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단 한 번도 내가 힘든 것으로 타인이 힘들 수 있단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날 걱정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내가 실패할 것을 걱정하는 것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내가 강하다는 걸 증명했다.
당신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승리할 것이라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알려준다면 괜찮을 것이라 여겼으니까.
허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날 걱정하는 이유는 그저 내가 짊어진 것이 너무도 많아서였다.
자그마한 아이가 수많은 고난 속에 제 발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게 너무도 괴로워서 사람들은 내게 걱정을 내비쳤다.
난 이걸 몰랐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앞에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기에 날 걱정하는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못했다.
그래서 페이비가 날 바라보며 주춤 물러설 때에 당혹을 느꼈다.
내가 뭘 잘못한걸까 싶었거든.
그 때 한순간만 그랬었다면 내가 착각했거니 생각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페이비는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피며 불안해했다.
아무리 봐도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단 생각에 고민하던 나는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했지만 할아버지는 내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건 내가 대답해 줄 일이 아니다. 네 친구들에게 묻거라.>
치사하다고 투정을 부려보았지만 할아버지의 대답은 똑같았다.
할아버지가 이토록 고집을 부릴 땐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걸 아는 난 페이비가 돌아간 후 슬그머니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성녀님께서 왜 저러냐고? 진심으로 묻는 게냐?”
“루시. 이건 저도 못 도와드리겠어요. 페이비가 왜 저러냐뇨!”
내 물음을 듣자마자 아서와 조이가 기겁하면서 화를 냈다.
이게 그렇게까지 화가 날 일이야? 난 눈치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고! 모를 수도 있는거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군.”
“하긴 그렇겠죠. 루시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알아듣게 말을 해달라고. 이게 그렇게 어려워?”
“루시. 페이비가 저토록 당황하는 이유는 페이비가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랍니다.”
“…뭐?”
“당신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당신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거라고요.”
그제서야 난 이번 일이 요정의 숲에서 있었던 일의 연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때의 난 친구들을 요정의 숲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가 너무나도 위험한 장소라는 걸 알았기에 어떻게든 나 혼자 그 곳에 들어가려 했다.
허나 친구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 고난을 나누고 싶어했다.
날 홀로 내버려두고 싶어하질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은 나와 함께 짐을 나눠 짊어지길 바랐다.
나 혼자 모든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내가 의무를 짊어진 걸 보고서 아픔을 느꼈다.
“페이비가 왜 다른 국가의 고위층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었겠어요. 모두 다 당신의 부담을 줄이기 위함이잖아요.”
“그건 나도 알아. 허접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근데 그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 성녀님께선 오늘의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있는 거다. 오히려 네 짐을 더 늘려버렸다고.”
“루시. 오늘 마음의 상처를 받으셨잖아요.”
부정할 수 없었다. 난 분명 도시의 풍경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잠시 마음을 놓은 탓에 수많은 이들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고, 더 빨리 이 곳에 오지 못했단 사실에 한탄했다.
허나 이건 나의 책임이지 않은가.
페이비가 하는 모든 행동을 허락한 건 나다.
조금이나마 편해지기 위해서 페이비의 어깨에 짐을 짊어지게 만든 게 나다.
그러니 이 모든 건 결국 내가 미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페이비가 죄책감을 지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루시는 바보야.”
음식을 우물거리던 프레이가 모든 걸 꿀꺽 삼키더니 포크로 날 가리켰다.
“완전 바보.”
“이번엔 동의한다. 이 녀석이 바보짓을 하니 성녀님께서 그토록 몰린 거겠지.”
“맞아요. 루시는 바보에요. 저희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것만으로도 바보라 불러 마땅해요!”
난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왜 친구들에게 물으라고 그랬는지 이해했다.
이건 누가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니었다. 알려준다 하더라도 나는 금방 잊어버렸을 것이다.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난 바보니까.
그렇지만 내가 스스로 깨닫는다면.
친구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 지, 나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는지, 그리고 날 말리는 대신 내 짐을 나눠지길 바란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거다.
“하아. 정말 주제가 넘네.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따까리들이 이러니저러니 하는 꼴이라니.”
“하. 사도니 뭐니 치켜세워주니 자기가 용사라도 된 줄 아는가.”
“맞는데요?”
“…뭐?”
“제가 용사라고요. 멍청한 왕자님. 그런 것도 몰랐어요? 대체 아는 게 뭐에요? 언제까지 멍청이로 사실 생각이신가요?”
아서를 잔뜩 타박하는 걸로 기분을 푼 나는 친구들에게서 떨어져 페이비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 했다.
꼭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불안해보이는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둘 수 없었으니까.
“알른 영애.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페이비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도중 요한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고 있는건지 눈 아래에 짙은 기미를 달고 있던 그는 짧게 호흡하고서 본론을 꺼냈다.
“성녀님께서 하시던 일을 제가 맡을 수 있도록 설득해 주십시오.”
요한이 말하길 지금 페이비는 과중한 업무를 맡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나를 따라다니면서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에 하던 성녀로서의 업무에 더해 최근 나를 돕기 위해 각국의 관계를 조정하는 일까지 자신의 손으로 모두 하려 했다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 이야기해도 페이비는 반드시 자기가 해야하는 일이라며 물러서질 않았다고.
“당신께서 직접 말을 해주신다면 성녀님께서도 한 번 생각을 해보시겠죠. 그러니 부디.”
“꼰대 할배. 당신이 이렇게 비굴한 사람인 걸 처음 알았네. 푸핳. 좋아. 네 추한 꼴을 봐서라도 내가 특별히 들어줄게.”
살짝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박찼던 나는 무너지려 하는 페이비의 모습을 보곤 순간 당황했다.
내게 민폐를 끼친 것 같단 생각에 고민하는 건 알고 있었다.
내 짐을 나눠들기 위해 무리하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몰려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난 지금도 페이비를 너무 과평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녀가 성녀라는 이유로 온갖 시련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무관심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 걸음이 페이비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넌 말야.
내가 모든 짐을 짊어지려는 게 마음 아프다고 말했지만 결국 너도 똑같잖아. 멍청아.
하아. 뭐 어쩌겠냐. 너나 나나 이 꼴인 걸 보면 허접페도주신은 이런 바보들을 좋아하나봐.
하긴 이런 답없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그 허접을 누가 믿어주겠냐.
그치?
어느 정도 진정한 페이비를 요한에게 넘겨준 나는 바깥에 나와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다루는 게 힘들더냐?>
‘다룬다는 표현이 좀 그렇네요.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해주세요.’
<하여간 너도 이 기회에 주변을 보는 법을 배우거라. 언제까지 꼬맹이로 살 순 없잖으냐.>
‘무슨 소리세요? 저처럼 다른 사람들 신경 써주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요?’
<차고 넘치는 듯 한데.>
‘할아버지. 초치지 말고 분위기 맞춰요.’
<싫다만?>
‘또 변기에 들어가고 싶으세요?’
<…미. 미안하다.>
*
다음 날 아침.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모인 우리들이었지만 기이하게도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질 않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가장 먼저 왔을 페이비가 지각을 한 것이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어 좀 늦어도 문제가 되진 않지만.
“루시. 어젯밤에 제대로 위로해주신 거 맞아요?”
“뭘 기대하는 거냐. 루시 알른이 그런 낯간지러운 걸 할 수 있을 성 싶으냐? 또 괴상한 말이나 지껄였. 끄억!?”
아서의 옆구리를 힘을 주고서 툭 건드리자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다리를 굽혔다.
“닥치시죠. 무능왕자님. 꼬맹이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관심 끌려 해봐야 추할 뿐이거든요.”
“왜 나만…”
“엄살이 심한데 속도 좁으시다니. 남성미라고는 조금도 없으시네요. 바지 대신 치마를 입으시는 게 어떠신가요?”
“…젠장.”
“왕자님. 치마줄까? 나 집에 안 입은 거 많아.”
“입겠냐!”
친구들과 투닥거리던 중 한 쪽에서 익숙한 신성이 느껴졌다.
그를 따라 고갤 돌렸더니 벽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는 페이비와 그를 의아하게 보는 성지의 사람들이 보였다.
쟨 저기서 뭘 하는 거람.
눈을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숨는 페이비의 모습에 짓궂은 웃음을 지은 나는 보란 듯 발소리를 내며 벽 쪽으로 향했다.
“안녕.”
“아. 아. 안녕하…세요.”
“왜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날 만나는 게 그렇게 싫었어?”
“아뇨! 아뇨. 그. 어제. 아니. 으에에.”
얼굴이 벌게져선 말조차 제대로 잇질 못하는 페이비의 모습은 내 안의 가학심을 자극했다.
이건 솔직히 페이비의 잘못 아냐? 이 정도면 제발 좀 괴롭혀달라고 부탁하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왜애? 허접 페이비라고 불린 게 그렇게나 기뻤어?”
“어. 어어어.”
“허접 페이비. 허접 페이비. 허접~ 허접~”
이젠 아예 쓰러지려 하는 페이비의 주변에서 키득거리고 있던 중 뒤편에서 타다닥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한 느낌에 고갤 돌린 나는 허공에 떠올라 있는 프레이를 발견하고 피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나도! 나도 프레이!”
“…꺼져. 바보 검사.”
“프! 레! 이!”
“네가 바보멍청이인 이상 넌 평생 바보검사야. 헛소리 지껄이지 마.”
“왜! 왜애애!”
“어머나. 아직도 켄트 영애께선 바보검사인가요? 저도 조이라고 불리는데.”
“치사해! 왜 나만 안 되는 건데!”
“헤헤. 헿. 페이비. 흐헿.”
여러모로 개판이었지만 어제의 불안함보다는 이런 난장판이 훨씬 더 나았다.
그래.
조금.
조금은 짐을 나누자.
내가 아닌 친구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