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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3

103화 부서진 땅 (3)

103화 부서진 땅 (3)

일루산은 적의 심장에 블레이드를 꽂아 넣었다.

그의 곁에 크쉬가 내려앉았다.

“수장.”

모르가나가 발현한 마법진의 영향으로 그들은 원래 다른 공간에 있었다.

그러나 분리되었던 공간은 점차 합쳐지고 있다.

“크쉬.”

“······죄송합니다. 수장.”

일루산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사실을 말한 건가. 세실에게.”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다른 할 말은.”

“네몬이 다쳤습니다.”

“네몬이?”

의외였다.

네몬을 다치게 할 정도의 실력자가 있었다니.

“바람숲의 아처로드가 참전했습니다.”

“야니카 제피르나 말인가. 그자는 아직 네몬을 상대할 그릇이 아닐 텐데.”

“레소빅 제피르나입니다.”

레소빅 제피르나. 현 바람숲의 수장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다. 은월처럼.

“야니카 제피르나와 레소빅 제피르나가 네몬을 협공했습니다. 그 결과로 바람숲의 수장은 네몬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제야 일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이퍼가 죽었습니다.”

일루산은 낮은 침음을 흘렸다.

사이퍼 블레오파드.

코드네임 델타(Delta).

크쉬를 제외하면 일루산이 가장 믿을 수 있는 부하였다.

실제로 그는 일루산이 내린 은밀한 임무를 수행했다. 금발 소년을 미행하고, 살림바르 왕성의 보물고에 검은 파편의 목걸이를 넣어둔 것도 그의 솜씨였다.

“누구에게 당했지.”

“용장 루카스입니다.”

“다른 것은.”

“작은 달빛과 금발, 그리고 세실이 사라졌습니다. 검은 파편의 힘이 발현된 듯합니다.”

일루산의 입가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일루산은 모르가나의 신호를 감지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후퇴한다고?

“합류 지점에서 만난다. 시체를 회수하도록. 나는 미스트를 찾겠다.”

“존명.”

어느새 주위 풍경은 또렷해졌다.

분리되었던 공간이 완전히 합쳐진 것이다.

유령 표범을 소환한 일루산은 미스트를 찾아 나섰다. 머지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흥분한 미스트는 폭발적으로 뻗치는 살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아하하하! 너 정말 재밌다! 흑월!”

미스트의 덜미를 잡아챈 일루산이 흑월의 검을 막았다.

일루산은 조금 놀랐다.

흑월의 경지가 상승했다.

“완전한 검은 달을 띄울 수 있게 되었나. 흑월.”

“······일루산 블레오파드.”

흑월이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일루산은 흑월을 제거할 생각이 없었다.

은월의 단은 건재해야 한다.

그래야 세실이 안전할 수 있다.

“돌아간다. 미스트.”

“이, 이거 놔 일루산!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유령 표범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발버둥 치다가 포기한 미스트가 일루산의 어깨너머로 소리쳤다.

“야 흑월! 너 나 말고 다른 녀석한테 죽으면 가만 안 둬!”

.

.

.

일루산은 숲의 허공을 보며 서 있었다.

있어야 할 검은 구체가 보이지 않는다.

모르가나의 마법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장.”

그림자 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검은 구체는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루산의 눈이 부하들을 훑었다.

삼분의 일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모두 정예 살수들이었다. 새로운 살수를 정예로 키우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동한다.”

일루산이 앞장서 달렸다.

오른쪽에는 네몬이, 왼쪽으로는 크쉬가 달렸다.

미스트가 크쉬 옆에서 중얼거렸다.

“······진짜 재밌었는데. 일루산 때문에 제대로 못 놀았어.”

미스트는 흑월과 결판을 내지 못해 심통이 났다.

미스트가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루산은 무시했다. 그는 많이 지쳤다. 오를리안의 소드마스터를 포함해 많은 기사와 병사를 죽였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만 적들이 몰려오는 기분도 들었다. 무엇보다 세실을 신경 쓰느라 쌓인 정신적 피로가 상당했다.

일루산은 눈동자를 굴려 네몬을 바라봤다. 다리를 다쳐 뛰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유령 표범을 꺼내지 않고 함께 달리고 있다. 하긴. 어릴 적부터 너는 자존심이 강했었지.

숲은 점점 더 울창해졌다. 달도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중, 네몬이 입을 열었다.

“수장.”

“말하라.”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하들을 물러 주시지요.”

일루산은 발을 멈췄다.

다른 살수들도 자리에 멈춰 섰다.

“이동 중이다. 복귀 후에 듣겠다.”

“지금 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루산은 네몬의 붉은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처음부터 네몬과 이런 관계는 아니었다.

자신이 가주가 되면서부터.

아니, 카이라가 죽은 뒤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시그마께서 이리도 다급히 전해야 할 이야기라면 저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코드네임 베타입니다.”

크쉬의 입에서 쉬이 나올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금 그는 ‘시그마’인 네몬보다 ‘베타’인 자신이 서열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쉬는 네몬을 경계하지만, 또한 두려워한다. 지금의 언사로 그는 네몬과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그은 셈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크쉬는 일루산과 네몬을 단둘이 두고 싶지 않았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베타’께서는.”

네몬의 붉은 눈이 크쉬를 바라봤다.

크쉬도 네몬을 마주 노려봤다.

미스트가 번쩍 손을 들며 외쳤다.

“그, 그럼 나도! 나는 코드네임 감마야!”

크쉬와 미스트를 차례로 바라본 일루산이 네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베타와 감마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상관없습니다.”

일루산이 부하들을 돌아봤다.

“출발하라. 뒤따라가겠다.”

“존명!”

살수들이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자리에는 일루산, 크쉬, 미스트, 그리고 네몬만이 남았다.

크쉬는 꿀꺽 침을 삼켰다. 드디어 속내를 드러내려는 것인가. 네몬.

하지만 네몬은 다쳤다. 설령 다치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그는 수장을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수장의 뒤에는 자신과 미스트가 있다.

그럼에도 크쉬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정말로 이야기만 할 셈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저자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신이 불리한 상황인데도 여유로운, 되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말하라. 네몬.”

일루산의 목소리에 네몬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일루산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루산의 눈이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할 말이 없다면 가겠다.”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일루산.”

크쉬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네몬이 수장에게 저렇게 말하는 것을 그는 처음 보았다.

“무례합니다! 네몬!”

분개하며 나서는 크쉬를 일루산이 제지했다.

일루산은 네몬의 저런 말투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일루산.’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치고 가주가 될 셈인가.”

“빼앗겼던 것을 돌려받을 뿐이다.”

일루산의 눈에 안타까움과 아픔이 스쳤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네몬은 침묵으로 응답했다.

일루산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나는 너보다 강하다. 게다가 나의 뒤에는 크쉬와 미스트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루산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불리함을 모를 네몬이 아니다.

또한 이길 수 있다는 확신 없이 섣불리 속내를 드러낼 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모르가나가? 불가능하다. 모르가나는 이번 임무로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일루산. 너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지.”

크쉬는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불안감이 증폭했다. 네몬은 무언가 믿는 것이 있다. 앞서 떠난 부하들이 배신한 것일까? 아니다. 주위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부하들은 수장을 배신할 자들이 아니다.

크쉬는 미스트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일루산과 네몬의 대화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츠컹! 섬뜩한 소음이 공기를 울렸다. 네몬이 블레이드를 뽑아 들었다. 거의 동시에 크쉬의 손에서도 블레이드가 뽑혔다.

그러나 일루산이 빨랐다.

카앙!

일루산의 블레이드와 네몬의 블레이드가 맞부딪쳤다. 이어 크쉬의 블레이드가 네몬의 옆구리를 노리며 쏘아졌다. 한발 늦게 미스트도 블레이드를 뽑으며 달려왔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쿼드 블레이드가 크쉬의 공격을 막았다. 크쉬의 눈이 충격으로 확장됐다. 네몬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수장과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블레이드는?

“크쉬.”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당신은······!”

크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크쉬뿐만이 아니었다. 일루산과 미스트도 두 눈을 부릅뜨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카앙! 캉!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일루산과 크쉬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상대 역시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미스트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네몬의 옆에 선 사내를 보며, 그녀는 혼란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내가 일루산을 돌아봤다.

일루산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얼굴.

“형님.”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가울!”

미스트가 비명을 질렀다.

일루산은 어금니를 악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된 것인가. 가울은 죽었다. 새까맣게 타 버린 시체를 회수했다.

그러나 쿼드 블레이드를 뽑아 든 채 눈앞에 나타난 이는 분명 가울이었다. 동생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그렇다면 그 시체는 가울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일루산은 그날 보았던 열 구의 시체를 떠올렸다.

그의 덜미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큭큭큭큭큭큭큭······.”

네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살을 에는 듯이 오싹한 그 웃음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퍼져 나오는 악마의 음성 같았다.

“나오거라.”

가울의 뒤에서 아홉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의 몸은 모두 그림자 결속으로 짙게 뒤덮여 있었다.

어느새 무심해진 얼굴로, 네몬이 말했다.

“일루산을 죽여라.”

“존명!”

아홉 명의 살수가 몸을 날렸다. 미스트는 이제 공포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런 미스트를 두 팔로 보호하며, 크쉬가 절망적인 외침을 토했다.

“네모오오오온!”

서슬 퍼런 소음과 함께 아홉 살수의 손끝에서 블레이드가 뽑혔다. 가울이 질풍 같은 기세로 달려들며 그들과 합류했다. 그 모습을 본 일루산의 눈동자가 파문처럼 흔들렸다.

시이이이잇!

가장 먼저 쇄도한 것은 가울의 블레이드였다. 뒤이어 다른 살수들의 블레이드가 동시에 쏘아져 들어왔다.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삼킬 듯한 폭풍이 일루산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모두 쿼드 블레이드였다.

***

불침번을 서던 세실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유 없이 몸에 한기가 돌았다. 모닥불이 꺼진 것이 아닌데도.

데미안과 루나는 새근새근 자고 있다. 먼지도 루나 옆에서 잠들었다.

친구들의 몸에 망토를 고쳐 덮어준 세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뒤로 숨은 창백한 달. 불현듯 크쉬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버지.

세실의 두 볼을 타고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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