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6
“여기가 진짜는 아니겠군.”
이른 아침부터 훈련장에 나와 어제 유덴이 알려주었던 것을 되새기던 아서는 갑작스레 황무지에 떨어졌음에도 침착했다.
이 곳이 진짜가 아니라는 증거는 몇 가지가 존재했지만 그 중에서 아서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루시가 조용했단 것이다.
아카데미에 있는 모두가 이상한 곳으로 납치당할 만큼 커다란 일이 벌어졌는데 주신의 관심을 받는 그녀가 조용하다?
그럴 리가. 만약 저 일이 실제로 펼쳐졌다면 루시는 며칠 전부터 온갖 일을 벌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강한 체를 하지만 속은 여린 녀석이니까. 타인이 다치는 걸 볼 바에는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쪽을 택하는 루시 알른이 자신의 계획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킬 리가 없지.
흐음. 가짜라는 걸 알아낸 것까지는 좋은데 여기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꿈에서 깨어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죽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만 지금 같은 경우엔 예외일 것이다.
죽음으로써 빠져나갈 수 있는 환상을 학생들을 상대로 펼치진 않을 테니.
아. 그래. 지난 번에 에르기누스님께 배운 것을 써볼까.
그 때 대마법사께서 조이의 마법을 수정하는 것을 보며 함께 수업을 들었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만.
그리 생각하고 아서가 마법을 짜내려던 순간 저 멀리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든 아서는 주변에 몇 개의 마법진을 띄운 채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갤 돌렸다.
“허. 이거 참 지독하군.”
그리고 그 곳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서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검을 아래로 내렸다.
“아서. 잘 지냈니?”
거기에는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아서가 너무도 어려서 세상을 분별하지도 못할 적에 죽어버린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명해서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그 얼굴이 말이다.
“오늘은 예쁘게 꾸미고 오셨군요.”
“응?”
“제가 꿈에서 마주하는 어머님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계셨거든요.”
그 날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하늘은 맑지도 흐리지도 않았고. 왕궁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같았으며. 아서의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서를 칭찬해주었지.
어머니의 칭찬에 신이 난 아서는 자신이 오늘 홀로 공부한 것을 열심히 떠들었고 그의 어머니는 진심 어린 감탄을 입 밖으로 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서의 어머니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댄 그 때.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낸 파열음이 어렸던 아서의 목소리를 끊었고.
그의 어머니는 목을 붙잡은 채 죽어가는 닭같은 소리를 냈다.
궁중의 의사가 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은 뒤였다.
타국에서도 존경을 받는 의사라 한들 죽은 자를 살려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3왕비의 죽음에 대한 조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운 좋게 왕비가 된 아서의 어미를 질투한 시녀가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고 그녀의 목이 날아가는 것으로 사건은 끝이 났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 그 누구도 시녀가 진정한 범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리고 어렸던 당시의 아서조차도 말이다.
“꿈에 나온 당신은 언제나 죽어갈 때의 얼굴을 한 채 저를 원망했죠. 네가 눈에 띄지 않았다면. 네가 멍청했다면. 아무 재능도 없는 병신이었다면.”
아서도 안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란 사실을.
꿈속에서 어머니가 꺼낸 말은 사실 아서가 생각하던 것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내뱉어졌을 뿐임을.
헌데 그를 안다 하여 무엇이 달라질까. 어머님께서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라 자위한다 한들 더 비참해지는 것은 아서인데.
“부디 지금도 그래주셨으면 합니다. 그 쪽이 더 마음이 편하거든요.”
“아서?”
“아니면 제 목을 날려주시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죽음을 시험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한지라.”
“…”
“방법은 편하신 대로 해주십시오. 다른 꿈 속에서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다 죽어봐서 익숙…”
갑작스레 주변의 풍경이 검게 물드는 모습에 당황한 아서였지만 머잖아서 그는 자신이 눈꺼풀을 닿고 있기에 어두웠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어떻게 환상에서 벗어난 거지? 난 아직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의문을 품은 채 눈을 뜬 아서는 한심하단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루시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진상을 깨달았다.
“그대가 날 깨운 것인가?”
“네에. 그래요. 무능한 반푼이주제에 잠이나 쿨쿨자는 불쌍왕자님이 너무 한심해서 안 깨우고는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무어라 헛소리를 하진 않던가?”
“자안뜩 하셨죠. 욕해달라느니. 죽여달라느니. 불쌍왕자님께선 그런 취향이셨군요? 어쩐지 제가 매도 할 때마다 좋아 죽으시더니.”
“언제 내가 좋아 죽었다고 그러느냐! 없던 사실을 만들지 마라!”
“그럼 뭔데요? 당당하시다면 말씀해 보시죠. 마조변태왕자님.”
루시의 가늘어진 눈앞에선 아서는 입술을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어머니의 기일에 정신을 잃을 때까지 서럽게 울던 사람 앞에서 어찌 그가 꿈속에서 했던 일들을 이야기하겠는가.
젠장. 눈이 가늘어지는 게 정말 열이 받는 군. 내가 자신을 배려하고 있단 걸 알기나 하는 건지.
“푸훟. 뭐. 불쌍왕자님께서 굳~이 아니라고 하시니 믿어는 드릴게요.”
“하. 됐다. 그보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나 이야기 해봐라.”
“불쌍왕자님. 벌써 치매 오셨어요? 얼마 전에 제가 귀여운 목소리로 한 말도 잊어버리셨나요?”
“그냥 공허의 추종자들이 일을 벌였다고 하면 될 것을.”
짜증이 나서 혀를 찬 아서는 장난스러운 표정의 루시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계가 장악당한 건가.”
“네에.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걸 굳이 입 밖으로 내시는 걸 보니 정말 총명하시네요. 대애애단하세요.”
“…다른 이들은?”
“다들 왕자님보다는 천한 사람들이라 부지런해서요. 이미 일어나서 움직인 지 오래랍니다. 게을러빠진 불쌍왕자님.”
이거 진짜 어투가 왜곡되고 있는 거 맞나? 루시 알른 이 빌어먹을 녀석이 진심으로 날 놀려대는 것 같은데?
살짝 열이 받은 아서가 눈을 치떴지만 루시는 그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쯧. 여태 받은 게 너무나도 많은 데다가 앞으로 받아내야 할 것도 있어 무어라 할 수가 없구나.
“왕자님도 일어났네?”
아서가 울분을 달래고 있으려니 프레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넌 언제 일어났느냐.”
“바로.”
“어떻게?”
“벴어.”
“그러니까… 하아아.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래봐야 머리만 아플 게 분명해.”
안 들어도 뻔하다. 환상을 베어내서 깨어냈다느니 뭐니 지껄이겠지.
어제 검성님께 배움을 얻고 나서부터 무언가를 알아가는 듯 했던 녀석이니 그 배움을 벌써 적용시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허접 둘. 헛소리 할 여유가 있어? 하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데 의욕도 없다니. 대체 왜 그러고 살아?”
“뭘 어찌 할 생각이냐. 일단 다른 이들과 합류할 테냐? 아니면 바깥에 구원을 청할 테냐.”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 받는 것밖에 생각 못 하는 걸 보면 불쌍왕자님은 패배의식에 쩔어 계신가 보네요. 잘 어울려요.”
“…그럼 뭐 어쩌란 거냐!”
진심으로 긁힌 아서가 버럭소리를 내지르자 루시가 얄미운 웃음을 흘려댔다.
“머리가 잘 안 굴러가시는 것 같은데.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따라오기나 하세요. 무능하고 게으르고 허접한 불쌍왕자님께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요.”
“…내가?”
“네. 그래도 꼴에 왕족이긴 하시잖아요?”
*
공허의 사도를 비롯한 추종자 이끌던 루카는 소울 아카데미의 본관 최상층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 방의 안에는 몇 개의 마법이 뒤섞인 것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한 마법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추종자들의 무리가 있었다.
공허의 권능을 이용해 마법진을 침식하고 있는 이들을 살피던 루카는 점차 검게 물들어가고 있는 마법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꽤 많이 남았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아카데미를 지키는 결계의 마법진이 너무도 복잡하거든요.”
“이해합니다. 저도 이 마법진을 처음 보았을 때 머리가 하얘졌었으니.”
루카가 소울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고 나서 2년이 지났을 무렵. 그는 다른 교수의 뒤를 따라 이 방에 들렀다.
결계의 마법진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 루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에 대한 경외였다.
과거 세상을 구원한 영웅이 지녔던 재능은 이토록 압도적이며 아름다운 것이란 말인가.
수백년 전의 영웅이 남기고 간 유산 앞에서 루카는 유덴이 내뿜는 빛이 절대적인 게 아님을 알고 안도했으며 언젠가 그 빛을 뛰어 넘을 자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원하게 됐다.
“참으로 대단한 마법이죠. 이 마법진 하나가 소울 아카데미라는 교육기관을 성립시켰으니까요.”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남긴 마법진은 단순히 소울 아카데미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안에 들어온 자들의 재능이 개화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 고된 몸을 빠르게 회복시켜 주는 것. 이외에도 마법진 안에는 무수한 부가효과들이 존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법진이 제공하는 막대한 마력이었다.
100층계나 되는 던전을 구현할 뿐만 아니라 그를 몇 개월이나 유지시키고, 같은 던전을 수백의 사람이 공략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이 마법
진은 그야말로 기적의 산물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영웅께서도 이것이 공허의 악신에게 바쳐질 거라고 생각하진 못하신 듯 하지만.”
루카는 점차 검게 물들어가는 마법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아. 알른 영애. 제가 건네드리는 선물을 부디 기뻐하며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거절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주신의 사랑을 받는 당신이 악신을 상대하는 걸 포기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