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1
길드의 모험가들은 나를 향해 시선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 앞 뒤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이 너무도 위협적이었으니까.
할배의 말에 따르면 칼은 아예 모험가들을 향해 살기를 쏘아내며 위협을 하고 있다는 모양이니. 도저히 다가설 엄두가 안 나겠지.
‘살기라는 게 진짜 있어요?’
<당연히 있지. 일정 경지를 넘어선 자들은 눈빛만으로 다른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법이다.>
과거 존재감만으로 전장을 지배했던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할배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나는 접수대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메네스테일 길드입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은 책상을 가득 채울만한 어깨를 지닌 남성이었다.
여러 잔상처가 묻어있는 얼굴은 무척이나 험악해서 겁이 많은 사람이라면 남자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허나 난 괜찮았다.
알른 가문에서 워낙 얼굴이 험한 사람을 많이 봐서 적응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접수원의 얼굴을 자주 보았던 영향이 컸다.
접수원은 소울 아카데미에서 메네스테일 길드에 들어올 때마다 보는 얼굴이니까. 무서움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게…’
“허접한 메네스테일 던전에 들어갈 거야. 증서를 내놔. 떡대.”
접수원은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당돌한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이 사람 착한 건 게임대로네. 얼굴이 험해서 모험가들의 억제력이 되지만 다른 도시의 접수원들처럼 착한 아저씨.
“세 분이 함께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네.’
“그래. 딱 보면 몰라?”
“그렇군요. 처음 오시는 분들인 듯 하니 몇 가지 사항을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접수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메네스테일 길드에 대한 소개였다.
의뢰의 수주. 전리품의 판매. 던전 공략 시에 발생하는 세금. 이외에 던전을 공략할 때 주의해야 하는 여러 사안.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수십 번도 넘게 들은 사람이었던지라 접수원의 말을 대충 흘려 들었다.
“그럼 증서 발급 절차입니다. 우선 세 분의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칼입니다.”
“알새틴이라고 합니다.”
‘루시 알른입니다.’
“루시 알른이야. 잘 기억해둬. 떡대. 너 같은 평민은 보기 어려운 귀한 얼굴이니까.”
앞서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무적인 얼굴을 하던 접수원이었지만 내 이름을 들은 순간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저어. 혹시 솔라딘 왕국 알른 가문의 루시 알른 영애 맞으십니까?”
‘정확해요.’
“뭐야. 알고 있었어? 허술해 보이는 떡대치곤 제법이네.”
접수원의 얼굴 일부에 생겨난 균열은 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오크하고 힘대결을 할 것 같은 사람이 식은땀을 흘리는 광경은 꽤나 신선했다.
내가 막 루시한테 빙의했을 적 알른 가문의 기사들이 저랬던 거 같은데 말야.
<여아야. 네 소문은 마도 제국까지 퍼져있는 모양이구나.>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어요.’
예전에 알새틴이 가져다 준 보고서에 타국의 귀족에게 무례를 저지른 게 여럿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
하아. 이 놈의 빌어먹을 평판! 어디를 가도 루시 알른이라는 이름만 대면 쩔쩔매는 것 좀 그만 보고 싶어!
루시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한 접수원은 아주 빠릿하고 정확한 태도로 증서 발급 과정을 수행했다.
“내일 아침 길드에 들리시면 증서를 발급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덕분에 나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과정이 어찌되었든 간에 결과만 좋으면 된 거려나.
증서 발급과정을 끝마친 우리가 모험가 길드에서 빠져나왔을 무렵에는 이미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와 있었다.
여러 거센 모험가들이 모인 도시답게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친 내가 도달한 곳은 어느 허름해 보이는 여관의 앞이었다.
칼은 그를 보고서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내가 선택한 곳이니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할 말이 많은 게 눈에 띌 지경이었다.
아마 아가씨를 이런 곳에서 주무시게 할 수 없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쟤 그런 거 엄청 신경 쓰니까 말이야.
나는 그를 모른 체 하며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 곳의 주인은 무심한 인상의 남자였다.
보통의 여관주인이라면 손님을 반길 터이지만 그는 달랐다. 그저 가벼운 목례만을 건넬 뿐이었다.
내가 카운터에 섰을 때에도 아무 말 없이 멀뚱히 바라보는 그는 사교성이라는 단어를 날려먹은 사람처럼 보였다.
허나 내가 품 안에서 까마귀의 인장을 꺼내 보인 순간 그의 얼굴이 달라졌다.
잿빛과도 같던 얼굴에 생기가 생겨난 것이다.
“뉴먼 가문의 손님이셨군요. 실례했습니다.”
보통 대형 던전을 중심으로 생겨난 도시에는 수많은 것들이 모여 든다.
사람도. 물건도. 소문도.
그래서 뒷세계를 기반으로 일을 하는 뉴먼 가문은 대형 던전이 있는 도시라면 거의 다 지부를 설치해두지.
여기도 그런 장소 중 하나다.
“손님 세 분 숙박이십니까? 기간은 어떻게 되십니까?”
‘2주일이요.’
“길어도 2주.”
“확인했습니다. 바로 방을 안내해 드리죠.”
그 말과 함께 카운터 너머의 방에서 한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는 따라오라는 말을 했다.
그녀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일반적인 방이 있는 2층이 아니었다.
창고로 사용하는 듯 먼지와 잡다한 물건으로 가득한 방에 숨겨진 문 너머에 존재하는 장소.
허름한 바깥의 건물과는 달리 어지간한 귀족의 저택보다 잘 꾸며진 곳.
이 곳이 우리가 메네스테일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에 묵을 숙소였다.
내가 이래서 까마귀의 인장을 얻어 놨지! 이거 진짜 쓸모가 많거든!
“지금은 따로 묵는 분이 없는지라 편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가능한 한 모든 걸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뉴먼 가문에서 재직하는 여성은 자신을 닉이라고 불러 달라 했다.
물론 그는 아무 의미 없는 요청이었다. 메스가키 스킬이 다른 사람을 이름으로 불러주는 경우 봤어?
닉의 이름은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음침이로 개명 당했다.
“…음침이인가요.”
‘죄송합니다! 그치만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이해해주세요!’
“그래. 음침하게 생겼으니까 음침이. 완전 어울리잖아. 너도 마음에 들지?”
“…예. 물론입니다.”
그런 사소한 이슈가 지나간 후부터는 별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닉한테 수속성 마법사 한 사람을 수소문 해달라 한 것 정도?
그도 그럴 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이게 게임이었다면 최대 효율을 위해 여러 자잘한 퀘스트를 받으러 뛰어다녔을 텐데 지금 난 그런 것도 못한다고.
입을 열 때마다 허접 좆밥 병신 쓰레기 중 한 가지를 붙이는 건방진 꼬맹이한테 누가 부탁을 하겠어.
아카데미에서도 모조리 거절당했는데 여기도 비슷하겠지.
어차피 꼭 받아야 하는 퀘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라 오늘은 그냥 쉴 거야.
연습 모드고 뭐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푹 잘래.
<벌써부터 수련을 시작할 생각이더냐?>
내일 아침까지 쭉 잘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더니 할배가 목소리를 냈다.
할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저 내일 던전 공략하러 간다니까요? 쉬어야 한다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이럴 때일수록 실전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더 거세게 수련을 해야 하는 법!>
잔소리쟁이에 틀딱인 할배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습모드에 끌려가 밤새 메차쿠차 수련을 해야만 했다.
*
메네스테일 던전의 컨셉은 화산이다.
이글거리는 화산 아래에 던전이 지어진 느낌이라고 묘사하면 알아듣기 편하려나?
컨셉이 이러니 그 아래에 존재하는 여러 몬스터나 기믹들도 화산과 연관이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던전 안의 온도가 높아서 아무 준비 없이 안에 들어가면 일정 시간마다 화상 데미지를 입는다거나.
안에 존재하는 몬스터들도 하나 같이 불과 관련되어 있다거나.
용암, 불, 암석과 관련된 함정이 즐비하다거나.
게임을 할 적에는 던전의 난이도를 높여주는 기믹에 불과했었지만 이 모든 것이 현실로 바뀌니 느낌이 달랐다.
메네스테일 던전의 안은 그 자체로 이미 사우나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피부가 후끈후끈 거려서 깜짝 놀랐다니까.
심지어 지금 우리가 돌아다니는 곳은 아직 메네스테일 던전의 초입이었다.
총 80층으로 이루어진 이 던전이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심층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지옥이라 불러 마땅하리라.
물론 난 이럴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상해 두었다.
너무도 심각한 더위로 인해 주기적으로 체력이 깎일 정도라고. 그 더위가 얼마나 끔찍할지 뻔하잖아?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 나는 알새틴이 건네준 아공간 주머니에서 준비해 둔 물건을 꺼냈다.
[영원한 겨울의 마석]
[만년설로 뒤덮인 북부의 산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마석입니다. 북부의 끔찍한 추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감정 스킬이 해 준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이 마석은 냉기를 품은 녀석이다.
본래는 무기에 인챈트하거나 마법 스크롤의 재료가 되는 녀석이지만 이 마석에는 부가효과가 하나 더 있지.
바로 자신의 냉기를 주변에 퍼트려 온도를 낮추어 주는 것!
“알른 영애. 그걸 지금 사용하면…”
본래 용도보다 메네스테일 던전을 공략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아서 유저들끼리 농담 삼아 에어컨 보석이라 부르던 이 마석은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도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했다.
목걸이로 만들어 둔 마석을 꺼내 목에 걸자마자 냉기가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우와아아. 시원해… 아니. 좀 과하게 시원한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가는 얼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난 다급하게 목걸이를 벗었다.
뭐야. 뭐야?! 아니 시원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이상하잖아!
내가 에어컨을 틀어 달랬지 냉동 창고에 내던져서 얼어 죽여 달랬냐고!
잘못 준비한 게 아니냐는 항의의 의미를 담아 알새틴을 노려보았더니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부탁하신 물건을 준비한 겁니다. 알른 영애.”
‘그치만 이거 너무 효과가 강하잖아요!’
“허접 정보 팔이. 의뢰자의 요구도 제대로 반영 못 하는 거야? 이건 너무 과하잖아. 대체 언제까지 무능한 좆밥으로 살 생각이야?”
“허나 영원한 겨울의 마석은 다 그렇습니다만…”
그러니까 이것도 게임이 현실이 되며 생긴 영향인가.
게임 속에서는 던전의 패널티를 없애주는 효과로 그쳤지만 현실이 되면서 북부의 끔찍한 추위라는 단어가 현실화 된 거야?!
말도 안 돼. 이래서야 이 목걸이 못 써먹잖아!
“제가 목걸이를 구하며 들은 것입니다만 메네스테일 던전 20층 이후로는 별 패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다더군요.”
‘그럼 그 전에는요?’
“야. 허접 무능 정보 팔이. 그럼 그 전에는?”
“이 정도만 버틸 만 하지 않습니까? 다들 20층 전까진 그냥 다니는 걸로 압니다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 끔찍한 더위를 버티라고?!
그것도 철갑옷을 입은 상태에서?!
“여아야. 나중에 네가 오늘 입던 옷을 받을 수 있겠느냐? 안 빤 그대로 주면 참 좋을 듯 하다만.”
‘닥쳐요. 제발.’
“얼빠 여우. 닥쳐. 열 받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 뿐이다.
스피드런.
최대한 빠르게 오늘 공략 할당량을 채우고 이 끔찍한 불지옥에서 탈출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