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0
태양이 가운데를 가리킬 즈음에.
할 일이 있다며 훈련장에서 벗어났던 루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심통이 난 표정과 함께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프레이조차도 슬며시 눈치를 보게 될 정도로 썩어 들어가는 루시의 얼굴에 네 사람은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걸까하는 의심을 가졌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사건사고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변태사도가 잠시 너네들 좀 보고 싶다니까 따라 와.”
변태사도?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조이는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보통 루시에게 타박을 하는 역할은 아서의 것이었으니까.
허나 오늘은 달랐다. 아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루시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지난번에 호되게 당하시더니 말을 아끼시는 건가.
으으. 이럼 어쩔 수 없이 내가 물어봐야 하잖아.
“저. 영애. 죄송합니다만 변태사도가 누구죠?”
“있어. 말을 섞고 싶지도 않은 역겨운 페도 변태 자식이.”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궁금한 건데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던 조이가 바라던 대답을 해 준 것은 예상외의 사람이었다.
“예술 교단의 사도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그 변태 자식 말야.”
예술 교단의 사도가 변태?
혐오 어린 루시의 표정을 살피던 조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갤 갸웃거렸다.
그녀가 아는 예술 교단의 사도 프레테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프레테.
조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대륙을 유랑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떨쳤던 사람.
악신을 추종하는 이들이 일으킨 여러 일들을 수습하며 예술 교단의 이름을 드높인 성직자이자 대륙의 유행을 선두하는 위대한 예술가인 그는 뭇 사람들의 존경을 사는 이였다.
프레테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더라면 그가 어찌 파트란 축제에 참가할 수 있었겠는가.
축제에서 몇 번이나 프레테라는 사람을 마주했던 조이는 여러 귀족 부인들이 입에 닳도록 칭찬하는 그가 변태라 불리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이?”
“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일단 가 보시면 이해하게 될 거에요.”
알른 영애뿐만이 아니라 페이비까지 이렇게 말 할 정도라면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긴 한가보네.
“이제 할 말 없지?”
“아뇨. 있어요.”
“뭔데. 빨리 말 해. 내 귀한 시간 낭비시키지 말고.”
“지금 이 꼴로 예술 교단의 사도님을 만나러 갈 순 없어요.”
방금 전까지 죽어라고 체력단련을 하느라 엉망진창이 된 머리카락. 땀범벅이 된 옷. 흙투성이 얼굴. 이런 모습으로 프레테님을 만날 수는 없어!
“흐응? 얼빵이 너 취향 참 별로네. 그 변태의 어디가 좋은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프레테님께서 여전히 멋지신 분인 건 사실이지만 전 스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분에게 호감을 품을 정도로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럼 뭔데? 얼빵이가 화장한다고 얼빵이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영애도 아시잖아요! 예술 교단의 사도께서 사교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그가 꺼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귀족을 묘사하는 부사가 될 정도의 명망을 지닌 게 프레테다.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서 파트란 가문의 영애가 후줄근했다는 이야기라도 꺼내면!
자신의 뒤에서 나돌 음험한 이야기를 상상한 조이는 머뜩 찮다는 루시의 표정을 앞에 두고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어쨌든 저 씻고 올 거에요!”
“영애님. 저도 몸가짐을 하고 오겠습니다.”
“그럼 나도 다녀오마. 교단의 사도를 만나는 데 이런 꼴을 할 순 없으니.”
그렇게 세 사람이 떠나가 버린 후 훈련장에 남겨진 루시는 여전히 루시가 어색한 듯 우물쭈물거리는 프레이를 보다 이마를 붙잡았다.
“바보 검사.”
“…응?”
“너도 씻고 와.”
“굳이?”
“그럼 나중에 하루 종일 대련하면서 주제 파악을 시켜줄게.”
“알겠어. 갔다 올게.”
*
“3왕자님. 지금 제게 흐트러진 부분이 있나요?”
예술 교단의 사도가 기다리고 있다는 방문 앞에 선 조이는 스스로의 차림을 살피며 물음을 던졌다.
“하아. 조이. 그 질문만 벌써 네 번째다.”
“그치만.”
“그리고 내 답변은 세 번째와 같다. 제발 호들갑 좀 그만 떨어라. 예술 교단의 사도가 멍청이도 아닌데 파트란 가문의 영애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할까.”
아서의 정론 앞에 조이는 결국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는 호들갑이었으니까.
그렇게 소란이 그친 후 아서는 한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테는 여느 때처럼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아서에게 인사와 함께 칭찬을 건네고.
조이에게는 파트란 축제를 언급하며 친근함을 드러냈으며.
페이비 같은 경우에는 순수한 감탄과 함께 훌륭해졌다는 말을 전했다.
물론 프레테는 프레이에게도 칭찬의 말을 건넸지만 프레이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동조차 존재치 아니했다.
칭찬이 무의미함을 느낀 걸까. 프레테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조이와 페이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트란 영애. 그리고 주신 교회의 성녀님. 제가 두 분의 의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만 혹여 바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네?”
“…예?”
“어라? 못 들으셨습니까? 영애께서 제게 부탁을 하시기에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다 생각했습니다만.”
조이는 프레테의 말이 이어지는 도중 뒤 쪽에 있는 루시 쪽으로 고갤 돌렸다.
영애?!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제가 영애께 드레스를 골라달라 부탁하긴 했지만 이건!
“왜? 싫어? 그럴 수도 있겠네. 이런 역겨운 변태가 만든 옷이라면 나라도 소름이 끼칠 테니까.”
“아뇨! 싫을 리가 있나요! 그게! …그. 단지 기대에 비해 너무 과한 것을 받아 놀랐을 뿐입니다.”
당장 이 분께서 만든 장신구를 끼기만 해도 그 사교장의 중심이 될 수 있는데 프레테님께서 직접 만든 드레스라니!
과합니다!
부담스럽다고요!
전 이 정도까지 바라지 않았어요!
“푸하핳. 얼빵 영애. 웃기는 소릴 하네. 이 변태가 만든 게 뭐 대단하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세요?”
장신구도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게만 건네주는 것이 예술 교단의 사도일지언데 그 분께서 개인에게 맞추어 드레스를 제작해 주시는 게 대단한 일인 건 당연하잖아요!
농담하시는 거죠?! 그쵸?!
“조이. 저 녀석을 그리 오래 봐 놓고도 모르는 게냐. 루시 알른은 사도께서 지닌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말도 안 돼.”
“아하하. 파트란 영애. 진정하십시오. 알른 영애께서 말씀이 마냥 틀린 것도 아니니까요.”
당사자인 프레테의 만류에 조이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이 상황까지 왔으면 거절하는 것도 실례야.
조이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도께 맡기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사도께서 바라는 대로 해주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좀 생각을 해봐야겠네요.”
으으. 알른 영애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던 간에 이건 어마어마한 빚이야.
단순히 친구 간에 오고 가는 선물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걸 갚으려면 대체 뭘 해야 할지!
조이가 속으로 신음하던 그 때 프레테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루시의 곁에 섰다.
“그럼 여러분들. 잠시 이 곳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영애를 꾸며드릴 예정인데 여러분들께서 평가를 해주셨으면 해서요.”
“이 변태의 눈을 믿기 어려우니까 부탁하는 거야. 아무리 식견이 허접해도 이 토 나오는 페도보다는 나을 테니까.”
“아하하. 보시다시피 영애께서 절 워낙 불신하시는지라. 부디 기다려 주십시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이 티격거리면서 떠나가기 무섭게 아서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루시 알른. 저 녀석 도대체 프레테님과 무슨 관계지?”
“그러게요.”
왕의 부탁마저 면전에서 거절하는 프레테님께서 영애의 부탁을 듣고 우리 둘의 드레스를 만들어주기로 했다니.
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기에 저럴 수가 있는 거지?
아. 그러고 보면.
“페이비. 당신 무언가 아는 게 있죠?”
영애께서 프레테님을 변태사도라 불렀을 때 페이비만큼은 그 말을 알아들었어.
그렇다는 건 페이비가 둘 사이에 대해 아는 게 있다는 소리겠지.
자신을 향하는 아서와 조이의 시선에 페이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는 게 있긴 한데요. 그으.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페이비의 반응을 본 조이는 눈을 크게 떴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정석적인 대답을 했을 페이비가 당혹스러워하는 티를 내다니!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길래.
…설마?!
“영애께서 프레테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신 건가요?!”
“조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조이가 소리를 내기 무섭게 페이비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은 두 분 모두에게 실례가 되는 발언이랍니다! 주의해주세요!”
“그. 죄. 죄송합니다. 페이비.”
이게 아냐?
그럼 뭐지?
대체 무슨 연관이 있기에 페이비가 말을 하는 걸 꺼려하는 거지?
도저히 추측가는 부분이 없어. 조이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 조이는 모든 생각이 증발해 머릿속이 새하얀 색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다.
하얀 도화지가 되어버린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새겨진 단어는 고귀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무심한 듯 내려다보는 붉은 색 눈동자도.
앙 다문 입술도. 살짝 드러난 쇄골을 스치며 내려가는 비단 같은 머리카락도.
하늘에서 내린 눈으로 빚은 듯 새하얀 드레스와 그와 비슷할 정도로 말끔하면서도 분명한 생기를 지닌 피부도.
그 모든 것이 너무도 고귀하고 고결하여서 조이는 여성의 등 뒤에서 날개의 환상을 보았다.
뭐. 뭐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래. 분명 그런 걸 거야.
꿈이 아니라면 천사께서 내 앞에 등장하신 게 말이 안 되잖아.
…흐엑?!
뭐야. 왜 천사께서 나한테 다가오는 거지?
나 뭐 잘못 했나? 또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건가?!
“…들려?”
“네헷?!”
“하아. 진짜. 자꾸 이러니까 내가 널 얼빵이라고 부르는 거잖아. 이 얼빵얼빵아.”
“…알른 영애? 세요?”
“바보야?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사람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가 없잖아.”
…맞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영애 뿐이니까.
어어. 그러고 보면 이 드레스 어딘가 익숙한데.
내가 골라 드린 건가?
아니 그치만 저번에 입으셨을 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 디자인은 분명 내가 고른 게.
“…에엑?!”
정말로 영애라고?!
영애께서 제대로 꾸미시면 이렇게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소리 좀 그만 내고. 네 허접한 눈으로 보기엔 어때?”
“정말 고귀하세요…”
“푸하핳. 공작영애치고는 너무 어휘가 모자란 거 아냐?”
만족스러운 듯 한참을 키득거리던 루시는 여전히 굳어 있는 다른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와아아. 진짜 뭐라고 묘사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볼 때마다 어휘가 증발해서 고귀하다는 말밖에 남지 않아.
다른 사람들 반응을 보면 나만 이런 건 아닌 모양이야.
3왕자님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뻘개져선 제대로 말도 못 잇고 계시고.
페이비는 제대로 보는 것조차 못해서 힐끗힐끗 거리고 있고.
켄트 영애께서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채 눈으로 알른 영애를 쫓고만 있을 지경이라니.
안 그래도 예쁜 영애를 프레테님께서 꾸미시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구나.
…나도 한 번 부탁을 드려볼까.
설령 거절 당하더라도 한 번 쯤은.
“알른 영애.”
“응? 뭔데? 얼빵아?”
“프레테님께선 어디에 계신가요?”
“그 변태 새끼는 왜?”
“한 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옆 방에 있긴 한데 대화는 못 할 거야. 역겨운 페도 새끼답게 인간이길 포기해 버렸거든.”
…인간이길 포기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시길래 영애의 목소리에서 저런 진득한 혐오가 묻어나는 걸까.
호기심이 생겨난 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옆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 쓰러져 있는 프레테의 모습을 본 순간 조이는 루시의 혐오를 이해했다.
코에서 줄줄 새어나오는 피.
여한이 없다는 듯 행복함으로 가득한 얼굴.
입가에 새겨진 징그러운 웃음.
“아아아. 여신님. 전 이 곳에서 또 다른 여신을 마주했습니다. 은혜로운 발로 밟아주신 이 얼굴을 걷어차 주시는 자비까지 베풀어 주셨지요. 마음 같아선 평생 씻지 않고…”
그리고 음흉한 목소리와 사람을 절로 질리게 만드는 내용까지.
그 곳에 예술 교단의 사도 프레테는 없었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당장 감옥에 가두어버려야 할 변태 새끼 하나뿐이었다.
그 이상의 정경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조이는 슬며시 문을 닫아버리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루시를 껴안았다.
“얼빵아. 갑자기 왜 이러는.”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영애.”
“…응?”
“진짜 진짜 수고하셨습니다. 영애.”
“어. 응. 그래.”
…이제서야 페이비의 심정이 이해가 가네.
예술 교단의 사도가 저런 미친 변태라는 걸 어떻게 이야기하겠어. 나 같아도 말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