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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너희들이 내가 있는 곳에 갇힌 것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환생했다.

고즈넉한 천장.

LED 전구 대신 기름을 쓴 등불이 방 안을 밝혔다.

비단과 융으로 짜 올린 옷. 둔탁한 나무식기를 보자면 지구 문명보다 떨어진 건 확실하다.

그래도 뭐… 판타지 세계인데 이 정도면 부잣집인 거 아니겠어? 막노동 하다 과로사한 천애고아 신세치곤 괜찮은 환생이다.

무엇보다 내가 귀족이라고 확신한 건 하나다. 우리 어머니의 미모였다.

“우리 아가…….”

나를 바라보는 생물학적 어머니의 눈부신 미소. 저 얼굴이 귀족이 아닐 수가 있나? 내 미래 연애문제는 문제없을성싶다.

3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요람 위를 벗어나 방 밖을 목격했다. 아직 유아라는 점을 고려해도 너무 크고 거대했다.

“공자님!”

유모인 모나가 허겁지겁 나를 안아 들었다. 내 인생 첫 모험은 그렇게 끝났다.

생각해보면.

이때 모험 같은 걸 꿈꾸지 말았어야 했다.

진짜 모험이라는 건 리얼리티 100%의 진흙탕이라는 걸 알았으면 그 고생은 안 했을 텐데.

6년차.

내가 환생한 집은 왕국에서도 유명한 대공가라는 모양이다.

드라고니아 대공. 악룡을 쓰러뜨리고 그 피를 뒤집어썼다는 전설적인 기사가 가문의 시조였다. 역대 국왕도 넷이나 배출했다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 왕국은 국왕이 선출제다.

8년차에 이르렀을 때, 나는 차기 왕국의 기사로서 검을 배워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두근거렸다. 판타지 기사라니! 나도 막 검기 같은 거 뽑고 검에 오러를 입힐 수 있을까?

나를 가르쳐줄 사람은 왕궁에서 파견된 성배기사 고르딕 경이라던데 어떤 사람일까?

응? 성배기사?

10년차.

아프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다.

기사의 길을 선택한 나는 매일매일 고르딕 마초 새끼한테 두들겨 맞고 있었다.

대공가 적자 찬스로 종자 노릇을 넘긴 건 좋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수행하고 말타는 법을 배웠다.

성배기사… 그래, 판타지로 치면 소드 마스터 같은 존재들이다.

이 세계의 기사들이 내가 생각했던 판타지 기사들과는 좀 많이 달랐지만, 성배기사는 정말 인간과는 동떨어진 괴물들이다.

다만 이 성배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 퀘스트를 완수하고 왕국의 기사가 되어 전공과 명예를 쌓으며 성배의 선택을 받아 성수를 마셔야 한다는 것 정도?

강한 건 당연하고 명예와 신실함까지 지녀야 이세계 소드 마스터인 성배기사가 될 수 있었다.

망할… 나 종교 안 믿는데.

14년차.

매일매일이 고통이다.

뼈를 깎는 수행은 그렇다 치자. 날이 가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성취감도 있다.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예법과 공부였다.

나는 차기 대공이 유력한 적장자였다. 당연히 대공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배워야 했다.

영민을 다스리는 법, 법을 수행하는 법, 정의와 법 사이의 철학적 논쟁을 비롯해 레이디를 대하는 법과 성서 공부까지.

이 세계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여 만신전에서 공물을 바치고 신들의 말씀을 따른다고 한다.

신이라니… 참 판타지스럽긴 하다.

근데 나… 정의의 여신 뭔가하는 여자한테 인정받아야 성배의 선택을 받는다던데?

16년차.

지금 나는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네? 나이 열여섯이면 중학생 아니냐고? 공교롭게도 이 세계에선 한 사람의 성인으로 쳐주는 나이다.

성배기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 수행을 떠나 왕국의 국민들을 수호하고 명예로운 퀘스트를 완수해내라, 라는 것인데.

그 퀘스트라는 걸 받으려면 여신의 분신체를 찾아야 한단다. 어떻게 찾냐고?

그냥 왕국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명예를 드높이래. 그럼 알아서 찾아온단다. 환장하겠네.

17년차.

오늘은 오크 놈들을 썰었다. 이 개 같은 꼴통 전쟁광 버러지 짐승들. 허구헌 날 왕국의 국경을 침범해 왕국민들을 죽이고 다닌다. 이놈들만 아니었다면 왕국은 태평성대일 것이다.

도중에 만난 길두스 경과 안토크 경, 숲의 수호자인 움직이는 나무인간 군라르와 함께 오크들을 썰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다친 자들을 수습하고 목책을 바로 세워라. 왕국의 검과 여신의 은총이 그대들과 함께하리라.”

걱정이다. 농사는 매해 풍년에 그들이 바치는 세금은 꼬박꼬박 왕국을 배 불렸지만, 이 나라는 적이 너무 많았다.

인간이 아닌 것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 요즘은 사교도들도 성행한다던데.

20년차.

여신을 만났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다. 정말로 신은 실존했다.

종교라는 게 원래 무지한 것들을 계몽하고 규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던가?

천국? 명예의 전당? 신들과의 만찬? 그거 다 꾸며낸 신화 아니었어?

그야 현 국왕이 110년째 살아 왕국을 호령한다지만, 환골탈태 비스무리한 걸 한 성배기사니 싶었다.

당장 내 스승이신 고르딕 경도 올해로 90세의 성배기사였으니.

“울프릭 드라고니아 대공의 아들 레온 드라고니아여. 그대의 명예와 신실함을 증명할 퀘스트를 수여하겠도다.”

“여, 여신의 명을 받잡습니다!”

수행기사 4년차. 드디어 여신의 분신을 만났다. 아리아나께선 실존하셨다!

오크를 베었다. 고블린을 찢었다. 사악한 사교도들의 무리를 토벌하고 왕국의 영토를 지켰다.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명예를 드높일 때마다 울리는 내 이름과 찬사, 동경과 존경이 나를 으쓱거리게 했다.

워나이트 갈바트의 아들 길두스 경. 광산의 수호자 안토크 경, 처음 볼 때는 2m에 불과했던 트리맨 군라르는 어느덧 5m에 이르는 트리 자이언트가 되었다.

나는 성배의 인정을 받고 성배기사가 되었다.

27년차.

최연소 워나이트가 되었다.

오크 워로드의 목을 따오고, 야만스러운 유목민족을 싹다 죽여버린 게 컸던 모양이다.

하여간 오크 놈들은 어디서 애를 그렇게 싸지르고 다니는지 잊을만하면 10만, 20만의 무리를 짜서 쳐들어온다.

내가 자유로운 전쟁 자결권과 기사 소집권한이 있는 워나이트가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오크 정벌이었다.

이 빌어먹을 녹색피부 새끼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70만 마리를 매장했다. 속이 다 시원하네.

35년차.

명예로운 제14대 사자심왕이시자 살아있는 성자이자 반신 아르헨 마제스티 라이온하트께서 서거하셨다. 제국 변방에서 소환된 대악마와 맞서다 벌어진 일이었다.

오크도 골치 아픈데 요즘은 악마까지 지랄이다. 빌어먹을 제국 마법사 새끼들. 그놈의 탐구심이랍시고 흑마법 연구하다 이꼬라지 날 것 같았다.

이래서 사람은 신을 믿고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 본연의 탐구심이니 진리니 뭐니 하면서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벌이니까 대악마가 사람을 십만이나 썰어 잡수시는 거 아니겠나.

그와 별개로 멸망할 뻔한 제국을 돕다가 명예롭게 서거하신 사자심왕을 이을 성배기사를 선출해야 한다.

“성배기사 레온 드라고니아.”

“아리아나시여.”

여신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나를 지목하셨다. 성배의 선택이 아닌 여신의 직접강립은 왕국 역사상 처음이라는 모양이다.

대악마의 목을 딴 명예가 컸나 보다.

명예로운 길이었고 고단한 자리였으나 나를 따르는 기사들과 왕국민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다.

나는 드라고니아의 대공이자 라이온하트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여신께서 하사하신 성물 사자의 심장을 이식하고 성배를 수호하기로 맹세했으며, 성검과 성창을 들고 왕국의 적을 쓰러뜨렸다.

80년차.

그간 수많은 일이 있었다.

오크들과의 대전쟁이 세 번 있었고, 웬 이상한 곱추 고블린 놈이 진각성하더니 대악마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놈 아가리를 찢어놓을 수 있었는데, 운이 나쁘게도 데몬 게이트를 통해 도망쳤다.

“폐하, 제국의 흑마법 학파가 또다시 실험을 강행한다고 합니다!”

미쳤나, 제국 새끼들. 이 새끼들이 요즘 왜 이러지?

요즘 제국의 방종과 불신이 극에 달했다.

매년 있는 만신전 참배도 불참하더니 신에게서 독립한다는 멍청한 신성독립주의자들이 설치고 다녔다.

이게 다 북방 이교도 새끼들을 규합해서 그런다. 군인 모자라다고 야만족 그 천것들을 받아들이더니 그들의 신앙까지 받아들였다.

우리 라이온하트 왕국에선 천한 농노로 평생 살다 돼지처럼 죽어나갈 천것들인데 사람 대접해준다고 꼴값이다.

진짜 그냥 확 정벌해버려? 조별과제에서 트롤짓을 일삼는 조원을 보는 기분이다.

98년차.

제국놈들이 기어코 일을 벌였다!

죽고 싶지 않다며 사교도의 비밀스러운 제물의식을 수행하던 황제 새끼가 제국 수도에 혼돈의 군주를 소환해버렸다!

나이 칠십도 안 처먹은 새파랗게 젊은 새끼가 영생을 누리고 싶다며 수도의 300만 제국인들과 동반자살을 한 것이다!

“하…….”

작년 오크들의 기름이 채 마르지 않은 성검을 들고 기사들을 소집했다.

121년차.

세상이 망해간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정의의 여신 아리아나를 대신해 악마들을 썰어 넘겼고, 풍요의 여신 데메라의 사제들을 각지에 파견해 농지를 재건했다.

철과 대장장이의 신 헤토께서 성배기사들을 위한 갑주와 검을 마련해주셨고, 전쟁과 불꽃의 신 페토스께선 직접 내게 강림하셔서 전장의 업화를 태우셨다.

신마 전쟁 23년 째. 제국의 똥볼로 시작된 이 전쟁은 기어코 세계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로드 레온.”

“아렌느 경인가.”

나의 맹우 안토크 경의 아들. 그 젊을 적의 외모가 그에게 남아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여신의 은총으로 100년 전과 그닥 다를 게 없는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자랑스럽게 여겨라, 아렌느. 그대 아버지는 명예롭게 전사하여 신들의 만찬장으로 향했으니.”

“예…….”

죽은 아버지의 아들을 위로하고 나를 바라보는 병사와 기사들을 본다. 최후의 결전… 아니, 마지막 저항이었다.

적들의 진군 소리가 자아내는 땅울림과 그들 눈에 차오르는 혼잡한 감정들.

공포, 두려움, 무력감, 절망감.

아아, 여신이시여.

이 부족한 피조물에게 사자심장을 잇게 하시고, 성검에 찬란한 불빛을 지피신 성배의 주인이시여.

여기 당신의 어린 양들이 두려워하며 떨고 있나이다.

여인들은 우는 아이를 달래며 눈물을 삼키고,

청년들은 꺼져가는 항전의 불씨를 애써 손에 담고,

기사들은 피로 젖은 황야에라도 희망의 씨앗을 남기려 하나이다.

그러나 그대, 성검과 성창과 성배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첫 번째 기사는 지평선 너머까지 뻗은 악을 막지 못할 것을 아나이다.

여신이시여.

나의 여신이시여. 이 어리석은 기사가 어찌해야 하나이까.

『그대 뜻대로 할지어다』

“…….”

『나의 기사여. 은애하는 나의 명예로운 기사여. 네 여신이 내 기사와 마지막까지 함께하리라.』

여신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우리는 결국 최후를 맞이할 진정, 그 최후는 명예로울 것이다.

“여신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라이온하트를 위하여!”

121년차 그해 겨울.

우리는 지상을 메운 천만의 악마들과 결전을 벌였다.

야만족 농노들은 고기방패로 가치 있게 소모되고 창과 방패로 무장한 자유민 병사들과 영광의 기사들이 명예롭게 스러져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악마들을 소멸시킨 성배기사들이 하나둘 승천했다.

오직 모든 신들의 선택을 받은 만신전의 대행자. 나만이 끝까지 악마들을 도륙했다.

수많은 악마군주와 대악마들을 찢어발기고 놈들에게 성배기사의 신성을 비쳤다.

217년차.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56년차.

마지막 남은 데몬 게이트를 파괴했다. 수십만 마리의 악마들이 도주로를 잃고 허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비천하고 비루한 악종들이여! 네놈들은 이제 나와 함께 이 세계에 갇혔노라! 최후의 한 마리까지 남김없이 소멸시켜주겠다!”

내가 갇힌 게 아니다!

너희들이 내가 있는 곳에 갇힌 거다, 씨부랄 것들아!

300년차.

“세상에, 이런 게이트는 처음 봐요. 대체 여긴 어디죠?”

“긴장해, 하리야. 측정불가 게이트는 13년 만이라고. 뭐가 나올지 몰라.”

“알아요… 그런데 이쪽 세계는 대체 뭐가 있기에 등급측정도 안 되는 거죠?”

“몰라… 상급 악마라도 있는 거 아니야?”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지구인들과 마주한 것은 딱 300년이 되던 해였다.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singwahamkke dol-aon gisawangnim, The King of Knights Returns with the Gods, 신과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returned to Earth as the invincible Knight King. But the Gods came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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