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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4

오르도에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두 마리였던 말은 성국을 떠나며 세 마리가 되었다.

둘이었던 일행이 셋이 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다은은 카나와 같이 말을 탄다 해도 상관없었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면 따로 타는 것보다 그쪽이 더 좋은 그녀였기에, 말을 한 마리 더 사자는 카나의 말에-

‘꼭 한 마리를 더 사야 해? 카나는 가벼우니까 나랑 같이 타고 가도 되지 않을까? 돈도 아낄 겸.’

라고 말했지만.

‘싫어. 불편해.’

카나의 단호한 말에 침몰했다.

일행의 리더이자 물주이자 마스코트인 카나가 그렇게 말하는데 짐꾼 A에 불과한 다은으로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각자의 말을 타고 여행길에 오른 일행이었으나.

다은과 카나가 한 마리에 같이 타고 있는 지금은 필연적으로 한 마리가 놀 수밖에 없었다.

“진짜 똑똑하네….”

그리고 다은은 고삐를 쥐고 있지도 않은데 제가 태웠던 주인을 따라오는 말을 보며, 말은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머나…!”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셀린이 다은을 돌아보더니 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주무시고 계시네요….”

카나는 다은의 몸에 기댄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케이프가 오르내릴 때마다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들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다은이 잠시 멈칫하더니 손을 내리고는, 그 대신 몸에 들어간 힘을 조금 더 풀어 소녀가 더 편하게 기대어 잘 수 있게 해주었다.

“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많이 졸렸나 봐요.”

“아아…. 확실히, 밤새 뒤척이시더라고요. 아이들은 가뜩이나 잠이 많으니 더 피곤하셨겠죠.”

“아하하. 그렇긴 하죠.”

나이를 알고 있기에 카나가 마냥 아이가 아니란 걸 아는 다은이었지만, 외모를 볼 때마다 나이를 잊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에 제대로 못 먹고 자란 탓일까, 카나의 작은 체구와 앳된 얼굴은 본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행동에서 아이다운 면모가 묻어나오곤 했다.

고집이 세고, 무뚝뚝한 척하지만 은근히 잘 삐지고, 종종 짓궂은 장난을 치고….

또, 마음을 준 사람에게 이렇게 기대기도 하고.

만약 카나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다은은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셀린도 피곤하실 텐데, 말에서 내려서 조금만 쉬었다 갈까요?”

“저는 괜찮아요. 에델 님의 은혜 덕분에 이 정도 피로는 금방 회복할 수 있거든요. 보세요, 아까보다 안색이 괜찮지 않나요?”

“앗, 확실히 그런 거 같긴 하네요.”

“아마 카나 님도 그 정도로 피곤하신 건 아닐 거예요. 저니 님의 품이 포근해서 깜박 잠에 드신 거겠죠.”

“포근….”

행여나 목소리에 카나가 잠에서 깰까.

목소리를 낮춰 셀린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던 다은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다은은 자신의 몸매에 자신이 있었다.

다은은 운동을 좋아하지 않지만, 건강과 그녀의 취미인 여행을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고, 그 결과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군살 없는 몸매를 갖게 된 그녀였다.

그런 그녀였지만-

힐긋.

“크다….”

“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셀린의 몸과 비교하면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 특정 부위가….’

셀린의 자애로움에 잠시 한눈이 팔렸던 다은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절대 작지 않은, 오히려 평균보다 큰 크기라고 할 수 있었지만, 셀린의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보다 셀린의 품이 더 포근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다은의 귓가에 고롱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카나도 나이를 더 먹으면 저렇게 커질까?’

…빵빵한 카나라니.

다은은 완성형 카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린 무표정한 얼굴의 미녀.

표정 때문에 차갑게 보일 수도 있는 인상은 순한 눈꼬리 덕분에 무구하게만 보였다.

십이면 십, 백이면 백 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

그런 얼굴 밑으로는 시원하게 뻗은 팔다리와 볼륨감 있는 가슴이….

거기까지 그린 순간, 캔버스의 그림이 마치 물을 쏟은 수채화처럼 뭉개지고 일그러졌다.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그림에 다은은 다시 상상이라는 붓을 들어 그려보았지만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그린 그림이 뭉개지고.

그 일을 세 번쯤 반복했을 때,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다은이 깔끔하게 붓을 내려놓았다.

‘음. 이건 무리네.’

카나가 늘 지금 같은 모습이길 바라는 건 아니긴 한데,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모습이 너무 익숙해서 그래. 절대 내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응?”

능숙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다은에게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백야’처럼, 특성이 붙은 지역은 이곳 외에도 아르디나 대륙 곳곳에 있다.

어느 곳은 이곳과 똑같이 24시간 내내 해가 지지 않았고, 또 어느 곳은 정반대로 24시간 내내 밤이 계속되기도 하고….

그 모든 곳을 가본 적은 없어도, 언젠가 한 번은 가보겠다고 생각한 다은이었기에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드리운 밤과 달리 해가 떠 있는 낮은 시야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에 백야 지역은 플레이어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지역이었다.

번거롭게 횃불을 들고 사냥하는 걸 좋아하는 플레이어는 많이 없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백야 지역에서 사람을 마주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이른바 ‘고인물 룩’이라고 부르는, 일부러 괴상한 캐릭터를 만드는 플레이어들도 실리아 온라인에서만큼은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음에 안 들면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만들거나 다른 캐릭터를 만들면 되는 다른 게임들과 다르게 실리아 온라인의 캐릭터는 단 하나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들어서 삭제하면 그걸로 끝.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왼팔이.”

다은의 맞은편에서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원래라면 왼팔이 있어야 할 자리엔 빈 소매만 홀로 남아 바람에 나풀거렸다.

실리아인처럼 보이는 데 어떤 사연이 있길래 홀로 백야를 떠돌아다니는 걸까.

다은은 조금의 호기심을 느끼며 남자를 피해 그의 왼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터벅.

“…응?”

간혹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폭이 그리 넓지 않은 길에서 사람과 마주쳤을 때, 비켜주려는 방향이 같아서 머쓱해하는 일.

말머리를 따라서 남자가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만 해도 다은은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로 두 번이나 연달아 방향이 겹쳤을 때, 다은은 그녀가 한 생각을 버려야 했다.

이대로 가면 남자와 부딪힐 게 분명한 상황에 다은이 말을 멈춰 세우자 남자도 똑같이 발걸음을 멈췄다.

우연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저희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혹시라도 그가 달려들면 곧바로 도망칠 수 있게 거리를 벌린 상태로 다은이 물었다.

남자가 허리춤에 찬 검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아니.”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다면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아니.”

“…왜요? 저희한테 볼일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래. 너희한테는 볼일 없다.”

다은의 말을 되짚듯이 말한 남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검은 그의 차림새처럼 이가 빠져 있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예기를 뿜고 있었다.

증오인지 경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그의 눈동자.

눈동자를 쫓은 다은은 시선 끝에 자리한 그 시선의 끝이 제 품에 안긴 소녀에게 닿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그녀의 추측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 남자의 입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악마에게 동료들과 왼팔을 잃은 후 나는 깨달았다.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건 신도, 보잘것없는 행운도 아니라는 것을. 오직 강함만이 스스로의 운명, 그리고 타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과거를 돌아보는 남자의 말투는 덤덤했다.

“그 후로 나는 대륙을 떠돌며 검에 매진했다. 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기 위해서. 그러던 중, 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오우거 무리와 차원수를 쓰러트렸다는 소문이 들려오더군.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악마가 다시 나타났다는 걸 직감한 나는 악마의 뒤를 쫓았고.”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얌전히 듣고 있던 다은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당신, 제국인인가요?”

“예전에는 그랬지. 지금은 그냥 떠돌이일 뿐이다.”

“우리를 찾아온 건 카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아니.”

“에?”

당연히 복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라니.

의외의 대답에 다은의 입에서 다소 멍청하게 들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나는 증명하러 왔다. 내 운명은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운명이니 증명이니…. 그렇게 낭만 있는 성격으로 보이진 않는데요.”

“이건 진리지, 낭만이 아니다.”

“아, 그렇군요.”

보아하니 카나와 싸우러 온 건 맞지만, 복수하러 온 게 아니라는 말도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네.

솔직히, 다은은 증명과 복수가 무슨 차이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남자가 그 나름대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했다.

단순 복수 목적이었으면 귀찮게 길을 막고 대화를 나눌 필요 없이 카나가 자는 걸 보자마자 달려들었을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은과 눈이 마주친 셀린도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곤란하긴 해도 남자를 말릴 생각은 딱히 없는 듯한 태도.

“괜찮을 거예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한숨을 쉬던 다은의 허리춤에 문득 묵직한 무게감이 걸렸다.

처음에는 무섭기만 했지만 최근 들어 부쩍 익숙해진 그것.

검.

‘…싸우는 건 무서워. 아픈 것도,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도 싫어.’

아픔을 알기에 다은은 타인의 아픔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싸움을 꺼렸다.

“…그래도.”

망설이던 다은의 눈동자에 굳은 의지가 빛나며 고삐를 잡고 있던 손의 잔떨림이 멈췄다.

“그 증명, 저도 해봐도 될까요?”

“…네가?”

남자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흥미가 생겨서요.”

“그 정도 수준으로 보이진 않는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카나와 같이 가고 싶은 거지, 카나의 등 뒤에 숨고 싶은 게 아니다.

어쩌면 아무리 몬스터를 잡아 레벨을 올려도 카나에게 닿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카나가, 잘 부탁한다고 했잖아.’

물론 그 부탁에 ‘나 대신 싸워줘’ 같은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녀 혼자만의 다짐이었다.

“그렇게 원한다면야.”

다은의 의지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외팔 검사가 하나뿐인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내리면 카나가 깨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

다은이 셀린을 불렀다.

“셀린. 카나 좀 맡아주실 수-”


그럴 필요 없어.”

품속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다은이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눈을 뜬 카나가 그녀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Chapter 84

Chapter 84

오르도에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두 마리였던 말은 성국을 떠나며 세 마리가 되었다. 둘이었던 일행이 셋이 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다은은 카나와 같이 말을 탄다 해도 상관없었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면 따로 타는 것보다 그쪽이 더 좋은 그녀였기에, 말을 한 마리 더 사자는 카나의 말에- ‘꼭 한 마리를 더 사야 해? 카나는 가벼우니까 나랑 같이 타고 가도 되지 않을까? 돈도 아낄 겸.’ 라고 말했지만. ‘싫어. 불편해.’ 카나의 단호한 말에 침몰했다. 일행의 리더이자 물주이자 마스코트인 카나가 그렇게 말하는데 짐꾼 A에 불과한 다은으로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각자의 말을 타고 여행길에 오른 일행이었으나. 다은과 카나가 한 마리에 같이 타고 있는 지금은 필연적으로 한 마리가 놀 수밖에 없었다. “진짜 똑똑하네….” 그리고 다은은 고삐를 쥐고 있지도 않은데 제가 태웠던 주인을 따라오는 말을 보며, 말은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머나…!”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셀린이 다은을 돌아보더니 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주무시고 계시네요….” 카나는 다은의 몸에 기댄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케이프가 오르내릴 때마다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들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다은이 잠시 멈칫하더니 손을 내리고는, 그 대신 몸에 들어간 힘을 조금 더 풀어 소녀가 더 편하게 기대어 잘 수 있게 해주었다. “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많이 졸렸나 봐요.” “아아…. 확실히, 밤새 뒤척이시더라고요. 아이들은 가뜩이나 잠이 많으니 더 피곤하셨겠죠.” “아하하. 그렇긴 하죠.” 나이를 알고 있기에 카나가 마냥 아이가 아니란 걸 아는 다은이었지만, 외모를 볼 때마다 나이를 잊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에 제대로 못 먹고 자란 탓일까, 카나의 작은 체구와 앳된 얼굴은 본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행동에서 아이다운 면모가 묻어나오곤 했다. 고집이 세고, 무뚝뚝한 척하지만 은근히 잘 삐지고, 종종 짓궂은 장난을 치고…. 또, 마음을 준 사람에게 이렇게 기대기도 하고. 만약 카나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다은은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셀린도 피곤하실 텐데, 말에서 내려서 조금만 쉬었다 갈까요?” “저는 괜찮아요. 에델 님의 은혜 덕분에 이 정도 피로는 금방 회복할 수 있거든요. 보세요, 아까보다 안색이 괜찮지 않나요?” “앗, 확실히 그런 거 같긴 하네요.” “아마 카나 님도 그 정도로 피곤하신 건 아닐 거예요. 저니 님의 품이 포근해서 깜박 잠에 드신 거겠죠.” “포근….” 행여나 목소리에 카나가 잠에서 깰까. 목소리를 낮춰 셀린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던 다은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다은은 자신의 몸매에 자신이 있었다. 다은은 운동을 좋아하지 않지만, 건강과 그녀의 취미인 여행을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고, 그 결과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군살 없는 몸매를 갖게 된 그녀였다. 그런 그녀였지만- 힐긋. “크다….” “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셀린의 몸과 비교하면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 특정 부위가….’ 셀린의 자애로움에 잠시 한눈이 팔렸던 다은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절대 작지 않은, 오히려 평균보다 큰 크기라고 할 수 있었지만, 셀린의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보다 셀린의 품이 더 포근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다은의 귓가에 고롱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카나도 나이를 더 먹으면 저렇게 커질까?’ …빵빵한 카나라니. 다은은 완성형 카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린 무표정한 얼굴의 미녀. 표정 때문에 차갑게 보일 수도 있는 인상은 순한 눈꼬리 덕분에 무구하게만 보였다. 십이면 십, 백이면 백 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 그런 얼굴 밑으로는 시원하게 뻗은 팔다리와 볼륨감 있는 가슴이…. 거기까지 그린 순간, 캔버스의 그림이 마치 물을 쏟은 수채화처럼 뭉개지고 일그러졌다.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그림에 다은은 다시 상상이라는 붓을 들어 그려보았지만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그린 그림이 뭉개지고. 그 일을 세 번쯤 반복했을 때,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다은이 깔끔하게 붓을 내려놓았다. ‘음. 이건 무리네.’ 카나가 늘 지금 같은 모습이길 바라는 건 아니긴 한데,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모습이 너무 익숙해서 그래. 절대 내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응?” 능숙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다은에게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백야’처럼, 특성이 붙은 지역은 이곳 외에도 아르디나 대륙 곳곳에 있다. 어느 곳은 이곳과 똑같이 24시간 내내 해가 지지 않았고, 또 어느 곳은 정반대로 24시간 내내 밤이 계속되기도 하고…. 그 모든 곳을 가본 적은 없어도, 언젠가 한 번은 가보겠다고 생각한 다은이었기에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드리운 밤과 달리 해가 떠 있는 낮은 시야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에 백야 지역은 플레이어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지역이었다. 번거롭게 횃불을 들고 사냥하는 걸 좋아하는 플레이어는 많이 없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백야 지역에서 사람을 마주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이른바 ‘고인물 룩’이라고 부르는, 일부러 괴상한 캐릭터를 만드는 플레이어들도 실리아 온라인에서만큼은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음에 안 들면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만들거나 다른 캐릭터를 만들면 되는 다른 게임들과 다르게 실리아 온라인의 캐릭터는 단 하나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들어서 삭제하면 그걸로 끝.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왼팔이.” 다은의 맞은편에서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원래라면 왼팔이 있어야 할 자리엔 빈 소매만 홀로 남아 바람에 나풀거렸다. 실리아인처럼 보이는 데 어떤 사연이 있길래 홀로 백야를 떠돌아다니는 걸까. 다은은 조금의 호기심을 느끼며 남자를 피해 그의 왼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터벅. “…응?” 간혹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폭이 그리 넓지 않은 길에서 사람과 마주쳤을 때, 비켜주려는 방향이 같아서 머쓱해하는 일. 말머리를 따라서 남자가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만 해도 다은은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로 두 번이나 연달아 방향이 겹쳤을 때, 다은은 그녀가 한 생각을 버려야 했다. 이대로 가면 남자와 부딪힐 게 분명한 상황에 다은이 말을 멈춰 세우자 남자도 똑같이 발걸음을 멈췄다. 우연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저희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혹시라도 그가 달려들면 곧바로 도망칠 수 있게 거리를 벌린 상태로 다은이 물었다. 남자가 허리춤에 찬 검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아니.”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다면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아니.” “…왜요? 저희한테 볼일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래. 너희한테는 볼일 없다.” 다은의 말을 되짚듯이 말한 남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검은 그의 차림새처럼 이가 빠져 있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예기를 뿜고 있었다. 증오인지 경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그의 눈동자. 눈동자를 쫓은 다은은 시선 끝에 자리한 그 시선의 끝이 제 품에 안긴 소녀에게 닿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그녀의 추측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 남자의 입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악마에게 동료들과 왼팔을 잃은 후 나는 깨달았다.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건 신도, 보잘것없는 행운도 아니라는 것을. 오직 강함만이 스스로의 운명, 그리고 타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과거를 돌아보는 남자의 말투는 덤덤했다. “그 후로 나는 대륙을 떠돌며 검에 매진했다. 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기 위해서. 그러던 중, 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오우거 무리와 차원수를 쓰러트렸다는 소문이 들려오더군.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악마가 다시 나타났다는 걸 직감한 나는 악마의 뒤를 쫓았고.”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얌전히 듣고 있던 다은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당신, 제국인인가요?” “예전에는 그랬지. 지금은 그냥 떠돌이일 뿐이다.” “우리를 찾아온 건 카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아니.” “에?” 당연히 복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라니. 의외의 대답에 다은의 입에서 다소 멍청하게 들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나는 증명하러 왔다. 내 운명은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운명이니 증명이니…. 그렇게 낭만 있는 성격으로 보이진 않는데요.” “이건 진리지, 낭만이 아니다.” “아, 그렇군요.” 보아하니 카나와 싸우러 온 건 맞지만, 복수하러 온 게 아니라는 말도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네. 솔직히, 다은은 증명과 복수가 무슨 차이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남자가 그 나름대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했다. 단순 복수 목적이었으면 귀찮게 길을 막고 대화를 나눌 필요 없이 카나가 자는 걸 보자마자 달려들었을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은과 눈이 마주친 셀린도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곤란하긴 해도 남자를 말릴 생각은 딱히 없는 듯한 태도. “괜찮을 거예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한숨을 쉬던 다은의 허리춤에 문득 묵직한 무게감이 걸렸다. 처음에는 무섭기만 했지만 최근 들어 부쩍 익숙해진 그것. 검. ‘…싸우는 건 무서워. 아픈 것도,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도 싫어.’ 아픔을 알기에 다은은 타인의 아픔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싸움을 꺼렸다. “…그래도.” 망설이던 다은의 눈동자에 굳은 의지가 빛나며 고삐를 잡고 있던 손의 잔떨림이 멈췄다. “그 증명, 저도 해봐도 될까요?” “…네가?” 남자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흥미가 생겨서요.” “그 정도 수준으로 보이진 않는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카나와 같이 가고 싶은 거지, 카나의 등 뒤에 숨고 싶은 게 아니다. 어쩌면 아무리 몬스터를 잡아 레벨을 올려도 카나에게 닿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카나가, 잘 부탁한다고 했잖아.’ 물론 그 부탁에 ‘나 대신 싸워줘’ 같은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녀 혼자만의 다짐이었다. “그렇게 원한다면야.” 다은의 의지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외팔 검사가 하나뿐인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내리면 카나가 깨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 다은이 셀린을 불렀다. “셀린. 카나 좀 맡아주실 수-” -그럴 필요 없어.” 품속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다은이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눈을 뜬 카나가 그녀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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