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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8

뜨거운 핏덩이를 토하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불쾌하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움도 그렇고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비린내도 그렇고….

애초에 몸 안에서만 돌아야 하는 피를 입에서 토하는 시점에서 기분을 따지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콜록… 콜록….”

태평한 생각과 다르게 내 몸은 연신 핏덩이를 토해냈다.

각혈이든 토혈이든, 피를 토하는 건 어떻게 보더라도 정상적인 몸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내 몸도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은 곤죽이나 다름없는 만신창이였고.

‘죽겠네….’

고통을 참는 건 익숙하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뒷골목에서 꼬마, 그것도 여자아이는 약자 중의 약자.

아파도 아픈 걸 티 낼 수 없는 처지였고, 때문에 나는 언제나 고통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지금 올라오는 고통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세한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했던 고통은 지금에 와서는 칼로 내장을 얇게 저미고 소금을 뿌려대는 듯한 고통으로 변했다.

잠시나마 펴졌던 몸이 다시 동그랗게 말려 들었다.

“어, 어떡해…. 그, 그래! 셀린. 셀린이라면…!”

고통 때문에 흐릿한 시야 너머로 언뜻 다은이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카나, 조금만 참아. 내가 셀린을 데려올 테니까.”

견습 성녀인 셀린이라면 카나를 치료할 수 있을 거야.

라는 기대감이 고스란히 담긴 그녀의 말.

이윽고 셀린이 일행과 함께 도착하고, 나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을 때까지만 해도 다은의 표정은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


“…셀린? 왜 그래요?”


“죄송해요. 제힘으로는 카나 님을 치료할 수 없을 거 같아요.”


“…네?”

“당연하지….”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내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가호의 해제와 동시에 사라진 적색의 검 대신 단출한 생김새의 롱소드를 지팡이 대신 짚으면서.

“이건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니까….”

무려 드래곤 중에서도 특히 더 흉포하다고 알려진 레드 드래곤의 마나가 휩쓸고 간 결과물이다.

뭐랄까… 말로 설명하려니 애매한데.

실제로 상처가 남은 게 아니라, 너무 큰 부담을 받아서 육체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 셀린의 성법이 효과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피가 계속 나오잖아…!”

다은이 만류하며 소맷자락으로 내 입가를 훑었다.

그녀의 하얀 소맷자락에 새빨간 피가 묻어나왔다.

“아.”

어쩐지 뭔가 계속 흐르는 기분이 들더라니, 말하느라 피를 흘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나 보네.

칠칠치 못하게.

“…나, 순간 피가 아니라 침인 줄 알았어.”

너무 태연하게 반응해서 착각했다고 다은이 말했다.

피든 침이든 입에서 줄줄 흘리고 있으면 칠칠치 못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엄연히 다르지! 아니, 그보다 아프면서 계속 말하지 말라니까!”

입가에 부드러운 천의 촉감이 스치고, 다은의 다른쪽 소매도 붉게 물들었다.

하얀색 옷에 피 묻으면 세탁할 때 곤란한데.

소맷자락에 묻은 내 피를 보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라.”

“카나?!”

“카나 님!”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 시야는 땅바닥을 향해 있었다.

-덜커덕!

지팡이 대용으로 짚고 있던 롱소드가 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쇳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어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넘어졌구나.’

어쩐지 땅이 너무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다. 내 키가 작아진 게 아니라 그냥 넘어진 거라서.

귓가로 들리는 소리가 물속에서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질 수 없다는 듯이 흐릿해지는 시야.

‘…조금, 힘을 과하게 줬나.’

그 생각을 끝으로, 몽롱했던 정신이 완전히 암전했다.

* * *

수술실로 들어간 환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늘 환자의 역할을 맡았던 다은에게 이런 경험은 사뭇 새로운 경험이었다.

탁탁.

톡, 톡.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발걸음 소리와 손톱을 깨무는 소리가 길지 않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끼익.

굳게 닫혀있던 문의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

자칫 놓칠 수도 있었던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다은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쫑긋!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린 다은이 열린 문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

“어, 어때요?! 괜찮아요?”

문을 열고 나온 셀린이 그 기세에 눌려 몸을 굳혔다.

“아… 죄송해요.”

심히 당황한 셀린의 얼굴을 본 다은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닫고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해요.”

잠시 당황했던 셀린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돌아왔다.

카나와 다은과 함께 한 시간.

몇 주간의 시간은 셀린이 그들에 대해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주 틱틱대지만 다은에게만 유독 유한 모습을 보이는 카나와, 그런 카나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보는 다은을 보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토록 아끼는 소녀가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 있으니 걱정할 만 하죠.’

…보기 좋네요.

훈훈한, 어쩌면 부러움에 가까운 질투를 담아 다은을 보던 셀린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제가 의원이 아닌지라 정확한 소견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카나 님의 몸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어요.”

“그렇군요….”

셀린의 말을 들은 다은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몸에 이상이 없다는 말은 다행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셀린의 힘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했기에.

‘드래곤의 마나라고….’

무려 한 나라의 국보이니 범상치 않은 물건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그 정도로 대단한 물건일 줄이야.

마을을 불태우던 그루모의 그림자를 일격조차 허용하지 않고 때려눕힌 카나를 떠올리며 다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큰 힘엔 큰 대가가 따르기 마련.

그림자를 단숨에 때려눕힌 소녀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을 더 새하얗게 물들인 채로 쓰러져서 몇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역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요….”

카나는 강한 아이니까 곧 눈을 뜰 수 있을 거야.

다은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했다.

‘많이 아파 보였어.’

카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 연기했지만.

대화를 나누는 다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고통을 참기 위해 악물어서 새하얗게 질린 입술,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 묘하게 흐린 초점, 잔뜩 찌푸린 미간, 고통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그 외에도 카나의 상태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나 더 있었으나,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상태는 좀 어때…?”

“딱히 차도는 없어요.”

잠시 자리를 비웠던 아티샤가 돌아왔다.

크로모의 그림자가 감행한 습격은 마을에 큰 피해를 낳았다.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탓에 환자들은 물론이고 당장 오늘 밤을 지낼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멀쩡한 건물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아티샤는 그나마 멀쩡한 건물 중 하나인 자신의 관저를 흔쾌히 다은의 일행에게 내주었다.

다은은 아티샤의 호의가 감사하면서도 불편했다.

“이렇게 넓은 곳을 정말 저희만 써도 괜찮아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수십은 묵을 수 있는 곳을 자신들만 쓰려니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써 몇 차례나 넌지시 말했지만 아티샤의 의지는 확고했다.

“은혜는 갚아야지….”

마을을 구해준 은인인데 고작 이깟 관저 따위가 아까우랴.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환자한테 우리가 내뿜는 마기가 좋을 리 없으니까….”

이미 마기가 만연한 마을이라고 해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있다.

몸 상태가 멀쩡했을 땐 괜찮을지라도,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금은 주의해야 한다는 게 아티샤의 의견이었다.

“으음… 그렇다면야….”

아티샤가 쓰러진 카나의 건강을 들먹이자 다은이 마지못해 물러났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테니까….”

“아직은 딱히 필요한 게 없네요. 나중에 생각나면 말할게요.”

“그래…. 아참….”

이걸 말하려고 온 게 아닌데….

안부 겸 소소한 잡담을 나누던 아티샤가 작게 손뼉을 쳤다.

“이 말을 전하려고 했는데 까먹을 뻔했네…. 앞으로 몇 시간 정도는 집 밖에 나오지 마….”

“네? 나갈 생각이 없긴 했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몬스터 무리가 쳐들어오는 게 발견됐거든…. 원래라면 목책이 있어서 괜찮았겠지만….”

말끝을 흐리며 창밖으로 흘깃 시선을 던지는 아티샤.

그녀의 검은색 눈동자에 무너지고 불탄 마을의 정경이 담겼다.

“보다시피 꼴이 말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웬만하면 여기에만 있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놈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몬스터 무리요?”

“응….”

그림자의 습격을 아직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몬스터 무리까지 닥치다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란 말이 꼭 들어맞는 상황에, 다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도와드릴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 몬스터 무리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많은 것도 아니니까 우리 힘만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좀 이상하긴 하네요.”

다은은 문득, 어디선가 봤던 말을 떠올렸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발생한다는 통계적 법칙.

이렇게 사건이 잇달아서 일어나다니.

더 큰 사건이 터지려는 징조가 아닐까.

다은은 치밀어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아서, 슬쩍 말을 돌렸다.

“왜 하필 지금일까요.”

“글쎄….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해하는 다은과 다르게 아티샤는 태평했다.

오히려 혀를 날름 내밀며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요즘 고기가 부족했는데 잘됐네….”

“게엑….”

아티샤의 말을 들은 다은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몬스터 고기라니.

지구인인 다은에게 몬스터 고기란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맛이 있다는 건 알지만, 냉큼 주워 먹기엔 꺼림칙한 느낌….

다은은 자신을 의아하게 보는 시선을 느끼고 헛기침했다.

“…아, 아무쪼록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별일 아닐 거야.”

“그렇겠죠?”

“왜 나를 보고 말해…?”

“응? 그러면 아티샤를 보고 말하지 누굴 보고 말해요?”

다은이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티샤가 말없이 턱짓했다.

저쪽을 보라는 듯한 행동에 다은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작은 소녀가 문틀에 반쯤 기댄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벌레들은 강한 빛에 이끌리거든….”

아티샤 못지않게 피로한 얼굴을 한 카나가 말했다.


           


Chapter 98

Chapter 98

뜨거운 핏덩이를 토하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불쾌하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움도 그렇고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비린내도 그렇고…. 애초에 몸 안에서만 돌아야 하는 피를 입에서 토하는 시점에서 기분을 따지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콜록… 콜록….” 태평한 생각과 다르게 내 몸은 연신 핏덩이를 토해냈다. 각혈이든 토혈이든, 피를 토하는 건 어떻게 보더라도 정상적인 몸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내 몸도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은 곤죽이나 다름없는 만신창이였고. ‘죽겠네….’ 고통을 참는 건 익숙하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뒷골목에서 꼬마, 그것도 여자아이는 약자 중의 약자. 아파도 아픈 걸 티 낼 수 없는 처지였고, 때문에 나는 언제나 고통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지금 올라오는 고통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세한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했던 고통은 지금에 와서는 칼로 내장을 얇게 저미고 소금을 뿌려대는 듯한 고통으로 변했다. 잠시나마 펴졌던 몸이 다시 동그랗게 말려 들었다. “어, 어떡해…. 그, 그래! 셀린. 셀린이라면…!” 고통 때문에 흐릿한 시야 너머로 언뜻 다은이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카나, 조금만 참아. 내가 셀린을 데려올 테니까.” 견습 성녀인 셀린이라면 카나를 치료할 수 있을 거야. 라는 기대감이 고스란히 담긴 그녀의 말. 이윽고 셀린이 일행과 함께 도착하고, 나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을 때까지만 해도 다은의 표정은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 “…셀린? 왜 그래요?” “죄송해요. 제힘으로는 카나 님을 치료할 수 없을 거 같아요.” “…네?” “당연하지….”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내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가호의 해제와 동시에 사라진 적색의 검 대신 단출한 생김새의 롱소드를 지팡이 대신 짚으면서. “이건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니까….” 무려 드래곤 중에서도 특히 더 흉포하다고 알려진 레드 드래곤의 마나가 휩쓸고 간 결과물이다. 뭐랄까… 말로 설명하려니 애매한데. 실제로 상처가 남은 게 아니라, 너무 큰 부담을 받아서 육체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 셀린의 성법이 효과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피가 계속 나오잖아…!” 다은이 만류하며 소맷자락으로 내 입가를 훑었다. 그녀의 하얀 소맷자락에 새빨간 피가 묻어나왔다. “아.” 어쩐지 뭔가 계속 흐르는 기분이 들더라니, 말하느라 피를 흘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나 보네. 칠칠치 못하게. “…나, 순간 피가 아니라 침인 줄 알았어.” 너무 태연하게 반응해서 착각했다고 다은이 말했다. 피든 침이든 입에서 줄줄 흘리고 있으면 칠칠치 못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엄연히 다르지! 아니, 그보다 아프면서 계속 말하지 말라니까!” 입가에 부드러운 천의 촉감이 스치고, 다은의 다른쪽 소매도 붉게 물들었다. 하얀색 옷에 피 묻으면 세탁할 때 곤란한데. 소맷자락에 묻은 내 피를 보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라.” “카나?!” “카나 님!”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 시야는 땅바닥을 향해 있었다. -덜커덕! 지팡이 대용으로 짚고 있던 롱소드가 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쇳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어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넘어졌구나.’ 어쩐지 땅이 너무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다. 내 키가 작아진 게 아니라 그냥 넘어진 거라서. 귓가로 들리는 소리가 물속에서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질 수 없다는 듯이 흐릿해지는 시야. ‘…조금, 힘을 과하게 줬나.’ 그 생각을 끝으로, 몽롱했던 정신이 완전히 암전했다. * * * 수술실로 들어간 환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늘 환자의 역할을 맡았던 다은에게 이런 경험은 사뭇 새로운 경험이었다. 탁탁. 톡, 톡.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발걸음 소리와 손톱을 깨무는 소리가 길지 않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끼익. 굳게 닫혀있던 문의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 자칫 놓칠 수도 있었던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다은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쫑긋!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린 다은이 열린 문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 “어, 어때요?! 괜찮아요?” 문을 열고 나온 셀린이 그 기세에 눌려 몸을 굳혔다. “아… 죄송해요.” 심히 당황한 셀린의 얼굴을 본 다은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닫고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해요.” 잠시 당황했던 셀린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돌아왔다. 카나와 다은과 함께 한 시간. 몇 주간의 시간은 셀린이 그들에 대해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주 틱틱대지만 다은에게만 유독 유한 모습을 보이는 카나와, 그런 카나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보는 다은을 보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토록 아끼는 소녀가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 있으니 걱정할 만 하죠.’ …보기 좋네요. 훈훈한, 어쩌면 부러움에 가까운 질투를 담아 다은을 보던 셀린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제가 의원이 아닌지라 정확한 소견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카나 님의 몸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어요.” “그렇군요….” 셀린의 말을 들은 다은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몸에 이상이 없다는 말은 다행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셀린의 힘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했기에. ‘드래곤의 마나라고….’ 무려 한 나라의 국보이니 범상치 않은 물건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그 정도로 대단한 물건일 줄이야. 마을을 불태우던 그루모의 그림자를 일격조차 허용하지 않고 때려눕힌 카나를 떠올리며 다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큰 힘엔 큰 대가가 따르기 마련. 그림자를 단숨에 때려눕힌 소녀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을 더 새하얗게 물들인 채로 쓰러져서 몇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역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요….” 카나는 강한 아이니까 곧 눈을 뜰 수 있을 거야. 다은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했다. ‘많이 아파 보였어.’ 카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 연기했지만. 대화를 나누는 다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고통을 참기 위해 악물어서 새하얗게 질린 입술,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 묘하게 흐린 초점, 잔뜩 찌푸린 미간, 고통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그 외에도 카나의 상태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나 더 있었으나,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상태는 좀 어때…?” “딱히 차도는 없어요.” 잠시 자리를 비웠던 아티샤가 돌아왔다. 크로모의 그림자가 감행한 습격은 마을에 큰 피해를 낳았다.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탓에 환자들은 물론이고 당장 오늘 밤을 지낼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멀쩡한 건물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아티샤는 그나마 멀쩡한 건물 중 하나인 자신의 관저를 흔쾌히 다은의 일행에게 내주었다. 다은은 아티샤의 호의가 감사하면서도 불편했다. “이렇게 넓은 곳을 정말 저희만 써도 괜찮아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수십은 묵을 수 있는 곳을 자신들만 쓰려니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써 몇 차례나 넌지시 말했지만 아티샤의 의지는 확고했다. “은혜는 갚아야지….” 마을을 구해준 은인인데 고작 이깟 관저 따위가 아까우랴.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환자한테 우리가 내뿜는 마기가 좋을 리 없으니까….” 이미 마기가 만연한 마을이라고 해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있다. 몸 상태가 멀쩡했을 땐 괜찮을지라도,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금은 주의해야 한다는 게 아티샤의 의견이었다. “으음… 그렇다면야….” 아티샤가 쓰러진 카나의 건강을 들먹이자 다은이 마지못해 물러났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테니까….” “아직은 딱히 필요한 게 없네요. 나중에 생각나면 말할게요.” “그래…. 아참….” 이걸 말하려고 온 게 아닌데…. 안부 겸 소소한 잡담을 나누던 아티샤가 작게 손뼉을 쳤다. “이 말을 전하려고 했는데 까먹을 뻔했네…. 앞으로 몇 시간 정도는 집 밖에 나오지 마….” “네? 나갈 생각이 없긴 했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몬스터 무리가 쳐들어오는 게 발견됐거든…. 원래라면 목책이 있어서 괜찮았겠지만….” 말끝을 흐리며 창밖으로 흘깃 시선을 던지는 아티샤. 그녀의 검은색 눈동자에 무너지고 불탄 마을의 정경이 담겼다. “보다시피 꼴이 말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웬만하면 여기에만 있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놈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몬스터 무리요?” “응….” 그림자의 습격을 아직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몬스터 무리까지 닥치다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란 말이 꼭 들어맞는 상황에, 다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도와드릴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 몬스터 무리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많은 것도 아니니까 우리 힘만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좀 이상하긴 하네요.” 다은은 문득, 어디선가 봤던 말을 떠올렸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발생한다는 통계적 법칙. 이렇게 사건이 잇달아서 일어나다니. 더 큰 사건이 터지려는 징조가 아닐까. 다은은 치밀어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아서, 슬쩍 말을 돌렸다. “왜 하필 지금일까요.” “글쎄….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해하는 다은과 다르게 아티샤는 태평했다. 오히려 혀를 날름 내밀며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요즘 고기가 부족했는데 잘됐네….” “게엑….” 아티샤의 말을 들은 다은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몬스터 고기라니. 지구인인 다은에게 몬스터 고기란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맛이 있다는 건 알지만, 냉큼 주워 먹기엔 꺼림칙한 느낌…. 다은은 자신을 의아하게 보는 시선을 느끼고 헛기침했다. “…아, 아무쪼록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별일 아닐 거야.” “그렇겠죠?” “왜 나를 보고 말해…?” “응? 그러면 아티샤를 보고 말하지 누굴 보고 말해요?” 다은이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티샤가 말없이 턱짓했다. 저쪽을 보라는 듯한 행동에 다은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작은 소녀가 문틀에 반쯤 기댄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벌레들은 강한 빛에 이끌리거든….” 아티샤 못지않게 피로한 얼굴을 한 카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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