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3
용의 분노가 쏘아짐에 따라 하늘에서 날뛰던 검은 색의 용이 저만치 뒤로 물러난다.
피해는 분명 존재했다.
제 아무리 용의 비늘이 튼튼하다 한들 이번에 쏘아진 것은 세상의 앞에 있는 모든 걸 지우는 용의 숨결. 다른 용종의 공세 앞에서 검은 용이 어찌 멀쩡할 수 있을까.
허나 겉으로 드러났던 용의 피해는 머잖아 사라졌다.
공허의 권능이. 결계 안에 자리한 악신의 힘이 상처를 지운 것이다. 그걸 본 카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열 받네. 이 스크롤 비싼데다가 구하기도 힘든 건데.”
“그까짓 잔재주로 신께서 보낸 심판자가 쓰러질 거라 생각했나!”
카리아의 짜증을 본 공허의 사도가 웃음기어린 목소리를 냈지만 카리아는 거기에 태연히 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이런 걸로 해결될 거였다면 내가 여기 올 일도 없었을 걸?”
“억지로 태연한 체 해봐야 의미 없다! 결국 모든 건 공허 아래에 굴복하게 될 지니!”
“시끄러워. 등신아.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네가 무슨 생각하는 지 다 아니까 제발 닥쳐줄래?”
광기 어린 목소리에 가뿐히 대꾸한 카리아는 또 다른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물리적으로 죽여 버리는 게 불가능하다면 시간 벌이라도 해야지. 상대가 상대이니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저 놈들을 당혹스럽게 하기엔 충분할 걸.
카리아가 스크롤을 찢은 순간 허공에서 수많은 사슬이 튀어 나와 용의 사지를 묶는다.
용의 피와 뼈를 섞어 만들어낸 사슬들이 저주가 되어 용의 사지를 묶는다.
스크롤이 좀 오래돼서 그런가 성능이 애매하네. 오래 버티진 못하겠다.
뭐. 상관 없어. 아직 남아있는 스크롤은 잔뜩 있으니까.
“저 년을 막아!”
또 다른 스크롤을 꺼내는 카리아의 모습에 공허의 추종자들이 저마다 다른 형상으로 변해 달려들지만 그 앞을 유덴이 가로 막는다.
검성이 내지르는 검이 추종자들의 다리를 잘라 걸음을 강제로 정지시킨다.
“그 정도로 저희를 막을 수 있을 성 싶습니까!?”
자신의 공격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걸 보던 유덴은 살짝 눈썹을 치켜들었다.
느려졌어.
처음에 비해 확연히 느려졌어.
저 녀석이 지닌 권능이 이전보다 약해진 거야.
하긴. 저 놈은 어디까지나 악신의 대리인.
악신이 힘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근데 저 쓰레기의 주인은 지금 이 안에서 무수히 많은 일을 벌이는 중이야.
결계의 구멍 부근에서 싸우는 녀석들한테 힘을 실어줘야 하고.
용을 다루는 데에도 힘을 투자해야하고.
아카데미 부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소란에도 힘을 보내고 있을 테고.
뭣보다 지하로 향하는 기운이 막대한 게 커.
균열이 생기고 있어.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던 막대한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던 일에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고.
이제 필요한 건 아주 약간의 변수야.
조금의 변수만 더 생긴다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릴 테니까!
*
“앉지 않고 무얼 하니?”
아서는 찻잔을 치켜든 채 웃음 짓는 어머니를 보고서 눈에 살짝 힘을 더했다.
시조의 조각을 자처한 그 꼬맹이는 이 곳을 시련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것은 무얼 시험하기 위함인가.
아서가 의구심을 품은 그 순간 그의 시야 아래에 무언가가 보인다.
고통에 찬 채 죽은 여성의 얼굴.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낸 채 죽어버린. 좋게 말 할래도 좋게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이.
죽었을 때의 어머니다. 어머니께서 저 곳에 계셔.
“아서?”
재차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고갤 든 아서는 찻잔을 든 어머니 뒤에 선 다른 어머니를 보았다.
누군가가 쏜 화살에 의해 목이 꿰뚫린 채 박제되어 버린 어머니를 말이다.
어머님께서는 저런 식으로 죽은 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활처럼 위험한 무기와 관련된 곳에 향한 적 자체가 존재치 않아.
그 분께서 돌아다니던 장소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럼 저건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던 아서는 머잖아 저 시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저것은 그의 악몽이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악몽 중 하나.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머지않았을 무렵, 아서가 자신을 책망하느라 하루에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잘 때 그의 꿈속에서 온갖 방식으로 죽어가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아서가 그를 눈치 채고 머지않아서 그의 어깨 위에 무언가의 손이 올려 진다.
조심스레 고갤 돌린 아서는 말라비틀어진 여성의 손을 보고서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그에 따라 기댈 곳을 잃은 미라가 바닥에 넘어진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미라가 부서지기 무섭게 그의 콧가에 피비린내가 새어든다.
냄새를 따라 고갤 돌린 아서는 나무에 박혀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니?”
죽음과 죽음과 죽음과 죽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서는 시조의 조각을 자처한 꼬맹이가 왜 버티라고 그랬는지 이해했다.
시체를 볼 때마다 어렸을 적의 아서가 악몽 속에서 느꼈던 감정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공포가.
자책이.
슬픔이.
허무함이.
체념이.
원망이.
그리움이.
계속.
계속.
계속.
그의 머릿속을 파고든다.
다리에 힘이 풀린 아서가 나자빠지기 무섭게 바닥에 늘어서 있던 시체들의 그의 팔을 붙잡는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원망 어린 말이 들려온다.
그라는 존재를 향한 증오가 들려온다.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는 비난의 앞에서 아서는 반박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평소 친구들의 앞에서 당당하던 그는 없다. 온갖 놀림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제 할 말을 하던 그는 여기에 없다.
이 곳에 자리한 아서는 그저 어리고 여리던 시절의 그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살 이유를 찾지 못해 차라리 죽기를 바라던 꼬마아이 말이다.
“내 말이 안 들리니?”
두 손을 들어서 귀를 막는다. 어릴 적 이불을 뒤집어쓴 채 주변의 소리를 외면하기 위해 했던 것처럼.
“아서. 우리 아들. 괜찮아?”
그럼에도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진절머리를 내며 힘을 더하던 아서는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 채고 고갤 들었다.
수많은 시체들 사이에서 홀로 멀쩡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어머니.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으며 이 악몽 속에서도 멀쩡히 서서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이.
그녀만이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멀쩡한 외형을 지니고 있다.
한 사람의 정신을 무너트리고자 하는 이 곳에서 평온을 유지한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아이를 달래기 위한 목소리를 들은 아서는 가만 살아 숨 쉬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봤을 때 이 어머님의 존재는 이상하다.
정신을 무너트리기 위한 시련 속에 어찌하여 버팀목이 존재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건 말이 안 돼.
함정이다.
저건 분명 함정이야.
“이 어미에게 말해주지 않으렴?”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함정이라하여 어머님께서 지닌 따스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은가.
저 분의 손을 잡으면 머릿속에 휘몰아치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이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여태까지 겪은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어찌.
“무서운 거니? 괜찮단다. 아서. 걱정 마렴. 날 넌 원망하지 않는단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따라 손을 내밀려던 아서가 갑작스레 굳는다.
동상이 된 것만 같은 아서의 모습에 영문을 모르겠단 듯 그의 어머니가 고갤 갸웃거리지만 아서는 헛웃음과 함께 손을 거둘 뿐이었다.
“고맙군. 덕분에 예전 일이 생각이 났다.”
“아서? 갑자기 왜 그러는 거니?”
“어머님께선 다른 이들이 이야기하던 것처럼 운 좋게 왕비가 되었을 뿐인 사람이었다.”
왕의 변덕에 의해 왕비가 되었을 뿐인 이름 없는 귀족.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바보.
그것이 아서의 어머니였다.
왕궁에 들어오고 나서 뒤늦게 여러 교양을 반 강제로 배우게 된 그녀였지만 그런다 하여 수십년간 쌓아온 천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아서의 어머니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순박한 사람이었다.
“나 때문에 어머님이 죽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며 추론이다.”
아서는 자신의 추론이 틀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눈에 띄었기에 그를 지탱해 줄 사람이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어머니가 죽을 이유가 없으니.
“어머님의 추론이 아냐. 자식된 도리로써 이런 말을 하는 게 어떨까 싶긴 하다만. 어머님께선 그런 추론을 할 능력이 없으셨다.”
다만 이 추론을 그의 어머니가 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아서의 생각으로 그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몰랐을 거다.
궁중의 음흉함을 이해하질 못해서 온갖 험한 일을 당해도 배시시 웃기만 하던 분이니.
누군가 자신을 죽일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그게 자신의 자식과 관련되어 있을 거란 것도.
“너도 내가 만들어낸 악몽이었군.”
그의 어머니는, 아서가 가장 고통스럽다 생각하던 자비로운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를 본 아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여전히 끔찍하다.
냄새 또한 구역질이 절로 날만큼 역겹다.
내 안에 몰아치는 수많은 감정들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버틸 만 해졌다.
잊고 있었던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덕에 저 모든 게 가짜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저 모든 자책은 속죄가 될 수 없음을 깨우쳤으니까.
‘미안하다고? 왜? 아서.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설령 네 말이 사실이라도 사과할 필요는 없어. 이 엄마도 너한테 사과해야 될 게 잔뜩 인 걸! 과자를 몇 개 더 먹은 거나. 책에 침을 흘린 거나. 잉크를 엎은 거나.’
‘다 알고 있었다고!? 근데 신경도 안 쓴다고!? 역시 아서! 우리 아들! 너무너무 착해!’
‘으으음. 정 미안하면 이렇게 하자. 아서가 어마어마어마하게 행복해지는 거야! 그럼 이 엄마도 어마어마하게 행복해질테니까!’
‘왜 그렇게 되냐니? 자식의 행복은 부모의 행복! 이 당연한 것도 이핼 못하다니! 우리 아서는 아직 꼬맹이구나!’
‘알겠지? 행복해지는 거야?! 약속한 거다?!’
주변에 잔소리할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후. 무릎을 굽혀 아서와 시선을 맞춘 그의 어머니는 품위라고는 조금도 없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서는 어머니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행복해지기로.
허나 그 약속은 단 하루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약속을 한 그 날. 그의 어머니가 목숨을 잃었기에.
“루시 알른이 나를 바보 취급할 만 했군. 이런 중요한 약속을 잊고 있었다니.”
수많은 감정을 뒤로 한 채 아서가 쓴웃음을 지은 순간 주변의 풍경이 무너져 내리고 그의 앞에 밝게 빛나는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만들어낸 마법진.
솔라딘의 피에게 이어져 온 마법.
그걸 본 아서는 저 마법진이 무엇인지.
저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리고 루시 알른이 왜 자길 여기로 데려온 건지 모두 다 이해했다.
아서가 마법진에 손을 내밀자 마법진이 거기에 호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