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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2

발토라에서 떠나고 며칠간, 다은의 기분은 고공 행진을 이어 나갔다.

“헤헤.”

말을 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잠 자기 전에도.

반지를 낀 손을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있으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카나야. 그거 알아? 어느 손가락에 반지를 끼냐에 따라서 반지의 의미가 달라진대. 예를 들어, 왼손 약지에 끼는 건 ‘사랑의 증표’라는 의미라서 결혼반지는 꼭 왼손 약지에 낀다고 해.”

“음….”

그러고 보면 지구에선 그런 의미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네.

풍속…이라고 해야 하나, 미신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실리아에도 그런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그런 데 관심이 없는데 알 리가 있나.

“그건 무슨 의미인데?”

“응? 이거 말이야?”

다은이 씩 웃었다.

왼손 검지에 낀 반지도 그녀의 웃음을 따라 하듯 반짝 빛났다.

“비밀이야!”

“…?”

…뭐지?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라서 상관은 없는데… 뭔가 다은에게 진 기분이라 떨떠름했다.

실제로는 지고 이기고 할 것도 없는 대화라고 해도 말이다.

“정말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럼요. 카나가 저한테 처음으로 해준 선물인걸요!”


“후후, 그 말도 벌써 다섯 번은 넘게 하셨어요.”


“앗….”

셀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다은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슬쩍 숨겼다.

근처에 사람도 없고, 봤다고 해도 다은이 낀 반지가 드래곤 오브로 만들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아마, 그냥 ‘와 정말 고급스럽고 예쁜 반지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쁜 사람들이라면 그 뒤에 ‘훔쳐야지!’나, ‘죽이고 뺏어야겠다!’가 붙을 테고.

…그런데 플레이어들한테서 무언가를 뺏는 게 가능하긴 한가?

산에 살던 시절에 상당히 많은 수의 플레이어를 썰어 넘겼지만 물건을 떨구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이런 걸 다은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나중에 에델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의문을 속으로 삼켰다.

* * *

락시아 대륙은 서쪽 바다 건너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락시아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출발했던 곳, 한때 그라시스의 영토였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물론, 머리 좋은 사람들에 의해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이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것이 밝혀졌고.

따라서 아르디나 대륙 동쪽 끝에서 배를 타고 계속 동쪽으로 항해하다 보면 언젠가 락시아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식으로 락시아에 도착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애초에 락시아를 직접 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항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항해를 나설 순 없었다.

우리의 목적은 마대륙에 가는 것이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동쪽 바다에서 락시아로 가는 배를 구한다고 내내 떠들어봤자 응하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아르디나인들에게 마대륙 락시아는 죽음의 땅이나 마찬가지인걸.

“응? 그건 서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인식만 따지면 마물과 더 많이 부대끼는 서쪽이 더 안 좋을 거 같은데?”

“응. 맞아.”

날카로운 다은의 말.

그녀의 말대로, 서쪽으로 갈수록 마족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면 서쪽 끝으로 가도 락시아까지 갈 배를 못 구하는 거 아니야? 사지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으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그렇지?”

얼굴에 한가득 웃음꽃을 만개한 다은이 말했다.

“여기 있네.”

“…응?”

“사지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

콕 콕 콕.

나, 셀린, 그리고 다은.

이렇게 셋을 연달아 가리키자 그녀의 얼굴에 피어있던 웃음꽃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뭐, 그래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마족들의 마을에 다가가기만 해도 마기에 영향을 받는 아르디나인들이 마족의 고향인 락시아에 간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니 제정신이라면 가고 싶어 할 리 없다.

만약 배를 구해서 간다고 해도 웬만한 사람은 항해 도중에 죽지 않을까?

아마 락시아로 가는 항로도 모를 테고.

“…역시 그렇지?”

다은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우린 갈 거지만.”

“…역시 그렇지?”

좀 전과 같은 말이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천지 차이였다.

누가 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줄 알겠어.

“배가 없으면, 뛰어가면 돼.”

“…어디를? 바다를?”

“응.”

“그게 무슨 말….”

순간 다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멈췄다.

“아니, 카나라면….”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난 결사반대야! 그런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속이 뒤집히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해!”

“배를 타도 멀미하는 건 똑같지 않아?”

“달라! 다르다고!”

바닥에 드러누울 기세로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다은은 내가 농담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그녀의 결사반대 때문에 뜻을 바꾼 건 아니었다.

단지, 정말로 그렇게 건너갔다간 돌아올 때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응. 그래서 그런 거야.

“….”

“…카나? 갑자기 왜 그래?”

“응?”

“아, 아니. 심각한 표정을 짓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심각한 표정?

딱히 그런 걸 지은 적은 없는데.

가만히 눈만 깜박거리고 있으니 다은도 덩달아 볼을 긁적였다.

“기분 탓인가?”

“실없기는. 아무튼, 그렇게 가는 건 나도 힘들어서 싫어.”

“헉…!”

“…왜?”

“카나가 힘들다고 하는 건 처음 들었어.”

“힘든 건 힘든 거야.”

자칫 손이 미끄러져서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 건져 와야 하잖아.

놓치지 않겠다고 힘을 세게 주면 손이 으스러질지도 모르고.

나도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은걸.

나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힘들다기보다 귀찮은 쪽에 가까운 것 같긴 하네.

“…아, 그런 의미로 힘들단 거였구나. 그럼 그렇지.”

뭘 납득했는진 모르겠지만 끄덕거리는 걸 보니 나름대로 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근데 그러면 어떡해? 배야 돈을 쓰면 어떻게 구할 수야 있겠지만, 배를 몰 줄 아는 사람까지 돈으로 구할 순 없을 텐데…. 카나, 혹시 배 몰 줄 알아?”

“그럴 리가.”

“그럴 거 같긴 했어. 셀린은 배 몰 줄 아세요?

“으음, 아니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 아뇨.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뭘.”

다은이 깜짝 놀라며 셀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장난기가 일었다.

“저니, 나빴어.”

“…카나는 셀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잖아! 알아듣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하라구!”

“으응….”

다은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분홍색 실타래가 불편해서 나도 모르게 칭얼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내 머리를 완전히 까치집으로 만든 다은이 다시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셀린도 배를 몰 줄은 모른다는데 무슨 좋은 방법 있어?”

말은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나에게 방법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다은의 기대에 부응했다.

“아까 말했잖아. ‘아르디나인들이 마족의 고향인 락시아에 간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면, 아르디나인이 아니면 되는 거잖아.

내 말을 들은 다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마족을 고용할 생각이야?”

“응.”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래서 좋다.

한마디만 들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바로 눈치채잖아.

“마족들은 락시아로 가는 항로를 알고 있겠지. 마기에 버틸 수도 있을 테고.”

락시아의 마기를 버틸 수 없어서 아르디나 대륙으로 왔다고 해도, 마기와 더불어 사는 종족이니 배가 뭍에 상륙하고 하선하는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적합한 인선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아닐까?

“어, 음… 계획은 그럴듯하긴 한데….”

“한데?”

“과연 마족들이 우리 말을 들어줄까? 마족들도 아르디나인들을 좋아할 거 같진 않은데…. 락시아에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그건 걱정하지 마.”

에델에게 들은 대로라면 그들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은이 걱정한 것처럼, 나와 다은의 말은 믿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셀린의 말이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믿을 것이다.

셀린은 에델을 모시는 수녀니까.

그것도 보통 수녀가 아니라 무려 견습 성녀라는 신분인 수녀인걸.

“…셀린이 에델 교 신자라는 거랑 마족들이 믿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 그 종족 전쟁 때 성국이 중재해 줘서 그런 건가?”

“반대야. 성국이 중재해 줘서 신뢰하는 게 아니라, 성국을 신뢰해서 중재를 받아들인 거야.”

“으응?”

실리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에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

신이 실존하는 이 세계에선 그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수백 년이 지나 에델의 강림이 모든 사람의 기억과 자료에서 사라진다면 그때는 또 다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때가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족들도, 자신들이 에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앙심만 따지면 마족들이 성국보다 더 신실할지도.”

그게 아니었다면 그 오랜 시간 동안 락시아에 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으으응??”

다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셀린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다은.

그녀가 알아듣질 못하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성국의 견습 성녀 앞에서 그런 말을 했으니 만약 그녀가 들었다면 언짢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셀린이라면 내 말을 들었다 해도 언짢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괜찮을 거야.”

그녀도 마족에 대한 비화를 알고 있을 테니까.

슬슬 귀찮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락시아에 가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텐데 지금 당장 모든 걸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스….

음, 분명 스로 시작하는 단어였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

머리카락을 빙글뱅글 꼬며 고민했지만 끝내 기억나지 않아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체 뭔데? 응? 무슨 뜻이야?”

그러나 나와 달리 깔끔하게 포기하지 못한 다은은 나에게 매달렸지만.

내 입이 끝내 열리지 않자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며 토라졌다는 티를 팍팍 냈다.

딴에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대체 누가 누굴 애 취급하는지.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Chapter 82

Chapter 82

발토라에서 떠나고 며칠간, 다은의 기분은 고공 행진을 이어 나갔다. “헤헤.” 말을 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잠 자기 전에도. 반지를 낀 손을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있으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카나야. 그거 알아? 어느 손가락에 반지를 끼냐에 따라서 반지의 의미가 달라진대. 예를 들어, 왼손 약지에 끼는 건 ‘사랑의 증표’라는 의미라서 결혼반지는 꼭 왼손 약지에 낀다고 해.” “음….” 그러고 보면 지구에선 그런 의미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네. 풍속…이라고 해야 하나, 미신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실리아에도 그런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그런 데 관심이 없는데 알 리가 있나. “그건 무슨 의미인데?” “응? 이거 말이야?” 다은이 씩 웃었다. 왼손 검지에 낀 반지도 그녀의 웃음을 따라 하듯 반짝 빛났다. “비밀이야!” “…?” …뭐지?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라서 상관은 없는데… 뭔가 다은에게 진 기분이라 떨떠름했다. 실제로는 지고 이기고 할 것도 없는 대화라고 해도 말이다. “정말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럼요. 카나가 저한테 처음으로 해준 선물인걸요!” “후후, 그 말도 벌써 다섯 번은 넘게 하셨어요.” “앗….” 셀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다은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슬쩍 숨겼다. 근처에 사람도 없고, 봤다고 해도 다은이 낀 반지가 드래곤 오브로 만들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아마, 그냥 ‘와 정말 고급스럽고 예쁜 반지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쁜 사람들이라면 그 뒤에 ‘훔쳐야지!’나, ‘죽이고 뺏어야겠다!’가 붙을 테고. …그런데 플레이어들한테서 무언가를 뺏는 게 가능하긴 한가? 산에 살던 시절에 상당히 많은 수의 플레이어를 썰어 넘겼지만 물건을 떨구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이런 걸 다은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나중에 에델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의문을 속으로 삼켰다. * * * 락시아 대륙은 서쪽 바다 건너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락시아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출발했던 곳, 한때 그라시스의 영토였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물론, 머리 좋은 사람들에 의해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이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것이 밝혀졌고. 따라서 아르디나 대륙 동쪽 끝에서 배를 타고 계속 동쪽으로 항해하다 보면 언젠가 락시아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식으로 락시아에 도착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애초에 락시아를 직접 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항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항해를 나설 순 없었다. 우리의 목적은 마대륙에 가는 것이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동쪽 바다에서 락시아로 가는 배를 구한다고 내내 떠들어봤자 응하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아르디나인들에게 마대륙 락시아는 죽음의 땅이나 마찬가지인걸. “응? 그건 서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인식만 따지면 마물과 더 많이 부대끼는 서쪽이 더 안 좋을 거 같은데?” “응. 맞아.” 날카로운 다은의 말. 그녀의 말대로, 서쪽으로 갈수록 마족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면 서쪽 끝으로 가도 락시아까지 갈 배를 못 구하는 거 아니야? 사지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으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그렇지?” 얼굴에 한가득 웃음꽃을 만개한 다은이 말했다. “여기 있네.” “…응?” “사지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 콕 콕 콕. 나, 셀린, 그리고 다은. 이렇게 셋을 연달아 가리키자 그녀의 얼굴에 피어있던 웃음꽃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뭐, 그래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마족들의 마을에 다가가기만 해도 마기에 영향을 받는 아르디나인들이 마족의 고향인 락시아에 간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니 제정신이라면 가고 싶어 할 리 없다. 만약 배를 구해서 간다고 해도 웬만한 사람은 항해 도중에 죽지 않을까? 아마 락시아로 가는 항로도 모를 테고. “…역시 그렇지?” 다은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우린 갈 거지만.” “…역시 그렇지?” 좀 전과 같은 말이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천지 차이였다. 누가 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줄 알겠어. “배가 없으면, 뛰어가면 돼.” “…어디를? 바다를?” “응.” “그게 무슨 말….” 순간 다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멈췄다. “아니, 카나라면….”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난 결사반대야! 그런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속이 뒤집히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해!” “배를 타도 멀미하는 건 똑같지 않아?” “달라! 다르다고!” 바닥에 드러누울 기세로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다은은 내가 농담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그녀의 결사반대 때문에 뜻을 바꾼 건 아니었다. 단지, 정말로 그렇게 건너갔다간 돌아올 때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응. 그래서 그런 거야. “….” “…카나? 갑자기 왜 그래?” “응?” “아, 아니. 심각한 표정을 짓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심각한 표정? 딱히 그런 걸 지은 적은 없는데. 가만히 눈만 깜박거리고 있으니 다은도 덩달아 볼을 긁적였다. “기분 탓인가?” “실없기는. 아무튼, 그렇게 가는 건 나도 힘들어서 싫어.” “헉…!” “…왜?” “카나가 힘들다고 하는 건 처음 들었어.” “힘든 건 힘든 거야.” 자칫 손이 미끄러져서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 건져 와야 하잖아. 놓치지 않겠다고 힘을 세게 주면 손이 으스러질지도 모르고. 나도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은걸. 나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힘들다기보다 귀찮은 쪽에 가까운 것 같긴 하네. “…아, 그런 의미로 힘들단 거였구나. 그럼 그렇지.” 뭘 납득했는진 모르겠지만 끄덕거리는 걸 보니 나름대로 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근데 그러면 어떡해? 배야 돈을 쓰면 어떻게 구할 수야 있겠지만, 배를 몰 줄 아는 사람까지 돈으로 구할 순 없을 텐데…. 카나, 혹시 배 몰 줄 알아?” “그럴 리가.” “그럴 거 같긴 했어. 셀린은 배 몰 줄 아세요?“으음, 아니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 아뇨.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뭘.” 다은이 깜짝 놀라며 셀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장난기가 일었다. “저니, 나빴어.” “…카나는 셀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잖아! 알아듣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하라구!” “으응….” 다은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분홍색 실타래가 불편해서 나도 모르게 칭얼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내 머리를 완전히 까치집으로 만든 다은이 다시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셀린도 배를 몰 줄은 모른다는데 무슨 좋은 방법 있어?” 말은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나에게 방법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다은의 기대에 부응했다. “아까 말했잖아. ‘아르디나인들이 마족의 고향인 락시아에 간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면, 아르디나인이 아니면 되는 거잖아. 내 말을 들은 다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마족을 고용할 생각이야?” “응.”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래서 좋다. 한마디만 들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바로 눈치채잖아. “마족들은 락시아로 가는 항로를 알고 있겠지. 마기에 버틸 수도 있을 테고.” 락시아의 마기를 버틸 수 없어서 아르디나 대륙으로 왔다고 해도, 마기와 더불어 사는 종족이니 배가 뭍에 상륙하고 하선하는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적합한 인선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아닐까? “어, 음… 계획은 그럴듯하긴 한데….” “한데?” “과연 마족들이 우리 말을 들어줄까? 마족들도 아르디나인들을 좋아할 거 같진 않은데…. 락시아에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그건 걱정하지 마.” 에델에게 들은 대로라면 그들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은이 걱정한 것처럼, 나와 다은의 말은 믿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셀린의 말이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믿을 것이다. 셀린은 에델을 모시는 수녀니까. 그것도 보통 수녀가 아니라 무려 견습 성녀라는 신분인 수녀인걸. “…셀린이 에델 교 신자라는 거랑 마족들이 믿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 그 종족 전쟁 때 성국이 중재해 줘서 그런 건가?” “반대야. 성국이 중재해 줘서 신뢰하는 게 아니라, 성국을 신뢰해서 중재를 받아들인 거야.” “으응?” 실리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에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 신이 실존하는 이 세계에선 그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수백 년이 지나 에델의 강림이 모든 사람의 기억과 자료에서 사라진다면 그때는 또 다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때가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족들도, 자신들이 에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앙심만 따지면 마족들이 성국보다 더 신실할지도.” 그게 아니었다면 그 오랜 시간 동안 락시아에 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으으응??” 다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셀린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다은. 그녀가 알아듣질 못하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성국의 견습 성녀 앞에서 그런 말을 했으니 만약 그녀가 들었다면 언짢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셀린이라면 내 말을 들었다 해도 언짢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괜찮을 거야.” 그녀도 마족에 대한 비화를 알고 있을 테니까. 슬슬 귀찮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락시아에 가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텐데 지금 당장 모든 걸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스…. 음, 분명 스로 시작하는 단어였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 머리카락을 빙글뱅글 꼬며 고민했지만 끝내 기억나지 않아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체 뭔데? 응? 무슨 뜻이야?” 그러나 나와 달리 깔끔하게 포기하지 못한 다은은 나에게 매달렸지만. 내 입이 끝내 열리지 않자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며 토라졌다는 티를 팍팍 냈다. 딴에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대체 누가 누굴 애 취급하는지.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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