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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6

퉁.

투웅!

내가 예상했던 대로 제국이 추가 병력을 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인구가 많은 제국이라고 해도 애써 키운 기사단이 갈려 나가는 걸 원하지는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 기사가 자라는 것도 아닌데 아깝지 않을 리 없지.

반면 나를 죽여봤자 얻는 이득은… 생각나는 게 사기 진작 정도밖에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리스크에 비해 리턴이 너무 적지 않아?

쐐애액!

퉁!

아니면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전에 왔던 녀석들은 그저 뱀의 교활한 계략에 휘말린 걸 수도 있고.

내 손을 빌려 숙청을 끝냈으니 더 이상 애꿎은 전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어진 거라거나.

뭐가 됐든 뱀을 비롯한 제국의 주류 의견은 나와 마찰을 빚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아무리 마스터 검사라고 해도 세력도 없고 뒷배도 없는데 굳이 건드려서 무슨 이득을 얻겠어.

그렇게 보면 원한은 잠시 접어두고 나를 제국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뱀의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

합리적인 것과 별개로, 가능성은 없는 생각이지만.

투우웅!

“….”

“….”

“….”

나는 잠시 옆에 내려놨던 검을 잡았다.

지난번 마을에 내려갔을 때 사 온 명검 파리채의 후배였다.

제국 놈들이 쳐들어왔을 땐 깜박하고 놓고 가는 바람에 못 썼고, 그 후로는 쓸 일이 없었는데….

마침내 쓸 일이 생긴 것 같네.

아아,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퉁!

지치지도 않는지 또다시 묵직한 무언가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걸 뭐라 하더라.

층간 소음? 그렇다고 하기엔 층이 나뉘어 있진 않고.

그냥 소음이라고 하자.

“카, 카나야….”

소음의 원흉을 제거하러 가려고 마음먹은 찰나,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손이 있었다.

“…놔.”

손의 주인은 이제는 거의 이 산에 살다시피 하는 저니였다.

저니는 아침이면 꼬박꼬박 산에 올라 나를 찾는다.

저니가 챙겨온 음식으로 가볍게 아침을 때우면 그녀는 점심 전까지 검술 연습을 하거나 그라닉을 공부했다.

같이 점심을 먹은 후, 저녁이 될 때까지 똑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반복.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그라닉으로 적힌 책을 가져와 더듬더듬 읽던 저니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내가, 말할게.”

책을 열심히 읽고 모르는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며 그라닉을 배운 게 효과가 있었는지 저니의 그라닉 실력은 몇 주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취월장했다.

아직 어눌한 티가 나긴 하지만 단어로만 말하던 전과 달리 이젠 문장을 구사할 줄도 알게 됐다.

발음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

하지만 나의 일상과 저니의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매일 찾아오면서도 내가 무서웠는지 쉽게 다가오지 못하던 그녀는 제국이 쳐들어온 그날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거리를 좁혔다.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질 않나, 가까이 다가와서 친근하게 말을 걸질 않나.

지금처럼 이렇게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것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처음에 당황해서 타이밍을 놓쳤더니 뭔가 이제 와서 거부하기도 애매하고, 매일 먹을 걸 갖다주는 사람한테 매정하게 대하기도 양심에 찔리고….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라서 반쯤 포기한 상태로 내버려두고 있다.

설마 나를 정말 어린애로 보는 건 아니겠지.

…이 세계 나이로 따지면 성인이 아닌 건 맞지만, 아무튼.

“자, 착하지?”

“….”

나는 부드럽게 나를 이끄는 저니의 손길에 의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를 앉힌 저니는 반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결계로 향했다.

“유키 님… 저희 카나가 많이 화가 났어요. …아니, 이게 아니지.”

나를 힐끔 본 저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안 힘들어요?”

“원래 수련은 힘들어야 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결계만 두드리는 게 무슨 수련이에요. 그보다 카나가 검 들고 오려는 거 진짜 간신히 말렸으니까 오늘은 그만해요. …오히려 좋아하지 말고요!”

“…쳇.”

무슨 말을 나눴는지 저니와 아르키쉬로 떠들던 유키라는 여자, 즉 대검 삐약이가 순순히 검을 집어넣었다.

마나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마스터 메이지가 친 결계를 무슨 수로 부수겠다는 건지.

물론 유키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지만, 애초에 좀 두드려 보다 안 되면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백날 두드려봤자 부술 수 있을 리 없어서 걱정은 하지 않는다지만,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은 내 신경을 자극했다.

유키와 처음 만난 게 일주일 하고 며칠이 더 됐으니 저렇게 결계를 두드려대기 시작한 것은 일주일 정도 된 것 같다.

처음에는 그녀도 저렇진 않았다.

그야 그때는 내가 결계 안에 들여보내 줬으니까 두드릴 이유도 없었지.

근데, 결계 안에 들여주니까 시도 때도 없이 대검을 들이밀며 귀찮게 굴더라.

한두 번이야 어울려 줄 수 있는데, 몇 번을 쓰러져도 달려드는 통에 결국 죽여서 쫓아냈다.

그 후로 결계를 열어주지 않았더니 저걸 부수겠답시고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도대체 어떻게 된 사고방식인지.

집주인 앞에서 문을 부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사람을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지 말고, 유키 님도 방식을 바꿔보는 건 어때요?”

“…방식?”

“저처럼 먹을 걸 갖다준다든가…. …납치범이라니! 그냥 호감작이거든?!”

“먹을 걸 주면 저랑 싸워줄까요?”

“애초에 카나가 나를 납치하면 모를까, 나 같은 허접한테 카나가 납치당하겠어?!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 글쎄요. 카나가 워낙 무뚝뚝한 면이 있어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나아지지 않을까요?”

“음….”

대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유키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을 돌렸다.

“…어린애들은 뭘 좋아할까요?”

“애들마다 다르겠지만 장난감이나 인형이나… 군것질거리도 많이 좋아하죠?”

“장난감, 인형, 군것질거리….”

“아, 꽃 가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원예 도구나 꽃을 사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원예 도구, 꽃…. 고마워요.”

“고마우면 결계 좀 그만 두드려 주세요. 솔직히 저도 시끄러워서….”

얼추 대화가 마무리 끝나가는 느낌이네.

근데, 왜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여느 때와 같은 아침.

저니를 들여보내기 위해 결계를 열고, 저니의 뒤를 졸졸 따라온 유키를 막으려고 할 때였다.

불쑥.

“자, 뇌물이야.”

유키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건넸다.

“…?”

검은색… 상자?

유키의 손에 들린 것은 붉은색의 작은 리본이 달린 조그만 상자였다.

경계 어린 눈으로 보고 있자니 유키가 안 받고 뭐 하냐는 듯 손을 재차 흔들었다.

“…선물이래.”

우리를 보고 있던 저니가 나에게 설명해 줬다.

“사과의 선물. 귀찮게 해서 미안하대.”

“그럴 리가 없는데.”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유키는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대검을 휘두르다 죽을 미친 삐약이지, 순순히 사과하는 얌전한 병아리가 아니었으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저니가 슬며시 내 눈을 피했다.

수상한데….

적의가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 일단 뭔지나 볼까.

달칵.

“…!”

뚜껑을 열자마자 강렬한 단내가 코를 찔렀다.

이 정도로 강한 단내면 틈으로 새어 나올 것 같은데 용케 뚜껑으로 막아두고 있었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유혹적인 향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초콜릿이야. 먹어 볼래?”

“으, 으응… 아니….”

윤기 나는 검은 빛깔이 시선을 잡아끌고 놓아주질 않는다.

분명 맛있겠지.

이런 냄새를 풍기는데 맛이 없을 리 없어.

하지만 이걸 먹는다면….

나는 유키를 힐끔 바라봤다.

“왜 그래? 이거, 맛있어.”

그렇겠지.

나도 알아….

덥석.

저니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초콜릿을 노려보고 있으니 그녀가 초콜릿을 집었다.

내 시선도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아~”

“….”

…보자 보자 하니까 나를 정말 애 취급하고 있네.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내려고 할 때 갑자기 입 안에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

“옳지.”

…핫, 무의식적으로 받아먹고 말았어…!

하지만 후회하기엔 유키가 가져온 초콜릿은 너무 달고.

…너무 맛있어….

달긴 엄청나게 단데 끈적하지 않게 혀를 감싸오는 게 그야말로 일미라고 부름에 부족함이 없는 맛이었다.

눈을 감고 부드러운 단맛을 음미하고 있으니 입안에 들어온 초콜릿이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졌다.

“아….”

진하게 맴도는 단맛의 여운에 아쉬운 한숨을 흘리고 있으니 저니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하나 더 있는데.”

그 말과 동시에 유키가 어디선가 상자 하나를 더 꺼냈다.

조금 전과 완전히 똑같은 상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귀찮게 하는 건 딱 질색이지만, 손님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성의를 보였으니 봐주는 거야.

…절대 초콜릿에 넘어간 게 아니라고.

* * *

“쉽군요.”

“쉽네요.”

초콜릿 상자를 안아 들고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는 카나를 본 저니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허탈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처음부터 이걸 갖다줄 걸 그랬네요.”

그랬다면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가져다준 것들도 충분히 맛있는 것들이었는데…. 어린애 입맛엔 안 맞았던 거려나.’

그렇다고 하기엔 매운 거에 반응한 게 또 이상하고.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저니가 머리를 저었다.

그래도 기뻐하는 걸 봤잖아.

웃지는 않았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카나의 얼굴이 사르르 펴지는 걸 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고급 초콜릿인 만큼 가격이 상당히 비쌌지만, 어차피 돈을 쓴 건 저니가 아니라 유키였기에 저니는 아무런 부담 없이 행복을 만끽했다.

재주는 유키가 부리고 돈은 저니가 번다기엔 어쨌든 유키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않았나.

“이런 걸 보고 윈-윈. 이라고 하는 거죠.”

“…윈윈?”

유키는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하는 저니를 힐끔 봤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활짝 열린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앗, 카나야 잠시만…! 나 아직 안 들어갔어!”

혼자 남아 히죽거리던 저니도 앞서 간 둘을 따라 결계 안으로 뛰어들자 불안정하게 일렁이던 결계가 완전히 닫혔다.

평소와는 조금 달랐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Chapter 26

Chapter 26

퉁. 투웅! 내가 예상했던 대로 제국이 추가 병력을 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인구가 많은 제국이라고 해도 애써 키운 기사단이 갈려 나가는 걸 원하지는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 기사가 자라는 것도 아닌데 아깝지 않을 리 없지. 반면 나를 죽여봤자 얻는 이득은… 생각나는 게 사기 진작 정도밖에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리스크에 비해 리턴이 너무 적지 않아? 쐐애액! 퉁! 아니면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전에 왔던 녀석들은 그저 뱀의 교활한 계략에 휘말린 걸 수도 있고. 내 손을 빌려 숙청을 끝냈으니 더 이상 애꿎은 전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어진 거라거나. 뭐가 됐든 뱀을 비롯한 제국의 주류 의견은 나와 마찰을 빚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아무리 마스터 검사라고 해도 세력도 없고 뒷배도 없는데 굳이 건드려서 무슨 이득을 얻겠어. 그렇게 보면 원한은 잠시 접어두고 나를 제국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뱀의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 합리적인 것과 별개로, 가능성은 없는 생각이지만. 투우웅! “….” “….” “….” 나는 잠시 옆에 내려놨던 검을 잡았다. 지난번 마을에 내려갔을 때 사 온 명검 파리채의 후배였다. 제국 놈들이 쳐들어왔을 땐 깜박하고 놓고 가는 바람에 못 썼고, 그 후로는 쓸 일이 없었는데…. 마침내 쓸 일이 생긴 것 같네. 아아,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퉁! 지치지도 않는지 또다시 묵직한 무언가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걸 뭐라 하더라. 층간 소음? 그렇다고 하기엔 층이 나뉘어 있진 않고. 그냥 소음이라고 하자. “카, 카나야….” 소음의 원흉을 제거하러 가려고 마음먹은 찰나,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손이 있었다. “…놔.” 손의 주인은 이제는 거의 이 산에 살다시피 하는 저니였다. 저니는 아침이면 꼬박꼬박 산에 올라 나를 찾는다. 저니가 챙겨온 음식으로 가볍게 아침을 때우면 그녀는 점심 전까지 검술 연습을 하거나 그라닉을 공부했다. 같이 점심을 먹은 후, 저녁이 될 때까지 똑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반복.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그라닉으로 적힌 책을 가져와 더듬더듬 읽던 저니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내가, 말할게.” 책을 열심히 읽고 모르는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며 그라닉을 배운 게 효과가 있었는지 저니의 그라닉 실력은 몇 주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취월장했다. 아직 어눌한 티가 나긴 하지만 단어로만 말하던 전과 달리 이젠 문장을 구사할 줄도 알게 됐다. 발음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 하지만 나의 일상과 저니의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매일 찾아오면서도 내가 무서웠는지 쉽게 다가오지 못하던 그녀는 제국이 쳐들어온 그날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거리를 좁혔다.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질 않나, 가까이 다가와서 친근하게 말을 걸질 않나. 지금처럼 이렇게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것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처음에 당황해서 타이밍을 놓쳤더니 뭔가 이제 와서 거부하기도 애매하고, 매일 먹을 걸 갖다주는 사람한테 매정하게 대하기도 양심에 찔리고….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라서 반쯤 포기한 상태로 내버려두고 있다. 설마 나를 정말 어린애로 보는 건 아니겠지. …이 세계 나이로 따지면 성인이 아닌 건 맞지만, 아무튼. “자, 착하지?” “….” 나는 부드럽게 나를 이끄는 저니의 손길에 의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를 앉힌 저니는 반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결계로 향했다. “유키 님… 저희 카나가 많이 화가 났어요. …아니, 이게 아니지.” 나를 힐끔 본 저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안 힘들어요?” “원래 수련은 힘들어야 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결계만 두드리는 게 무슨 수련이에요. 그보다 카나가 검 들고 오려는 거 진짜 간신히 말렸으니까 오늘은 그만해요. …오히려 좋아하지 말고요!” “…쳇.” 무슨 말을 나눴는지 저니와 아르키쉬로 떠들던 유키라는 여자, 즉 대검 삐약이가 순순히 검을 집어넣었다. 마나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마스터 메이지가 친 결계를 무슨 수로 부수겠다는 건지. 물론 유키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지만, 애초에 좀 두드려 보다 안 되면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백날 두드려봤자 부술 수 있을 리 없어서 걱정은 하지 않는다지만,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은 내 신경을 자극했다. 유키와 처음 만난 게 일주일 하고 며칠이 더 됐으니 저렇게 결계를 두드려대기 시작한 것은 일주일 정도 된 것 같다. 처음에는 그녀도 저렇진 않았다. 그야 그때는 내가 결계 안에 들여보내 줬으니까 두드릴 이유도 없었지. 근데, 결계 안에 들여주니까 시도 때도 없이 대검을 들이밀며 귀찮게 굴더라. 한두 번이야 어울려 줄 수 있는데, 몇 번을 쓰러져도 달려드는 통에 결국 죽여서 쫓아냈다. 그 후로 결계를 열어주지 않았더니 저걸 부수겠답시고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도대체 어떻게 된 사고방식인지. 집주인 앞에서 문을 부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사람을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지 말고, 유키 님도 방식을 바꿔보는 건 어때요?” “…방식?” “저처럼 먹을 걸 갖다준다든가…. …납치범이라니! 그냥 호감작이거든?!” “먹을 걸 주면 저랑 싸워줄까요?” “애초에 카나가 나를 납치하면 모를까, 나 같은 허접한테 카나가 납치당하겠어?!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 글쎄요. 카나가 워낙 무뚝뚝한 면이 있어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나아지지 않을까요?” “음….” 대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유키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을 돌렸다. “…어린애들은 뭘 좋아할까요?” “애들마다 다르겠지만 장난감이나 인형이나… 군것질거리도 많이 좋아하죠?” “장난감, 인형, 군것질거리….” “아, 꽃 가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원예 도구나 꽃을 사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원예 도구, 꽃…. 고마워요.” “고마우면 결계 좀 그만 두드려 주세요. 솔직히 저도 시끄러워서….” 얼추 대화가 마무리 끝나가는 느낌이네. 근데, 왜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여느 때와 같은 아침. 저니를 들여보내기 위해 결계를 열고, 저니의 뒤를 졸졸 따라온 유키를 막으려고 할 때였다. 불쑥. “자, 뇌물이야.” 유키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건넸다. “…?” 검은색… 상자? 유키의 손에 들린 것은 붉은색의 작은 리본이 달린 조그만 상자였다. 경계 어린 눈으로 보고 있자니 유키가 안 받고 뭐 하냐는 듯 손을 재차 흔들었다. “…선물이래.” 우리를 보고 있던 저니가 나에게 설명해 줬다. “사과의 선물. 귀찮게 해서 미안하대.” “그럴 리가 없는데.”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유키는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대검을 휘두르다 죽을 미친 삐약이지, 순순히 사과하는 얌전한 병아리가 아니었으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저니가 슬며시 내 눈을 피했다. 수상한데…. 적의가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 일단 뭔지나 볼까. 달칵. “…!” 뚜껑을 열자마자 강렬한 단내가 코를 찔렀다. 이 정도로 강한 단내면 틈으로 새어 나올 것 같은데 용케 뚜껑으로 막아두고 있었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유혹적인 향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초콜릿이야. 먹어 볼래?” “으, 으응… 아니….” 윤기 나는 검은 빛깔이 시선을 잡아끌고 놓아주질 않는다. 분명 맛있겠지. 이런 냄새를 풍기는데 맛이 없을 리 없어. 하지만 이걸 먹는다면…. 나는 유키를 힐끔 바라봤다. “왜 그래? 이거, 맛있어.” 그렇겠지. 나도 알아…. 덥석. 저니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초콜릿을 노려보고 있으니 그녀가 초콜릿을 집었다. 내 시선도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아~” “….” …보자 보자 하니까 나를 정말 애 취급하고 있네.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내려고 할 때 갑자기 입 안에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 “옳지.” …핫, 무의식적으로 받아먹고 말았어…! 하지만 후회하기엔 유키가 가져온 초콜릿은 너무 달고. …너무 맛있어…. 달긴 엄청나게 단데 끈적하지 않게 혀를 감싸오는 게 그야말로 일미라고 부름에 부족함이 없는 맛이었다. 눈을 감고 부드러운 단맛을 음미하고 있으니 입안에 들어온 초콜릿이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졌다. “아….” 진하게 맴도는 단맛의 여운에 아쉬운 한숨을 흘리고 있으니 저니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하나 더 있는데.” 그 말과 동시에 유키가 어디선가 상자 하나를 더 꺼냈다. 조금 전과 완전히 똑같은 상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귀찮게 하는 건 딱 질색이지만, 손님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성의를 보였으니 봐주는 거야. …절대 초콜릿에 넘어간 게 아니라고. * * * “쉽군요.” “쉽네요.” 초콜릿 상자를 안아 들고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는 카나를 본 저니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허탈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처음부터 이걸 갖다줄 걸 그랬네요.” 그랬다면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가져다준 것들도 충분히 맛있는 것들이었는데…. 어린애 입맛엔 안 맞았던 거려나.’ 그렇다고 하기엔 매운 거에 반응한 게 또 이상하고.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저니가 머리를 저었다. 그래도 기뻐하는 걸 봤잖아. 웃지는 않았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카나의 얼굴이 사르르 펴지는 걸 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고급 초콜릿인 만큼 가격이 상당히 비쌌지만, 어차피 돈을 쓴 건 저니가 아니라 유키였기에 저니는 아무런 부담 없이 행복을 만끽했다. 재주는 유키가 부리고 돈은 저니가 번다기엔 어쨌든 유키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않았나. “이런 걸 보고 윈-윈. 이라고 하는 거죠.” “…윈윈?” 유키는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하는 저니를 힐끔 봤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활짝 열린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앗, 카나야 잠시만…! 나 아직 안 들어갔어!” 혼자 남아 히죽거리던 저니도 앞서 간 둘을 따라 결계 안으로 뛰어들자 불안정하게 일렁이던 결계가 완전히 닫혔다. 평소와는 조금 달랐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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