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3
친구들을 피해 도망쳐 나온 나는 복도 한켠에 자리한 거울 속에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식당에 있던 모두가 나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유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애써 웃으려 노력하는 여자아이를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겠지.
눈가에 맺혀 있던 것들을 떨친 나는 무작정 내 방으로 돌아와서는 침대 위에 뛰어 들었다.
차디 찬 바람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방 안에서 훌쩍대고 있으려니 울적함이 더 심각해졌다. 점차 감성이 이성을 잡아먹어가는 것이다.
<이럴 때는 방 안에 틀어박히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낫다만.>
‘제가 그걸 몰라서 안 하는 줄 아세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을 정도로 죽어라 구르다보면 자연스레 울적함이 달아나기야 하겠지.
근데 그러려면 훈련장에 가야 할 텐데 훈련장에 가면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눈으로 날 바라볼 터 아닌가.
그러면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굉장히 불편해질 게 뻔하니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 틀어박힌 것이다.
<너도 참 부끄럼이 많구나.>
‘어쩌라고요. 이런 사람인 걸.’
<뭐라 그런 게 아니다. 요 녀석아.>
할배의 웃음소리를 무시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목소리가 내 귓가에 파고들었다.
“미인의 울적한 모습이라. 이 또한 미식이군.”
징그러운 어투를 따라 고갤 돌리자 입꼬리를 늘어트린 얼빠 여우의 모습이 보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눈물을 핥겠답시고 달려들 녀석이었지만 지금의 얼빠 여우는 그저 변태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발을 움직이진 않았다. 겨울이 찾아옴에 따라 노곤함에 잠식된 것이다.
나는 느릿하게 꼬리를 휘적거리는 변태 여우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울음 섞인 눈동자로 날 바라봐주는 건 좋다만 왜 다가오는 게냐? 손은 왜 꼼지락거리는. 잠. 멈춰라! 너. 너도 나 같은 짐승과 닿고 싶지는 않을 터!”
영물이라 한들 그 근원은 짐승. 짐승의 본능 중 하나인 겨울잠이 불러일으키는 노곤함이 있는 한 얼빠여우의 저항은 거셀 수 없었다.
너무나도 손쉽게 내 손아귀에 붙잡힌 얼빠여우가 이런저런 개소리를 하는 걸 무시하며 그녀의 거센 털과 온기를 품었다.
“하아아.”
결국 얼빠여우는 저항을 포기한 채 가만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본녀는 그대를 좋아하니 한 가지만 조언을 하겠다.”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잇는 걸 기다렸다. 평소의 변태성을 제외한다면 얼빠여우만큼이나 지혜로운 존재도 흔치 않으니.
“감정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아. 점차 커지기만 할 뿐. 그러니 마주하고 받아들여라.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숲의 주인다운 지혜가 담긴 어투에 웃음이 샜다. 이만큼 대단한 녀석이 왜 평소에는 짐승 같은 모습밖에 보이질 않는 건지.
겨울 동안에 계속 이런 모습이라면 얼빠여우는 평생 겨울에 내버려둬야 하지 않으려나.
“아. 물론 본녀를 향한 역겨움은 되도록 외면해주면 좋겠다. 네 질색하는 표정은 내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거든. 하악. 그래. 지금 그 표정이다. 최고군. 행복해서 죽어버릴 것 같아.”
방금 전 말은 취소. 이 녀석은 평생 겨울에 봉인해야 하는 존재야.
*
아서는 다른 사람들이 훈련을 준비하는 동안 멍하니 식당에 앉아 방금 전의 광경을 떠올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려는 루시의 모습을 말이다.
항시 당당하고 거만하던 루시가 보여 준 연약한 모습은 아서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그래. 그 녀석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 어떤 재앙의 앞에 서더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믿음직스럽기도 하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매도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녀석이기도 하지.
허나 그 녀석은 사람이다. 아무리 강한 체를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인 것이야.
“조이.”
기둥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던 조이는 아서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해 다급히 숨으려다 미끄러져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꽈당! 하는 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운 것으로 보아 상당히 아플 것이 분명했으나 다급히 일어난 조이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일 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채를 했다.
“걱정마라. 다른 이들은 모두 훈련의 준비를 하느라 바쁘니까.”
“…그냥 모르는 체 해 주시면 안 돼요?”
“모르는 체를 하면 모르는 체 하는 대로 성을 낼 녀석이 투정은.”
“으으으.”
아서의 무덤덤한 말을 들으며 터덜터덜 걸어온 조이는 털썩하고 그의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마침 잘 되었구나. 물을 것이 있었는데.”
“뭐요?”
“루시 알른이 군도에서 찾아 헤매던 게 무엇인지 아느냐?”
아서의 물음을 들은 순간 조이가 일순 굳었지만 그 혼란은 아주 짧았다. 자신의 마법을 통해 표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녀석이 표정을 되찾은 것과 연관이 있는가?”
허나 그 다음 물음이 이어진 순간 기껏 만들어낸 조이의 표정이 다시금 무너져 내렸다.
“…다 알고 계셨어요?”
“당연히 알지.”
아서는 군도에서도 알른 기사단에 있을 때처럼 수면을 제한했다. 루시와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녀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랬던 아서가 루시 알른의 외출을 어찌 모르겠는가.
표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항시 짜증나는 얼굴만 해대던 녀석이 갑자기 해맑은 웃음을 짓는데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 녀석과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와. 방금 전에 그거 굉장히 로맨틱한 대사였어요.”
“조이. 내가 비속어를 쓰길 바라나?”
“죄송합니다.”
이 녀석은 누구를 진짜 땅에 묻으려 드는가. 방금 전 이야기를 알른 가의 기사가 들었다면 진짜로 날 죽이기 위해 몰아붙였을 터.
아서가 미간을 찌푸린 걸 본 조이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근데 왜 여태 모른 체 하셨어요?”
“그 녀석이 알리려 하지 않았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시 알른은 내게 그걸 알리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그녀를 존중하여 모른 체를 했다. 나의 은인이자 스승인 그녀를 향해 예의를 지킨 것이다.
“근데 왜 지금은.”
“네가 나를 만나러 온 것과 같은 이유다.”
“네?”
“가만 내버려 둘 수 없다 생각한 것 아니냐.”
“그. 그걸 어떻게.”
“뻔하지. 생긴 것만 독하고 속은 순해 빠진 얼빵이가 너이니.”
아서는 거기서 얼빵하단 이야기가 왜 나오냐며 투덜대는 조이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받기만 했으니 이럴 때라도 보답을 해야지.”
“…그거 제가 먼저 하려던 말이거든요.”
“하하. 그래.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 네가 아는 것이나 읊어봐라.”
“하아. 일단 영애께서 섬에서 뭘 찾으려 했는지는 저도 정확히 몰라요.”
다른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숨겨진 던전을 찾아다닌 건 맞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무얼 찾고자 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루시 알른 뿐이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해 알 방법은 존재치 않는다.
“그치만 영애께서 왜 울적해하시는 지는 알 것 같아요.”
“뭐지?”
“알른 부인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어머니의 상실. 과거 직접 겪었으며 여전히 떨쳐내지 못한 슬픔의 단어를 들은 아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곤란하게 됐군. 외부인이 끼어들 일이 아냐.”
여전히 상처를 새긴 채 사는 아서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일에 괜히 끼어들어봐야 루시의 울적함을 키울 뿐이라는 걸.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울적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만큼 영애께서 기뻐할 일을 찾고 있었거든요? 근데 마땅한 게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아서는 조이의 고민을 이해했다. 슬픔의 크기를 이루 짐작할 수 없는 이상 어지간한 일로는 울적함을 떨칠 수 없.
아냐. 그것이라면 분명.
아서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고민을 이어나갔다.
답은 금방 나왔다.
군도에서의 일이 끝났으니 그 정체모를 존재와의 약속은 지켰다 봐도 무방하겠지.
뭐. 내가 착각한 것이라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들면 저 알아 개입을 할 테니.
아서는 나름대로 개조한 소리 차단의 마법을 사용하고서 입을 열었다.
“조이. 잘 듣거라.”
“네.”
아서가 목소리를 낮춤에 따라 조이의 눈빛도 진중해진다. 이만큼 신경을 쓸 정도라면 필시 중요한 이야기라 생각한 것이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다만 루시 알른은 스스로 바라여 거친 말을 일삼는 것이 아닌 듯 하다.”
말을 끝마친 아서는 조이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거냐. 정말이냐거나. 하는 얼빵이 특유의 반응을 말이다.
허나 아서의 이야기를 들은 조이는 무덤덤했다. 아니. 단순히 무덤덤할 뿐이 아니라 다소 한심하다는 기색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대체 왜 반응이 그런 것이냐.”
“저기요. 왕자님.”
“못 믿겠느냐? 물론 그 마음도 이해한다.”
“아니.”
“허나 잘 들어봐라. 여기에는 분명한 근거가.”
“야. 아서.”
너무도 무례한, 평소 귀족다움에 집착하는 조이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을,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어투에 아서가 눈동자를 크게 뜬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이는 평소의 가식을 모두 떨쳐내고서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알른 영애와 함께 있었던 시간보다 내가 함께했던 시간이 더 길어.”
“그…렇지?”
“내가 그 분에게 먼저 구원을 받았고 내가 먼저 그 분의 친구가 됐고 내가 먼저 그 분의 훈련을 받았어.”
“그… 말도 옳다.”
“근데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해?”
아서는 그제서야 조이가 보내는 한심함이 어디에서 기반했는지 깨달았다.
그랬지. 이 녀석은 허술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인관관계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나보다도 뛰어나. 자신의 허술함을 감추고 영애들의 중심이 되기 위해 죽어라 노력한 것이 이 녀석이니 말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를 이어나가던 내가 알아차린 것을 사교계의 비수 속에서 살아온 조이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어.
허나.
허나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다.
정말 오래 전부터 이 녀석이 루시 알른의 이상을 알아차렸다면 어째서.
“어째서 모르는 체를 했지?”
“방금 전에 네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줄게.”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래. 영애께서 내게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난 영애를 가만 바라봤어.”
아서는 모르고 조이는 아는 루시 알른이 있다.
사교계에서 온갖 분란을 만들어내던 루시 알른의 모습이 말이다.
당시의 조이는 그 행동이 루시의 성미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루시의 본성이 아니라면?
그 때의 그녀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을 뿐이라면?
수많은 비난 속에서 애써 강한 체 했던 것이라면?
그녀가 필사적으로 썼던 가면을 벗겨내는 것이 진정 옳은 일일까?
모든 말을 끝마친 조이가 얼굴을 쓸어올리자 그녀의 표정이 평상시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내도록 하죠. 왕자님.”
조이는 자신의 의구심에 확신을 얻을 때까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라도 과거의 루시가 지녔던 각오를 훼손하고 싶지 않기에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래.”
아서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
“그럼 뭐 해야 해?”
이려다 옆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기척에 놀라 고갤 돌렸다.
프레이 켄트가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온 거냐.”
“방금.”
“주변에 결계가 쳐져 있었을텐데.”
“잘라냈어. 허접하던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프레이의 말에 아서가 이빨을 아득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