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3
“2왕비님께서 저를.”
카리아가 설명을 끝마치자 헤이샨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카리아와는 달리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지금 그녀가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을지 추측하는 건 가능했다. 게임 속 사이드 스토리를 진행하다보면 헤이샨이 진심을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으니까.
자신의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 어쩔 수 없는 이별에 대한 아쉬움. 현실적인 벽을 넘는 게 불가능함에 대한 회한.
게임 속 스토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2왕비의 이야기를 들은 지금은 여기에 몇 가지 감정이 더 추가되겠지만 큰 틀은 바뀌지 않으리라.
“어떡할래? 만나고 싶다면 자리를 주선해 줄게.”
“…제게 선택지가 있나요?”
“있을 것 같아? 아카데미 출신인 당신이라면 알 텐데?”
카리아가 해맑은 웃음을 짓자 헤이샨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왜? 만나기 껄끄러워?”
“헤어질 때가 좋지 못했거든요. 다시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그녀는 2왕비와 만나는 광경을 상상한 듯 미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저어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시면.”
‘안 돼요.’
“정말 될 거라고 생각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졸업생이란 작자가 그렇게까지 사리분별 안 되는 멍청이는 아니길 바랄게.”
평소 같았으면 그녀를 배려해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라샤가 여기에 오기 전에 그녀를 빼돌려야하거든.
라샤가 호의를 가장해 나를 엿 먹인 후 나는 내가 당한 것을 되갚아주기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일단 라샤가 짜증나게 만들고 싶기는 한데 지금 내가 라샤와 적대를 하게 되면 좀 여러모로 곤란해진단 말이지. 걔가 정신이 반쯤 나간 미친년이라는 것과 별개로 라샤가 지닌 무력은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라샤가 호의로 나를 엿 먹였듯 나도 호의로 그녀를 엿먹여주기로 결정했다.
라샤가 노리는 강자? 난 그런 거 몰라. 나는 그냥 고귀하신 솔라딘의 2왕비님께서 하신 부탁을 들어줬을 뿐인 걸. 그것 때문에 라샤가 헛걸음을 하게 되겠지만 그건 나랑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야.
“그으러면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하나요?”
헤이샨이 조심스레 물음을 던지자 카리아가 슬며시 내 표정을 살폈다.
으음. 솔직히 바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카리아와 커즈 뉴먼에게 듣기로 라샤는 순간이동의 진을 이용하지 못한다.
강자를 사냥하겠다며 그녀가 벌여놓은 패악질이 너무도 많았기에 진을 설치해 둔 이들이 그녀를 이동시키는 걸 거부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라샤가 자신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 난장판을 만들었을 때 그 대가를 감당하는 것은 누가 되겠는가.
라샤 본인은 아니다. 그녀는 베네딕이 인정할 수준의 강자. 어지간한 힘으로 그녀에게 덤벼들었다가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니까.
이전에는 라샤에게 벌을 내리겠노라고 덤벼든 바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대지에 바침으로써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했을 뿐 라샤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사람은 실패에서 배우는 동물인지라 처참한 희생을 본 이들은 라샤에게 덤비는 대신 라샤에게 도움을 준 이들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당사자들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들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라샤로 인해 생겨난 피해에 책임을 져 줄 이들이 필요하다는 것 뿐.
이러한 일이 몇 번이나 라샤가 지나간 자리에서 발생했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라샤와 협력하는 걸 거부하게 되었다.
성격이 험악한 인간이라면 다른 이들을 협박해 제 뜻을 이루었을 테지만 라샤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강자의 사냥에 일생을 바친 미치광이일 뿐 학살자는 아니었으니까.
협력 받을 수 없음을 깨달은 라샤는 그냥 자신의 손과 발로 모든 걸 해결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테르샤 제국에서 빠져 나온 그녀는 자신의 걸음으로 군도를 향해 이동했다.
라샤 본인이 지닌 육신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기에 그녀의 이동 속도는 마차보다도 빨랐지만 순간이동의 진 같은 이적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했다.
카리아가 이야기하길 여기까지 오는 데 최소 2주는 걸릴 거라 했었으니까.
‘일주일 정도 여유를 드릴게요.’
“네 멍청한 얼굴이 재밌어서 특별히 일주일 정도 여유를 줄 게. 아무리 멍청한 허접이라도 그 때까진 모든 걸 정리할 수 있겠지?”
군도의 던전 공략이 끝난 후 데려갈 생각으로 말했더니 헤이샨이 애매하게 웃었다.
“저어. 조금만 더 자비를 베푸시면.”
‘바로 가실래요?’
“멍청한 허접 모험가는 지금 바로 가고 싶은 거구나? 난 착하니까 그 정도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있어.”
“죄송합니다. 주제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내 사나운 웃음을 마주하기 무섭게 사그라 들었다. 어쩌겠는가. 그녀는 변변찮은 뒷배도 없는 모험가고 나는 알른 백작가의 하나 뿐인 딸인데.
루카의 질투대상인 그 인간이나 라샤급의 강자가 아닌 한 내 갑질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냥 2왕비님이 껄끄러워서 시간을 끄는 건 아닌 듯 한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헤이샨이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옆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은 카리아가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그 물음을 부정하려던 헤이샨이었지만 카리아의 앞에선 그 모든 반항이 무의미했다. 손동작 하나만으로 감정을 읽는 기인 앞에서 거짓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저어. 그것이 다른 지역의 던전을 탐험하다 군도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되어서요.”
“여기에 뭔가 숨겨져 있다고?”
“예. 그게…”
헤이샨의 이야기에 카리아가 집중하는 동안 나는 턱을 괸 채 그녀의 말을 흘려들었다.
나는 헤이샨이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안다. 그걸 어떻게 찾아야 하는 지도. 찾아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두 다 알지.
그래서 난 헤이샨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지금쯤이면 조이가 아서한테 토끼귀를 전해줬겠지? 분명 아서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걸 착용했을 거야. 걔 은근히 그런 부분에서 고지식하니까.
조이는 그 모습을 보고 애써 웃음을 참았을 거고. 프레이는… 어. 걔는 잘 모르겠다.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아쉽네. 나도 헤이샨을 만나러 와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같이 구경했을 텐데.
“이게 제가 사막의 던전에서 찾아낸 지도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별 게 없는데?”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면 아서가 나한테 이게 뭐냐고 따지겠지. 그럼 난 그 녀석한테 이렇게 말해줄거야. 내기가 오늘 하루로 끝날 것 같냐고. 매일매일 벌칙이 추가될 예정이라고.
그렇게 아서를 몰아붙이다 보면 옆에 있던 조이가 너무하다 그럴 테니까 난 그 때가서 연대책임을 주장할 거다. 던전 공략법을 알려줄 테니 너도 함께 내기를 수행하라고 말야.
이쯤 되면 알겠지만 아서는 어디까지나 미끼에 불과해. 내가 노리는 건 조이야! 난 얼빵이가 부끄러워서 어찌할 줄 모르는 꼴을 보고 싶다고!
흐헤헿. 상상만 해도 재밌네. 얼빠여우의 심정을 약간이나마 이해…
“하지만 이렇게 신성을 흘리면 이 지도의 진가가 드러나죠.”
지도에서 흘러나오는 신성을 본 순간 난 헤이샨이 들고 있는 지도가 게임 속의 것과 전혀 다른 물건임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게 게임 속 지도에는 이런 기믹이 없었으니까. 시도를 아예 안 해 본 거 아니냐고?
그럴 리가. 소울 아카데미에 미쳤던 나는 모든 떡밥을 회수하기 위해 미친 짓을 반복했다.
모니터 너머의 세상에는 이런 거 없었어. 그러니까 이 지도는 이 세상만의 변수야.
변수.
평상시의 나라면 변수라는 단어를 듣고 기겁을 했을 것이다. 보통 내게 찾아오는 변수라는 것은 내 목을 갈취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렇지만 이 변수는 그런 위험한 종류가 아니었다.
“분명 이 군도에는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습니다.”
게임 속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컨텐츠와 그 아래에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보상. 썩은물의 피가 끓는 게 느껴진다.
모험을 바라는 듯한 헤이샨에게서 지도를 빼앗아 온 나는 지도 위의 그림이 희미한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성직자와는 거리가 먼 헤이샨이 도구를 이용해 신성을 불어넣은 탓이겠지. 문제는 없다. 여기에는 주신의 사도가 있으니까.
지도에 나의 신성을 불어 넣은 순간 그 위의 그림이 선명해짐과 동시에 알림음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군도의 보물을 찾아라!]
[당신에게 군도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당신의 손으로 군도의 보물을 찾아내십시오!]
[보상 : ???]
[실패시 : ???]
일단 퀘스트 자체는 게임 속에 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그렇지만 지도의 내용이 달라진 이상 진행과정도 다를테고 보상으로 얻을 것도 달라지겠지.
어쩌면 보물에 더해 허접주신이 부가적으로 뭘 더 줄지도 모르고.
어차피 하기로 결심했는데 덤까지 붙었단 사실에 함박웃음을 지은 나는 선명해진 그림을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능 58의 멍청이에게 보물지도의 해석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라는 걸.
…어어. 일단 이게 군도의 지도 같기는 한데 단서가 뭐지? 여기 적혀 있는 글자는 또 뭐고?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다 못해 뇌까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지도를 다시금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인간이란 혼자가 아니기에 여태까지 살아남은 동물. 스스로의 지식이 부족하면 다른 이들에게 협력을 구해야 하는 법!
카리아와 헤이샨은 선명해진 지도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이게 제대로 된 지도군요. 방금 전까진 반쪽이었고요.”
“우리 고용주님급의 신성이 있어야 드러나는 물건이라. 나도 좀 흥미가 생기는데?”
“당장 눈에 띄는 건 이 표식이네요. 위치는 아사라 섬 쪽인데…”
“그것 말고 여기에도…”
난 턱을 괸 채 두 사람이 열띈 토론을 나누는 것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나아가는 진도가 너무 빨라서 이해할 수 없었을 뿐.
무릇 썩은물이라하면 늅늅이를 배려할 줄 알아야하는 법인데 어찌 저 두 사람은 뉴비를 배척하기만 한단 말인가. 이러니 물에 새 생명은 안 들어오고 있던 놈들만 만날 보이지.
제발 나도 알아듣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과정은 모르고 결과만 알고 싶진 않단 말야.
아. 그래. 할배라면 저걸 내가 알아듣게 번역해줄 수 있을 거야. 할배는 똑똑하니까.
‘할아버지.’
<…>
‘할아버지? 자요?’
<어. 어. 그래. 여아야. 왜 그러느냐.>
‘무슨 일 있어요? 왜 당황하고 그래요?’
자기가 늙었다는 걸 티내듯 노인네스런 태도를 유지하던 할배의 당황에 의문을 표했지만 할배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 인간 또 이러네.
‘할아버지. 중간에 말 끊는 거 진짜 짜증난다고 제가 몇 번을.’
<아니. 아니다.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설명을 해줘야하는 데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있었을 뿐.>
‘대체 뭐길래 그래요? 저 지도에 뭐가 있어요?’
<저기 지도 오른 쪽 아래에 적힌 글귀가 보이냐?>
‘네. 꼬불꼬불해서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씨말이죠?’
<저것은 과거 주신을 모시는 이들이 썼던 글씨다. 우리 때에도 반쯤 잊혀져 직위 있는 자들의 암호문으로 쓰이던 물건이지.>
‘할아버지는 알아볼 수 있어요?’
<당연한 걸 왜 묻느냐. 본인은 용사 녀석의 곁에 서기 전에도 성기사단장의 역을 맡았던 사람이다.>
‘저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내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내용은 이렇다.>
주신께서 친히 기적을 남기셨으니. 자격을 지닌 자가 시련에 도달했을 때 그 기적이 다시금 세상을 밝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