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1
소울 아카데미의 던전학 교수 중 한 명. 제슬은 기말고사에 출제할 던전을 점검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어려워졌네.”
이건 시험으로 낼 수 없어. 다른 던전학 교수들이 이 문제를 보면 1학년들한테 원수라도 졌냐면서 빈정댈 게 분명해.
빌어먹을 꼰대 놈들. 지들이 그렇게 던전 구성을 잘하면 지들이 문제를 만들든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다 짬 때려 놓고 시험 문제를 만들어 가면 이게 안 좋니 저게 안 되니 하면서 지적질이나 하고 말이야.
진짜 다 뒤져버렸으면 좋겠다.
“하아. 어쩌다 던전 설계가 이런 식으로 된 거지?”
오늘 점심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멀쩡한 던전이었는데 왜 학생은커녕 현직에서 일하는 사람이 와도 공략하지 못할 마경이 된 걸까.
그를 곰곰이 돌이켜 보면 제슬은 머지않아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던전 제작을 하는 도중에 루시 알른을 의식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였어.
루시 알른.
현 소울 아카데미 1학년 수석.
이미 학생 수준을 아득히 벗어났다 평가 받는 괴물이자 소울 아카데미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고 있는 천재.
그리고 제슬이 진행하는 던전학 수업을 듣는 사람 중 하나.
그녀의 건방진 어투와 얄미운 웃음을 떠올린 제슬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더했다.
처음 루시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슬은 루시를 좋게 보았다.
그녀에 관한 소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루시가 입학시험에서 보여준 인상적인 모습만을 뇌리에 새긴 제슬은 루시가 훗날 크게 될 사람이라 확신하고 그녀의 성장을 돕고자 했다.
허나 이 결심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참. 실력이 허접하니 질문의 수준도 허접하네.’
아카데미의 학기가 시작되고 채 이 주가 지나기 전에 제슬에게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콧대를 찍어 눌러 주고자하는 대상이 되었으니까.
‘왜 자냐니. 배울 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심지어 볼 것도 없는데 어떻게 안 자?’
‘설마 내가 이걸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야? 푸하핳. 날카로운 질문 했다는 얼굴 좀 보라지. 진짜 허~접이네.’
‘교수면서 이것도 모른다고? 진짜로? 우와아. 대체 교수 자리는 어떻게 차지한 거야?’
아카데미의 학기가 진행되는 동안 제슬은 한 번이라도 루시 알른이 입을 우물대는 걸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런 것도 모르냐는 말을 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다.
허나 그 모든 시도 끝에 돌아오는 것은 항상 깔보는 듯한 눈빛과 한심하단 어투뿐이었다.
‘뭐어? 왜 이런 결론이 나온 건지 알려달라고? 맨입으로? 자. 알른 교수님~ 제발 이 허접하고 멍청한 자칭 교수에게 가르침을 주세요~ 라고 해 봐. 그럼 가르쳐 줄게.’
루시 알른은 단순히 건방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건방질만한 능력을 지닌 천재 중의 천재였던 것이다.
“아악! 진짜 열 받아아아!”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소리를 내지르던 그녀는 여태까지 던전을 설계해두었던 종이를 마구잡이로 찢어서는 허공에 흩뿌려 버렸다.
루시 알른에게 엿을 먹여 보겠단 일념 탓에 온갖 괴악한 것들이 들어가 버린 저 던전은 어디에도 쓸 수가 없을 테니. 화풀이를 하는 데라도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개 같은 년. 지가 그리 던전을 잘 알면 지가 만들어… 아.”
그래. 지가 던전을 만들어 보라고 그러자.
나 따위로는 도저히 평가를 할 수 없으니 이걸로 시험을 대신하겠다고 그러는 거야.
처음 말을 꺼내면 온갖 비꼼을 날리겠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
그 후에 던전을 만들어 왔을 때 이 정도 밖에 못하냐면서 비웃어 줄 미래를 생각하면 참아낼 수 있다고!
“저어기. 교수님?…”
허공을 바라보면서 씩씩거리다가 갑자기 미친 년처럼 웃음을 흘리는 제슬의 모습에 조교수가 걱정스러운 듯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제슬이 고개를 돌려 실핏줄이 선 눈으로 조교수를 노려봤다.
“조교수.”
“예!”
“지금 당장 칼 교수한테 가서 이야기 해. 알른 영애한테 전할 말이 있다고 말이야.”
루시 알른. 네가 어디 이것까지도 잘하나 보자.
*
칼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지금 나의 수준이 아카데미 1학년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있는 고로 던전학 수업의 시험으로는 날 평가할 수 없다.
그러니 던전학 수업의 평가를 전부 다 최상으로 내주는 대신 기말고사에 출제할 던전을 만드는 것으로 내 평가를 대신하겠다.
“여러모로 고민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이 이야기를 전해 준 칼은 쓴웃음을 지으며 던전학 교수를 변호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짬처리다.
자기가 일하니 귀찮으니까 나한테 넘기는 걸 거야.
던전학 교수 그 사람 자기 노예 있지 않나?
정 문제 만들기 귀찮았으면 노예한테 만들어오라고 하면 됐을 텐데 왜 굳이 나한테 짬처리를 하려는 거지?
진짜 모르겠네.
“거절하시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거절의 의사라고 생각한 걸까. 칼은 자신이 던전학 교수에게로가 잘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아뇨. 할게요.’
“똑똑한 강아지도 이것보다는 눈치가 좋을 텐데. 허접견이라는 칭호도 아깝네.”
나한테 직접 던전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준다잖아!
그것도 화면 너머의 던전이 아니라 시험에서 실제로 쓰일 던전을 말이야!
이걸 미쳤다고 내가 거절해!?
대가를 받겠다 그래도 있는 거 없는 거 다 내어줄 마당에 공짜로 던전을 만들 수 있는 데다가 성적까지 보장을 해주겠다니!
완전 사장님이. 아니 교수님이 미쳤어요라고!
절대 거절 안 해.
아니 거절 못 해.
던전학 교수가 나중에 말을 바꾼다 그러면 교수를 납치감금해서라도 던전을 만들고 말 거야!
이건 내 꿈이었다고!
언제였더라.
내가 아직 이 세상에 발을 들이기 전.
겨우 몇 천 시간밖에 안 했는데 할 게 없다니 좆망겜 수준하고는. 이란 헛소리를 하고 다니던 시절에.
나는 직접 던전을 만들어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게시판에서 한 악질 모드러와 키배를 뜬 것이 계기였지.
‘공짜로 주는 거 처먹으면서 존나 까다롭네. 애미가 반찬 차려주면 하나하나 지적할 패륜아 새끼.’
‘엄마 없어서 패륜도 못함. ㅅㄱ.’
‘진짜 개 또라이 새끼네. 꼬우면 니가 만들든가 씹새야.’
발로 만들어도 니가 만든 것보다는 나을 거란 답변을 남긴 난 모드를 제작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았다.
시작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개쩌는 지식으로 최고의 모드를 만들겠단 성대한 꿈을 지녔던 나지만 그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버리고 말았다.
우선 한 가지. 소울 아카데미는 모딩 툴을 따로 제공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프로그래밍에 대한 지식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같잖은 자존심을 지킨다고 코딩을 배워서라도 모드를 만들겠다며 책까지 구입한 나였지만 그 의욕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채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당신도 할 수 있다! 혼자 하는 파이썬!’을 중고 장터에 내놓은 난 모드러에게 도게자를 박았고 그 자식이 시키는 대로 햄버거를 뿌려 멍청함의 대가를 치렀지.
그 후에도 나는 괴악한 모드를 마주할 때마다 직접 던전을 만들고 싶단 생각을 품었지만 그 때마다 실패를 거듭할 뿐 모드를 제작하는 데 성공한 적은 없었다.
평생 이루지 못할 염원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날이 드디어 찾아왔구나.
지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믹만 하더라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아카데미에서 제작하는 던전이니만큼 모든 기믹을 때려 박을 순 없겠지.
하지만 괜찮아. 던전의 퀄리티는 기믹의 개수로 정해지는 게 아니니까.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는가? 표정이 밝군.”
어떤 던전을 만들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대련을 끝마친 아서가 내게 말을 걸었다.
“자신만만하던 3왕자님이 결국 나한테 발린 게 웃긴 거 아닐까.”
“발악해가면서 이긴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마지막 순간에 그대가 검을 내던지며 돌진한 게 아니었다면 본인이 이겼을 터!”
“맞아. 3왕자님은 잘했어. 나보다 허접했을 뿐.”
“조금 엇나갔으면 패했을 녀석이!”
“그래. 내가 운이 좋아서 이겼네. 와. 신난다.”
무표정한 얼굴과 무미건조한 어투로 아서의 복장을 터트리는 프레이의 모습을 보던 난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프레이. 저 녀석이 원래 저렇게 말싸움을 잘했던가?
마이페이스로 헛소리를 해서 열불이 터지게는 해도 상대를 직접적으로 도발하는 경우는 없었을 텐데.
…혹시 저거 나 때문인가?
나랑 만날 대련하다 보니까 도발하는 것까지 따라하게 된 건가?
그러고 보면 쟤 1학기 기말고사 때 날 도발하는 걸로 재미를 봤었지.
본의 아니게 끔찍한 혼종을 만들었음을 깨달은 난 슬며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붙어! 이번엔 내가 반드시!”
“싫어. 3왕자님은 허접해서 재미 없는 걸.”
“나한테 질 것이 두려운 것이냐!”
“응. 무서워. 그러니까 안 할래.”
“이. 이이이!… 프레이 켄트으으으!”
두 사람의 싸움을 중재한 것은 칼이었다.
그는 이성이 날아가려 하는 아서를 붙잡고서 두 사람의 대련은 팽팽했으며 누가 이기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보증하는 것으로 둘의 말싸움을 끝냈다.
중간에 프레이가 몇 마디를 더하긴 했지만 나조차도 이기지 못하는 강자인 칼의 발언은 그 자체로 권위가 생겨났으니.
결국 프레이도 칼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금 이성을 되찾은 아서는 긴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래서 루시 알른. 그대는 왜 웃고 있었던 거냐.”
‘제가…’
“어떻게 교수가 된 건지 모를 자칭 던전학 교수를 대신해서 제가 기말고사의 던전을 만들게 됐거든요. 그 안에서 질질 짤 허접들을 생각하니까 절로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뭐? 그대가 기말 고사의 던전을 만들게 됐다고?”
내 이야기를 들은 아서는 내 말이 맞는 지 확인하기 위해 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의미를 파악한 칼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다시금 내 쪽으로 고갤 틀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방금 전 프레이에게 버럭대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중한 목소리를 냈다.
“루시 알른. 내 하나만 당부하겠다. 제발 그대를 기준으로 난이도를 정하지 마라. 그랬다간 1학년 전체가 낙제를 하는 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잔뜩 분위기를 잡길래 무슨 이야길 하나 했더니 괜한 걱정이었네.
‘저도 알아요.’
“불쌍 왕자님. 제가 1학년 대부분이 허접이란 말도 아까운 놈팽이뿐이란 걸 모를 것 같아요?”
“알기야 하겠지! 그렇지만 그대는 상식이란 게 없지 않나! 안 봐도 보인다! 이 정도면 쉬울 거라면서 아카데미 3학년도 통과하지 못할 괴악한 던전을 만들어내는 그대가!”
아서는 점차 목소리를 드높이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목숨을 빼앗아선 안 된다거나. 던전에 트라우마가 생겨선 안 된다거나. 다른 시험이 기다리고 있단 걸 기억하라던가.
그러한 조언이 나오는 이유가 날 걱정해서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니 귀담아 들어야한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말야.
충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어 버리면 곤란해. 폭군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잖아.
“알겠느냐! 다시 한 번 말을…”
“불쌍왕자님♡ 참 여자애마냥 재잘재잘 말이 많으시네요♡”
“…뭐냐. 왜 메이스를 치켜드는 게냐.”
“아무래도 불쌍 공주님이 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특별히 도와드리려고요♡”
“그으. 조언을 한다 생각했는데 과했던 모양이구나. 내 이리 사과하마. 그러니 그 살벌한 무기를 내려 놓아주지 않겠느냐?”
“에이♡ 사양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미안! 미안하다! 내가 말이 과했다! 내 무엇이라도 할 테니 부디 그 분을 풀어다오!”
“기쁘시다니 저도 기쁘네요♡ 불쌍왕자님이 여자애가 되고 싶어 하는 변태였단 걸 진즉에 알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메이스를 어깨에 맨 채 한 걸음을 내딛자 아서가 다급히 칼과 프레이 쪽으로 목소리를 드높였다.
“보지만 말고 도와 다오! 이러다간 내가!”
“죄송합니다. 3왕자님. 아가씨의 뜻인지라.”
“루시는 안 허접하고 무서워. 미안.”
“이 비정한 놈들 같으니! 내 오늘의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야!”
울분에 찬 목소리를 내지른 아서는 자신의 검을 뽑아들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춘기 꼬맹이답게 부끄럼이 많으시네요♡ 이 천사같은 여자애한테서 도망치시는 걸 보면♡”
“그래! 천사는 천사구나! 내 임종을 알리러 온 천사 말이다!”
에이. 무슨 과장된 소리를.
걱정 마. 아서. 죽이진 않을게.
그냥 내가 신경 못 쓰는 동안 네가 땡땡이를 쳤는지 안 쳤는지만 확인할 테니까.
죽기 직전까지만 구르자.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