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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2

102화 부서진 땅 (2)

102화 부서진 땅 (2)

“뭐? 보석이 부서져?”

나는 루나에게 손을 펼쳐 보였다.

검은 파편은 고운 가루로 변해 있었다.

“그, 그럼 우리 다시 못 돌아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일행과 몸을 맞댄 뒤, 공간 이동을 시도해 봤다. 그러나 실패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공간 이동을 발현할 때마다 검은 파편에 실금이 추가되고 있다는 것은 인지했지만, 이렇게 빨리 부서질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녹음심장 때문인 것 같다. 루나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녹음심장의 힘을 끌어냈었다. 그 힘이 과부하를 일으킨 것이겠지.

나는 아공간에서 적당한 유리병을 꺼내 검은 가루를 넣었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어쩌면 가루가 합쳐지며 다시 덩어리로 변하지는 않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

“······라이칸은 어떻게 됐을까.”

루나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라이칸이 몹시 걱정됐다. 그 자리에는 무려 흑기사와 미스트가 있었다. 물론 미스트는 저만치 떨어져 있긴 했지만. 잠깐. 그럼 흑기사와 미스트는 한패인 건가?

“미스트는 흑기사를 모르던데? 오히려 흑기사의 공격을 맞고 날아갔어.”

루나의 대답이 나를 알쏭달쏭하게 했다. 하지만 다행이다. 흑기사와 미스트가 같은 편이 아니라면 라이칸의 생존 확률은 그만큼 높아질 테니까.

“카인은 괜찮을까? 조조아킴과 야니카는······.”

루나의 말에 세실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웠다.

“괜찮을 거야. 아마도 족제비는 야니카와 함께 있겠지. 그리고 카인 그 녀석은 쉽게 죽지 않을걸?”

뭐, 정확히 말하면 죽어도 되살아나는 거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카인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족제비와 야니카는 불안하다. 일단 족제비가 야니카와 함께 있는지도 의문이고, 제아무리 야니카가 아처로드라 해도 이번의 적은 만만치 않으니까.

‘일루산, 미스트, 모르가나, 거기에 흑기사까지.’

심지어 이게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네몬, 크쉬, 사이퍼(델타)도 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왕국 하나쯤은 순식간에 몰살할 정도의 전력.

“그렇겠지? 괜찮겠지?”

“응. 괜찮을 거야. 확실해.”

“헤헤헤.”

이렇게 확실하다고 말해주면 루나는 무척 좋아한다.

나도 루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물끄러미 나와 루나를 보던 세실이 물었다.

“루나. 검은?”

“앗! 앗!”

“뭐야 루나. 검 잃어버린 거야?”

“흐, 흑기사 때문이야! 흑기사가 갑자기 나를 확 끌어당기는 바람에······!”

항변하던 루나가 푹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바보야. 멍텅구리 딱정벌레야. 나는 검사의 자격이 없어.”

멍텅구리 딱정벌레는 뭐지.

나는 아공간에서 여분의 검을 꺼내 루나에게 건넸다. 사실 보물고에 다녀오기 전의 루나가 쓰던 검이다.

“힝······. 카인이랑 똑같은 검이라서 좋았는데······.”

“싫으면 이리 내.”

“누, 누가 싫댔니?”

내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봐 겁났는지, 루나가 검을 꼭 끌어안았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 검을 빼앗는 시늉을 하는데, 세실이 나를 불렀다.

“데미안.”

“응?”

“여기. 어디?”

그러고 보니 나도 그게 궁금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다른 곳보다 고지대였고, 그래서 사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황량하고 거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짙은 남색과 녹색이 섞인 빛을 띠었다. 파도 소리는 평온하면서도, 그 안에 어떤 거대한 힘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나도 모르겠어.”

바다와 맞닿은 해안선은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의아한 점은 모두 내가 알아볼 수 없는 식물들이었다는 거다. 뭐지? 정말로 다른 세계에 오기라도 한 건가? 지구에서 소설 속 세계로 들어왔던 것처럼?

나는 미니맵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 보았다. 괴이한 지형이다. 마치 깨진 그릇의 파편이 흩어진 것처럼, 바다 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었다.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점점 더 이곳이 무한회귀의 세계가 아닌, 새로운 세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스트레아 대륙에 이런 지형은 없었으니까.

헥. 헥. 헥.

먼지가 주머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앗! 먼지!”

루나가 활짝 웃으며 먼지를 끌어안았다. 세실도 미소 지으며 먼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루나와 세실은 먼지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래서 먼지도 편하게 모습을 드러낸 거겠지.

“먼지야! 어디 가!”

루나의 품에서 빠져나온 먼지가 주위를 탐색했다. 킁킁 냄새를 맡고, 헥헥 혀를 내밀고, 샥샥 꼬리를 흔든다.

‘먼지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놀랍게도 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데?’

먼지가 내게 의지를 전했다.

조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장소가 아스트레아 대륙의 어딘가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먼지도 이곳에는 처음 와보았다는 것도.

‘아무튼 아스트레아 대륙은 맞는 거지?’

먼지가 헥헥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안심했다.

아스트레아 대륙이 맞는다면, 어떻게든 길을 찾아 돌아가면 된다.

.

.

.

“배, 배를 만들자고?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해안에 내려와 있었다.

이 육지는 바다 위에 흩어진 여러 섬 중 하나였고, 그래서 다른 섬으로 건너가려면 배가 필요했다.

“시, 싫어! 나 배 타면 힘들어하는 거 알잖아! 세, 세실! 나 좀 도와줘!”

그러나 세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루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루나. 우리는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잊은 거야? 우리는 쿠훌린과 리아논과 디네베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고. 게다가 우리는 카인을 포함한 동료들의 안전도 확인해야 해.”

바르르 턱을 떨던 루나가 푹 고개를 숙였다.

“······네 말이 맞아 데미안.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한 걸까. 내 생각만 하고.”

루나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다. 루나는 무한회귀 세계관에서 가장 정의로운 등장인물이니까.

나는 아공간에서 나무를 꺼냈다. 최근 세르펜타인 산맥을 오르며 틈틈이 모아둔 것이다. 기다란 녀석들 위주로 챙겨두기를 잘했다. 이 정도면 작은 뗏목을 만들기 충분한 양이다. 짧은 녀석은 장작으로 쓰면 되고.

루나가 집중하는 눈으로 뗏목 만드는 것을 도왔다. 세실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우리를 도왔다. 하지만 뗏목을 만드는 것은 나도 처음이었고, 그래서 금세 해가 넘어가 버렸다.

“내일 마저 만들자.”

너무 열심히 일했는지 루나는 온몸이 진흙투성이였다. 나와 세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숲샘으로 몸을 씻기로 했다.

“데미안은 좋겠다. 씻는 걸 세실이 도와줄 수 있잖아.”

“아! 아으!”

세실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루나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루나가 깜짝 놀랐다.

“세, 세실! 왜 다들 이렇게 갑자기······!”

나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사하룬 사막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루나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세실이, 루나를 놓아줬다. 이어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루나를 바라봤다.

세실을 마주 보던 루나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서, 서, 설마 지금? 이, 이렇게 지저분한 꼴인데? 데미안도 있는데?”

발갛게 볼을 붉힌 루나가 당황한 얼굴로 나와 세실을 번갈아 쳐다봤다.

“세실! 나, 나중에!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이야기하면······!”

“루나.”

“안 돼애애앱······!”

세실의 손이 루나의 입을 덮었다.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던 세실이 루나의 시선을 피하며 속삭였다.

“······나. 여자아이.”

.

.

.

루나의 얼굴처럼 동그란 달이 떠오른 밤.

나는 보초를 서고 있었다.

루나와 세실을 지키기 위해.

미니맵에 적대적 표식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루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실의 비명도 들렸다. 뭐지. 루나가 세실을 괴롭히고 있는 건가.

둘은 함께 몸을 씻고 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제 곧 숙녀로 변모할 두 소녀가 씻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아니,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보초를 서는 것이 아니라, 앉아 있었다. 제발 적이 나타나지 않기를.

헥. 헥. 헥.

아까부터 먼지는 혀를 헥헥대며 나를 보고 있었다. 먼지야. 왜 그렇게 웃는 것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아아. 개운하다.”

루나와 세실이 젖은 머리를 털며 걸어왔다. 루나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고, 세실은 귀까지 빨개진 채 입술을 떨었다.

사뿐사뿐 다가온 루나가 내 귀에 속삭였다.

“혹시 엿본 거 아니지? 데미안.”

대답도 하기 전에 루나가 까르르 웃었다.

잠시 후, 우리는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루나는 아까부터 세실을 꼭 끌어안은 채 제 볼을 문질렀다.

“세실이 여자아이였다니. 너무 좋아. 역시 내 눈은 정확했어! 이렇게 예쁜 남자아이가 있을 리 없지. 아무렴. 헤헤헤헤.”

세실은 절반은 난처한 얼굴로, 나머지 절반은 도와달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봤다.

“세실리아라고 했지? 이름도 너무 예뻐!”

본명까지 밝힌 건가?

뭐, 루나라면 괜찮다.

세실이 그 정도로 루나를 신뢰한다는 거겠지.

“걱정하지 마 세실! 내가 입 딱 다물고 있을게! 그동안 여자아이라는 걸 숨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치?”

“······으. 응.”

“근데 세실 정말 대단하더라. 성숙한 어른 여자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어. 케일라도 발육이 좋은 편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흠흠. 멋져. 세실.”

이제 세실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루나는 그것도 모른 채, 세실의 몸과 제 몸을 번갈아 내려다보며 비교하기 여념이 없었다.

“······나도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니 더 자라겠지?”

세실이 얼굴을 붉히며 제 앞섶을 꼭 덮었다.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러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니?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편하게 있는 건 어때?”

“그. 그건.”

세실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아, 데미안 때문에 그렇구나! 하긴, 남자아이는 다 늑대라고 그랬어. 엘리샤가.”

아니 왜 가만히 있는 나를.

“앗! 그러고 보니 세실 너, 그때 사하룬 사막에서 카인과 함께 씻었던 거 아니니?”

“아! 아니야!”

세실이 완강히 부정했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그러나 다급하게 설명했다. 카인이 씻는 동안 계속 눈 감고 있었다고. 그래서 아무것도 못 봤다고.

“그랬구나. 나는 또 카인의 맨몸을 본 충격으로 달아났었나 했네. 그때 카인이 거의 억지로 데려갔었잖아.”

헤헤 웃던 루나의 얼굴이 돌연 굳어졌다.

“······잠깐.”

루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 채로 고정됐다.

그렇게 잠시 정지 화면처럼 멈춰 있던 루나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너 때문이었구나? 데미안.”

루나는 가면을 쓴 것처럼 표정이 없었다.

“세실이 달아났던 이유가.”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어쩐지.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걸 밝혔을 때 이상하게 아무 반응이 없다 했어. 데미안. 너는 알고 있었던 거지?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고 있었을까?”

루나의 이마가 내 이마에 맞닿았다.

“너, 엿본 거구나? 세실을.”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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