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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1

생명체를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선 급소를 노리는 게 상책이다.

다른 곳을 당해도 쇼크로 죽을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머리나 심장처럼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곳을 공격하는 것만큼 효율적이진 못하니까.

그러니 그런 곳들을 공격해야 지금 상대하는 늑대를 쉽게 죽일 수 있겠지만 나는 집요하게 녀석의 다리를 노렸다.

급소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리 차원수가 일반적인 생명체와 다르다고 해도 심장 역할을 하는 코어나, 머리 같은 급소는 있거든.

붙잡아서 해부해 보거나 연구를 한 건 아니고, 지금까지 차원수들을 사냥하며 직접 알아낸 사실이다.

그러면 왜 급소를 노리지 않고 다리만 노리는 거냐고?

“쫄랑쫄랑 도망 다니기는.”

그야, 급소를 노릴 수 없으니까 그렇지.

한낱 미물조차 본능적으로 급소를 보호하는데 과연 차원수가 급소를 쉽게 내어줄까.

그리고 무엇보다….

“…짜증 나.”

너무 높아서 노릴 수가 없어.

급소를 제대로 노리기 위해선 나도 그만큼 놈에게 접근해야 하는데, 그러면 내 위험도 커지고.

그러니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다리를 먼저 공격해 기동성과 전투력을 낮춰서 확실한 기회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절대 내가 키가 작아서 열등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그런 노력 덕에 나는 다리 하나를 더 떼어내는 데 성공했고, 두 개의 다리에 상처를 입혔다.

원래대로 짝수가 됐으니 균형 잡기도 쉬워졌을 텐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네.

다시 홀수로 만들어 주면 좋아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르르르….”

짐승 특유의, 목을 긁는 듯한 으르렁 소리가 들렸다.

상위 포식자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몸이 굳는다고 하던데, 과연 이런 소리를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내가 더 강한데 그러면 나도 상위 포식자 아니야?

“으르르릉?”

시험 삼아 흉내를 내 봤지만 늑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몸에 박혀 있는 입들이 일제히 벌어지더니,

스스스-

진녹색의 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늑대 근처에 있던 꽃들은 안개에 닿자 급격하게 생기를 잃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네.

빨리 해치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나저나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거야 상관없는데, 저걸 어떻게 해야 할까.

갑자기 제초에 흥미가 생겨서 안개를 뿜은 건 아닐 테니 나한테도 악영향을 끼칠 게 분명한데….

“…으음.”

잠깐 반지를 내려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마나의 출력을 조금 더 올렸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전쟁 시절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다음에 이어질 전투를 위해 힘을 아껴야 해서 최소한의 힘만 들여서 적을 죽여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걸.

그렇다 해도,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까지 쓸 필요는 없지.

더군다나 소 잡는 칼이 주인까지 위협하는 칼이라면.

가로, 그리고 세로.

총 두 차례 그어진 검격을 따라 분홍색 검기가 날아갔다.

십자 형태로 날아간 검기는 모든 걸 찢어발길 것 같던 기세와 다르게 늑대를 둘러싼 안개를 조금 흐트러뜨리는 선에서 끝이 났다.

뭐,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견제할 겸 안개의 효과를 알아보려고 한 거였으니까.

간혹, 제 주변에 역장 같은 걸 만들어서 공격을 무시하는 놈들도 있거든.

그런 놈들은 좀 귀찮은데, 이놈은 다행히 주변을 녹이는 게 끝인 모양이야.

안개에 닿을까 무서워?

안개 때문에 본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그럼, 안개째로 날려줄게.”

손이 허리 왼쪽에 닿을 정도로 팔을 크게 접었다.

마치 발도술을 하는 듯한 자세.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이 검집 안에 있지 않다는 것 정도.

심상치 않은 걸 느낀 늑대가 뒤늦게 달려들었지만, 조금 전에 날렸던 검기를 피하느라 거리가 벌어졌던 터라 놈이 내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나의 검이 휘둘러진 후였다.

카나리아류

비상(飛上)

* * *

“하아… 하아…!”

저니는 쉴 새 없이 내달렸다.

숨이 차고, 다리가 뜨거워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카나…!’

영혼을 때리는 듯한 불길한 울림을 느낀 저니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의 몸은 이미 카나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산을 올려다보던 카나가 떠올랐다.

그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카나가 그러고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나는 알고 있었던 거였어.’

오우거보다 더 큰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이따금씩 커다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지면을 따라 육중한 진동이 올라올 때마다 저니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걸어갈 때도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졌던 길이 지금은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이분 귀신 들렸나요??

-????

-왜 이럼?

-무서워요;

저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느꼈던 울림을 느끼지 못한 시청자들은 미친 듯이 내달리는 그녀를 이상하게 보았다.

해명할 시간도 없이 한참을 달린 저니는 마침내 진녹색의 거대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차원수…?!”

거대한 무언가의 정체는 차원수였다.

“7, 78레벨?!”

“저런 게 여기서 왜 튀어나와?!”

그것도 무려, 78레벨의 차원수.

레벨이 가장 높은 유키와 비교해도 20레벨 이상 높은 레벨이었다.

저니를 따라 뒤늦게 도착한 플레이어들도 차원수를 보고 경악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카나, 카나는?”

저런 강력한 차원수를 상대로 카나가 버틸 수 있을까?

저니는 다급하게 카나를 찾아 헤맸다.

“저기…!”

플레이어 중 하나가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곳에 분홍색 머리를 한 소녀가 있었다.

안 그래도 작은 소녀가 거대한 차원수 앞에 서 있으니 더욱 작게 보였다.

상대는커녕 차원수가 입김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작은 체구.

그러나 카나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늑대와 맞서고 있었다.

작은 새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늑대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공격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늑대의 몸에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놈은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달빛 아래서 춤추며, 거대한 늑대를 압도하는 소녀의 모습.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광경에 저니는 말을 잃은 채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늑대의 몸에서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에 대응하듯, 카나도 검을 휘두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매섭게 이어지던 카나의 공세가 멈추자 늑대가 돌진했다.

“카나야…!”

카나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늑대를 보며 비명을 지르던 저니는 그 뒤에 이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잠시 내려앉았던 새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듯, 부드럽게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검.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날갯짓에 마음을 빼앗긴 건 저니만이 아니었다.

“와….”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특히, 검을 허리에 맨 플레이어는 턱이 빠진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 채 구경하고 있었다.

저니는 그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을 저렇게 쓸 수도 있구나….’

저니는 검을 그저 도구라고만 생각했다.

때리고, 찌르고, 벨 수 있는 도구.

검을 아무리 잘 쓴다고 해봤자 결국 이 세 가지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나 카나가 휘두르는 검을 본 순간, 저니는 지금까지 그녀가 갖고 있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활개를 편 새가 날았다.

때로는 흔들리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칠 때도 있었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검.

늑대를 감싸고 있던 안개는 날갯짓에 휩쓸려 흩어진 지 오래였다.

“검, 제대로 배워볼까….”

새가 그리는 매혹적인 비행에 홀린 저니가 중얼거렸다.

물론 배워도 저렇게는 못 하겠지만,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충동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건 어린애 장난이었어….”

“나도 검사나 할걸. 괜히 약제사 같은 거나 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에휴.”

“지금이라도 바꿀까…?”

검술에 매료된 플레이어들이 좌절, 푸념 등 다양한 감정이 섞인 말을 토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쉴 새 없이 늑대의 몸을 난자하던 분홍색 새가 마침내 늑대의 머리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었다고 생각했다.

“아…!”

저니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졌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늑대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고 그 덕에 머리 정중앙에 꽂혔을 검이 머리 한쪽 부분을 훑고 지나갔다.

말이 훑고 지나간 거지, 사실상 머리가 반쯤 갈라진 거나 다름없어서 치명상인 건 틀림없었다.

쿠웅-

거대한 늑대가 땅에 몸을 뉘었다.

높이 일었던 흙먼지가 가라앉고, 그렇게 드러난 늑대의 눈동자는 여전히 흉흉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래봤자 온몸이 난도질당하고 머리도 반쯤 잘린 채로 덜렁거리는 늑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카나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 것뿐.

터벅.

가볍게 걸음을 옮겨 늑대 앞에 선 카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니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흐으읍-

“카-나!”


“…!”

전투에 열중하느라 저니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카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저니도 덩달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카나와 함께 한 시간이 아직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감안해도 저니는 카나가 저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녀가 아는 카나는 언제나 무덤덤하고 무뚝뚝한 아이였다.

지금은 놀란 적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돌아보는 걸 똑똑히 보았다.

카나에게 다가가는 저니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카나, 놀랐어?’


“안 놀랐어.”


“에이, 놀랐잖아.”


“…안 놀랐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부정하는 카나.

그 모습을 귀엽게 보던 저니가 늑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크네.”

절로 감탄이 나오는 크기였다.

제대로 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징그럽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위용에 감탄했을지도.

이런 놈을 상처 하나 없이 해치운 카나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저니에게 카나는 그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나저나 꽃밭이 다 망가졌네….”

예쁜 꽃밭이었는데.

꽃밭 전체가 날아가진 않았지만 짓눌리고, 녹아내리고, 검에 베인 탓에 상당히 많은 부분이 흉하게 망가졌다.

달밤 아래의 꽃밭을 보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하고 아쉬운 목소리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저니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격렬한 전투에도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꽃.

아까 같이 왔을 때, 카나가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분홍색 꽃이었다.

저니는 행여라도 꽃이 뭉개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았다.

저니에게 신경을 끈 카나는 불만스럽게 늑대를 올려다보다가, 검을 들어 늑대의 머리를 땅에 박아 넣을 기세로 내려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심통이 난 거지?’

알 수 없는 카나의 행동에 땀을 흘렸던 저니가 큰 소리로 카나를 불렀다.

“카나, 이거 봐!”


“?”

카나는 검을 내려치는 걸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가 좋아하는 꽃이야.”

격전지 한가운데 있었지만 분홍색 꽃과 그 주변은 용케 싸움에 휘말리는 일 없이 멀쩡했다.

어느새 그녀의 곁에 다가온 카나도 저니를 따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분홍색 꽃.

“이 꽃, 카나 닮지 않았어?”

저니가 불현듯 낮에 떠올렸던 감상을 입 밖에 내었다.

단순히 분홍색이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꽃에 비해 작은 크기도, 은은하게 나는 달큰한 향기도, 알게 모르게 초연한 분위기도.

‘…너무 오글거리는 말이었나?’

작업 거는 것도 아니고….

달이 내뿜는 마력 때문일까.

기분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말했던 저니는 갑자기 몰려드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카나에게 잊어달라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카나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언뜻 보면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자세히 보면 평소와 다른 점이 보였다.

조금 더 크게 뜬 눈,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 은은하게 붉게 물든 볼.

꼭 생각지도 못한 걸 들은 사람 같은 모양새였다.

저니의 물음에도 아무 대답 없이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던 카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고는 등을 돌려 타박타박 걸어가는데, 저니는 멀뚱하게 앉아 카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카나의 작은 등이 더욱 조그매지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됐을 때,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 말이 그렇게 오글거렸나?”

저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는데….

아주 조금,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저니였다.


           


Chapter 41

Chapter 41

생명체를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선 급소를 노리는 게 상책이다. 다른 곳을 당해도 쇼크로 죽을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머리나 심장처럼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곳을 공격하는 것만큼 효율적이진 못하니까. 그러니 그런 곳들을 공격해야 지금 상대하는 늑대를 쉽게 죽일 수 있겠지만 나는 집요하게 녀석의 다리를 노렸다. 급소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리 차원수가 일반적인 생명체와 다르다고 해도 심장 역할을 하는 코어나, 머리 같은 급소는 있거든. 붙잡아서 해부해 보거나 연구를 한 건 아니고, 지금까지 차원수들을 사냥하며 직접 알아낸 사실이다. 그러면 왜 급소를 노리지 않고 다리만 노리는 거냐고? “쫄랑쫄랑 도망 다니기는.” 그야, 급소를 노릴 수 없으니까 그렇지. 한낱 미물조차 본능적으로 급소를 보호하는데 과연 차원수가 급소를 쉽게 내어줄까. 그리고 무엇보다…. “…짜증 나.” 너무 높아서 노릴 수가 없어. 급소를 제대로 노리기 위해선 나도 그만큼 놈에게 접근해야 하는데, 그러면 내 위험도 커지고. 그러니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다리를 먼저 공격해 기동성과 전투력을 낮춰서 확실한 기회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절대 내가 키가 작아서 열등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그런 노력 덕에 나는 다리 하나를 더 떼어내는 데 성공했고, 두 개의 다리에 상처를 입혔다. 원래대로 짝수가 됐으니 균형 잡기도 쉬워졌을 텐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네. 다시 홀수로 만들어 주면 좋아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르르르….” 짐승 특유의, 목을 긁는 듯한 으르렁 소리가 들렸다. 상위 포식자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몸이 굳는다고 하던데, 과연 이런 소리를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내가 더 강한데 그러면 나도 상위 포식자 아니야? “으르르릉?” 시험 삼아 흉내를 내 봤지만 늑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몸에 박혀 있는 입들이 일제히 벌어지더니, 스스스- 진녹색의 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늑대 근처에 있던 꽃들은 안개에 닿자 급격하게 생기를 잃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네. 빨리 해치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나저나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거야 상관없는데, 저걸 어떻게 해야 할까. 갑자기 제초에 흥미가 생겨서 안개를 뿜은 건 아닐 테니 나한테도 악영향을 끼칠 게 분명한데…. “…으음.” 잠깐 반지를 내려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마나의 출력을 조금 더 올렸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전쟁 시절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다음에 이어질 전투를 위해 힘을 아껴야 해서 최소한의 힘만 들여서 적을 죽여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걸. 그렇다 해도,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까지 쓸 필요는 없지. 더군다나 소 잡는 칼이 주인까지 위협하는 칼이라면. 가로, 그리고 세로. 총 두 차례 그어진 검격을 따라 분홍색 검기가 날아갔다. 십자 형태로 날아간 검기는 모든 걸 찢어발길 것 같던 기세와 다르게 늑대를 둘러싼 안개를 조금 흐트러뜨리는 선에서 끝이 났다. 뭐,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견제할 겸 안개의 효과를 알아보려고 한 거였으니까. 간혹, 제 주변에 역장 같은 걸 만들어서 공격을 무시하는 놈들도 있거든. 그런 놈들은 좀 귀찮은데, 이놈은 다행히 주변을 녹이는 게 끝인 모양이야. 안개에 닿을까 무서워? 안개 때문에 본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그럼, 안개째로 날려줄게.” 손이 허리 왼쪽에 닿을 정도로 팔을 크게 접었다. 마치 발도술을 하는 듯한 자세.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이 검집 안에 있지 않다는 것 정도. 심상치 않은 걸 느낀 늑대가 뒤늦게 달려들었지만, 조금 전에 날렸던 검기를 피하느라 거리가 벌어졌던 터라 놈이 내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나의 검이 휘둘러진 후였다. 카나리아류 비상(飛上) * * * “하아… 하아…!” 저니는 쉴 새 없이 내달렸다. 숨이 차고, 다리가 뜨거워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카나…!’ 영혼을 때리는 듯한 불길한 울림을 느낀 저니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의 몸은 이미 카나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산을 올려다보던 카나가 떠올랐다. 그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카나가 그러고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나는 알고 있었던 거였어.’ 오우거보다 더 큰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이따금씩 커다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지면을 따라 육중한 진동이 올라올 때마다 저니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걸어갈 때도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졌던 길이 지금은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이분 귀신 들렸나요?? -???? -왜 이럼? -무서워요; 저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느꼈던 울림을 느끼지 못한 시청자들은 미친 듯이 내달리는 그녀를 이상하게 보았다. 해명할 시간도 없이 한참을 달린 저니는 마침내 진녹색의 거대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차원수…?!” 거대한 무언가의 정체는 차원수였다. “7, 78레벨?!” “저런 게 여기서 왜 튀어나와?!” 그것도 무려, 78레벨의 차원수. 레벨이 가장 높은 유키와 비교해도 20레벨 이상 높은 레벨이었다. 저니를 따라 뒤늦게 도착한 플레이어들도 차원수를 보고 경악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카나, 카나는?” 저런 강력한 차원수를 상대로 카나가 버틸 수 있을까? 저니는 다급하게 카나를 찾아 헤맸다. “저기…!” 플레이어 중 하나가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곳에 분홍색 머리를 한 소녀가 있었다. 안 그래도 작은 소녀가 거대한 차원수 앞에 서 있으니 더욱 작게 보였다. 상대는커녕 차원수가 입김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작은 체구. 그러나 카나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늑대와 맞서고 있었다. 작은 새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늑대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공격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늑대의 몸에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놈은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달빛 아래서 춤추며, 거대한 늑대를 압도하는 소녀의 모습.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광경에 저니는 말을 잃은 채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늑대의 몸에서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에 대응하듯, 카나도 검을 휘두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매섭게 이어지던 카나의 공세가 멈추자 늑대가 돌진했다. “카나야…!” 카나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늑대를 보며 비명을 지르던 저니는 그 뒤에 이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잠시 내려앉았던 새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듯, 부드럽게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검.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날갯짓에 마음을 빼앗긴 건 저니만이 아니었다. “와….”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특히, 검을 허리에 맨 플레이어는 턱이 빠진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 채 구경하고 있었다. 저니는 그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을 저렇게 쓸 수도 있구나….’ 저니는 검을 그저 도구라고만 생각했다. 때리고, 찌르고, 벨 수 있는 도구. 검을 아무리 잘 쓴다고 해봤자 결국 이 세 가지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나 카나가 휘두르는 검을 본 순간, 저니는 지금까지 그녀가 갖고 있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활개를 편 새가 날았다. 때로는 흔들리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칠 때도 있었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검. 늑대를 감싸고 있던 안개는 날갯짓에 휩쓸려 흩어진 지 오래였다. “검, 제대로 배워볼까….” 새가 그리는 매혹적인 비행에 홀린 저니가 중얼거렸다. 물론 배워도 저렇게는 못 하겠지만,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충동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건 어린애 장난이었어….” “나도 검사나 할걸. 괜히 약제사 같은 거나 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에휴.” “지금이라도 바꿀까…?” 검술에 매료된 플레이어들이 좌절, 푸념 등 다양한 감정이 섞인 말을 토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쉴 새 없이 늑대의 몸을 난자하던 분홍색 새가 마침내 늑대의 머리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었다고 생각했다. “아…!” 저니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졌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늑대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고 그 덕에 머리 정중앙에 꽂혔을 검이 머리 한쪽 부분을 훑고 지나갔다. 말이 훑고 지나간 거지, 사실상 머리가 반쯤 갈라진 거나 다름없어서 치명상인 건 틀림없었다. 쿠웅- 거대한 늑대가 땅에 몸을 뉘었다. 높이 일었던 흙먼지가 가라앉고, 그렇게 드러난 늑대의 눈동자는 여전히 흉흉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래봤자 온몸이 난도질당하고 머리도 반쯤 잘린 채로 덜렁거리는 늑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카나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 것뿐. 터벅. 가볍게 걸음을 옮겨 늑대 앞에 선 카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니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흐으읍- “카-나!” “…!” 전투에 열중하느라 저니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카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저니도 덩달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카나와 함께 한 시간이 아직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감안해도 저니는 카나가 저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녀가 아는 카나는 언제나 무덤덤하고 무뚝뚝한 아이였다. 지금은 놀란 적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돌아보는 걸 똑똑히 보았다. 카나에게 다가가는 저니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카나, 놀랐어?’ “안 놀랐어.” “에이, 놀랐잖아.” “…안 놀랐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부정하는 카나. 그 모습을 귀엽게 보던 저니가 늑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크네.” 절로 감탄이 나오는 크기였다. 제대로 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징그럽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위용에 감탄했을지도. 이런 놈을 상처 하나 없이 해치운 카나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저니에게 카나는 그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나저나 꽃밭이 다 망가졌네….” 예쁜 꽃밭이었는데. 꽃밭 전체가 날아가진 않았지만 짓눌리고, 녹아내리고, 검에 베인 탓에 상당히 많은 부분이 흉하게 망가졌다. 달밤 아래의 꽃밭을 보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하고 아쉬운 목소리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저니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격렬한 전투에도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꽃. 아까 같이 왔을 때, 카나가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분홍색 꽃이었다. 저니는 행여라도 꽃이 뭉개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았다. 저니에게 신경을 끈 카나는 불만스럽게 늑대를 올려다보다가, 검을 들어 늑대의 머리를 땅에 박아 넣을 기세로 내려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심통이 난 거지?’ 알 수 없는 카나의 행동에 땀을 흘렸던 저니가 큰 소리로 카나를 불렀다. “카나, 이거 봐!” “?” 카나는 검을 내려치는 걸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가 좋아하는 꽃이야.” 격전지 한가운데 있었지만 분홍색 꽃과 그 주변은 용케 싸움에 휘말리는 일 없이 멀쩡했다. 어느새 그녀의 곁에 다가온 카나도 저니를 따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분홍색 꽃. “이 꽃, 카나 닮지 않았어?” 저니가 불현듯 낮에 떠올렸던 감상을 입 밖에 내었다. 단순히 분홍색이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꽃에 비해 작은 크기도, 은은하게 나는 달큰한 향기도, 알게 모르게 초연한 분위기도. ‘…너무 오글거리는 말이었나?’ 작업 거는 것도 아니고…. 달이 내뿜는 마력 때문일까. 기분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말했던 저니는 갑자기 몰려드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카나에게 잊어달라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카나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언뜻 보면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자세히 보면 평소와 다른 점이 보였다. 조금 더 크게 뜬 눈,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 은은하게 붉게 물든 볼. 꼭 생각지도 못한 걸 들은 사람 같은 모양새였다. 저니의 물음에도 아무 대답 없이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던 카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고는 등을 돌려 타박타박 걸어가는데, 저니는 멀뚱하게 앉아 카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카나의 작은 등이 더욱 조그매지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됐을 때,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 말이 그렇게 오글거렸나?” 저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는데…. 아주 조금,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저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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