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7
나는 아서를 일으킨 후에 바로 소울 아카데미의 대학원실 쪽으로 찾아왔다.
낮이고 밤이고 꺼질 일이 없던 등대 같은 건물은 악신이란 변수가 생기고 나서야 고요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은 자고 일어나면 쉬었다고 좋아할까 일이 밀렸다면서 비명을 지를까.
“여기는 왜 온 거지? 누구 찾을 사람이 있나?”
“아뇨. 여기에 불쌍왕자님 같은 바보는 모를 장소가 있어서요.”
“…내가 모를 장소?”
내가 안내를 한 곳은 과거 영웅의 흔적이 남아있던 곳이며 지금은 한 사령의 보금자리가 된 장소였다.
아드리가 이 곳에 머무는 동안 이런저런 것을 건드린 건지 지하의 모습은 살풍경한 미로보다는 고즈넉한 느낌의 저택에 가까워져 있었다.
지하에 있는 동안 많이 심심했던 걸까? 진짜 안 건드린 곳이 없다 싶은 수준이네.
대체 뭘 하면 사령마법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생각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으려니 내 앞에 뚱한 얼굴을 한 아드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할망구. 용케도 안 자고 있었네? 뻗어서 바닥을 구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 네가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나 꽤 강한 사령이거든? 이런 허접스런 수작엔. 힉!?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뒤를 따라오던 프레이가 갑작스레 검을 휘둘렀다. 그 공격을 알아차린 아드리가 다급히 뒤로 물러서자 프레이가 혀를 찼다.
– 뭐. 뭐 하는 짓이야!
“적. 아냐?”
– 적은 무슨! 내가 적이었으면 너네를 가만 내버려 뒀겠냐!
“적이 아니라면 루시 알른의 협력자입니까?”
–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비슷한 거야.
아서와 프레이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비슷한 시기에 고갤 주억거렸다.
뭔가 나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은 느낌이네. 쉬이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설득할 준비를 하던 나는 살짝 김이 빠진단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시콜콜 잡담하고 있을 만큼 시간이 많지는 않거든? 따라 와. 허접들.”
지하의 풍경이 달라졌다하여 그 길마저도 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난 당연하다는 듯 길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난 복도에 나자빠져 있는 몇 구의 해골을 보고서 고갤 갸웃했다.
“이 쓰레기는 뭐야?”
– 예전에 여기 머무르던 녀석이 남기고 간 거. 너도 아는 거 아냐?
아아. 이거 예전에 지하 던전을 구성하던 해골이구나. 악신의 기운에 물들어서 다 가루가 되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두 그런 건 아닌가보네.
근데 얘네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내 기억하고는 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 어차피 주인도 없는 물건이라 마음대로 썼는데.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이해했다. 아드리 얘가 이걸 이용해서 지하의 풍경을 바꾼 거구나. 하긴 실력 있는 사령술사인 아드리라면 이 정도야.
음.
으으음.
“야. 외톨이 할망구.”
– 뭔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무능한 너라도 이런 거 가능해?”
아드리에게 방금 전 떠올린 내용을 이야기하자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 가능하긴 해.
“시간은 얼마나 걸려?”
– 금방 될 걸? 이미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힌 상태라.
아드리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나는 눈썹을 올리고 인벤토리에서 종이를 꺼내 즉석에서 설계도를 그렸다.
최근 미적감각을 얻으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내 그림 실력은 내 뇌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종이 위에 그려내주었다.
– 으음. 대충 무슨 생각하는 지 알겠네. 준비하고 있을게. 굳이 내가 따라갈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럼. 무능한 할망구가 있어봐야 쿱쿱한 냄새밖에 더 나겠어?”
– …아. 정말 뒤통수 한 대 때리고 싶네.
투덜거리며 아드리가 떠나가고 난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미로를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본래 가짜 영웅이 머무르던 곳이었다.
“여기는?”
“공주님이 되고 싶어 하던 변태 해골 기사가 있던 곳이에요.”
“…그건 또 무슨.”
메스가키어로 번역되어 새나온 말에 아서가 눈을 끔벅인다. 그를 본 나는 설득을 하려 생각하다가 괜히 꼬일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한없이 진짜에 가까웠던 해골을 모욕하는 말밖에 튀어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피식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벽 앞에 도착한 나는 얼마 전 카리아에게 받은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잠깐. 루시 알른. 그 스크롤. 혹여 용의 숨결을 품은 물건 아닌가?”
“오. 불쌍왕자님께서 이런 것도 알아요? 신기하네요. 불쌍왕자님께서 아는 것이라고는 투덜거리는 것 뿐이라 생각했었는데.”
아서가 이야기한대로 이것은 용의 숨결을 담은 스크롤이다.
이름도 드래곤 브레스라는 간지나는 이름이 박혀있지. 근데 게임을 하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이걸 드래곤 브레스라고 부르진 않았다.
왜냐고? 이 스크롤이 발동될 때 일어나는 현상은 용의 숨결과는 한없이 거리가 멀거든.
눈앞에 있는 걸 물리적으로 다 지워버리는 게 뭐가 드래곤 브레스야?
차라리 소멸마법이라고 적어놓던가.
“내 듣기로 그건 결코 실내에서 사용해선 안 되는 물건이라고 들었다만?!”
“겁 먹으셨나요? 걱정마세요. 죽지만 않으시면 살려드릴 수 있거든요. 푸훟. 계집애처럼 비명을 지르게 되시긴 하겠지만.”
“무슨 살벌한 소리를 하는 거냐!”
아서가 소리를 지르는 걸 한 귀로 흘린 나는 스크롤을 설치하고서 바로 다음 물건을 꺼냈다.
이번 것은 드래곤 브레스에 비해 대단한 건 아니었다.
작년 나크라드를 처음으로 상대했을 때 사용한 물건. 내 목숨을 구해주었던 스크롤. 주변의 환경을 바꾸어 마법을 완벽히 무효화시키는 것.
“루시 알른. 이야기를 듣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되겠는가? 최소한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불쌍왕자님. 자꾸 그러시다 제가 실수하면 저희 진짜 분해되거든요? 저처럼 귀여운 여자애라면 같이 죽을 수도 있단 건가요? 그건 좀 질리는데.”
“미안하다. 닥치고 있으마. 계속해라.”
아서가 입을 다문 후에도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나가던 나는 만들어야 할 것을 완성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끝났나?”
“대략적인 건요.”
“그럼 이제 설명을 좀 해다오.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냐.”
“불쌍왕자님. 혹시 이런 생각해보신 적 없으세요? 이 허접한 아카데미에 뭐가 잘나서 저런 거대한 던전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소울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100층짜리 던전은 소울 아카데미만의 전유물이다.
다른 아카데미도 인공던전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학교 시험에 사용하는 정도고. 심지어 그것도 우리 측에서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질이 확실히 떨어지지.
이 때문에 소울 아카데미는 다른 아카데미에 비해 확실한 이점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던전학 학자들이 오고 싶어 하는 장소가 되었다.
헌데 이상하지 않은가? 왜 소울 아카데미만이 100층계나 되는 던전을 만들 수 있는가.
다른 자원은 그렇다 쳐도 던전을 만들고 유지하는 힘은 어디서 수급한단 말인가.
“그거라면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께서 남긴 마법이.”
“그 찌질한 해골이 남긴 마법이요? 푸하핳. 여자랑 대화도 못하는 동정 마법사가 그럭저럭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봐야 인간이에요. 동정으로 죽은 쑥맥이라고요.”
에르기누스가 남긴 마법진이 대단하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그가 남긴 마법진은 설정을 알기 전에도, 설정을 안 후에도 분명 기적이라 부를 만한 물건이었으니.
그렇지만 그 마법진이 모든 힘의 근원인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에르기누스의 마법진에서 새어나오는 힘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불과하다.
마법진에 그려진 수많은 기적들을 발현함에도 불구하고 남을 만큼 막대한 힘을 지닌 무언가에서 새 나온 부산물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걸 믿는 정신병자들은 그 힘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말 필요한 일이 펼쳐질 그 순간에. 잠깐이나마 힘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광경을 상상하며 히죽 웃어보인 나는 방패를 꺼낸 후 그 위에 신성을 덧댔다.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배웠을 적에는 따라하는 것조차 버거워했던 것.
허나 이제는 숨쉬는 것처럼 행할 수 있는 기적.
악신의 일격조차도 막아세웠던 영웅의 방패가 우리들의 앞을 가린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놀라서 혀 깨물고 죽어버리면 더럽게 추하잖아요.”
모든 준비를 끝마친 내가 스크롤에 마력을 담은 순간 스크롤에 빛이 스며들더니 짐승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찢어버릴 듯 거세게 파고 든다.
용의 울부짖음이 세상을 짓누르고.
용의 분노가 한 군데로 모여.
용의 심판이 본래 벽이었던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콰아아아앙!
당장에라도 건물이 무너져 내릴 듯한 거대한 충격은 머잖아 두 번째 스크롤이 발동되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 어떤 마법도 허락하지 않는 환경이 스크롤의 마법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렇게 충격이 사라지고, 먹먹한 고막에 고요가 찾아왔으며, 눈 앞을 가리던 연기마저 흩어졌을 때 그 곳에 드러난 것은 어디론가 향하는 통로였다.
*
“루시 알른이 아카데미의 구건물 쪽으로 향하다 사라졌습니다. 루카. 이에 대해 무언가 아는 바가 있습니까?”
공허의 사도가 전한 이야기를 들은 루카는 작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옛 영웅 가라드의 해골이 있던 장소. 그 곳으로 들어간 건가. 알른 영애께서 악신의 수작을 피해 숨으러 들어갔을리는 없고, 높은 확률로 그 곳에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봐야겠지.
“사람 몇을 그 쪽으로 보내보죠.”
알른 영애께서 하려는 것을 내버려 둘 생각이었지만 이젠 그러기가 어렵군.
영애께서 내 예상에서 벗어난 일을 한다면 그건 통제 불가능한.
– 쿠오오오오!
갑작스레 일어난 진동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당혹을 표한다.
누군가는 바닥에 나자빠지고.
누군가는 다급히 벽에 달라붙고.
누군가는 저 멀리에서 들려 온 짐승의 분노에 몸을 떨고.
또 누군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을 무너트릴 듯한 진동이 끝났을 무렵 루카는 방금 전에 하려던 말을 거두었다.
“…제가 직접 가도록 하죠. 몇 사람을 붙여 주실 수 있습니까?”
용의 숨결이라니. 알른 영애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냐.
하하. 정말. 빌어먹을 재능을 지닌 자는 항상 범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