가…’
“그 허접 성녀님께서 환상에 잡아 먹혔다고?”
“정확하다. 그녀는 환상에서 깨어날 생각이 조금도 없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환상에 안주해버린 나머지 자신의 환상이 평생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거든.”
멍청하고도 우둔한 아이야. 얼빠 여우는 그리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페이비가 환상에 잡아 먹혔다니.
조금도 상정하지 못한 상황에 머릿속의 생각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페이비가 게임 속과는 달리 많이 흔들리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허나 이 정도로 심각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지난번에 정화의 기도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 자존감도 되찾았을 텐데 왜.
머리가 지끈거려서 이마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소울 아카데미에서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게임 속 캐릭터의 정신력 수치가 낮은 상태에서 시련을 강행하면 환상에 잡아먹히는 일이 생기곤 했지.
하지만 이 시련에서 완전히 면역인 캐릭터가 몇 명 존재했다.
프레이 같은 경우에는 환상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걸 마주해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페이비는 정신력이 아무리 낮아도 극복해버리는 지라 문제가 생길 일이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시련의 내용을 알고서 임한 거였으니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보다 시련을 통과하기가 수월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해 봐야 뭘 하겠냐. 이미 펌블이 떠버렸는데.
“알른 영애. 리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대로라면 페이비는 평생 잠을 자게 될 거래요. 어쩌면 좋죠? 어떡하면.”
‘잠시만요.’
“얼빵영애. 조용히 해봐.”
울 것만 같은 목소리를 내는 조이의 말을 끊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없냐고? 있지. 그 방법이 없었으면 애초에 이 시련 자체에 참가할 생각을 안 했을 걸.
간단한 이야기다. 환각자체를 만들어 낸 녀석이 바로 앞에 있잖아. 당연히 그 해결책도 그 녀석에게 존재하겠지.
고개를 들어 분위기 파악을 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웃음을 짓고 있는 얼빠여우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내 시선이 닿자마자 거기서 한층 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도와 달라 말할 생각이라면 거절하겠다. 시련은 시련이니 말이다.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저 아이가 감당해야 할 일이겠지.”
이 얼빠 여우는 매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사람에게 호의적이다.
진짜 매력치가 극한을 찍으면 그 사람에게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내어주기도 하지.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자처해서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그러니 이 얼빠 여우에게 안 된다는 말은 네 매력이 부족해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라 받아들이면 된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매력을 더 끌어올리면 그만이다. 사람을 홀리는 얼빠 여우를 역으로 홀릴 수 있을 정도로.
마침 내 인벤토리에는 매력 수치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여러 물건이 존재하지.
‘리나님…’
“얼빠 여우.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본녀와 단 둘이 있고 싶다고? 고백이더냐? 적극적인 게 좋긴 하다만 본녀의 심장에 무리가…”
‘그런 거 아닌데요.’
“헛소리마. 너처럼 징그러운 변태랑 한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게 역겨워 죽을 것 같지만 참아주는 거니까.”
“하악. 날 선 시선과 매도도 좋구나. 몸 이곳저곳이 짜릿한 느낌이야.”
모니터 너머로 볼 때도 대사 칠 때마다 깬다는 느낌이었는데 현실이 되니까 더하네. 징그러워서 닭살이 돋는 느낌이야. 진심으로 기분 나빠.
그렇지만 얘가 유일한 해결책이니까 어쩌겠어.
알아서 해결을 하겠다 이야기하고 조이와 프레이를 바깥으로 내보낸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하나 둘 꺼내어 사용했다.
처음은 라노의 달콤한 향수. 몸에 뿌리는 순간 즉각적으로 매력 수치를 올려주는 소모품이다.
“향이 좋구나. 그대라는 꽃에 향이 더해졌으니 벌들이 정신을 못차리겠어.”
‘이제…’
“이제 부탁을 들어 줄 생각이 들어?”
“아니. 그대는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것으로는 불가하지.”
얼빠 여우가 입꼬리를 늘어트리며 주접을 떨었지만 아직 설득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꺼낸 건 여러 화장품이었다. 지금 쓸 수 있는 소모품 중에서 최고로만 엄선해 모은 물건들.
사용하는 방법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에린에게 배워두었던 지라 손을 움직이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호오. 이것 참. 아름다움의 위에 아름다움이 덧칠될 수 있는 게로구나. 허나 본녀를 흔들 수준은 아니구나.”
아직도 모자란가. 그 다음에 내가 꺼낸 건 여러 악세사리였다. 착용하는 것으로 즉각적으로 매력을 올려주는 물건들.
‘지금은 어떻죠?’
“지금은 어때? 변태 얼빠 여우? 네 변태적인 성향에 맞아 떨어져? 응?”
준비해 둔 모든 물건을 착용했더니 얼빠 여우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학!”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 눈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더니 얼빠 여우가 얼굴을 붉히면서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는 뻔뻔하게 변태 아저씨마냥 징그러운 말을 읊어대던 녀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진짜로 무언가에 홀린 듯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만족이야? 이제 페이비를 깨워 줄 생각이 들어?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낸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는 더듬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으. 지금의 그대는 본녀보다도 더 여우같은 매력을 풍기고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오.”
이걸로도 모자라다고?! 왜! 지금 거의 다 넘어왔잖아! 그냥 넘어 온 걸로 해주면 안 되는거야?! 반올림 해줘서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여주면 안 되냐고!
여전히 방법은 남아 있었다. 내 인벤토리에 고고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가지 아이템이 있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사용한 그 어떤 아이템보다도 크게 매력을 올려 줄 물건이 말이다.
흐으. 이것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었는데!
‘저기. 리나님. 잠시…’
“얼빠 여우. 변태처럼 힐끗힐끗 보지 말고 꺼져버려. 그리고 내가 부르면 들어오도록 해.”
“흠? 아직도 무어가 남은 게냐? 본녀의 심장을 앗아갈 무언가가 있다 기대해도 되는 것이야?”
‘제발 좀 꺼져 주시겠어요?’
“짐승 나부랭이라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거야? 난 꺼지라고 했어. 변태 가축아.”
“흐읍. 흡. 알겠다. 잠시 나가있도록 하마.”
늘어지는 입꼬리를 주체할 줄 모르는 얼빠 여우가 바깥으로 나간 후 나는 인벤토리에서 바니걸 의상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놨다.
돌아가면 불에 태워버릴 생각이었는데 이걸 입을 일이 생기다니. 제기랄.
<입을 게냐?>
‘히약?!’
“히약?!”
갑작스레 들려 온 목소리에 비명을 내지르며 어깨를 좁힌 나는 할배가 곁에 있었음을 깨닫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제일 빠르고 쉬운 방법이니까요.’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며칠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페이비를 깨울 방법을 수십 개는 넘게 찾아서 가져올 수 있지.
그렇지만 즉시 해결이 가능한 방법이 존재하는데 굳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먼저 말을 꺼내서 시련을 치르자고 이야기를 한 건데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맞다고 봐.
<고생하는구나.>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그건 그거고 할아버지는 잠시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으세요.’
<허?! 여아야! 잠시.>
죄송합니다만 24시간 내 옆에 붙어서 상주하시는 분의 눈에 흑역사를 새겨드리고 싶지 않거든요? 나중에 이거 가지고 놀릴 게 분명하니까.
할배를 인벤토리에 넣은 나는 침대 위에 있는 바니걸 의상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저 얼빠 여우한테 보여주고 말거잖아. 미친 얼빠 여우가 주접을 떠는 것만 견디면 아무런 문제도 없어.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끝마친 나는 갑옷의 연결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