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0
정부보에서 올라온 서류를 확인하던 1왕비는 헛웃음과 함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저희에게 약점을 붙잡힌 세르란을 제외한 모든 공작 가문이 저 쪽으로 넘어갔군요.
아르테아 백작가와 뉴먼 백작가가 힘을 합쳐 물 밑에서 협상한 덕분에 대부분의 백작 가문도 협력을 약속했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알른 백과 켄트 백이 지닌 무위를 믿고 저 쪽 편에 섰습니다.
이제 저에게 남은 패는 한참 전에 장악한 궁중의 귀족들과 여러 잔챙이들뿐.
쿠르텐 공작이 자기 신념을 꺾고 저쪽에 참여한 게 치명적이었어요. 그것만 아니었다면 이정도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까다롭네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왕비의 입가에는 진심 어린 웃음이 새겨져 있었다.
르네님이나 아서님께서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계시긴 하지만 이건 두 분의 능력만으로는 이런 일은 불가능해요.
개인의 능력은 그렇다치고 파벌 싸움에는 영 재능이 없으신 분들인지라.
루시 알른. 그 한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고뇌할 일도 없었을 거에요.
당장 쿠르텐 공작을 설득한 게 그 분이고.
본래라면 중립을 지켰을 버로우 공작을 끌어들인 것도 그 분이고.
이 상황을 돈벌이로밖에 보지 않았을 뉴먼 가문을 한 쪽 편에 서게 만든 것도 그 분이고.
자기 가문을 부흥시키는 것에만 집중하던 아르테아 백작을 끌어들인 것도 그 분이고.
영지에 틀어박힌 채 나올 줄을 모르던 베네딕 알른에게 다시 송곳니를 쥐어준 것도 그 분인데다.
“아마 제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 것도 그 분일테죠.”
알른 영애에 대한 평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만 그 분의 진가를 알아차린 게 너무 늦었네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아니 과거 혼자이던 시절의 그 분과 친해질 수 있었다면 전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해요. 그 시절의 알른 영애를 보고 지금을 상상할 수 있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잖아요.
“그래도 덕분에 마음은 편하네요.”
1왕비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실패하더라도 왕국은 평온할 것이다.
그녀가 악신의 힘을 빌린다는 죄를 저질러도 왕국은 이전보다도 융성할 거다.
그러니 이제 1왕비는 마음 편히 하늘 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
“1왕비님!”
궁중의 대신 중 하나가 다급히 집무실을 찾았다. 창백해진 얼굴은 그가 들고 온 소식이 최악이란 걸 진즉부터 알리고 있었다.
“오공작 중 네 분께서 회의의 소집을 청하셨습니다!”
아하. 그렇게 오는 건가.
*
“왕성회의라. 기록이 있단 말은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버로우 공작이 책상을 바라보며 입술을 곱씹자 쿠르텐 공작이 거기에 답했다.
“끌어내려지고 싶냐는 협박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니 어지간하면 불가능하지.”
“공작가문 다수의 동의를 구해야한단 조건도 까다롭고요.”
“난 지금도 이 네 가문이 같은 뜻을 위해 움직인단 게 믿어지지가 않아.”
쿠르텐 공작과 비슷한 연배의 베드퍼 공작이 헛웃음을 흘리자 주변을 둘러보던 파트란 공작이 살벌한 미소와 함께 고갤 돌렸다.
“나라가 무너지는 걸 보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그들이 지닌 명분에 모두가 턱을 주억이지만 정작 애국의 마음을 품은 이는 존재치 않는다.
당장 베드퍼 공작은 자신의 손자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에 선 것이고,
쿠르텐 공작은 친우를 위해 이 곳에 왔으며,
버로우 공작은 어디까지나 은혜를 갚기 위해 이 일에 참여했으며,
파트란 공작도 오롯이 나라를 위해 이 곳에 온 건 아니다.
“저기 1왕비께서 오고 계시네요.”
허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바라는 건 달라도 목적이 같다면 공작들은 얼마든 협력할 수 있다.
오공작이 오랫 동안 다섯으로 유지된 게 어디 우연의 일치겠는가.
“진짜인가?”
“마법적인 작용은 없는 걸로 보입니다. 카리아. 당신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본인으로 보입니다.”
“자. 다들 그럼 질질 끌어 봅시다. 이틀 밤 정도는 새우실 수 있죠?”
“노력은 해보마.”
“괜찮을 거다.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들거든.”
이들은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엔 1왕비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설령 그녀가 검을 뽑아든다 해도 말이다.
*
왕성회의가 시작되는 그 때. 왕궁의 정문에는 솔라딘의 세 왕자와 주신 교회의 요한 추기경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말 똑바로 하시오! 요한 추기경! 지금 당신이 하는 말에 책임질 수 있소!?”
“솔라딘의 1왕자시여. 저희도 저희의 의심이 틀렸으면 좋겠노라 생각합니다. 신화시대에 세워진 위대한 왕국에 인류의 배신자가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근거를 대란 말이오! 근거를! 제 아무리 주신교회의 추기경이라 할지라도 한 나라의 왕실을 이리 대할 순 없소!”
왕궁의 경비병들도.
때 아닌 소란에 집결한 기사들도.
거리 인근에 모여든 시민들도.
요한 추기경을 따라 찾아 온 성직자들도.
소란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정작 소란의 중심이 되는 왕자들과 요한 추기경만큼은 주변을 살필 여유를 지닌 채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진즉에 입을 맞추고서 연극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요한 추기경! 성녀님께 연락을 해주십시오! 그 분이라면 저희의 무고를 증빙해주실 겁니다!”
“성녀님께선 어둠의 악신을 상대한 과정에서 얻은 피로로 쉬고 계십니다.”
“헛소리 마십시오! 제가 그 분과 함께 전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 분께선!”
“성하께서 판단하신 일입니다. 설령 성녀님이 온다 한들 이번 결정을 돌이킬 순 없습니다!”
지금 이들이 소리를 치고 있는 건 주변의 구경꾼들이 소란을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았을 때 모두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용히 사태가 처리되었을 때는 왕국에서 교회를 공격할 명분을 얻을 수 있도록.
“서로 간의 감정이 너무 격해졌군요.”
그리고 훗날 2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될 때 명분이 될 수 있도록.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아우야!”
“작은 형님!”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랬…”
“2왕자 저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진정 성하의 명이라면 저 분들께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2왕비가 안에서 등장함에 따라 상황이 진정되고 교회의 성직자들이 자연스레 왕성에 발을 들인다.
“부디 저희의 의심이 헛소리로 끝나야 할 텐데요.”
“예. 그 편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
왕성의 상공. 어둠의 권능으로 몸을 감춘 에르기누스와 요정여왕은 걱정어린 눈으로 아래를 살폈다.
“신의 직위라는 것이 이렇게 불편한 것일 줄은 몰랐네요.”
“신화의 시대는 오래 전에 종말을 맞이했으니까요. 인간의 시대가 찾아왔음에도 신의 권한이 많을 수는 없겠죠.”
“여왕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를 모르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전 이 무력감이 너무도 싫습니다. 왜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 건지.”
요정여왕을 구하지 못했을 때도. 신화시대의 전쟁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을 때도. 에르기누스는 지금처럼 무력했다.
이래서야 신의 직위를 얻은 게 무슨 소용인가. 나란 인간이 달라진 게 없는데.
“네. 맞아요. 당신은 예전과 같아요.”
“…역시 그런가요?”
“예전에 제가 반했던 그 때처럼 멋있으세요.”
“제가?”
“네. 당신께선 포기하지 않고 절 구해주셨고, 이제 영원토록 제 곁에 머물러주실 거잖아요.”
“그건 제 잘못을 바로 잡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 지금은요?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개입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정곡이 찔린 에르기누스가 입을 다물자 요정여왕이 웃음을 흘리며 그를 끌어 안았다.
“잠. 여왕이시여.”
“걱정마세요. 어차피 아무도 못 보잖아요.”
“그렇다 해도 이건.”
“제 아이들이 알른 영애의 곁에 있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여기까지만입니다.”
“네? 여기까지라뇨? 이 뒤에 뭐가 있나요?”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안다뇨? 전 아무것도 모르겠는걸요?”
귓불이 벌게진 에르기누스를 보며 키득거리던 요정여왕은 수도 이곳저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맹자들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정말. 짓궂으십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참아왔는걸요. 지금도 나름 자제하고 있는 거랍니다?”
후후. 나중에 알른영애와 얘기를 나눌 시간이 된다면 에르기누스님께선 평범한 찐따로 불러달라 청해야겠네요.
모든 게 좋게 끝난다면요.
*
수도 아래의 지하도. 긴 세월이 지나 왕국의 정보부마저도 존재를 잊어버린 길은 솔직히 말해 사람이 돌아다닐만한 곳이 아니었다.
여기 냄새가 왜 이래!?
똥통에 처박혀도 이것보단 낫겠다!
더 짜증나는 건 내가 이 악취에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단 거야!
“조이. 조금만 더 견뎌요. 얼마 안 남았어요.”
“…페이비. 당신은 어떻게 태연할 수 있는 건가요. 무디기 그지 없는 켄트 영애마저도 축 늘어져 있는데.”
“성녀란 가장 힘들고 더럽고 껄끄러운 곳에 희망을 불어넣는 사람이니까요.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편이랍니다?”
“페이비의 얼굴이 빛나는 느낌이에요.”
“성녀님. 존경.”
“대. 대단하세요오.”
프레이와 비시가 연이어 칭찬하자 페이비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면서도 은근히 내 쪽에 시선을 건넸다.
“허접성녀치고는 그럴 듯한 말이네.”
“후후. 감사합니다.”
흐으으. 이제 슬슬 끝이 보여야 하는데.
어디지? 어디에 있지? 어디로 가야 신선한 공기를 맡을 수 있는 거지!?
<침착해라.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지 않으냐.>
‘…저 물 속에 처박아 드려요?’
<미안하다. 가만 있으마.>
‘그럴거면 처음부터 가만 계셨어야죠.’
<그. 아! 저기 아니냐!? 딱 봐도 문처럼 생겼다만!?>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고갤 돌린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젠장. 왜 진짜 출구인거야. 헛다리를 짚은 거면 망설임없이 처박아버렸을 텐데.
출구로 빠져나와 신성한 공기를 맡은 나는 정화를 통해 오물을 제거한 후 주변을 둘러봤다.
후우. 이걸로 왕성 침입에는 성공했네.
“얼빵아.”
“이미 했어요. 이제 누구도 저희를 발견할 수 없답니다.”
잠입을 하는 데에 있어 최고의 사기기술이라 부를만한 어둠의 권능으로 자취를 감춘 우리는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1왕비에게서 왕을 NTR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