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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00

아르마디가 십자가에 자신의 권능을 불어넣은 순간 감추어져 있던 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이 계획의 마지막에 아르마디에게 선물하려 했던 물건.

그가 평생에 걸쳐 준비해 둔 것.

신화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대지에 내던진 그녀에게 권능을 되찾아주기 위해 안비해 둔 이 목걸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진 물건이며 권위를 잃어버린 아르마디가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제와서 희생된 이들의 한을 달랠 수는 없으리라.

이전에 그녀의 성녀가 말했던 것처럼 아르마디가 영원토록 짊어져야 할 죄 중 하나겠지.

그걸 알고는 있지만, 최소한 지금의 기적이 그들의 희생에 의미를 만들어주길.

조금이라도 그들의 이름을 이 세상에 남겨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아르마디가 손을 들자 루시가 만들어낸 빛이 환해지더니 하늘 위에서 신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신화의 시대 당시 주신의 편에 서서 싸웠으며 지금은 악신을 물리치기 위해 이 대지에 선 이들.

“오합지졸들이 잔뜩 뭉쳤구나.”

그들을 마주하고서도 아그라는 태연했다. 저 정도 전력은 자기 혼자서 어찌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묻어난 어투였다.

“참 신기하구나. 과거에 저들의 무능을 보고도 저 놈들에게 의지할 생각이 들더냐?”

“그러는 당신께선 과거에 홀로 패배하였거늘 지금도 당신이 이기리라 생각하십니까?”

“물론이다.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세상의 시작과 끝은 거스를 수 없는 규율이다. 이 세계는 이미 동력을 잃었어. 사라질 세계에 어찌 의미가 있겠는가!”

아그라는 자신의 권능 속에서 확신을 얻었다. 눈앞의 저주스러운 존재가 아무리 발악한다 한들 정해진 끝을 바꿀 수 없으리라고.

“한 가지는 알지만 다른 것은 모르고 계시네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기도 하단 것을요.”

지금의 세계는 아르마디가 시작을 알린 세상이며 그녀가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니 이 세계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이유는 곧 아르마디란 신의 권능이 한계에 달해가고 있기 때문이란 소리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새로운 신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고하면 된다.

“당신이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듯, 저도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아르마디의 웃음을 본 아그라는 자신의 권능을 펼치려 했지만 즉시 아르마디를 제지하기엔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인간도. 요정도. 신수도. 신도. 그 모든 이들이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그의 앞을 가로 막았으니까.

서로 간의 뜻과 뜻이 부딪히며 생겨난 혼란 속에서 옆으로 고갤 돌린 아르마디는 조심스레 루시에게 다가갔다.

“저의 사도여.”

“…뭔데. 허접주신.”

“당신은 알고 계시지요? 이 세상에 새로운 시작을 고할 방법에 대해서.”

다른 이들이었다면 주신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루시는 아니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지식을 지닌 루시라면, 그리고 이 세계의 다음에 대해 수도 없이 생각하고 고민했던 그녀라면, 분명 새로운 세사의 시작을 고할 수 있을 거다.

이러한 아르마디의 기대에 루시는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내밀었다.

*

아르마디의 말을 들은 순간 그가 무얼 바라고 말을 꺼낸 건지를 이해했다.

이 허접이 굳이 내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하나 뿐이야.

아그라가 게임의 끝이 다가옴에 따라 강인한 힘을 얻게 된 것이라면 게임에 새로히 생명을 부여하면 되는 거잖아.

하하핳! 모니터 너머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단어를 이 곳에서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정말.

정말.

어이가 없고.

그래서 즐겁네.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거지?”

“되도록 희망찬 정경이 될 것을 약속해주신다면요.”

“내가 너 같은 변태인 줄 알아? 그 정도는 구별할 수 있거든?”

“그런 것치고는 당신께서 만드신 던전이 무척 무시무시했습니다만.”

“푸핳. 뭐래? 네가 만든 것도 끔찍했거든?”

“당신 이외의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장소였으니까요.”

“…진짜?”

애초부터 썩은물의 기준에 맞춰져 있어서 그 꼴이었던 거냐.

놀라운 진실을 듣게 된 내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밀자 아르마디가 마주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태어났을 때 그대로의 부드러움을 간직한 그녀의 손은 맞잡는 것만으로 긴장이 풀리게 해줬다.

“권능을 다루는 것에는 익숙해지셨죠?”

“억지를 부리는 거잖아. 당연히 알지.”

신의 권능이란 건 말이 거창해서 무섭게 느껴질 뿐 실제로는 권능에게 떼를 쓰는 것에 가깝다.

내가 이걸 바라니 날 좋아하는 넌 반드시 이걸 해줘야 된단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 말이다.

교황과 싸우며 이를 지겹도록 체감한 난 웃으며 고갤 끄덕이다 문득 떠오른 걱정에 멈칫했다.

“혹시 바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상한 외계어를 써야 하는 건 아니지?”“그 쪽을 바라시나요?”

“진심으로 지껄이는 말이야?”

“당연히 아니죠.”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힘을 나누어 받은 난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아그라를 보며 과거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리고 고갤 내저었다.

그 때의 내가 바라던 세상과 지금의 내가 바라는 세상은 달라.

내가 원하는 소울 아카데미의 DLC는.

소울 아카데미의 미래에는.

앞으로 나와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이외에도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에 고난 따윈 필요치 않거든.

“어떻게.”

저 멀리에서 당혹이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시작의 권능을 품을 수 있는 거지?”

자신을 향하는 무수한 공격 속에서도 아그라의 눈은 오롯이 나를 바라봤다.

“주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라 한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자신의 이해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그 눈빛에 절로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설마. 아르마디. 네 년!”

“뭐야?♡ 뭐야?♡ 왜 배신당한 듯한 표정을 짓는 거야?♡”

아그라의 고함소리를 가로 막듯 목소리를 냈다.

여태 단 한 번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던 아그라지만 이번엔 달랐다.

당혹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는 도저히 날 외면하지 못했다.

“아항!♡ 짝사랑이었구나?♡ 풋풋해라♡ 끝의 악신은 동정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건가 보네~♡”

미간을 찌푸린 아그라가 소리를 내지르며 내 쪽에 손을 뻗었지만 난 비웃음을 흘릴 뿐 그에게 조금도 반응해주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도 저를 막아 줄 이들이 있었으니까.

숲의 주인들이. 요정들이. 왕국의 기사들이. 용사의 일행이. 알른의 사람들이. 칼이. 베네딕이. 아서가. 프레이가. 페이비가. 조이가.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선 아르마디가 날 지켜줄 것을 믿었으니까.

“퍄하하!♡ 허어어어접~♡”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등을 돌린 나는 복잡한 표정의 아르마디를 보며 눈을 굽혔지만 따로 무어라 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녀와 진득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니까.

“이제 하면 돼?”

“벌써 생각을 끝마치셨습니까?”

“말이 새로운 세상이지 그냥 내가 바라는 미래를 요구하면 되는 거잖아? 너 같은 허접변태를 택한 권능이니까. 내 말은 당연히 들어주겠지.”

“어떤 미래를 그리셨나요?”

“보시다시피 난 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거든. 세상의 모든 허접들에게 내 발치에 깔릴 기회를 줄 거야.”

이 세상은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니야.

그러니까 고난을 겪고 성장할 주인공도, 그 주인공이 겪을 여러 위기도, 세상에 도사린 위기도 필요치 않아.

“잘 이해가 되질 않네요. 쉽게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아차차. 또 버릇처럼 쓰잘데기 없는 말을 해버렸네.

이렇게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 영 안 바뀐다니까.

헛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인 나는 표정을 다잡고서 가슴켠에 손을 올렸다.

“이 끝에 모두가 행복하기를.”

간절한 소원을 내 안의 빛에 속삭인 순간 내 가슴 켠에서 피어오른 빛이 하늘 저 높은 곳으로 향해 올라갔다.

그 순간 내가 만들어낸 태양이 부서지며 세상에 자신의 빛을 흩뿌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바뀌고 있는 걸까?

“이럴 순 없다!”

고함소리를 따라 고갤 돌리자 권위를 잃어가는 아그라가 보였다.

“이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냐! 저주받을 아르마디여!”

그 뒤에는 재가 되어 흩어져가는 마물의 군세와 그를 믿기힘든 듯 사라져가는 마물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군세가 있었다.

“하! 그래! 이 것이 네 년의 발악이더냐! 좋다! 얼마든 발악해봐라! 그래봐야 결국에 찾아 올 끝을 막을 순 없을 테니!”

점차 힘을 잃어가는 아그라를 향해 다가간 아르마디는 아그라가 뱉은 침을 아무렇지 않은 듯 닦아내고서 살짝 허리를 숙여 그와 시선을 맞췄다.

“지하에 처박혀서 수백년 동안 또 다시 짖도록 하세요. 그 목소리가 제게 닿을 일은 없겠지만요.”

“아르마디이이이이이!”

그걸로 끝이었다.

점차 힘을 잃어가던 아그라는 갑작스레 나타났을 때처럼 갑작스레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아르마디라는 기적이 이 대지에 평화를 선사했다.

– 띠링!

익숙한 알림음을 따라 고갤 돌리자 푸른 색의 창이 떠올라 있었다.

[퀘스트 클리어!]

[당신께서는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이 세계는 전적으로 당신의 덕분에 새로운 미래를 얻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의 사도시여.”

아르마디의 목소리를 따라 푸른색의 창이 무너져내리며 허공으로 흩어져갔다.

“이 무능한 자의 부름을 받아 많은 고생을 겪으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아르마디에게 다가간 난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서 끌어 당겼다.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우리 둘 사이에 개입하는 이는 없었다.

꼭 우리 둘이 선 공간이 분리된 것처럼.

“고맙단 말로 끝낼 생각을 한 거라면 나 진짜 화낼 거야?”

“바라시는 게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지. 허접에 마조에 무능한 변태 새끼인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바라시는 게 있으시다면 무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그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많았다.

아르마디를 만난 순간 어떤 식으로 괴롭혀줄지에 대해 상상한 것만 해도 수십에 가까웠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후의 일이였다.

당장 물어봐야 할 것도 부탁해야 할 것도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말해봐. 난 누구야?”

“어떤 의미에서도 루시 알른입니다. 저의 사도시여.”

“그럼 호칭이 달라져야 하지 않아? 마마.”

“…그렇네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루시. 부디 용서해주세요.”

“안아주면 용서해줄게. 난 착하니까.”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르마디의, 마마의 품 안에 안긴 나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흑!”

지금의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Chapter 700

Chapter 700

아르마디가 십자가에 자신의 권능을 불어넣은 순간 감추어져 있던 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이 계획의 마지막에 아르마디에게 선물하려 했던 물건. 그가 평생에 걸쳐 준비해 둔 것. 신화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대지에 내던진 그녀에게 권능을 되찾아주기 위해 안비해 둔 이 목걸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진 물건이며 권위를 잃어버린 아르마디가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제와서 희생된 이들의 한을 달랠 수는 없으리라. 이전에 그녀의 성녀가 말했던 것처럼 아르마디가 영원토록 짊어져야 할 죄 중 하나겠지. 그걸 알고는 있지만, 최소한 지금의 기적이 그들의 희생에 의미를 만들어주길. 조금이라도 그들의 이름을 이 세상에 남겨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아르마디가 손을 들자 루시가 만들어낸 빛이 환해지더니 하늘 위에서 신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신화의 시대 당시 주신의 편에 서서 싸웠으며 지금은 악신을 물리치기 위해 이 대지에 선 이들. “오합지졸들이 잔뜩 뭉쳤구나.” 그들을 마주하고서도 아그라는 태연했다. 저 정도 전력은 자기 혼자서 어찌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묻어난 어투였다. “참 신기하구나. 과거에 저들의 무능을 보고도 저 놈들에게 의지할 생각이 들더냐?” “그러는 당신께선 과거에 홀로 패배하였거늘 지금도 당신이 이기리라 생각하십니까?” “물론이다.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세상의 시작과 끝은 거스를 수 없는 규율이다. 이 세계는 이미 동력을 잃었어. 사라질 세계에 어찌 의미가 있겠는가!” 아그라는 자신의 권능 속에서 확신을 얻었다. 눈앞의 저주스러운 존재가 아무리 발악한다 한들 정해진 끝을 바꿀 수 없으리라고. “한 가지는 알지만 다른 것은 모르고 계시네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기도 하단 것을요.” 지금의 세계는 아르마디가 시작을 알린 세상이며 그녀가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니 이 세계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이유는 곧 아르마디란 신의 권능이 한계에 달해가고 있기 때문이란 소리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새로운 신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고하면 된다. “당신이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듯, 저도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아르마디의 웃음을 본 아그라는 자신의 권능을 펼치려 했지만 즉시 아르마디를 제지하기엔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인간도. 요정도. 신수도. 신도. 그 모든 이들이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그의 앞을 가로 막았으니까. 서로 간의 뜻과 뜻이 부딪히며 생겨난 혼란 속에서 옆으로 고갤 돌린 아르마디는 조심스레 루시에게 다가갔다. “저의 사도여.” “...뭔데. 허접주신.” “당신은 알고 계시지요? 이 세상에 새로운 시작을 고할 방법에 대해서.” 다른 이들이었다면 주신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루시는 아니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지식을 지닌 루시라면, 그리고 이 세계의 다음에 대해 수도 없이 생각하고 고민했던 그녀라면, 분명 새로운 세사의 시작을 고할 수 있을 거다. 이러한 아르마디의 기대에 루시는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내밀었다. * 아르마디의 말을 들은 순간 그가 무얼 바라고 말을 꺼낸 건지를 이해했다. 이 허접이 굳이 내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하나 뿐이야. 아그라가 게임의 끝이 다가옴에 따라 강인한 힘을 얻게 된 것이라면 게임에 새로히 생명을 부여하면 되는 거잖아. 하하핳! 모니터 너머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단어를 이 곳에서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정말. 정말. 어이가 없고. 그래서 즐겁네.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거지?” “되도록 희망찬 정경이 될 것을 약속해주신다면요.” “내가 너 같은 변태인 줄 알아? 그 정도는 구별할 수 있거든?” “그런 것치고는 당신께서 만드신 던전이 무척 무시무시했습니다만.” “푸핳. 뭐래? 네가 만든 것도 끔찍했거든?” “당신 이외의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장소였으니까요.” “...진짜?” 애초부터 썩은물의 기준에 맞춰져 있어서 그 꼴이었던 거냐. 놀라운 진실을 듣게 된 내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밀자 아르마디가 마주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태어났을 때 그대로의 부드러움을 간직한 그녀의 손은 맞잡는 것만으로 긴장이 풀리게 해줬다. “권능을 다루는 것에는 익숙해지셨죠?” “억지를 부리는 거잖아. 당연히 알지.” 신의 권능이란 건 말이 거창해서 무섭게 느껴질 뿐 실제로는 권능에게 떼를 쓰는 것에 가깝다. 내가 이걸 바라니 날 좋아하는 넌 반드시 이걸 해줘야 된단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 말이다. 교황과 싸우며 이를 지겹도록 체감한 난 웃으며 고갤 끄덕이다 문득 떠오른 걱정에 멈칫했다. “혹시 바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상한 외계어를 써야 하는 건 아니지?”“그 쪽을 바라시나요?” “진심으로 지껄이는 말이야?” “당연히 아니죠.”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힘을 나누어 받은 난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아그라를 보며 과거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리고 고갤 내저었다. 그 때의 내가 바라던 세상과 지금의 내가 바라는 세상은 달라. 내가 원하는 소울 아카데미의 DLC는. 소울 아카데미의 미래에는. 앞으로 나와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이외에도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에 고난 따윈 필요치 않거든. “어떻게.” 저 멀리에서 당혹이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시작의 권능을 품을 수 있는 거지?” 자신을 향하는 무수한 공격 속에서도 아그라의 눈은 오롯이 나를 바라봤다. “주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라 한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자신의 이해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그 눈빛에 절로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설마. 아르마디. 네 년!” “뭐야?♡ 뭐야?♡ 왜 배신당한 듯한 표정을 짓는 거야?♡” 아그라의 고함소리를 가로 막듯 목소리를 냈다. 여태 단 한 번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던 아그라지만 이번엔 달랐다. 당혹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는 도저히 날 외면하지 못했다. “아항!♡ 짝사랑이었구나?♡ 풋풋해라♡ 끝의 악신은 동정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건가 보네~♡” 미간을 찌푸린 아그라가 소리를 내지르며 내 쪽에 손을 뻗었지만 난 비웃음을 흘릴 뿐 그에게 조금도 반응해주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도 저를 막아 줄 이들이 있었으니까. 숲의 주인들이. 요정들이. 왕국의 기사들이. 용사의 일행이. 알른의 사람들이. 칼이. 베네딕이. 아서가. 프레이가. 페이비가. 조이가.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선 아르마디가 날 지켜줄 것을 믿었으니까. “퍄하하!♡ 허어어어접~♡”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등을 돌린 나는 복잡한 표정의 아르마디를 보며 눈을 굽혔지만 따로 무어라 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녀와 진득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니까. “이제 하면 돼?” “벌써 생각을 끝마치셨습니까?” “말이 새로운 세상이지 그냥 내가 바라는 미래를 요구하면 되는 거잖아? 너 같은 허접변태를 택한 권능이니까. 내 말은 당연히 들어주겠지.” “어떤 미래를 그리셨나요?” “보시다시피 난 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거든. 세상의 모든 허접들에게 내 발치에 깔릴 기회를 줄 거야.” 이 세상은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니야. 그러니까 고난을 겪고 성장할 주인공도, 그 주인공이 겪을 여러 위기도, 세상에 도사린 위기도 필요치 않아. “잘 이해가 되질 않네요. 쉽게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아차차. 또 버릇처럼 쓰잘데기 없는 말을 해버렸네. 이렇게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 영 안 바뀐다니까. 헛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인 나는 표정을 다잡고서 가슴켠에 손을 올렸다. “이 끝에 모두가 행복하기를.” 간절한 소원을 내 안의 빛에 속삭인 순간 내 가슴 켠에서 피어오른 빛이 하늘 저 높은 곳으로 향해 올라갔다. 그 순간 내가 만들어낸 태양이 부서지며 세상에 자신의 빛을 흩뿌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바뀌고 있는 걸까? “이럴 순 없다!” 고함소리를 따라 고갤 돌리자 권위를 잃어가는 아그라가 보였다. “이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냐! 저주받을 아르마디여!” 그 뒤에는 재가 되어 흩어져가는 마물의 군세와 그를 믿기힘든 듯 사라져가는 마물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군세가 있었다. “하! 그래! 이 것이 네 년의 발악이더냐! 좋다! 얼마든 발악해봐라! 그래봐야 결국에 찾아 올 끝을 막을 순 없을 테니!” 점차 힘을 잃어가는 아그라를 향해 다가간 아르마디는 아그라가 뱉은 침을 아무렇지 않은 듯 닦아내고서 살짝 허리를 숙여 그와 시선을 맞췄다. “지하에 처박혀서 수백년 동안 또 다시 짖도록 하세요. 그 목소리가 제게 닿을 일은 없겠지만요.” “아르마디이이이이이!” 그걸로 끝이었다. 점차 힘을 잃어가던 아그라는 갑작스레 나타났을 때처럼 갑작스레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아르마디라는 기적이 이 대지에 평화를 선사했다. - 띠링! 익숙한 알림음을 따라 고갤 돌리자 푸른 색의 창이 떠올라 있었다. [퀘스트 클리어!] [당신께서는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이 세계는 전적으로 당신의 덕분에 새로운 미래를 얻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의 사도시여.” 아르마디의 목소리를 따라 푸른색의 창이 무너져내리며 허공으로 흩어져갔다. “이 무능한 자의 부름을 받아 많은 고생을 겪으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아르마디에게 다가간 난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서 끌어 당겼다.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우리 둘 사이에 개입하는 이는 없었다. 꼭 우리 둘이 선 공간이 분리된 것처럼. “고맙단 말로 끝낼 생각을 한 거라면 나 진짜 화낼 거야?” “바라시는 게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지. 허접에 마조에 무능한 변태 새끼인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바라시는 게 있으시다면 무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그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많았다. 아르마디를 만난 순간 어떤 식으로 괴롭혀줄지에 대해 상상한 것만 해도 수십에 가까웠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후의 일이였다. 당장 물어봐야 할 것도 부탁해야 할 것도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말해봐. 난 누구야?” “어떤 의미에서도 루시 알른입니다. 저의 사도시여.” “그럼 호칭이 달라져야 하지 않아? 마마.” “...그렇네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루시. 부디 용서해주세요.” “안아주면 용서해줄게. 난 착하니까.”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르마디의, 마마의 품 안에 안긴 나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흑!” 지금의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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