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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7

107화 혼란

107화 혼란

긴 항해 끝에 육지에 닿은 나는 세실을 치유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다. 루나의 도움으로 세실을 깨끗이 씻기고, 세계수의 혼돈과 샘터의 혼돈을 세실의 몸 안에 불어넣었다.

한두 번의 치유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세실은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몸을 혹사한 상태였으니까.

‘세실이 안 깨어나······. 어떡하지 데미안······?’

루나는 지극정성으로 세실을 보살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대책 없이 잠든 사이 세실이 어떤 고난을 헤쳐왔는지 알았기에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루나는 만약 세실이 죽으면 자기도 콱 죽어 버릴 거라며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나와 루나는 왜 그렇게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을까. 이동 거리를 봤을 때, 우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내가 꿨던 신비로운 꿈과 연관이 있겠지. 잠결에 루나를 끌어안은 탓에 루나도 영향을 받은 것 같고.

‘데미안! 세실의 안색이 좋아졌어!’

우리의 정성이 통했는지 세실의 몸 상태는 차츰 나아졌다. 그때부터 나는 세실을 등에 업고 걸었다. 이전까지는 들것을 만들어 루나와 함께 세실을 옮겼었다.

어느새 우리는 조각 난 섬들의 바다를 벗어나 거대한 육지에 닿아 있었다. 이 지역이 고대 시대의 마법 왕국이 있던 자리라는 것을 깨달은 후, 나의 목적지는 서쪽으로 정해졌다. 소설에서 고대 왕국이 어디에 있었다는 언급은 없지만, 나는 아스트레아 대륙 지도와 이 부서진 땅의 지형을 보고 이곳이 대륙의 어디쯤인지 가늠했다.

휘이이이잉.

바람 부는 서쪽의 장대한 산맥을 바라봤다. 이대로 서쪽으로 계속 움직이면 아마도 슈타인탈 왕국에 닿을 것이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겠지. 비츠크 산맥 최북단을 가로질러야 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먼 길로 우회하기로 했다. 지금의 우리는 결코 비츠크 산맥을 넘을 수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 부서진 땅의 존재가 대륙의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하센베르크 가문은 도달했어.’

어쩌면 두 발로 산맥을 넘은 결과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이 땅에 닿은 것인지도 모른다.

.

.

.

“아아······.”

깨어난 듯했던 세실이 묘한 신음을 흘리며 다시 정신을 잃었다. 나는 검지를 루나의 입술에 갖다 붙이며 쉿! 하고 속삭였다. 루나도 동그랗게 커진 눈을 깜빡이며 제 입술에 자물쇠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기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세실을 등에 업은 후 나는 조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등 뒤로 세실의 감촉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의 세실은 자세가 바뀐 탓인지 더욱 내 등에 밀착한 상태였다.

“으응······.”

게다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종종 내 목을 끌어안기도 했다. 그때마다 세실의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한 숨결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데미안.”

“응?”

“왜 그렇게 콧구멍을 벌름거리니?”

“내가 언제.”

루나가 의심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럴수록 나는 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우물쭈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루나의 신뢰를 잃은 전적이 있다.

고개를 갸웃하던 루나가 아! 하며 손뼉을 쳤다.

“미안 미안. 세실을 업고 걸어서 숨이 찬 거였구나.”

그럴 것이다. 나는 세실을 업은 채 벌써 수 시간 동안 산맥을 오르고 있었다. 아마 50레벨의 벽을 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그렇다.

나는 50레벨에 도달해 ‘소드 엑스퍼트’가 됐다.

“카인도 소드 엑스퍼트가 되었을까? 어쩌면 우리를 보고 막 배 아파할지도 몰라. 그치? 헤헤헤.”

루나는 52레벨이 됐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이는 세실이었다. 세실은 우리가 기절한 사이 2레벨이 상승해 59레벨이 됐다. 바다 위에서 세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새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루나! 그쪽의 괴물을 맡아!”

“응!”

우리는 어떤 적을 만나도 자신감이 있었다. 오러의 발현 가능 유무는 그 정도로 큰 차이를 낸다.

게다가 평범한 소드 엑스퍼트가 아닌, 장래 은월의 소드마스터로 성장해 이 세계를 호령할 루나다. 거기에 더해 나는 소서러이기도 했다.

“우리 먼지. 이제 좀 괜찮니?”

전투가 끝난 후, 루나가 먼지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바다에서 멀어질수록 먼지의 상태는 호전됐다. 아무래도 부서진 땅에서 발하는 어떤 기운이 먼지를 괴롭혔던 것 같다.

헥헥, 먼지가 루나의 볼을 핥았다. 루나가 까르르 웃으며 간지러워했다.

“점점 추워진다. 그치.”

루나의 말대로, 가을이 가까워지며 밤공기가 부쩍 서늘해졌다. 산맥이라 장작을 구하기 수월해 다행이었다.

“데미안. 세실은 언제쯤 다 나을까?”

“걱정 마. 곧 괜찮아질 테니까.”

“그렇겠지? 분명 그렇겠지?”

“응. 확실해.”

“헤헤헤.”

세실은 식사할 때를 제외하면 잠만 잤다. 나는 수시로 세계수의 혼돈을 발현해 세실의 몸 상태를 살폈다. 자연스레 나는 세실의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세실의 육체는 생각보다 연약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훈련에 매진했기 때문일까, 오랜 기간 몸 안에 누적된 데미지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지난 전투를 통해 임계점을 넘은 듯했다.

세실이 레벨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림자의 힘, 즉 영력(影力) 때문이다. 블레오파드는 영력을 육체에 덧씌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발현하는 기술이 바로 ‘그림자 결속’이고.

그러나 세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영력 사용을 자제해왔다. 그러면서 많은 위험을 헤쳐 나가야 했기에 육체 능력을 과하게 소모했고, 자연스레 몸에 부하가 쌓였다.

‘이렇게 약한 몸을 가지고서.’

모닥불 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세실을 내려다봤다. 세실은 요즘 내 곁을 한시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 나를 더욱 의지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아플 때는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니까. 내가 더 잘해줘야겠다.

“이제 진짜로 곧이겠지? 은월섬으로 돌아가는 것 말이야.”

루나가 가지런히 모은 두 무릎을 팔로 끌어안으며 웃었다.

시간이 빠르다.

은월섬을 떠난 후 우리는 벌써 네 번째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곧, 이 세계에서 성년으로 인정받는 16세가 된다.

“고마워 데미안. 그리고 세실도.”

천사처럼 미소 짓는 루나.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아이다.

저 미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왜 그런 눈으로 보니? 괜히 부끄럽게.”

그렇게 말하는 루나의 볼은 정말로 붉었다. 모닥불의 열기 때문일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인지, 루나가 맞닿은 무릎을 옴지락댔다.

“······저기 데미안.”

“응.”

“물어볼 게 있어.”

“뭔데?”

“혹시 말이야. 데미안은 세실을 좋아하는 거야?”

“히끅!”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범인은 내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던 세실이었다.

나와 루나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세실을 바라봤다. 세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자는 척하는 건가?

***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산맥의 정상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어떤 마법진 같은 것에 붙잡혀 제자리걸음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루나는 앞서 걷는 데미안을 바라봤다. 아니, 세실의 뒷모습을.

세실의 굴곡진 몸이 부러웠다. 반칙 같았다. 저런 인형 같은 얼굴에, 저렇게 예쁜 몸을 가졌다니.

루나는 얼마 전부터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선한 인물이야.’

언젠가 데미안이 했던 말.

‘네가 그 선한 마음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너의 그런 면이 좋은 거니까.’

그때를 떠올리자 루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주범.

못된 데미안.

오빠인 척하더니.

이게 다 데미안 때문이야.

“아악!”

데미안이 비명을 질렀다. 홧김에 데미안의 팔에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뭐, 뭐야 갑자기!”

“벌레가 있었어. 내가 잡아준 거야.”

“······거짓말이지?”

“아니거든. 메롱.”

루나는 카인이 좋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첫눈에 반했다. 카인은 또래 친구들에 비해 어른스러웠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고귀한 기품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루나가 카인에게 가장 매력을 느낀 부분은 다듬어지지 않은 어떤 야생의 카리스마였다.

카인을 보고만 있어도 루나는 가슴이 뛰었다. 루나는 자기 세계가 뚜렷한 아이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타인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것을 넘어, 그의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열망마저 일었다.

‘궁금해 카인. 너의 세계가.’

루나는 카인 같은 아이를 처음 보았다. 아니, 어른 중에서도 그런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전력을 다해 싸우는 아빠는 조금 멋있긴 했지만. 뭐, 아빠니까.

그동안 루나는 데미안에게서 남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귀여운 남동생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변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그 말을 한 이후로.

아니, 실은 그 이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 아마도 혹한의 땅을 향해 여행할 때부터.

‘데미안. 너 정말 따뜻하다.’

데미안을 마주 안았을 때, 루나는 묘하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무시했다. 추위 때문이라고 치부했다.

또한 그때의 루나는 데미안이 은월섬에서 했던 말이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다. 아빠와 친구들이 은월섬을 떠난다는 말에 홀로 엄마의 방에서 울고 있었을 때.

‘조금만 기다려 줘요 리아논. 내가 꼭 낫게 해줄게요. 디네베도.’

그때, 엄마의 방을 찾아온 데미안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었다. 은월병의 치유제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있다고. 하지만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고. 그리고, 아빠가 위험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 말대로 아빠는 흑기사를 만나 다쳤다. 설마 데미안은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동안 한 번도 표현한 적은 없지만 친자식처럼 대해주신 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진심이에요. 나는 태어나 한 번도 리아논이 내게 주었던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이후 데미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데미안이 작게 속삭였을 때, 루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데미안은 이렇게 말했다. 다녀올게요. 엄마.

데미안이 방을 나선 뒤 루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루나는 결정했다. 데미안과 함께 갈 것이다. 우리는 같은 엄마를 가진 가족이니까. 형제니까. 그러니까 힘을 합쳐 엄마와 디네베를 구할 거야.

‘앞으로 나를 누나라고 불러도 좋아.’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왜 네가 누나야? 생일도 같은데.’

‘그, 그렇다고 내가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부르지 마. 나도 누나라고 안 부를 거니까.’

‘그, 그러면 우리는 남매가 아닌 거잖아!’

‘남매?’

지금도 그때와 같은 마음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어떡하고 싶은 걸까. 정말로 데미안과 남매가 되고 싶은 걸까?

루나는 여전히 카인이 좋았다. 점점 더 좋아졌다. 카인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너무 보고 싶고, 안달이 났다. 하지만 데미안은······. 혼란스러웠다. 데미안은 내게 어떤 존재인 거지?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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