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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0

100화 존재

100화 존재

“하아······! 하아······!”

카인의 숨소리가 무거워졌다. 그의 눈앞으로 지난 회귀의 기억들이 뒤섞여 펼쳐졌다. 각각의 순간들은 시간의 질서를 잃고 혼란스럽게 얽혀 있었다. 마치 끝없는 회상의 미로 속을 헤매는 듯이.

‘나는 미다크 페이드린이라고 한다. 하센베르크 백작을 만나러 왔지.’

가문을 찾아왔던 손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엘프를 닮았던.

‘······방금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

성문을 열고 마주했던 보랏빛 눈의 사내.

그 순간 느꼈던 혼란과 공포.

흔들리는 시야.

달아나는 숨소리.

‘카인! 아벨!’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회귀가 거듭될 때마다 기다려지던 따뜻한 품.

그러나 그 안에서도 피할 수 없었던 현실의 고통.

‘비밀 통로로 가면 안 돼요!’

회차마다 다른 선택을 해보았다. 그러나 헛된 노력이었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결과는 같았다. 숙명과도 같은 반복.

그리고 깨달았다.

프란츠 경과 기사단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난관을 극복하려면 아버지와 합류해야 한다.

‘이걸 받거라. 카인.’

아버지가 건네준 검은 파편.

그러고 보니 이런 물건을 최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오필리아에게는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가!’

아버지가 언급했던 ‘오필리아’라는 이름.

왜 그동안 잊고 있었지?

‘그것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될 저주받은 힘이다!’

‘그 저주받은 힘을 연구하도록 도운 것은 하센베르크 가문이 아니었던가.’

저주받은 힘.

그 힘을 연구하던 하센베르크.

‘하센베르크는 힘의 위험성을 깨닫고 연구를 포기했다.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그 힘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이다!’

‘빌헬름 하센베르크. 너는 어떻게 그 감옥에서 빠져나와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나.’

무엇일까.

그 ‘감옥’이라는 것은.

‘헬레나! 카인!’

회차가 거듭되어도 아버지는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 속의 균열을 뚫고.

오러 블레이드를 발산하며.

‘이걸 받거라. 카인.’

그래서 일부러 비밀 통로에서 시간을 끌어, 프란츠 경이 한쪽 팔을 잃기 전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조절했다. 그렇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적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의 결말은 같았다.

사랑하는 모든 이의 죽음.

변치 않는 비극의 순환.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바뀌었다.

검은 파편의 힘으로.

‘아버지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힘이다.’

그 파편은 지금 어디에 있지?

“이제야 돌아왔나요?”

귀를 파고드는 속삭임에, 카인은 본능적으로 검을 뻗었다. 그러나 맞지 않았다.

어느새 모르가나는 저만치 뒤로 물러나 있었다.

“정말로 성미가 급하군요. 당신은.”

두근, 카인의 심장이 뛰었다.

기억 속의 세계로 빠져들기 직전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실의 비밀을 알고 있나요? 세실은 블레오파드랍니다? 당신의 가문을 멸망시킨 혈족 말이에요.’

모르가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면 조금 무섭답니다?”

“내 가족을 죽인 것이······ 세실의 혈족이라고······?”

“아! 제대로 들은 거군요?”

반색한 모르가나가 짝! 손뼉을 쳤다.

“맞아요! 당신이 보았던 보랏빛 눈의 사내가 바로 세실의 아버지, 일루산 블레오파드랍니다?”

“거짓말이야!”

격정적인 외침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인의 반응에 모르가나는 당황한 듯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죠? 당신에게 세실은 소중한 존재가 아니지 않나요? 세실의 비밀을 알았으니, 이제 그냥 복수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저는 당신이 무척 기뻐할 줄 알았는데요?”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모르가나의 목소리가 카인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 공해와도 같은 소음을 들으며 카인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모르가나의 말이 맞다. 원한의 대상을 찾았으니 복수하면 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분노가 치미는 것일까.

세실이 그동안 나를 속여왔기 때문에?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답니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세실이 블레오파드라는 사실을.”

······뭐라고?

“그래요.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당신처럼 강력한 혼돈을 지닌 자가 그 아이의 어설픈 말과 행동에서 위화감을 찾지 못했을 리 없잖아요?”

카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의 머릿속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모르가나를 처음 만났던 날.

그날, 의문의 검은 구체에 갇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던 세실.

‘카인!’

세실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전신을 뒤덮은 어두운 기운. 분명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던 그것은······.

카인은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가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빗소리가 들린다. 네모진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은월섬의 밤. 왜인지 비를 맞고 싶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것 같다.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는 세실이 보인다. 호기심을 느끼며 세실을 미행한다. 덤불에서 느껴지는 진한 풀 내음. 이런 비밀 통로가 있었다고?

세실은 나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다. 거친 빗소리 때문에?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로? 달리는 세실의 뒷모습이 대나무 숲 너머로 사라진다. 채앵! 챙! 금속성 소음이 들린다. 뭐지? 세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렇지! 그거다! 세실!’

쿠훌린과 세실이 보인다.

대련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블러디드를 발현해 보거라! 세실!’

쿠훌린의 외침에 세실이 웃는다.

세실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발현된 순간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명이 울린다. 환각을 보는 것만 같다.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어두운 기운.

그것이 세실의 몸을 뒤덮었다.

“크흑······!”

카인은 거친 신음을 토했다. 그랬다. 자신은 알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기억을 조작했다. 그날의 세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야 깨달았나요?”

카인은 빠득 이를 갈며 모르가나를 노려봤다. 저 위험한 여자가 자신의 기억을 마구 헤집고 있다.

“······너는 내 기억을 엿볼 수 있는 건가.”

“그럴 리가요? 아무리 저라도 타인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는 없답니다?”

모르가나가 과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런 힘을 지닌 존재가 있기는 하지만요.”

“그게 누구지?”

“흐응. 말씀드리기 조금 곤란하네요.”

“너는 ‘오필리아’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모르가나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런 것까지 기억하신 건가요?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겠는데요?”

이어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오필리아 플랑브아즈. 제국의 속국인 레나르 보호령의 공작이죠. 그녀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레나르의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들었답니다? 아, 참고로 공작에게는 당신 또래의 어여쁜 딸이 있다더군요. ‘아리엘라 플랑브아즈’라는. 제 어머니를 능가하는 마법 잠재력을 지녔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게다가 재미있는 사실이 또 하나 있어요. 오필리아 플랑브아즈 공작은 한때 ‘아르카넘 홀’이라는 제국의 특별한 학교를 다녔답니다? 익숙한 이름이죠? 맞아요! 빌헬름 하센베르크와 헬레나 미스트우드가 졸업한 바로 그 학교예요!”

모르가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당신에게 플랑브아즈 공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신이 먼저 묻지 뭐예요? 아아, 이것이 운명이라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한때 저는 신이 내린 운명이라는 싸구려 낱말을 믿었었죠. 그런 것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인데.”

카인은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워. 내게 플랑브아즈 공작에 관해 말하려던 이유가 뭐지?”

모르가나는 잠시 카인을 응시하다가, 특유의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도움이라고?”

“당신은 복수를 원하죠?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까요? 대륙 최강의 살수 가문인 블레오파드를 지배하고, 당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존재.”

모르가나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만약 그 존재가 제국에 있다면 어떨까요.”

***

내가 발현한 세계수의 혼돈은 일루산의 블레이드에 무력화됐다. 이후, 그가 내게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내가 믿어온 것과 너무도 대조되는 이야기. 일루산이 세실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고? 제 손으로 아내의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그렇게 말하며, 한편으로 나는 일루산이 내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루산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쿠훌린과 은월섬을 향하던 중 그는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났었다. 쿠훌린과 몇 차례 검을 주고받은 그는 카인과, 세실과, 나를 번갈아 본 후 연기처럼 사라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날, 일루산은 쿠훌린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세실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지금은 물러나지. 궁금증은 해소되었다.’

어떤 궁금증이었을까.

네몬이나 미스트를 통해 무언가를 들은 것일까.

아니면 그저 세실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어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내 말은 사실이다.”

“그 사실을 내게 전하는 이유가 뭐지?”

“은월이 상처 입은 지금, 네가 세실을 지켜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내가 세실을 바짝 끌어안았던 그날의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세실을 향한 보호 본능. 강렬한 연민. 무엇보다 세실을 지키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

일루산은 그때의 내 감정을 알아본 것일까.

“너는 소서러다. 하센베르크의 망자와 마찬가지로.”

“하센베르크의 망자라면, 카인을 말하는 거야?”

“글쎄. 어떨까.”

확인차 물은 것이었는데, 일루산의 대답은 묘했다.

“그를 믿지 마라.”

내게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님피엘의 속삭임이 다시금 머리를 스쳤다.

‘너는 배신을 경험하게 될 거야.’

“너는 카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유례없이 강한 잠재력을 지닌 소서러라는 것. 그리고.”

일루산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좁혀졌다.

“군주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

어쩌면 내게는 일루산이 세실을 살리려 한다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부분이었다.

나는 그동안 일루산이 암영의 절대적인 권력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있었다니.

“군주의 정체가 뭐지?”

“너에게 많은 것을 밝힐 수는 없다. 다만 그는 위험한 존재다. 그가 주시하는 하센베르크의 망자 또한 마찬가지다.”

“군주는 세실을 노리는 건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세실을 어떤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는 것뿐.”

“그런 위험한 자로부터 내가 세실을 지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고?”

“너는 그와 닮았다.”

그?

“살림바르 왕성에서 손에 넣은 물건이 있을 거다.”

나는 흠칫 놀랐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검은 보석의 목걸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 파편에는 아주 오래된 힘이 담겨 있다. 그 힘을 발현해 이곳을 벗어나라. 네 동료들에게 위험이 닥칠 거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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