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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8

108화 재회

108화 재회

‘데미안.’

‘응?’

‘너는 늘 확신에 차 있는 것 같아.’

‘내가?’

‘응. 그래서 조금 멋있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리고, 함께 있으면 안심이 돼.’

왜 가슴이 두근거렸을까.

‘너와 카인은 참 비슷한 것 같아.’

‘내가 카인과 비슷하다고?’

‘응. 꼭 형제 같아.’

나도 모르게 카인과 데미안을 저울질했던 걸까.

모르겠어.

루나는 다시금 세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잠든 와중에도 데미안을 꼭 끌어안고 있다.

그동안 루나는 세실이 데미안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뤄질 수 없는 마음이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 루나는 세실이 남자아이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실은 여자아이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루나가 보기에 세실은 흠 잡을 곳 없이 매력적인 아이였다. 게다가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데미안은 묘하게 세실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느꼈을 때 루나는 이상한 감정을 경험했다. 머지않아 루나는 그 감정 속에 질투가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설마 데미안 때문에?

‘데미안 너! 방금 세실 엉덩이 만졌지!’

‘무슨!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니! 내가 방금 봤는데! 너, 그래서 세실을 업고 가겠다고 했구나! 이번이 처음이 아닐 거야! 변태!’

공연히 데미안에게 화를 내며 루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거지?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가슴속에 굳게 새겨지는 생각이 있었다. 루나는 친구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카인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도 않았다. 또한, 세실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말이야. 데미안은 세실을 좋아하는 거야?’

데미안이 세실을 좋아하고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루나는 데미안과 세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친구들과 지금처럼 지낼 수 있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

하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다시 물어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번에도 내심 많은 노력을 해야 했으니까.

루나는 세실을 등에 업은 데미안의 두 팔과, 어깨를 봤다.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데미안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 같았다.

‘못 믿겠으면 큰 공주, 아빠랑 내기할까?’

언젠가 아빠는 말했었다. 자기는 미래를 보고 왔다고. 머지않아 데미안은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처럼 변할 거라고. 얼굴도 몸도, 사내 중의 사내처럼.

루나는 걸음을 빨리해 슬쩍 데미안의 얼굴을 봤다. 더욱 뚜렷해진 옆선. 언제부터 이렇게나 올려다보게 된 걸까. 왜 자꾸 데미안에게서 카인의 모습이 보이는 거지?

그 순간 루나는 정말로 데미안의 얼굴이 카인으로 변하는 것을 봤다. 그와 함께 정신이 몽롱해졌다. 카인이 눈을 마주하며 속삭였다.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걸맞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

루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카인의 미소가 낯설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루나는 두 귀를 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환각이야.

이 낯선 땅에 들어서고 많은 것이 이상해졌어.

‘그건 잘못된 게 아냐.’

귀를 막아도 카인의 속삭임은 뇌리를 파고 스며들었다.

루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나는 아직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걸까.

여전히 바다 위의 뗏목에 쓰러져 잠들어있는 걸까.

카인이 부드럽게 손을 내민다.

그 손에서 눈부신 빛이 일렁인다.

그리고 점점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루나.”

데미안의 목소리가 루나의 정신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루나는 헉! 하는 신음을 뱉으며 몸을 움츠렸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추위. 뭐지? 계절이 한순간에 겨울로 변한 것처럼.

루나는 바들바들 몸을 떨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머릿속이 부옇다. 정신의 일부가 환각에 갇힌 기분이었다. 카인의 낯선 미소와 속삭임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그런데 카인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었지?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추위가 가차 없이 전신을 습격했다. 그때, 루나의 등에 포근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데미안이 담요를 덮어주고 있었다.

“······고마워.”

루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데미안을 봤다. 그러나 세실의 몸을 담요로 덮어주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왜일까. 지금은 데미안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어려웠다.

등 뒤의 담요를 목으로 끌어당기며 루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희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낙엽이 지는 산맥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하얀 눈의 세상으로 변했다.

“반지가 사라졌어.”

데미안이 설명했다. 언젠가부터 몇 번을 말을 걸어도 루나가 반응하지 않았다고. 그러다가 돌연 주머니 속의 반지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고, 루나를 둘러싼 공간이 물결처럼 이지러지기 시작했다고. 마치 모르가나의 마법진에 당했을 때처럼.

그래서 본능적으로 루나의 팔을 붙잡은 데미안은 자신의 손가락 위에서 빛나는 반지를 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주머니에 넣어두기만 했을 뿐, 끼운 적이 없었으니까.

이후의 상황은 모르가나의 마법진에 당했을 때와 유사했다. 어느새 비츠크 산맥은 지워지고, 일행은 눈의 세상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반지가 사라졌다.

“엣취!”

세실이 재채기했다. 너무 추워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코를 훌쩍인 세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걸을 수. 있어.”

세실이 데미안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내 추위를 못 견디겠는지 데미안의 망토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헉! 소리를 내며 빠져나왔다.

“미. 미안해. 데미안.”

그러나 데미안은 세실을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데미안은 종종 저런다. 지금처럼 낯선 곳에 왔을 때나,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일 때.

저럴 때의 데미안은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루나는 다시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들이 별똥별처럼 빛난다. 태양빛을 받은 눈밭이 은은한 광채를 드러내고, 길게 뻗은 산맥은 무한히 펼쳐진 흰 담요 같았다. 루나의 숨결이 하얀 김으로 변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데미안이 히죽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워 세실의 등을 덮어줬다.

“가자. 날 따라와.”

“으. 응.”

세실이 살짝 미소 지으며 데미안을 따랐다.

루나도 데미안의 뒤를 쫓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의 눈이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힌다. 차가운 공기가 두 뺨을 아프게 해 루나는 거의 눈만 내놓은 채 담요를 뒤집어썼다. 그러면서 슬쩍 눈동자를 굴려 데미안을 봤다.

춥지도 않은 걸까, 데미안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가 내뱉는 숨이 공기 중에 흩어지며 작은 구름을 만든다. 어딘가에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데미안의 코끝이 붉게 물든 것이 보여 루나는 살짝 웃었다. 그래. 너라고 춥지 않을 리 없지.

“데미안.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응. 알아.”

“어딘데?”

데미안이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내가 생각한 방식은 아니지만, 드디어 원하던 곳에 도착했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냐고.”

데미안이 검지를 들어 루나의 담요를 콕 찔렀다.

담요 안에 숨겨진 루나의 오른쪽 볼이 움푹 들어갔다.

“왜, 왜 이러니?”

“잊은 거야? 루나. 너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잖아.”

루나는 아까부터 알쏭달쏭한 말만 하는 데미안이 조금 짜증 났다. 그래서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돌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 하늘의 감정 같은 폭풍이 눈송이들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루나는 보았다. 눈보라가 사라진 푸른 하늘 위로 등장한 아름다운 유선형의 몸. 새하얀 깃털. 위아래로 펄럭이는 장대한 날개.

“마중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루나를 돌아보며 데미안이 웃었다.

“꽤 가까운 곳에 있었나 봐. 라바다는.”

***

라바다는 우리들을 순식간에 혹한의 땅 경계로 데려다주었다. 라바다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모든 궁금증을 해소하기는 무리였다. 여전히 라바다는 모호한 대답을 즐겼고, 또 우리는 정말 서둘러야 했으니까.

라바다와 하늘을 날며, 이번에도 루나는 요정처럼 속삭이고 악기처럼 웃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나를 끌어안지는 않았다. 나는 왠지 서운함을 느꼈지만, 그 대신 비행 내내 세실이 매미처럼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많이 곤란했다. 세실은 아직 압박붕대를 두르지 않았으니까.

그런 나를 보며 라바다가 엷게 몸을 들썩였다. 이제 나는 안다. 라바다는 웃고 있다.

“가자! 루나! 세실!”

슈타인탈 왕국으로 진입한 우리는 말을 구해 쉴 새 없이 달렸다. 사람들을 통해 듣기로, 오를리안 왕국과 티롤 왕국의 전쟁은 끝났다고 한다. 티롤 왕국이 막대한 배상금을 내며 항복했다는 말에 우리는 조금 안심했다. 동료들이 무사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 거니까.

라바다가 우리의 몸을 치유해 준 덕에 피로감은 없었다. 세실도 가슴에 붕대를 감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계절은 다시 가을로 바뀌었다. 추위에서 벗어난 루나와 세실이 환히 웃었다. 나도 웃었다. 먼지도 연신 혀를 내밀며 좋아했다.

“저기 봐 데미안! 항구 도시 브리즈야!”

루나의 말대로, 저 멀리 항구 도시 브리즈의 성벽이 보였다.

지난 시간이 영화처럼 머리를 스쳤다. 거의 일 년 전에, 우리는 저곳을 떠났었다. 이후 혹한의 땅에서 라바다를 만났다.

– 오랜만이군 브류나크. 나의 형제여.

나는 정신의 침식을 겪던 라바다를 해방시켰다. 그 과정에서 세계수의 혼돈을 제어하고, ‘별의 샘물’과 샘터의 혼돈을 손에 넣었다. 또한 시스템 창에 보이지 않는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이후 쿠훌린은 크게 다쳤다. 흑기사 때문이었다. 흑기사로부터 쿠훌린을 구하기 위해 나는 아스트레아의 천칭을 한계까지 오른쪽으로 기울였고, 이후 리메이크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른 먹어. 오늘 바로 출발할 거야.’

나는 루나와 함께 그림자 늑대를 상대해 ‘검은 백합’을 획득했다. 쿠훌린을 구할 ‘황금 백합’까지 얻게 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이후 카인, 세실, 족제비와 합류해 바다를 건너 엘프를 만났다. 드워프를 만났다. 그리고 살림바르의 사하룬 사막에서 치유제의 마지막 재료인 ‘태양의 풀’을 손에 넣었다.

그 뒤로 하나하나 나열하기도 힘든 여러 고난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와 루나와 세실은 극복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흰 새 여관의 출입문을 열고 있다.

“브란델!”

가장 먼저 여관으로 뛰어든 것은 역시 루나였다. 그 뒤로 나와 세실이 차례로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깜짝 놀랐다. 여관의 1층 식당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제일 가까이에서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루나를 돌아본 이는 브란델이었다. 그의 뒤로 라이칸을 위시한 은월의 단원들이 보였다. 그리고 카인도.

벌떡 몸을 일으킨 카인이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무사했구나! 데미안!”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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