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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8

‘오우거, 라….’

저니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종의 유행이라고 해야 할까. 오우거는 고블린 오크와 더불어 많은 판타지 소설과 게임, 영화 등에 단골 출연하는 몬스터였다.

강함과 특성은 제각기 다르게 표현되긴 하지만, 오우거를 약하게 표현하는 매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질긴 가죽, 거대한 덩치, 통나무를 가볍게 드는 강한 근력….

그런 유행에 편승한 건지, 실리아 온라인에도 오우거란 이름의 몬스터가 존재했다.

고블린과 오크처럼 자주 보이진 않지만 그렇게 희귀한 몬스터도 아니라 저니도 몇 번 사냥한 적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파티로.

“오우거가 원래 무리를 지어 다니던가?”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지

-저번에 네 마리 같이 다니는 거 봄

-가족 단위로 생활한다는 듯?

저니가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오우거 박사까진 아니어도 대학원생 정도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저마다 아는 것을 꺼내 보였다.

-어차피 와봤자 서너 마리 아님?

-ㄹㅇ 호들갑 오짐

-실버들 귀엽네ㅋㅋㅋㅋ

“그랬으면 좋겠는데….”

몬스터에 대한 것은 플레이어보다 이 세계의 원주민인 NPC들이 더 잘 알 텐데,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상황에 과연 ‘오우거 무리’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리고 서너 마리가 맞다고 해도 마을의 현재 전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근처에 오우거 서식지가 있는 걸 알고 계셨나요?”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산에서 수년을 살았지만 오우거는커녕 머리털 하나 못 봤습니다.”

“…누구예요?”

“근처 산에 사는 사냥꾼인데, 산에 살면서 마물이나 몬스터 같은 위험 요소를 발견하면 알리는 역할을 맡고 계신대요. 오우거 무리가 접근하는 걸 알린 것도 저분이에요. ”

저니와 캐서린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눌 때도 사냥꾼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애초에 먹을 것도 부족한 이런 작은 산에 오우거가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서 넘어왔다면 모를까.”

“다른 곳에서 넘어온다고요? 왜요?”

“난들 압니까. 자기들끼리 싸웠든, 영역 다툼에서 밀려났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해야죠.”

“으음….”

“크흠….”

누군가의 말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 미루는 상황.

가장 먼저 나선 건 한 청년이었다.

“목책을 끼고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면…!”

“오우거를 상대로? 아서라, 목책째로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을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는 건 확실해요? 방향을 틀 가능성도 있는데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가만히 있다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냥 죽자고?”

“그냥 도망갑시다!”

“안 돼요! 아직 짐도 못 챙겼고, 도망갔다가 집이라도 무너지면…!”

“그깟 집이 목숨보다 중요해요?!”

“젊은 사람들이야 도망갈 수 있겠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지원은 언제 온대요?”

“간 지 얼마 안 됐으니 아무리 빨라도 몇 시간은 걸리겠지.”

마을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 상단과 용병들도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다만 저니가 보기에, 마을 사람들과 상단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오우거가 빠르다고 해도 지금부터 도망치면 따라잡히지 않을 거예요.”

“조금 무리하더라도 다음 마을까지 간 다음에 휴식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맞서 싸우자는 사람은 거의 없… 아니, 아예 없고 도망가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나머지도 저니처럼 입을 다물고 상황을 보고 있는 거지, 딱히 다른 의견을 낸 건 아니었다.

‘하긴…. 여기가 삶의 터전도 아니고, 따라서 지켜야 할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

저니가 생각한 대로, 상단 일행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아직 측은지심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들을 나 몰라라 떠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망가자니 눈치가 보이고, 싸우고 싶진 않고.

슬금슬금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은 꾀를 냈다.

“남는 짐칸에 저희가 타고, 마차의 빈자리에 주민분들을 태우는 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모든 사람을 태울 순 없겠지만, 노인과 어린이, 여자들을 우선적으로 태우면 문제없이 대피할 수 있겠죠!”

“자리가 부족하면 가치가 낮은 물건을 추려서 버립시다. 이윤은 줄어들겠지만 돈보다는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요.”

싸우지 않으면서 체면도 살리는 방법.

상인에게 있어 목숨과도 같은 상품을 버리는 것이니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자기 보신을 위한 도망이 구명 활동으로 둔갑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쁜 걸까?

‘…그건 또 아니지.’

저니는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부활하는 그녀와 다르게 이 세계의 주민인 그들은 목숨이 하나밖에 없으니 자기 목숨을 우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목적이 도망이라고 해도 어쨌든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저니가 생각에 잠긴 사이 상인 중 하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상단의 뜻을 전했다.

“…그렇게 돼서, 그런 분들은 저희가 마차로 안전한 곳에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

“…음.”

다소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주민들끼리도 떠나냐 마냐 싸우는 마당에, 피난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상인에게 비난을 퍼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희가 어떻게든 돈을 모아볼 테니 용병분들이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용기 있는 사람이 말을 꺼냈지만.

“저희도 오우거 무리를 상대하는 건 좀….”

“아….”

상인의 말에 좌절되었다.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은 저니를 제외하면 모두 은 급의 용병이었다.

무기에 마나를 두를 순 있지만, 그들의 미숙한 실력으로는 질긴 오우거의 가죽을 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난 안 간다.”


“할머니!”

그때, 한 노파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왔다.

아까 저니에게 길을 알려준 노파였다.

자글자글 주름이 잡힌 얼굴을 알아본 저니가 눈을 크게 떴다.

“살아봤자 얼마 살지도 못하는 몸, 떠나서 고생할 바엔 여기 있으련다.”


“하, 하지만….”


“늙은이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떠나렴.”

손자인지 아들인지,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인지.

젊은 남자가 설득을 시도했지만 노파는 완고했다.

그라닉에 서툰 저니도, 그라닉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노파와 남자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통해 대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른 분들만 태우고….”

“무슨 소리예요! 제, 제가 설득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진짜 조금이면 되니까요!”

남자의 다급한 외침에 상인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캐서린이 저니에게 다가왔다.

“저니 님.”

“…네?”

“저니 님은 금 급 용병이잖아요. 저분들을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무심코 캐서린의 눈을 본 저니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 안에는 많은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측은함, 동정심, 미안함, 슬픔.

그리고, 동질감.

“금 급 용병이라고요?!”

저니가 캐서린의 말에 미처 답하기도 전, 노파와 대화하던 남자가 그녀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제, 제발 도와주세요! 이대로 가다간 할머니는 이 마을에 남으실 거예요…!”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금 급 용병이라고 해도 오우거 무리를 어떻게 상대하나? 자네 마음은 알지만 괜히 억지 부리지 말게.”

저니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대로, 그녀는 오우거 무리를 상대할 수 없었다.

오우거의 레벨은 대체로 30레벨 후반에서 40레벨 초반, 그리고 저니의 레벨은 43레벨.

경지로 따지면 엑스퍼트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저니로서는 오우거 무리는커녕 한 마리도 상대하기에 벅찼다.

‘무엇보다 오우거를 혼자 상대한 적은 한 번도 없는걸.’

몬스터를 홀로 상대할 땐 실수가 곧 사망으로 이어지지만, 파티를 맺으면 실수를 커버해 주는 아군이 있다.

또한 사냥 속도도 훨씬 빨라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파티를 맺어 사냥했다.

부득이하게 파티를 맺을 수 없거나 유키 같은 특이한 사례를 빼고.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녀의 시야에 문득 채팅창이 들어왔다.

“혹시 근처에 있는 사람 있으면 도와주면 안 될까? 사례는 꼭 할게.”

-이미 시도 했는데 방장 있는 채널은 입장 불가라고 안 들어가짐

-엥, 그렇게 사람이 많나?

-난 들어왔음ㅋㅋㅋ

“…빠르네.”

그래도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채널이 꽉 찰 정도의 인원이라면 아무리 적어도 수십 명은 될 테니 오우거 무리쯤은 가볍게 죽일 수 있겠지.

얼굴이 한층 밝아진 저니가 말했다.

“주변에 있는 사도들한테 연락을 넣었어요. 다들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하네요.”

“오오…!”

“가, 감사합니다!”

저니의 말에 남자는 물론이고, 다른 주민들의 얼굴도 밝아졌다.

오우거를 막을 방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피난하기로 한 거지, 그들이라고 해서 애써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카나가 나서면 이럴 필요도 없지만….’

이미 많이 의존한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저니는 카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저니가 오래전부터 바란 것과 완전히 어긋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용병들도 카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카나에게 목숨을 구해지며 카나가 그들보다 강하다는 건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들의 상식으로는 어린 소녀가 오우거를 상대하는 건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조그만 소녀한테 도움을 요청하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상단과 마을 주민, 그리고 저니까지.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플레이어들이 모이는 것을 기다렸다.

다행히 아직 오우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블럼 마을에 플레이어가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모인 열 명의 플레이어.

저니는 팔짱을 낀 채 초조하게 증원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열한 명째의 플레이어는 올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왜 안 오지?”

채널 수용 인원이 이것밖에 안 될 리가 없으니 분명 더 있을 텐데….

이상함을 느낀 저니가 재차 확인했다.

“아직도 채널 안 들어와져?”

-ㅇㅇㅇ 입장 불가라고 뜸

-ㅔ

혹시, 나를 골리려고 숨어있는 건가?

아니면 평소 나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채널을 점거했다든가….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깨물며 그런 생각까지 하던 저니는, 문득 드는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설마…!”

저니의 추측이 맞다고 알려주듯, 그녀를 포함한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개변 이벤트….”

시스템 창에 적힌 문장을 확인한 저니의 입에서 탄식처럼 들리는 허망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Chapter 38

Chapter 38

‘오우거, 라….’ 저니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종의 유행이라고 해야 할까. 오우거는 고블린 오크와 더불어 많은 판타지 소설과 게임, 영화 등에 단골 출연하는 몬스터였다. 강함과 특성은 제각기 다르게 표현되긴 하지만, 오우거를 약하게 표현하는 매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질긴 가죽, 거대한 덩치, 통나무를 가볍게 드는 강한 근력…. 그런 유행에 편승한 건지, 실리아 온라인에도 오우거란 이름의 몬스터가 존재했다. 고블린과 오크처럼 자주 보이진 않지만 그렇게 희귀한 몬스터도 아니라 저니도 몇 번 사냥한 적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파티로. “오우거가 원래 무리를 지어 다니던가?”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지 -저번에 네 마리 같이 다니는 거 봄 -가족 단위로 생활한다는 듯? 저니가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오우거 박사까진 아니어도 대학원생 정도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저마다 아는 것을 꺼내 보였다. -어차피 와봤자 서너 마리 아님? -ㄹㅇ 호들갑 오짐 -실버들 귀엽네ㅋㅋㅋㅋ “그랬으면 좋겠는데….” 몬스터에 대한 것은 플레이어보다 이 세계의 원주민인 NPC들이 더 잘 알 텐데,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상황에 과연 ‘오우거 무리’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리고 서너 마리가 맞다고 해도 마을의 현재 전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근처에 오우거 서식지가 있는 걸 알고 계셨나요?”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산에서 수년을 살았지만 오우거는커녕 머리털 하나 못 봤습니다.” “…누구예요?” “근처 산에 사는 사냥꾼인데, 산에 살면서 마물이나 몬스터 같은 위험 요소를 발견하면 알리는 역할을 맡고 계신대요. 오우거 무리가 접근하는 걸 알린 것도 저분이에요. ” 저니와 캐서린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눌 때도 사냥꾼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애초에 먹을 것도 부족한 이런 작은 산에 오우거가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서 넘어왔다면 모를까.” “다른 곳에서 넘어온다고요? 왜요?” “난들 압니까. 자기들끼리 싸웠든, 영역 다툼에서 밀려났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해야죠.” “으음….” “크흠….” 누군가의 말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 미루는 상황. 가장 먼저 나선 건 한 청년이었다. “목책을 끼고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면…!” “오우거를 상대로? 아서라, 목책째로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을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는 건 확실해요? 방향을 틀 가능성도 있는데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가만히 있다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냥 죽자고?” “그냥 도망갑시다!” “안 돼요! 아직 짐도 못 챙겼고, 도망갔다가 집이라도 무너지면…!” “그깟 집이 목숨보다 중요해요?!” “젊은 사람들이야 도망갈 수 있겠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지원은 언제 온대요?” “간 지 얼마 안 됐으니 아무리 빨라도 몇 시간은 걸리겠지.” 마을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 상단과 용병들도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다만 저니가 보기에, 마을 사람들과 상단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오우거가 빠르다고 해도 지금부터 도망치면 따라잡히지 않을 거예요.” “조금 무리하더라도 다음 마을까지 간 다음에 휴식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맞서 싸우자는 사람은 거의 없… 아니, 아예 없고 도망가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나머지도 저니처럼 입을 다물고 상황을 보고 있는 거지, 딱히 다른 의견을 낸 건 아니었다. ‘하긴…. 여기가 삶의 터전도 아니고, 따라서 지켜야 할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 저니가 생각한 대로, 상단 일행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아직 측은지심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들을 나 몰라라 떠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망가자니 눈치가 보이고, 싸우고 싶진 않고. 슬금슬금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은 꾀를 냈다. “남는 짐칸에 저희가 타고, 마차의 빈자리에 주민분들을 태우는 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모든 사람을 태울 순 없겠지만, 노인과 어린이, 여자들을 우선적으로 태우면 문제없이 대피할 수 있겠죠!” “자리가 부족하면 가치가 낮은 물건을 추려서 버립시다. 이윤은 줄어들겠지만 돈보다는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요.” 싸우지 않으면서 체면도 살리는 방법. 상인에게 있어 목숨과도 같은 상품을 버리는 것이니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자기 보신을 위한 도망이 구명 활동으로 둔갑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쁜 걸까? ‘…그건 또 아니지.’ 저니는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부활하는 그녀와 다르게 이 세계의 주민인 그들은 목숨이 하나밖에 없으니 자기 목숨을 우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목적이 도망이라고 해도 어쨌든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저니가 생각에 잠긴 사이 상인 중 하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상단의 뜻을 전했다. “…그렇게 돼서, 그런 분들은 저희가 마차로 안전한 곳에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 “…음.” 다소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주민들끼리도 떠나냐 마냐 싸우는 마당에, 피난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상인에게 비난을 퍼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희가 어떻게든 돈을 모아볼 테니 용병분들이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용기 있는 사람이 말을 꺼냈지만. “저희도 오우거 무리를 상대하는 건 좀….” “아….” 상인의 말에 좌절되었다.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은 저니를 제외하면 모두 은 급의 용병이었다. 무기에 마나를 두를 순 있지만, 그들의 미숙한 실력으로는 질긴 오우거의 가죽을 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난 안 간다.” “할머니!” 그때, 한 노파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왔다. 아까 저니에게 길을 알려준 노파였다. 자글자글 주름이 잡힌 얼굴을 알아본 저니가 눈을 크게 떴다. “살아봤자 얼마 살지도 못하는 몸, 떠나서 고생할 바엔 여기 있으련다.” “하, 하지만….” “늙은이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떠나렴.” 손자인지 아들인지,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인지. 젊은 남자가 설득을 시도했지만 노파는 완고했다. 그라닉에 서툰 저니도, 그라닉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노파와 남자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통해 대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른 분들만 태우고….” “무슨 소리예요! 제, 제가 설득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진짜 조금이면 되니까요!” 남자의 다급한 외침에 상인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캐서린이 저니에게 다가왔다. “저니 님.” “…네?” “저니 님은 금 급 용병이잖아요. 저분들을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무심코 캐서린의 눈을 본 저니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 안에는 많은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측은함, 동정심, 미안함, 슬픔. 그리고, 동질감. “금 급 용병이라고요?!” 저니가 캐서린의 말에 미처 답하기도 전, 노파와 대화하던 남자가 그녀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제, 제발 도와주세요! 이대로 가다간 할머니는 이 마을에 남으실 거예요…!”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금 급 용병이라고 해도 오우거 무리를 어떻게 상대하나? 자네 마음은 알지만 괜히 억지 부리지 말게.” 저니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대로, 그녀는 오우거 무리를 상대할 수 없었다. 오우거의 레벨은 대체로 30레벨 후반에서 40레벨 초반, 그리고 저니의 레벨은 43레벨. 경지로 따지면 엑스퍼트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저니로서는 오우거 무리는커녕 한 마리도 상대하기에 벅찼다. ‘무엇보다 오우거를 혼자 상대한 적은 한 번도 없는걸.’ 몬스터를 홀로 상대할 땐 실수가 곧 사망으로 이어지지만, 파티를 맺으면 실수를 커버해 주는 아군이 있다. 또한 사냥 속도도 훨씬 빨라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파티를 맺어 사냥했다. 부득이하게 파티를 맺을 수 없거나 유키 같은 특이한 사례를 빼고.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녀의 시야에 문득 채팅창이 들어왔다. “혹시 근처에 있는 사람 있으면 도와주면 안 될까? 사례는 꼭 할게.” -이미 시도 했는데 방장 있는 채널은 입장 불가라고 안 들어가짐 -엥, 그렇게 사람이 많나? -난 들어왔음ㅋㅋㅋ “…빠르네.” 그래도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채널이 꽉 찰 정도의 인원이라면 아무리 적어도 수십 명은 될 테니 오우거 무리쯤은 가볍게 죽일 수 있겠지. 얼굴이 한층 밝아진 저니가 말했다. “주변에 있는 사도들한테 연락을 넣었어요. 다들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하네요.” “오오…!” “가, 감사합니다!” 저니의 말에 남자는 물론이고, 다른 주민들의 얼굴도 밝아졌다. 오우거를 막을 방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피난하기로 한 거지, 그들이라고 해서 애써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카나가 나서면 이럴 필요도 없지만….’ 이미 많이 의존한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저니는 카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저니가 오래전부터 바란 것과 완전히 어긋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용병들도 카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카나에게 목숨을 구해지며 카나가 그들보다 강하다는 건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들의 상식으로는 어린 소녀가 오우거를 상대하는 건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조그만 소녀한테 도움을 요청하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상단과 마을 주민, 그리고 저니까지.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플레이어들이 모이는 것을 기다렸다. 다행히 아직 오우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블럼 마을에 플레이어가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모인 열 명의 플레이어. 저니는 팔짱을 낀 채 초조하게 증원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열한 명째의 플레이어는 올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왜 안 오지?” 채널 수용 인원이 이것밖에 안 될 리가 없으니 분명 더 있을 텐데…. 이상함을 느낀 저니가 재차 확인했다. “아직도 채널 안 들어와져?” -ㅇㅇㅇ 입장 불가라고 뜸 -ㅔ 혹시, 나를 골리려고 숨어있는 건가? 아니면 평소 나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채널을 점거했다든가….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깨물며 그런 생각까지 하던 저니는, 문득 드는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설마…!” 저니의 추측이 맞다고 알려주듯, 그녀를 포함한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개변 이벤트….” 시스템 창에 적힌 문장을 확인한 저니의 입에서 탄식처럼 들리는 허망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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