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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6

106화 당돌하게

106화 당돌하게

“세실!”

저만치에서 나를 발견한 세실이 환히 웃었다. 우리는 서로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듯했다.

“괴물. 막. 작아져.”

세실이 다급히 무언가를 설명했다. 들어 보니 세실도 비슷한 괴물을 만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괴물의 덩치가 작아졌다고 한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우리가 상대하던 괴물의 몸통이 거대한 아가리로 변한 시점과 얼추 맞았다.

“괴물. 막. 도망.”

게다가 괴물은 세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기보다는 나와 루나를 쫓아가려 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가 상대했던 녀석처럼 검은 파편을 노린 것이겠지.

아무튼 덕분에 세실은 괴물을 제압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위험했다. 괴물은 본래의 힘을 숨기고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를 죽일 생각으로 덤볐다면 아주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어서 뗏목으로 돌아가자. 데미안.”

루나가 나를 재촉했다. 위급하지만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루나가 어서 배를 타러 가자고 조르다니.

그러나 나는 뗏목으로 돌아가는 대신 주위를 탐색했다. 이곳에서 발견한 문명의 흔적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데미안 뭐해? 괴물들이 또 나타나면 어떡하려고.”

“잠시만.”

내 대답에 루나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루나도 내심 저 흔적들이 궁금했을 것이다.

“데미안. 벽화?”

벽화 조각을 손에 든 내게 세실이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심히 벽화를 살폈다. 잘게 부서져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핏 마법사로 여겨지는 사람과 깊은 구덩이 같은 것이 보였다.

‘우물인가?’

나는 수시로 미니맵을 확인했다. 적대적 표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머무를 수는 없다.

그러던 중 나는 어느 낡은 반지를 발견했다. 왠지 가져가고 싶어져 주머니에 넣자 루나가 기겁하며 외쳤다.

“가, 가져가려고? 거기서 또 괴물이 튀어나오면 어떡해!”

“괜찮을 거야. 먼지가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먼지는 지금 아프잖아!”

아. 그렇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먼지에게 물었다. 이 반지를 가져가도 괜찮겠느냐고.

먼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먼지의 이마를 살살 쓰다듬었다.

‘고마워 먼지야.’

마지막으로 해골을 살펴봤다. 이 해골을 처음 봤을 때부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그 이유를 발견했다.

해골 근처에 찢겨 파묻힌 천막 조각. 그중 하나에 어떤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땅을 파고 천막 조각을 꺼냈다. 내 눈이 저절로 커졌다. 많이 손상되고 찢겼지만 확실했다. 그것은 하센베르크 가문의 문장이었다.

.

.

.

뗏목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둘러 해안을 벗어났다. 루나는 안도한 듯 한숨을 뱉었지만 머지않아 찾아든 뱃멀미에 괴로워했다.

나는 고민했다. 검은 파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가 괴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대로 파편이 가리키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쩌면 파편은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있고,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 몇몇 위험이 도사린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냥 파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기로 했다.

“데미안. 아까. 그림?”

루나가 잠들자 세실이 다가와 물었다. 처음에는 벽화에 관해 묻는 것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세실은 천막의 문양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센베르크 가문의 문장이야. 카인의.”

세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때, 루나가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 오며 말했다.

“······뭐라고? 카인? 카인이 왔어?”

뱃멀미 때문인지, 카인이 보고 싶어서인지 루나는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다시 루나를 보살피던 세실이 나를 불렀다. 루나는 괴물의 팔에 얻어맞은 팔다리가 퉁퉁 붓고, 멍들어 있었다. 심지어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많이. 아픈가 봐.”

세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세계수의 혼돈을 루나의 몸에 불어넣었다. 그러던 중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낡은 반지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고, 돌연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

.

.

주위가 시끄러웠다. 눈을 뜨려는데 천근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시야가 또렷하지 않았다.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 몸을 적셨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기억을 엿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마법사였던 것 같다.

옆으로 팔을 움직이자 부드럽고 차가운 것이 만져졌다. 눈앞에 일렁이는 은빛의 실. 나는 루나를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루나가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았다. 루나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지면이 뒤집힐 것처럼 흔들렸다. 머리 위로 계속해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 ······ ······!”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것이 세실의 다급한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폭풍과도 같은 거친 소음 속에서 쇳소리가 울린다. 세실은 싸우고 있는 건가? 무엇을 상대로?

일어나 세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루나를 끌어안은 내 손가락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반지였다.

나는 나의 의식이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안에서 나는 다시금 마법사의 기억을 엿봤다. 거울 속 마법사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금발.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 ······. ······ ······.’

그녀가 거울을 보며 무어라 속삭였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수면에 이는 물결처럼 흔들렸다. 이어 나의 눈앞으로 탁 트인 대지와 높다란 탑들이 솟아났다.

탑과 탑 사이를 잇는 다리들은 구름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아래 마법으로 빛나는 거리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아니 그녀는 또래 마법사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질적인 언어. 그러나 그들이 자연의 원리를 파헤치고, 별들의 궤도를 탐구하며, 생명의 신비를 탐색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라레 ······르세린느!’

기억이 이어질수록 귀가 트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언어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환각 바깥에서 들리는 거친 폭풍우 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시금 세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알 수 없는 비명이 울린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그 어딘가에서 나는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했다. 나의 몸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따뜻했고, 깊은 어둠 속에 있었지만 또한 환한 빛을 품었다.

어느새 그녀는 귀족으로 보이는 자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리한 지성과 권력의 무게를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녀와 그들의 대화는 때때로 치열했고, 정치와 권모술수의 짙은 그림자가 느껴졌다.

‘······리노르. ······탈레 바나라.’

한 사내의 비웃는 듯한 웃음과 함께, 풍경이 돌변했다. 평화롭던 세계가 뒤흔들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괴의 소용돌이였다. 폭발의 중심에서 벗어나려 그녀가 발버둥 쳤다.

마법의 빛과 어둠이 충돌하며 혼돈의 물결을 일으켰다. 하늘과 땅이 서로의 위치를 바꿨고, 소용돌이치는 파괴의 잔해 속에서 나는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듯한 어두운 구덩이를 봤다.

데미안!

목소리가 머리를 울린 순간, 나는 눈을 떴다. 따가운 햇빛이 내 눈을 관통하듯 밀려 들어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비볐다. 땅이 흔들린다. 아니, 뗏목이.

내 품에 루나가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 머리카락과 얼굴에 소금기가 엉겨 붙어있다. 잠시 멍하니 루나의 얼굴을 보던 나는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뗏목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어떤 생명체의 것인지 모를 살점과 뼛조각과 내장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뗏목은 어떻게 아직 물에 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반파된 채였다.

그리고 저만치 구석에, 피투성이가 된 세실이 쓰러져 있었다.

“세실!”

세실에게 달려갔다. 일순 나는 세실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품에 안은 세실은 숨을 쉬고 있었다.

“세실! 세실!”

세실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고, 몹시 지쳐 보였다. 나는 망토를 벗어 세실의 몸을 감쌌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세실은 루나와 내가 잠든 사이에 홀로 수많은 괴물과 싸웠다.

미니맵을 확인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니맵 가장자리에서 수많은 적대적 표식이 꿈틀대고 있었다. 설마 세실은 저 표식들을 지나쳐 이곳으로 온 건가? 그럴 것이다. 세실의 손에는 검은 파편의 유리병이 쥐여 있었다. 나 대신 배를 움직이다가 변을 당한 것이겠지.

그제야 나는 저 멀리 안개 너머로 드러난 육지를 발견했다. 미니맵 속 수많은 적대적 표식은 모두 저 육지 주변에 몰려 있었다. 나는 미니맵의 범위를 최대한 넓혔다. 울퉁불퉁하지만 원 모양에 가까운 거대한 섬이 눈에 들어왔다.

그 섬을 보자 꿈속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어떤 근거도 없었건만 꿈에서 본 장면들이 저 섬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왜 이 지역의 땅이 잘게 부서졌으며, 이곳에서 본 문명의 흔적이 무엇인지.

이곳은 아스트레아 대륙의 모든 이에게서 잊힌 장소.

고대의 마법 왕국이었다.

***

“깼어? 세실.”

세실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데미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편히 쉬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데미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깼니? 불편한 곳은 없어?”

루나의 목소리도 들렸다.

세실은 자신이 데미안의 등에 업힌 채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 아으.”

“괜찮아 세실. 가만히 있어.”

데미안이 톡톡, 세실의 허리를 두드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세실은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데미안 너! 방금 세실 엉덩이 만졌지!”

“무슨!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니! 내가 방금 봤는데! 너, 그래서 세실을 업고 가겠다고 했구나! 이번이 처음이 아닐 거야! 변태!”

“아니라니까!”

“역시 그랬어. 세실의 가슴 붕대를 풀어버린 것도 그 때문이지? 막 등으로 느끼려고!”

세실의 얼굴이 한순간에 뜨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늘 가슴에 감아 두었던 압박 붕대의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처가 곪을까 봐 그런 거잖아! 루나, 너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했으면서!”

“흥!”

세실은 몹시 당황했지만, 그 와중에 당돌한 생각을 했다. 자신은 지금 환자였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바다의 괴물들과 싸웠다. 아마 데미안이 주운 낡은 반지의 힘이 아니었다면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이지 않을까. 지난번에 함께 목욕할 때 루나는 세실의 몸매를 매우 부러워했었다. 또, 세실이 마음만 먹으면 갖지 못할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래서 세실은 엷은 신음을 흘리며 혼절한 척, 데미안의 등에 몸을 밀착했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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