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1

#7 가랑비

청사과청이 탈퇴를 하고 난 다음 날, 경수의 커플 창은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청사과청이라는 유저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말이다. 고작 사흘 만에 정말 놈을 탈퇴까지 시킨 노을의 집념에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또, 유사 언론에서 이 사건을 가져다 ‘게임에서 만나 아이템과 순정까지 다 바친 여성, 알고 보니 남자?’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쓰는 바람에, SNS에 노을이 쓴 글과 청사과청의 최후가 널리 퍼졌다. 그 때문에 청사과청이 했던 게임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오는 중이었다. 이는 나비효과처럼 번져 제 발을 저린 넷카마들이 남자임을 자백하고 게임을 접는 일도 생겨났다. 썬셋은 암암리에 병역 기피자 사냥꾼, 줄여서 개새끼라고 불리기도 했다. 왜 단어를 그렇게 줄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썬셋과는 그다음 날 바로 커플이 되었다. 경수의 예상대로 길드원들은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선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수가 교제 신청을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지구별이 서버 마이크로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을 알렸고, 두 길드의 길드원들은 서버 마이크를 흥청망청 사용했다. 커플 탄생을 축하하는 문구들이 쏟아졌고, 노을은 축하의 의미로 이시스에서 ‘돈 뿌리기’ 스킬로 1억 가까이 되는 돈을 흥청망청 적선하고 다녔다.

그 뒤로도 가끔, 우편으로 의문의 위로금이 도착하기도 했다. 답장으로 돈을 돌려주려고 보면 ‘이미 삭제된 캐릭터입니다.’라는 문구만 화면에 떠올랐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사흘쯤 지나니 떠들썩했던 게임도 원래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경수는 가끔 노을과 만나 영화를 보거나 그의 집에 가서 함께 게임을 하고, 가끔은 가볍게 입을 맞추기도 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일상 속에 천노을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고, 포세이돈과 선율이 동맹 길드라는 말이 퍼져있었다.

「노을: 형 언제 와요?ㅠㅠ」

「나: 심부름 나왔어 늦어도 3시엔 들어감ㅇㅇ」

「노을: 게임 말고… 서울은 언제 올라와요?」

방학이 되어 부모님을 뵈러 지방에 내려온 경수는, 아버지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얼떨결에 한 달 가까이 자취방을 비워 두는 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노을을 볼 일도 줄어들었고, 게임에서나 그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엔 보고 싶다는 말만 하더니, 일주일이 지나던 시점부터 언제 올라오냐고 노래를 불러댔다.

「나: 몰라. 방학 끝나고?」

솔직히 말해 자취방에 혼자 있는 것보다 배는 편했다. 끼니마다 챙겨 주는 사람도 있고, 오랜만에 듣는 잔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노을: 아…ㅠㅠ」

「노을: 형 보고 싶어요ㅜ」

그렇겠지.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다 한 달 가까이 떨어져 지냈으니 말이다. 경수 자신조차도 조금 허전한데,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노을은 더할 것이었다. 당장 내려온다고 난리를 치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노을: 형이 갑자기 미쳐서 이번 주에 올라올 일은 없겠죠?ㅠ」

「나: 아마도?」

갑자기 미칠 일이 없으니 당연했다. 말풍선 옆의 1이 사라졌지만, 더 이상 답이 없었다. 한 달이나 지났는데 노을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지기는커녕 시무룩해지는 얼굴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

가서 방 청소도 좀 하고, 개학 준비도 해야 하는데…. 부모님은 섭섭해하실 테지만 슬슬 버스표를 알아볼까. 다음 주 정도로…. 경수는 멍한 눈을 깜빡이며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른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매섭게 때리는 칼바람에 후드의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쓴 경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했다.

*

웬일인지 오늘은 천노을이 게임에 접속해있지 않았다. 캐릭터 ‘국방부’를 힐러로 전직시킨 뒤 만렙을 찍어보겠다고 고군분투 중이라, 오늘도 민재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썬셋, 천노을, 그리고 국방부까지 모두 오프라인 상태인 게 왜 이렇게 낯선지 모르겠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 건가. 그렇게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놈은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경수는 친구 창에서 ‘스페이드퀸’의 이름을 클릭해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웬일로 천노을이 없어?ㅋㅋ

[귓속말] 스페이드퀸: 아 걔ㅋㅋㅋ 아까 전에 끌려 갔어영ㅋㅋㅋㅋ

끌려가다니? 그 말에 문득 떠오른 것은 경찰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천노을이라도 그렇게 스케일이 큰 사고를 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누구한테??

[귓속말] 스페이드퀸: 어머니한테여

그냥 뵈러 간 게 아니라 끌려갔다는 표현을 쓸 정도면, 집을 싫어한다는 의미인가. 그러고 보니 노을에게서 가정사를 들은 기억이 전무했다.

[귓속말] 스페이드퀸: 모레가 걔 생일이거든요? 맨날 연락 씹고 집에도 안 가고 하더니 직접 데리러 온 듯ㅋㅋ 내일은 아마 아버지한테 끌려가지 않을까여ㅎ

[귓속말] 냥이냥나냥: 내일모레?

경수는 곧바로 휴대폰 화면의 달력을 확인했다. 내일모레면… 주말인데. 아까 전 노을이 보내왔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형이 갑자기 미쳐서 이번 주에 올라올 일은 없겠죠?’

“…….”

그게 제 생일 때문에 물어본 거였나? 대놓고 생일이니 그날 보고 싶다고 얘기를 하지는 못할망정, 지나가듯 넌지시 말하니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놈이 무슨 심정으로 메시지를 보냈는지 생각하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거기다 대고 ‘아마도’ 따위의 애매한 답을 줬으니 더 속이 탔을 것이다.

[귓속말] 스페이드퀸: ?? 형 몰랐어요? 천놀이 얘기 안 함?

[귓속말] 스페이드퀸: 그럴 리가 없는데ㅔㅔ???

[귓속말] 냥이냥나냥: 아냐 즐겜ㅋ

[귓속말] 스페이드퀸: ?

옆자리 남자에게서 나는 매캐한 담배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온통 멍했다.

천노을, 너 모레 생일이라며? 채팅창에다 메시지를 입력해 놓고 보내는 것을 망설였다. 왜 말하지 않았지? 일 년에 고작 한 번뿐인 생일인데. 사소한 불평불만은 그렇게 잘 얘기하고 작은 일 하나하나에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던 놈인데, 왜 생일이니 만나달란 말은 하지 않았을까.

“아, 미치겠네.”

자꾸 신경이 쓰여 도무지 집중이 되지가 않았다. 경수는 결국 입력해 뒀던 메시지를 모두 지워버리고 홧김에 모레 오전 시간으로 고속버스 티켓을 예매했다.

*

혹시나 했는데, 어제도 노을은 게임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재는 ‘어제는 어머니였으니 오늘은 아버지’라며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부모님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왠지 가정사에 민감할 것 같아 친구를 통해 전해 듣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뜬 마음으로 밤을 보내고 해가 뜨자마자, 경수는 집을 빠져나와 버스에 탑승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열 시가 되어있었다. 그는 근처 빵집에서 케이크를 하나 사 들고 노을의 집으로 향했다. 말도 하지 않고 왔다고 반기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경수는 문 옆에 붙어있는 초인종을 꾹 눌렀다.

“…뭐야, 집에 없나?”

그렇게 서너 번을 더 눌러보았으나 여전히 답이 없었다. 이 시간까지 자는 것은 아닐 테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러보았다. 258789. 다행히 비밀번호는 바뀌지 않았는지,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천노을!”

놈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잠잠했다. 아무래도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을 제외하고는 온통 말끔해 여전히 생활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밥을 챙겨 먹기는 한 건가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경수는 식탁 위에다 케이크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노을의 방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다 메모를 남기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생일 축하해. 나중에 전화해.

‘생일 축하해, 나.’

A4용지에 큼지막하고 또박또박한 글씨로 메모를 남기고 있을 때, 문밖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천노을인가? 경수는 순간 귀를 쫑긋 세우고 문을 바라보았다.

“천노을 이 새끼 비번 바꾼 거 아냐?”

“걔 생각이 뻔하지. 바꿔봤자 아니겠음? 형이 다섯 번 만에 다 뚫어준다.”

문밖에 있는 건 한 명이 아니었다. 심지어 저 무리 안에는 노을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삑삑삑삑삑삑.

아마 노을의 친구들인 것 같았다. 도어록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에, 경수는 펜을 든 채로 허둥지둥 노을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숨을 만한 곳이 마땅히 없었다. 아, 씨. 어쩌지. 그러던 경수의 눈에 노을의 옷장이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옷장 문을 열어 그 안으로 몸을 숨긴 채 옷장 문을 닫았다. 생각해보니 숨을 이유도 없었지만 이미 늦었다. 간발의 차이로 집 비밀번호를 뚫은 놈들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집에 들어왔다.

“봤냐?”

“미친놈….”

“천노을네 집 털리면 정민재가 범인이다. 내가 가서 증언할 거임.”

“뭐래. 털 것도 없어, 씨발아.”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어? 싱크대에 물기 남아 있는데? 얘 집에 왔다가 잠깐 어디 갔나?”

“여긴 케이크 있는데. 그러고 보니 여기 뭐라고 쓰여 있….”

“…….”

“…….”

한참의 침묵 끝에, 누군가 코를 쿨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불쌍해…. 혼자 살더니.”

“우리 안 왔으면 어쩔 뻔했냐….”

도대체 왜 불쌍한 거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이던 경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생일 축하해, 나.’

“…….”

메모를 쓰다 말고 숨어버려, 놈의 친구들이 아마 그것을 천노을이 남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 나가서 ‘아니야 그건 오해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확 밝아지며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발신자는 천노을이었다. 아까는 폰도 꺼져 있더니 타이밍 한 번 진짜 잘 맞추네…! 경수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무슨 소리 안 들렸냐?”

“…방에 숨어서 게임 중인 거 아냐?”

“설마. 천노을!”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경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제발 저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방을 나가기를 바랐다.

“없는데?”

“침대 밑에 봐봐.”

“없어.”

“그럼 옷장 안?”

“애새끼냐? 누가 옷장 같은 데 숨어?”

씨발, 나.

경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숨지 말 걸! 옷장을 열어봤더니 사람이 숨죽인 채 숨어있었습니다. 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지금이라도 나가서 ‘아 깜빡 잠들었네.’하고 태연하게 인사하는 게 더 나으려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노을의 목소리였다. 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덕에 다행히 친구들이 옷장에서부터 멀어졌다. 경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옷장 문의 작은 틈새로 상황을 보려 애썼으나 잘 보이지 않아 곧 관두고 말았다. 친구들이 노을에게 다가가 우는소리를 내며 ‘아이고 노을아.’ 등의 통곡을 시작했다. 당연히 이들이 왜 이 꼴이 났는지 전혀 모르는 노을은 당황했다.

“왜 이래, 씨발. 단체로 미쳤냐?”

노을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뭐가 어찌 됐든 빨리 천노을이 저들을 모두 데리고 집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슬슬 다리가 저려왔다.

“네 생일이잖아. 우리가 케이크 사 왔어….”

“알았으니까 다리 좀 놔. 옷만 갈아입고 나가봐야 해.”

친구들은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더니 비통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혼자 선물 사러?”

“씹, 진짜… 이 새끼 너무 불쌍해서…….”

“단체로 뭐 잘못 먹었나….”

“어디 가는데! 옷 안 갈아입어도 괜찮아! 이대로 나가자!”

“……?”

그래, 그대로 나가면 돼. 빨리 가! 경수는 저린 다리를 끌어안은 채 노을이 친구들과 함께 놀러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어?”

한 편, 노을은 신발장에서 익숙한 신발을 발견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는 다리를 붙잡은 친구를 발로 손쉽게 떨어뜨려 놓고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이 어디에 있는지 대충 살펴본 그는 고개를 돌려 민재에게 물었다.

“정민재, 너 들어올 때 누구 본 적 없어?”

“누굴 봐?”

민재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그는 집을 나오며 만났던 사람을 모두 나열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정민재는 자신의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노을은 생각했다.

홀린 듯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긴 노을은 식탁 위의 케이크 두 개를 발견했다. 느끼한 걸 선호하지 않는 탓에, 제 친구들이라면 웬만해서는 사 오지 않을 생크림 케이크가 생뚱맞게 놓여있었다. 확신이 들었다. 친구들은 일체 입을 꾹 다물고 저들끼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너희 나가.”

설렘에 목소리 끝이 떨렸다. 노을은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거로 안 놀려, 새끼야!”

“어흑….”

친구들이 뭐라 하든 무시한 채, 노을이 식탁 밑을 슬쩍 내려다보았으나 그가 찾는 이는 그곳에 없었다.

“참, 비번 누가 뚫었어?”

“민재가.”

“씨발, 나 아니야!”

“또 바꿔야겠네… 이제 가라.”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든 지금 노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히 집 안 어딘가에 형이 몸을 감추고 있을 건데, 저런 불청객들에게 그를 보일 마음은 죽어도 없었다. 노을은 억지로 친구들을 집 밖으로 밀어내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

“…….”

“…….”

문이 닫히기 전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노을은, 귀 끝이 새빨개진 채 어딘가 곤란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그 꼴을 들켰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내가 천노을이었으면 죽고 싶었을 걸? 하긴…. 자그맣게 속삭이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노을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이제 나와도 돼요!”

문밖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노을은 집 안 전체에 들리도록 소리쳤다.

“…….”

하지만 이제 와서 옷장 밖으로 주섬주섬 나갈 수가 없었다. 낯선 이가 왔다고 해서 옷장에 냉큼 숨어버리는 형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멋이 없었다. 놈도 분명 비웃을 것이다. 언제 나가지. 경수는 숨죽인 채 허탈하게 웃었다.

“형?”

“…….”

“아, 그렇구나. 알았어요. 제가 찾을게요.”

노을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곧바로 자신을 찾아낼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한참 애먼 곳을 뒤적거렸다.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엣취!”

순간적으로 코가 간지러워 한 재채기에 노을의 움직임도 멈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형?”

…들켰네. 망했군. 경수는 속으로 읊조렸다. 놈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옷장 문이 활짝 열렸다. 갑자기 눈에 쏟아지는 빛에 경수는 눈을 찌푸린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곧 환한 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노을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조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찾았다.”

“…….”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쟨 내가 온 게 그리 달갑지 않은 건가?

“뭐 하려는…… 야, 나가!”

“앗….”

경수는 좁은 옷장에 제 몸까지 디밀어 앉으려는 노을을 밀치고 넘어지듯 옷장에서 굴러 나왔다. 쪼그려 앉은 채로 끌어안았던 다리가 쭉 펴지자 이제야 피가 좀 통하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경수는 다리를 편 채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저 보러 온 거예요?”

제발 그렇다고 말해 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에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경수는 시선을 슬쩍 돌리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면 네 집에 내가 왜 있겠냐? 생일이면 생일이라고 진작 말을 했으면 좋았잖아.”

“헤헤.”

노을은 멋쩍게 웃었다.

“생일 축하해. 선물은….”

……없는데. 급하게 올라오느라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경수는 말을 채 다 잇지도 못한 채 어물거렸다. 노을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접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형이 선물이에요.”

내가 선물이라고?

“……?”

이 새끼가. 엉겁결에 자신을 선물로 바칠 뻔한 경수는 표정을 굳히며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그 말을 부정했다. 노을은 아무렴 좋다는 듯 그저 웃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 얼굴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노을은 생일을 핑계로 집에 돌아가려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현관문을 쳐다보기만 해도 생일을 핑계 삼아 발목을 붙드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이 집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어디 갔다 왔어?”

“어제 아빠 집에 끌려갔다가 차가 끊겨서 자고 왔어요….”

“…….”

그저께는 어머니, 어제는 아버지. 두 분이 따로 사시나? 경수는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노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노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모양 좋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경수가 입에 던지듯 넣어준 과일을 씹어 먹었다.

“형이 올 줄 알았으면 걸어서라도 일찍 오는 건데…. 그 집 형 보고 데려다 달라니까 못 들은 척하는 거 있죠.”

“너 형이 있어?”

의외였다. 외동인 줄로만 알았는데.

“몰랐어요? 몇 년 전에 생겼는데.”

왜 몰랐냐는 듯 얘기하니 할 말이 없었다.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의 가정사를 꿰뚫어 볼 능력이, 안타깝게도 경수에게는 없었다.

“몰랐어. 당연하지. 넌 가족 얘기 안 하니까….”

“형이랑 있는데 다른 사람 얘기를 왜 해요?”

“……보통은 해.”

너는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은 내뱉지 않고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보통…. 노을은 그 단어를 몇 번이고 입안에서 굴려보다가 말했다.

“그럼 저희도 해요. 그 보통 사람들이 한다는 대화.”

“그렇게 말하면 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잖아.”

“자, 시작!”

“뭐 하자는 거야?”

“우선 저부터. 형은 형제 있어요?”

“…아니.”

“아하, 그럴 것 같더라.”

“…….”

무슨 의미지. 일어나서 노을의 멱살을 잡으려다 생일인 걸 가까스로 떠올려내 오늘만큼은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이제 와서 호구조사라니…. 뭔가 순서가 잘못된 것 아닌가. 차례로 질문을 주고받으면서도 이 상황이 어이없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노을의 말에 따르면, 부모님이 성격 차로 이혼한 뒤 따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원래는 아버지와 살다가 재혼한 뒤 가족이 견디기 힘들다고 따로 나와 산다는데, 이유가 터무니없었다. 학교와 집이 멀다는 핑계를 대고 나왔다지만, 진짜 이유는 새로 생긴 형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노을이를 귀여워한다는 것이었다.

“참, 그래서 아까 나올 때 형 주머니에서 차 키 훔쳐 왔어요.”

노을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어제 데려다 달라 했을 때 모른 척만 안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

“꼭 내일 출근하기 직전에 알았으면 좋겠다.”

그의 형은 어제 노을을 집에 데려다주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차 키를 도난당했다. 노을은 남의 차 키를 식탁 구석에 처박은 뒤, 내뱉은 말과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었다. 놈과 가족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혈압이 올라 화병으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노을이와 제가 한집에 사는 끔찍한 생각을 해보다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노을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즐거움이 잔뜩 묻어났다. 엄청 재밌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거지.

“뭘 봐, 눈 깔아.”

“…….”

“뭘 보냐고.”

그 말의 어디가 그렇게 놀라웠던 건지, 노을이 문득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소리 내어 맑게 웃기 시작했다. 시비를 거니 갑자기 웃는 놈이 솔직히 말해 정상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키득대던 노을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좋아해요.”

“뭐?”

“형은요?”

“…….”

갑자기? 경수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저 싫어요?”

해맑은 얼굴 때문일까. 어쩐지 대답이 망설여졌다. 그래도 쟤 생일인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잖아. 생일이니까 봐준다. 그래, 생일이니까….

“……그건… 아니고….”

경수는 끝말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노을은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답했다. 제게 고뇌를 안겨준 채 혼자만 여유로운 듯한 저 얼굴이 얄미웠다. 노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층 더 무리수를 뒀다.

“그럼 뽀뽀해줘요!”

“쳐 돌았냐?”

“안 싫다면서요. 그럼 좋다는 거잖아요!”

“아냐! 넌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냐?”

노을은 경수가 뭐라 하든 눈을 꼭 감았다. 마중 나온 저 입술을 손바닥으로 쳐버릴까 잠시 고민도 했으나, 새해가 지나 한 살을 더 먹은 자신은 적어도 천노을보다는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으므로 그런 짓은 관두기로 했다.

“…….”

하긴, 이쯤이야 별것도 아니잖아. 오랜 망설임 끝에, 경수는 입술을 축이고 식탁을 손으로 짚은 채 노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코끝에 생크림의 달큰한 향이 감돌았다. 제게서 나는 건지, 노을에게서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고개를 틀어 입술을 가볍게 부딪쳤다. 노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더 단내가 풍겼다. 노을은 혀를 살짝 내밀어 경수의 입술을 핥았다. 곧 입안으로 노을의 혀가 들어오고, 얽히고, 풀어졌다. 단맛 사이로 과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예전과 분명 뭔가 달라졌는데,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져 고개를 떼어내고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노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눈을 슬며시 떴다. 옅은 헤이즐넛 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경수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노을에게서 벗어나 오랜만에 자취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자고 가라며 경수를 보챘지만 오전의 그 입맞춤 이후로 기분이 이상해 억지로 그를 떼어놓았다. 하루 종일 한 것이라고는 집 안에서 뒹굴거리던 것과 지치지도 않고 주위를 맴돌던 노을과 놀아주는 것뿐이었는데 진이 다 빠졌다.

“……하아.”

아니, 어쩌면 노을의 집을 나오기 전, 그가 자신의 귓가에 속삭였던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육성으로 ‘좆 됐다.’는 소릴 내뱉었으니까. 순식간에 10년은 늙는 느낌이었다.

‘제가 알아봤는데 남자끼리도 된대요.’

‘뭐가 되는데?’

‘저 자신 있어요.’

‘네가 자신 없는 것도 있냐? 그리고 대체 뭘?’

‘뭐긴 뭐예요.’

섹….

“으악! 아아악! 미친 새끼…. 미친놈! 아아악! 개씨발! 진짜 좆됐어!”

경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꽉 쥔 주먹으로 침대를 쾅쾅 두드렸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좋았겠지만 확실히 기억났다. 그리고 그걸 노을에게도 들켜서 문제였다. 기억나자마자 아, 하고 탄성을 내뱉어버렸다. 이후 무심코 좆됐다고 중얼거리자 노을이 키득거리며 입가에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봄날 햇살처럼 포근했던 목소리.

경수는 가슴께에 손을 올린 채 천장을 보며 드러누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오래간만에 봐서 그랬을까. 눈을 감아도, 예쁘게 웃는 노을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손가락 사이에 걸리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나, 만지면 자국이 날 것 같은 새하얀 피부. 뽀뽀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눈을 꼭 감던 모습. 당당했던 주제에 빨개진 눈가. 장난스럽게 살짝 올라가 있던 입꼬리. 입술. …단내가 나던 붉은 입술.

“…….”

조심스레 손을 올려 제 입술을 쓸어보았다. 망설임 끝에 손바닥에 내려앉듯 입을 맞춰보았다. 그리고 곧 경기를 일으키듯 고개를 저으며 손을 멀리 떨어뜨렸다.

‘형은요? 저 싫어요?’

싫은 게 당연한 것 아니야?

‘좋아해요.’

당연해야 하는데.

‘형은요?’

나는….

경수는 눈썹을 찌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하지 않아.

*

“형, 요즘 이상해요.”

노을은 경수의 어깨에 턱을 괴고 웅얼거렸다. 숨소리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놀란 경수는 엉겁결에 발꿈치로 놈의 발을 세게 밟았다.

“아야…. 봐, 진짜 이상해. 제가 가까이 가기만 해도 놀라고….”

“미, 미안.”

“미안하다면 다예요? 뽀뽀.”

노을이 눈을 슬며시 내리깔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처 돌았나…. 밟았던 자리를 한 번 더 밟자 노을이 아프다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들고 있는 컵으로 머리를 내려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경수는 따뜻한 머그잔을 손에 든 채 홀짝이며 노을을 올려다보았다. 전에는 분명 엇비슷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눈높이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경수는 노을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너 키 컸다?”

“그런가? 형이 작아진…… 죄송해요.”

노을은 눈가를 움찔거리며 급하게 사과했다. 경수는 화도 내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아직 때리지도 않았는데. 누가 보면 매일 맞고 사는 줄로 알겠다. 컴퓨터 앞에 앉아 본체의 전원을 켰다. 노을은 늘 앉던 옆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려 비스듬히 경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요, 저희 언제 해요?”

노을은 정성스럽게 코팅까지 해서 책상 유리 아래에 넣어둔 문제의 서약서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린 경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칠천오백 년 뒤.”

“뭐라고요?”

다행인 건, 그 종이에는 ‘남자끼리 섹스하는 법을 찾아올 시 ♡김경수♡는 천노을과 그 방법을 직접 체험해볼 것!’이라고만 적혀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언제 할 건지는 안 적혀 있잖아.”

“안 적혀 있다구요…?”

“그래, 멍청아.”

그건 경수에게는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노을을 비웃듯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노을은 잠시 아무 말도 없더니, 어느새 방에 들어가 유성펜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

맑은 웃음은 불길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신호였다. 뽁, 뚜껑을 뽑는 소리와 함께 노을이 달려들었다. 그 후, 경수는 유리판을 들어 올려 종이를 꺼내려는 노을을 막느라 힘을 다 빼야만 했다.

“아, 꺼져! 이제 와서 뭘 더 쓰겠다고!”

“그야 전 그렇게 오래는 못 살… 아악! 아파요!”

경수는 온몸을 다 바쳐 책상을 지켜냈다. 그리고 실랑이 끝에 온통 선이 그어져 오른손이 엉망진창이 된 노을을 화장실로 들여보낸 뒤, 가까스로 평화가 찾아왔다. 경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국방부 님께서 게임에 접속하셨습니다.’

노을을 먼저 로그인 시킨 뒤 제 계정에 접속할 생각이었는데, 노을의 부캐로 들어가자마자 선율의 길드원들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길드] anamato: ㅋㅋㅋㅋㅋㅋㅋㅋ길마님ㅋ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설영: 썬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웃지마셈ㅋㅋㅋㅋㅋㅋ심각하다고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설영: 오빤 왜 웃는데

[길드] 스페이드퀸: 내 일 아니니까 존잼ㅋㅋ

[길드] 아슬렌: ㄷㄷ진짜 겁도 없지….

[길드] 스페이드퀸: 그니까요ㅋㅋㅋㅋ 걘 하필 시비를 털어도 썬발럼한테…;;

[길드] 아슬렌: ? 님 얘긴데요…?

[길드] 설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

[길드] 아슬렌: 썬셋님 본캐 우편함 ㄱㄱ

또 무슨 일이야. 흘러가는 채팅창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노을이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다가와 옆에 앉았다. 하필 가져와도 유성 펜을 가져와서 그런지 완벽하게 잉크가 지워지지는 않았다.

근데 이 새낀 손도 예쁘네…. 굴곡 없이 희고 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경수는 제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형, 왜 그래요?”

“……아니, 누가 너한테 시비 걸었나 봐….”

“뭐, 하루 이틀 일인가요.”

노을은 대수롭지 않게 읊조렸다. 하지만 경수는 노을이 신경을 쓰건 쓰지 않건, 누가 시비를 걸었는지가 신경 쓰였다. Esc 키를 눌러 썬셋으로 캐릭터 변경을 하자마자 우편이 도착했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썬셋 님께서 게임에 접속하셨습니다.’

‘새로운 우편이 도착했습니다. 우편함을 확인해주세요.’

[받은 우편]

보낸 사람: 투명인간

제목: 앂세야

내용: 니가 사과한태 줫던 거 돌려준다. 깔끔하게 캐삭빵 뜨고 끝내자^^

첨부: 건빵(음식 아이템)×10

사과라면, 청사과청? 한 달이나 지난 일이라 몇 초가 지나서야 그 이름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이미 넷카마의 역사에 한 획을 긋고 탈퇴까지 한 이름이 나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투명인간이라면 패망 길드의 길드원이자 부길마일 텐데….

“저 새끼랑 무슨 일 있었어?”

투명인간이 갑자기 천노을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라 그런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청… 어쩌고. 암튼 걔 탈퇴하고 나서, 그다음에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 말에 노을은 음, 하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요.”

그러면 단순 시비인가 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화면에 떠 있는 우편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그러다 첨부된 아이템에 건빵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건빵은 왜 열 개나 줬고?”

“열 개? 더 줬는데요? 다 합쳐서 백 개쯤?”

백 개나?

“그러고 보니 좀 그렇네요. 왜 열 개만 돌려주지? 나머지는 먹었나?”

“…….”

씨발. 경수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한 달이나 지났으면 깔끔하게 잊을 것이지, 왜 죄 없는 천노을을 걸고넘어지는지 모르겠다. 심심하면 그토록 싫어하던 우리 길드에나 시비를 걸지, 왜 하필 얘야. 경수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노을은 그런 경수를 곁눈질로 흘깃 쳐다보다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형. 제가 걱정돼요?”

걱정? 그 말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 아니?”

썬셋. 썬발놈. 썬신병자. 사이코패스….

온갖 좋지 않은 칭호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노을을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노을이 제 선에서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말이다. 비록 그게 정상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

내 표정? 표정이 어떻길래. 경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노을을 돌아보았다.

“봐, 저 걱정하는 거 맞잖아요.”

“내가 왜….”

걱정이라니, 그런 거 한 적 없어. 경수의 중얼거림에 노을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눈을 접어 웃었다. 웃음기를 머금은 눈가가 붉어졌다.

“아니야! 착각하지 말라고 몇 번째 말해?”

…아니겠지.

“네에. 케이크 남았는데, 가져올까요?”

“너 먹고 싶으면 가져와.”

아니어야 한다.

“경수 형은요?”

“가져오면 먹어줄게.”

노을이 다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경수는 손을 들어 제 뺨을 짝 때리고 제 계정으로 로그인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포세이돈에서도 같은 얘기 중이었다.

[길드] neutaaaa: ㅋㅋㅋㅋㅋ 패왕은 알고 있나? 우편 내용에 따라 자칫하면 길드전까지 갈 수도 있을 듯?

[길드] ㅈi9별: ㅋ누가 저거 보고 새로 출시된 자살법이래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박휘벌래: 맞는 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포세이돈대장: 투명인간이 이겼으면….

[길드] 할로윈가지: ?

[길드] al0ha: ?

[길드] 박휘벌래: 탄핵;;;

[길드] ㅈi9별: ㅌㅎ2222

[길드] neutaaaa: ㅌㅎ33

[길드] 할로윈가지: 44 그때 화해했잖아요 왜 그래요 또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포세이돈대장: 그냥 제 작은 소망입니다^^;

그런데 우편으로만 보낸 내용을 이들이 어떻게 알고 있나 의문이 들었다. 경수는 이들에게 물어보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홈페이지부터 들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2페이지 중반쯤에 투명인간이 쓴 글이 하나 있었다.

제목: 썬셋아

작성자: 투명인간/히어로

내용: 우편 봐

(18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머 임?

-??

-고…백…?

└투명인간: 경고장이다 10세야ㅋㅋ 고백 니나 해^ㅗ^

└ㅋㅋㅋㅋ고백이라닠ㅋㅋㅋ 제정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ㅠ 니라면 썬셋한테 고백하겠냐?

└ㅇㅋ ㅈㅅㅈㅅ; 왜 화를 내ㅠㅠ;; 구냥 물어본 건댐ㅠㅠ 썬셋아♡라고 이름도 다정하게 불러놓고 왜 나한테 그래ㅠ.ㅠ

-귓말을 보내; 여기서 좃같은 닉 처부르지 마셈 세 번 부르면 소환될라;;

└2222

└ㅋㅋㅋㅋ33

└썬신병자가 사탄이냐ㅋㅋㅋ 소환될까 봐 무서워하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짱뜰거?ㅋㅋ

└투명인간: ㅇㅇ

└헐 걍 말해본 건데

└???????

└ㅁㅊㅅㄲ

└미쳣냐

-새로 나온 자살법임? 걍 곱게 뒤지지 왜 썬셋사하려고 그래…?

└자살법ㅋㅋㅋㅋㅋㅋㅋㅋ

“…….”

길드원들이든 다른 유저들이든, 투명인간이 썬셋에게 갑자기 시비를 거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싸움이 날 것 같다는 것에 즐거워만 하고 있었다.

차라리 나도 천노을을 몰랐다면 즐거워할 수 있었을 텐데…. 경수는 옆을 힐긋 돌아보았다. 케이크를 접시에 예쁘게 담느라 열중한 모습이 보였다.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님

경수는 노을이 오기 전, 투명인간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귓속말] 투명인간: …?

[귓속말] 냥이냥나냥: 밤 10시 넘어서 귓ㄱㄱ

[귓속말] 투명인간: ?? 귓은 왜….

[귓속말] 투명인간: ;;;;; 일단ㅇㅇ;

지금 몰래 대화를 하다가 노을에게 들킨다면 그 후폭풍이 장난이 아닐 게 분명하다. 노을이 돌아오기 전, 길드 채팅으로 투명인간과 한 말을 모조리 묻어버린 경수는, 간식거리를 내려놓는 노을에게 뻔뻔한 얼굴로 고맙다고 대꾸할 수 있었다.

“우와…. 이제 길드원 안 받네. 진짜 작정한 건가?”

노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화면에는 파티 매칭 창이 떠 있었다. 패망의 길드원 모집 파티는 매번 1페이지에 있었는데, 오늘은 ‘XX길원 더 안 받음XX’으로 파티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귓속말] 투명인간: 야 답장 좀;

그러고 보니 우편을 읽기만 했지 답변을 보내는 것은 못 본 것 같았다. 경수는 화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귓속말 왔는데?”

노을은 그 말에 화면 아래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투명해서 안 보여요.”

“야.”

“형은… 제가 쟤랑 싸웠으면 좋겠어요?”

그럼 싸울게요…. 형이 바란다면 어쩔 수 없죠…. 노을이 말끝을 흐리며 처량한 척을 했다. 누가 들으면 강요한 줄 알겠다. 경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귓속말 왔다고…. 답하기 싫으면 그냥 둬.”

“네!”

노을은 정말 놈을 가만히 두기 시작했다.

[귓속말] 투명인간: 야

[귓속말] 투명인간: ??

[귓속말] 투명인간: ㅅㅂ내 말 안 들리냐?

[귓속말] 투명인간: 우편 본 거 다 앎;;; 답장하라고

[귓속말] 투명인간: 야!!!!!!!!!!

[귓속말] 투명인간: 썬셋아

[귓속말] 투명인간: 썬셋님

[귓속말] 투명인간: 한 번 만 확인해 주세요ㅠㅠ

[귓속말] 투명인간: 앂1세끼야 눈 멀엇냐?

[귓속말] 투명인간: 콩나물 1봉지 두부 2모 콘스프

[귓속말] 투명인간: ㅅㅂ진짜 안 보네

그럼 최소한 차단이라도 할 것이지. 노을은 정말 그를 보이지도 않는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며 필드를 누볐다. 계속해서 답장을 강요하는 저놈 꼴만 우스워졌다.

*

노을에게 칠천오백 년 중 칠천 년을 감해주는 조건으로 오늘은 더 이상 게임에 들어오지 않고 얌전히 잘 것을 약속받았다. 그 덕인지, 집에 돌아와 게임을 켜보니 노을의 캐릭터들이 모두 오프라인 상태였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귓속말] 스페이드퀸: 엥?? 천노을 자러 갓는데영?

[귓속말] 냥이냥나냥: ? 알아

[귓속말] 스페이드퀸: 걔가 형도 자러 간댔는데ㅋㅋ

“…….”

노을이 그 몰래 밤에 게임에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된다면 뭘 했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귀찮아 죽을 것 같았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Zzzzzz….

[귓속말] 스페이드퀸: 피곤하셨나 봐요ㅋㅋㅋㅋ

[귓속말] 냥이냥나냥: zzzzz….

[귓속말] 스페이드퀸: 흠ㅎㅎ 아까 천놀이 만약 형이 겜 들어오는 거 제보하면 일억 준댔는데….

“…….”

감시의 눈까지 깔아두고 자러 갔다는 말이야? 노을의 집요함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귓속말] 스페이드퀸: 형은 저한테 뭘 주실 수 잇죠? 한 번 들어보고 주둥이 개방을 결정하겠슴

[귓속말] 냥이냥나냥: ㅅㅂ 걍 말해라 꺼1져

경수는 파티 매칭을 열어 패망의 파티가 아직 있는지 확인했다. 파티에 참여 중인 인원에는 투명인간이 있었다. 아직 접속 중인 모양이었다.

[귓속말]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 할게여 말ㅠㅋ 자러 간다 해놓고 왜 몰래 들어왔는지만 말해주면요

[귓속말] 냥이냥나냥: 잠도 안 오는 김에 좀 하다가 자려고

[귓속말] 스페이드퀸: 그러면 천노을을 재웠을 리가 없잖아요ㅋㅋㅋㅋㅋㅋ

이 새끼도 생각보다 예리하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늘 노을에게 치이는 것만 봐서 그런지, 경수의 안에서 정민재는 굉장히 맹한 이미지였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알려줄 테니까 천노을한테 나 봤다고 말하지 마.

[귓속말] 스페이드퀸: 넹ㅋ 손목 검

[귓속말] 냥이냥나냥: 구라

[귓속말]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왜 안 믿는데여ㅠ

[귓속말] 스페이드퀸: ㅇㅋㅇㅋ 말하면 무기 터뜨릴게요ㅋㅋㅋㅋㅋ 이거 풀강된 거임 맹세ㅇㅇ

민재는 이거요, 라고 덧붙여 말하며 장비를 스왑해 보였다. 긴 창이 손에 들리기 무섭게 반짝이는 효과가 몸을 휘감고 사라졌다. 적어도 희귀 효과가 붙은 무기인 데다 풀 강화까지 되어있다. 이거면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투명인간한테 왜 하필 시비를 걸어도 썬셋인지 물어보려고. 캐삭빵 얘기까지 나왔었거든

[귓속말] 냥이냥나냥: 노을이는 별일 없었다는데 걜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귓속말] 스페이드퀸: 헐 캐삭빵??? 누가 그래요?

[귓속말] 냥이냥나냥: ㅇㅇ우편 내용에 있었음

[귓속말] 스페이드퀸: 아ㅋㅋㅋㅋㅋ 원래는 길드 잠입하면 무슨 생각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가입 막아뒀더라고요ㅋㅋㅋ

[귓속말] 냥이냥나냥: 잠입을 왜 해?

[귓속말] 스페이드퀸: 천노을이 시켜서요ㅜ

그러고 보니 청사과청 때도 천노을이 캐릭터까지 새로 파는 수고를 해가면서 패망에 들어갔었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들어가 본 적 있다는 거야?

[귓속말] 스페이드퀸: 작년에 패망이 포세이돈에 캐삭빵 뜨자 했을 때 제가 들어갔었어요ㅠ

[귓속말] 스페이드퀸: 대화 내용 갖다 나르느라 개 힘들었는데 ㅠㅠ

[귓속말] 스페이드퀸: 그 덕에 아직도 부길마 자리는 제 거네요ㅎㅎ….

길드 지위를 가지고 또 협박을 한 모양이었다. 하는 짓이 할로윈가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천노을이 정글 맵을 쓸 거라는 것을 알려준 덕에 당황하지 않고 미리 연습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귓속말] 냥이냥나냥: 노을이도 생각이 있었겠지

[귓속말] 스페이드퀸: ?? 지금 걔 편드는 거?

편을 드는 건 아니었다. 그냥 천노을이 아무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달려드는 놈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아니까. 그 덕에 이득을 본 것도 있으니까 해본 소리였다.

[귓속말] 투명인간: 나한테 할 말이 뭐임?

[귓속말] 투명인간: ??

투명인간에게서 귓속말이 도착했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열 시 정각이었다. 밤 열 시 이후에 귓속말을 달라고 했더니 정말 열 시에 맞춰 말을 건 것이다. 서로 좋게 알던 사이는 아니었기에 어떻게 하면 날이 선 말이 튀어나오지 않을지, 노을에 대한 적개심을 어떻게 돌릴지가 고민되었다.

[귓속말] 투명인간: 불러놓고 이젠 니도 씹냐?

[귓속말] 투명인간: 개빡치네ㄷㄷ

[귓속말] 냥이냥나냥: 1채널 길드존 시계탑 2층으로

[귓속말] 투명인간: ㅇㅇ

경수는 그 말을 하고 1채널의 길드존으로 이동했다. 1채널인 데다, 한창 게임하기 좋은 시간이라 그런지 길드존이 사람으로 넘쳐났다. 경수는 시계탑 앞에서 투명인간을 마주쳤다. 경수가 먼저 발판을 딛고 시계탑 꼭대기로 올라가자, 투명인간이 그 뒤를 따라왔다. 시계탑 안에 들어가자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비밀스럽게 만나기 좋은 장소였다.

[전체] 투명인간: 용건?

[전체] 냥이냥나냥: 자게 글 봤어요

[전체] 투명인간: 아ㅋㅋㅋ;

[전체] 냥이냥나냥: 그래서 뭐 좀 물어보려는데요

[전체] 투명인간: ?

[전체] 냥이냥나냥: 썬셋은 무슨 죄가 있다고 캐삭빵까지 뜸?

[전체] 투명인간: ??캐삭빵인건 어케 알고

[전체] 투명인간: ㅇ아 맞다 니 걔랑 컾이지?ㅋㅋㅋㅋ 그 ㅂㅅ이 머라든?

경수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좋게 말하려 해도 말이 곱게 나올 수가 없는 류의 인간이었다.

[전체] 냥이냥나냥: 왜 반말이야

[전체] 투명인간: ㅗ

[전체] 냥이냥나냥: 건빵이나 다시 가져가

경수는 건빵 열 개를 돌려주기 위해 투명인간에게 거래를 신청했다. 노을은 우편에서 아이템을 아직 빼내지 않았기에 투명인간이 보낸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경매장에서 샀다.

‘거래 신청이 거절되었습니다.’

[전체] 투명인간: 사과가 좋게 봤던 놈이라ㅋㅋㅋ 니는 봐줄라 했더니 좃 1같이 구네

‘섀도우 볼!’

갑자기 들어오는 공격에 경수도 무기를 꺼내어 들었다. 히어로가 단거리 딜러인 만큼, 이 좁은 공간에서는 경수가 불리했다. 갑자기 여기서 왜 싸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수는 들어오는 공격을 받아치며 투명인간의 HP를 조금씩 깎기 시작했다.

[전체] 냥이냥나냥: 청사과청이면

[전체] 냥이냥나냥: 남잔데 왜 이제 와서 뒷북?ㅋㅋㅋㅋ

[전체] 투명인간: 그게 뭐

[전체] 냥이냥나냥: ?

[전체] 투명인간: 썬발 새1기만 아니었어도 평생 몰랐을 텐데 ㅅㅂ

[전체] 투명인간: 걔가… 얼마나 착헷는지,, 알아??

[전체] 냥이냥나냥: ??;;;

그게 무슨 소용이지. 남자인 놈이 여자인 척하다가 들킨 거잖아. 투명인간은 청사과청이 제게 얼마나 상냥했는지를 열변을 토하며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경수는 공격이나 열심히 쏟아부었다. 결국 HP가 0이 된 투명인간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전체] 투명인간: 썬셋이랑 다니더니 똑같아 졌내^^

[전체] 냥이냥나냥: 먼저 공격한 게 누군데? 걘 잘못 없어

[전체] 투명인간: 싸패 커플 탄생ㅊㅋ

결국 노을에 대한 적개심을 없앨 거라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놈이 노을에게 보내왔던 우편 내용에도 청사과청 얘기가 있었다. 노을이 그를 아주 조금 괴롭힌 것은 맞지만, 청사과청이 접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본인에게 있었다.

“그 새끼가 잘못한 건데 왜 노을이한테 돌려?”

걔가 뭘 잘못했다고. 부활의 징표를 먹고 살아난 투명인간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경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시계탑 밖으로 나와 밖으로 나간 투명인간을 찾아다니려는데, 노을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수는 휴대폰의 이름과 전설 펫 ‘노을♡’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게임 중인 걸 들킨 건가? 경수는 스피커의 소리를 0으로 낮추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뭐야. …너 안 자?”

-네, 아직….

다행히 들킨 건 아닌 것 같았다. 누운 채로 몸을 뒤척이는지 이불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속대로 얌전히 침대에 누워있을 게 분명하다. 비록 조건을 걸기는 했지만 얌전히 말을 듣는 게 귀여워 소리 없이 슬쩍 웃었다.

-잠이 안 와요.

“…아, 그래? 나돈데.”

경수는 캐릭터를 시계탑 1층 포탈 앞에다 앉혀두고 모니터를 껐다. 그리고 노을이 자고 나면 다시 돌아올 생각으로 살금살금 자리를 옮겼다.

이 밤에 전화를 걸어서 할 말은 많지 않았다. 금방 대화 주제가 동나버리자 잠시 고민하던 경수가 제안했다.

“잠 안 오면… 끝말잇기나 할까?”

-네!

그 말에 노을은 좋다고 소리쳤다.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을을 재울 생각으로 시작한 끝말잇기는 한 시간을 넘어가도록 이어졌다. 사용했던 단어를 또 사용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 문장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면 수화기 너머의 노을이 간지럽게 웃었다. 그러면 경수도 멋쩍게 웃었다.

-흐아암….

하품은 옮는다고들 하던가. 하품뿐만 아니라 졸음까지 옮겨온 것 같았다.

-…형, 저 이제 졸려요.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아. 벌써 목이 잠겼잖아. 웃기지도 않은데 자꾸 웃음이 났다. 경수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그래, 잘 자.”

-형두요. …이따 봐요.

이따 보자며, 노을이 속삭였다.

“언제?”

-꿈에서요!

“웃기고 있네. 난 꿈같은 거 안 꿔. 빨리 자.”

이러다 또 잠이 깨버릴라. 경수는 단호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감았던 눈을 뜨고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매섭게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노을의 목소리가 실려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꿈….”

일주일에 한 번 꿀까 말까 한데. 왠지 오늘은 정말 꿈에 노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하고 말았다.

*

제목: (지금 핫한 글!)얘 왜 1채 길드존에서 죽어있냐?

작성자: 햄스터/소서러

내용: (사진)

썬셋이 죽였나…?ㄷㄷ 찔러도 안 일어남ㅜ

(98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부부 싸움?ㄷㄷ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부부싸움이야? 둘이 사귐??

└ㅇㅇ몰랏냐? 좀 됨ㅋㅋㅋㅋㅋㅋ

└헐… 보살이래?

-학살 시작 예고인가요…? 망했다

-3채만 위험한 줄 알았더니 1채로 넘어오고 ㅈㄹ임

-ㅈi9별: 엥??

-박휘벌래: 엥…????

-neutaaaa: 엥

-할로윈가지: 엥엥

-al0ha: 에에엥

└니들 머하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포세이돈 파리 길드냐? 왜 저리 앵앵거려

-스페이드퀸: 아닌데? 썬셋 이미 8시부터 자는 중임

└8싴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생아임?

└8시ㄷㄷ 뭘 그리 빨리 잠?

└썬발놈 아니면 누구야….

-야 빨리 글 지워 썬셋 보면 어떠캄ㄷㄷㄷ

└글 쓴 애도 자러 감

└뭘 지우기까지 하냐ㅋㅋㅋㅋ

-이 망겜에 미친놈이 둘이라고?

-인간적으로 잠수 중인 놈은 건들지 말지… 그것도 1채에서;;;

-썬셋: ㅇㅅㅇ….

제목: ★제보받습니다~!

작성자: 썬셋/문페어리

내용: (사진)

* 살인마 목격담 글자당 100

* 살인마 스샷 한 장당 1000

* 투명인간 << 원킬 당 3000(사진인증)

* [패망] << 길드원(안 가리고 다) 원킬 당 1000(사진인증)

목격담 제보는 >>>>썬셋<<<< 우편ㄱㄱ

[email protected] <<<< 스샷 제보는 여기로

(48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썬셋발 이벤트 2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살인마 ㅇㅈㄹㅋㅋㅋㅋ 개 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누구보고 살인마래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 일 되니까 재밌네ㅋㅋㅋㅋㅋㅋ 목격담 글자당 쳐 주는 거 최고ㅅㅂㅋㅋㅋㅋㅋ 나였으면 당장 글짓기 시작한다

-이 새끼 또 뭐 하냐….

-스샷 애?를 죽이면 되는 거임?

└썬셋: ㅇㅅㅇ?? 그럼 내 손에 주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쟬 죽인 애를 찾는 거야!ㅋㅋㅋㅋㅋㅋㅋ

*

게임을 켜두고 잤던 것을 잊어, 아침에 일어나 모니터를 켜보니 제 캐릭터가 무참하게 죽어 있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몰라도 왠지 투명인간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부활 아이템을 사용해 캐릭터를 소생시키자, 주위에 있던 놈들이 ‘살아났다’고 웅성거렸다. 길드존에서 죽는 사람을 처음 본 것도 아닐 텐데 왜 구경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경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3채널의 이시스로 이동해왔다.

[길드] 냥이냥나냥: ㅎㅇ

[길드] 할로윈가지: 오 살아났음?ㅋㅋㅋ

[길드] 냥이냥나냥: ?

내가 죽었다는 걸 왜 알고 있지? 경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드] al0ha: 하이

[길드] 완두완댜: ㅎㅇㅎㅇ~!

[길드] 허니문: ㅎㅇ

새로운 우편이 도착했다는 알림에, 일단 그는 마을에서 빨간 우체통부터 찾았다.

[받은 우편]

보낸 사람: ㅈi9별

제목: 조의금

내용: 오다 주웠따!

첨부: 100,000 Bell

“…….”

[길드] 냥이냥나냥: 지구별 나와

[길드] neutaaaa: 지구별 또 뭔 짓 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박휘벌래: 에휴휴….

[길드] ㅈi9별: 힝ㅠㅠ 냥냥이는 맨날 나한테만 그래ㅠ

그야 제일 맞을 짓을 하니까…. 괜히 천노을과 죽이 제일 잘 맞던 놈이 아니었다. 우편을 보내놓고 혼자 좋아했을 게 뻔히 보여 더 얄미웠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냥님 죽었다면서요?

[길드] 냥이냥나냥: ㅎㅎ;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길드] 포세이돈대장: 괜찮으세요?ㅠㅠ

[길드] 냥이냥나냥: 네 뭐…. 진짜 제가 죽은 게 아니니까;; 저 살아있어요ㅠ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로 큰일도 아니라 어리둥절했다. 아직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길드] ㅈi9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냥님… 또 현상금 걸렸서요

[길드] 냥이냥나냥: ?

현상금이란 말에 그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곧바로 천노을이 떠올랐지만, 이제는 그가 제게 그럴 이유가 없었다.

[길드] ㅈi9별: 아 냥님말구 패망한테 걸린 거예요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님 관련은 맞음^ㅅ^bb

[길드] 냥이냥나냥: 네??

[길드] ㅈi9별: 길드톡 안 보셨어여?

[길드] 냥이냥나냥: 네 충전 중이에요

전화를 하다 그대로 충전을 하지 않고 잠들어버려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화면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그나저나 천노을이 패망에게 현상금을 걸었다고? 경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 이유를 추정해보았다. 죽었다가 살아나 보니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즐비해 있었고, 채널이 다른 길드원들도 그의 사망 소식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죽인 범인이 패망에 있는 것 같았다.

[길드] 할로윈가지: 난 냥님이 너무 흥미로워… 사건 사고가 끊이지를 않아ㅎㅎ

[길드] 포세이돈대장: 넘 착해서 그렇죠….

[길드] 냥이냥나냥: ㅋㅋㅋ맞아

[길드] 할로윈가지: 아 넴;

이게 다 천노을 때문이었다.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것은 제가 아니라 노을이었고, 자신은 그에 휘말린 불쌍하고 선량한 유저일 뿐이었다.

[길드] 박휘벌래: 썬셋은 왜 이리 돈이 많지… 부럽

[길드] neutaaaa: 돈 많은 놈 썰면 다 자기 거니까 많을 수밖에ㅋㅋ

[길드] 박휘벌래: 아….

[길드] ㅈi9별: 냥님 갠차나요! 썬셋 님이 인성은 쫌(많이) 그래도

[길드] ㅈi9별: 돈은 많으니까 님 굶길 일은 없을 듯ㅎㅎ 화이팅! (물론 저는 줘도 안 가짐)

[길드] 냥이냥나냥: ㅗ

다시 방에 들어가 충전 중인 휴대폰을 꺼내올 수도 있었지만 너무 귀찮았다. 그는 그 대신에 친구 창을 열어 노을이 접속해 있는지를 확인해보았다.

썬셋

노을은 캐릭터 냥이냥나냥의 커플인 본캐로 접속해 있었다.

[커플] 냥이냥나냥: 천노을

[커플] 썬셋: 이제 일어났어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답이 돌아오는 것에는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커플] 냥이냥나냥: 너 이번엔 무슨 짓 했어

[커플] 썬셋: ㅇㅅㅇ….

노을은 대답 대신에 멍해 보이는 이모티콘을 사용했다. 대답하기 싫은 모양이다. 결국 직접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커플] 썬셋: 오늘은 우리 집 안 와요?

[커플] 냥이냥나냥: 천 년 늘리면 감ㅋㅋ

[커플] 썬셋: ….

저는 이보다도 더 비싸게 굴었으면서…. 고작 이것 가지고 입을 다물기인가. 처음에는 놈을 일찍 재우기 위해 칠천오백 년 중, 무려 천 년을 감해줄 것을 제안했지만, 노을은 ‘칠천오백 년 전부 깎아주세요.’라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지껄였다. 결국 흥정 끝에 칠천 년을 깎아주면서도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플] 썬셋: 그럼 제가 갈 테니까 오백 년 깎아줘요

천노을은 양심이 없었다. 그만큼 다 깎으면 하나도 안 남잖아!

[커플] 냥이냥나냥: ㄲㅈ

[커플] 썬셋: 499

[커플] 냥이냥나냥: 양심…?

[커플] 썬셋: ㅠㅠ 450년?

[커플] 냥이냥나냥: ㄴㄴ

[커플] 썬셋: 500년ㅠㅠ

[커플] 냥이냥나냥: 왜 다시 늘어나?

[커플] 썬셋: ㅡㅡ 그럼 얼마나 깎아줄 수 있는데요?

양심 없는 숫자에 기가 질린 경수는 백의 자리 숫자를 바꿔버렸다.

[커플] 냥이냥나냥: 100년 이상으로는 안 돼

[커플] 썬셋: ㅋㅋ

[커플] 썬셋: 네 갈게요

‘썬셋 님께서 접속을 종료하셨습니다.’

“뭐야?”

경수는 갑자기 로그아웃을 한 노을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제가 갈 테니까 오백 년 깎아줘요.’

“…….”

숫자 크기에만 집중하다 보니 숫자 삭감 조건을 잊고 있었다. 애초에 오지 말라고 했으면 됐잖아?

‘대화 상대가 없습니다.’

“씨발.”

하지만 노을은 이미 게임에서 나가버렸고,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은 채 대화 상대가 없다는 시스템 문구만이 대화창에 빼곡하게 채워졌다.

*

경수는 초인종이 눌리기 전부터 현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노을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주는 대가로 다시 100년을 늘릴 생각이었는데….

“형 생일이 언제예요?”

잠시 고민하던 노을이 물었다.

“4월 1… 잠깐.”

문에다 대고 반사적으로 대답해주던 경수는 입을 급하게 다물었다. 비밀번호는 0401이 맞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급하게 보조 잠금 장치를 걸었지만, 이미 문이 열리고 난 뒤에야 잠금쇠가 돌아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잠금 장치를 잡고 있던 탓에, 잘못하면 넘어질 뻔한 경수를 손쉽게 받아 안으며 노을은 키득거렸다.

“비밀번호가 저게 뭐예요? 더 긴 거로 바꿔요.”

남의 집 문을 따고 들어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노을에게서 바람 냄새가 묻어났다. 옷에서 배어나는 냉기에 얇은 옷만 걸치고 있던 경수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찬 기운 사이에 섞인 미미한 체향에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어깨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형?”

“…빨리 들어와.”

경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어깨를 쥔 손을 슬며시 놔주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려던 노을은 벽에 비스듬히 세워둔 야구 배트를 보고 작게 동요했다. 잠깐 손을 좀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그는 몰래 현관문 밖에다 배트를 내버리려다 도어록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에 나온 경수에게 그 꼴을 들키고 말았다.

“너 뭐 하냐?”

“…….”

현장을 적발당한 노을은 뻔뻔하게 나오지도 못하고 현관문을 반쯤 연 채로 굳어버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 뭐라고 할 힘도 나지 않았다.

“안 때려.”

“…….”

믿지 않는 듯 노을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아니, 그렇다고 그걸 버리냐?”

“집이 좁아 보여서….”

노을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방 청소를 하다가 밖에 잠시 내다 놓은 건데. 나와 보지 않았으면 없어진 줄도 모를 뻔했다. 노을은 문을 얌전히 닫고 배트를 신발장 구석에 세워두었다. 경수의 시선은 노을에게 잠깐 머물렀다 야구 배트로 옮겨졌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저걸 몰래 숨기겠다고 눈치를 봤을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기는커녕 우스웠다. 노을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큭큭 대며 웃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노을이 노트북을 펼치자마자 메일 창이 떠올랐다. 자유게시판에서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파악한 경수는 이게 그 스크린샷을 제보 받는 메일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미 메일 몇 개가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나 죽인 놈은 누구래?”

“투명 인간일걸요.”

“누가 봤대?”

“아뇨?”

결국 심증뿐이라는 소리였다. 심증밖에 없는 주제에 킬 당 3000씩이나 거는 게 너무나도 놈다워 아무런 동요조차 일지 않았다.

“걔 아니면 어떡하려고….”

“상관없어요. 걘 따로 잘못한 게 있어서 건 거니까.”

“잘못?”

“늦은 밤에 형이랑 단둘이 만났잖아요. 은밀하게.”

노을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덕분에 경수는 아무런 대꾸조차 못 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민재가 어제 형이 걔 보러 간다고 하고 연락 끊겼다던데요?”

“…….”

개새끼가. 아이템을 걸기에 정말 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게임을 켰다고 변명할 생각이었는데…. 노을은 콧잔등을 찌푸리며 불퉁하게 물었다.

“저 몰래 새벽에 혼자 게임하니까 좋았어요?”

아, 코 찡그리는 거 귀여워.

“좋았냐고요.”

“…….”

방금 내가 뭐라고…? 스스로 한 생각에 깜짝 놀라 머리가 굳었다. 해괴망측한 생각이었다.

“걔랑 무슨 얘기 했어요?”

“…네 얘기.”

경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말에 대충 대꾸했다.

“그래요?”

“그래. 너 그만 괴롭히라고 말한 것뿐이니까, 시답지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로그인이나 해.”

그 말에 노을이 표정을 완전히 풀었다. 단순하기가 그지없었다. 어쩜 이렇게 제 일이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일단 일을 저지르고부터 보는지. 그래서 그런가, 더….

“…….”

경수는 냉정하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얼굴을 보질 말아야지. 그래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다시 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뭐라도 바쁘게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200레벨 필드 중 아무 데나 골라 이동했다. 제게 달라붙는 몬스터들을 손쉽게 녹여내며 맵 깊은 곳까지 내려가던 그는 패망 마크를 단 길드원 두 명을 마주칠 수 있었다.

[전체] ohmyboy: 멀 바

[전체] 계이름표: 여기선 우리 못 죽이는데 어쩌냐ㅋㅋ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괜히 저들과 얽히고 싶지 않아 경수는 그들을 피해 다음 맵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패망 두 명은 그 뒤를 따라오며 계속 말을 걸었다.

[전체] ohmyboy: 니 남친은 어디 두고 산책 나왔냐

[전체] 계이름표: 걔 불러 바바!

“…….”

쟬 부르긴 왜 불러. 옆을 흘깃거리던 경수는 노을과 눈을 마주쳤다. 노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저딴 게 귀엽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경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시선을 휙 돌려버렸다.

[전체] 냥이냥나냥: 갈 길 가

[전체] 계이름표: 그게 아니라 좋게 말 좀 해보자고… 걔가 차단 박아서 귓말이 안 가서 그럼;;

[전체] 냥이냥나냥: 글쿤

[전체] 계이름표: 말하는 꼬라지 봐라ㅅㅂ

[전체] 냥이냥나냥: ㄱㅅ

[전체] 계이름표: ㅋㅋㅋㅋ

[전체] ohmyboy: 너도 니 컾 소문 더러워지는 건 안 원하잖아 윈윈 ㅇㅋ?

[전체] 냥이냥나냥: 걘 원래 소문 드러워서 ㄱㅊ

[전체] ohmyboy: ….

너무나 맞는 말이라 대꾸할 말이 없는지, 둘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침묵했다.

[전체] ohmyboy: 니 진짜 썬발놈이랑 똑같아졌네….

[전체] 계이름표: 좋아하면 닮는다잖아ㅋㅋ

[전체] ohmyboy: 진짜 맞말ㅋㅋㅋㅋ

“…….”

좋아하면 닮는다잖아.

“…….”

좋아하면 닮는다고?

[전체] 냥이냥나냥: 말로 해결해 쌍욕 하지 말고; 내가 걜 좋아하긴 뭘 좋아해 개소리하지 마라 개빡치니까;

[전체] ohmyboy: 초 쳐서 미안한데 욕도 말이야ㅋㅋ

[전체] 냥이냥나냥: 씨1발

[전체] 계이름표: 썬셋 남친이 화낸다ㅋㅋㅋㅋ

[전체] ohmyboy: 화내지 말구 썬신병자 불러줘ㅠㅠ

[전체] 계이름표: 불러죠!!

경수는 곁눈질로 노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왜 저리 집중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놈이 눈을 접어 살짝 미소 지었다.

“왜요?”

“하던 일해.”

“형이 먼저 봐놓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자꾸 노을에게 시선이 옮겨가려는 것을 몇 번이고 참아야 했다.

[전체] ohmyboy: 썬셋 불렀음?

경수에게는 이들을 상대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말을 거는 패망들을 무시한 채 길드존으로 다시 이동해왔다. 워프 포인트인 시계탑 앞으로 이동해오자, 갑자기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유저들이 무기를 전환했다. 갑자기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무기를 꺼내어 드는 모습에 경수도 무심코 공격 키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전체] 냥이냥나냥: ???

[전체] 센드witch: 헐 죄송해요;;;

누구보다 빠르게 공격을 하려던 유저가 공격 취소를 미처 하지 못해, 경수에게 조금의 데미지를 입혔다. 데미지를 입힌 여캐는 새해 한정 이모티콘인 ‘엎드려 세배하기’를 사용해 바닥에 넙죽넙죽 엎드렸다.

[전체] 냥이냥나냥: 아니 괜차나요;;;;

괜히 황송한 기분이 들어 경수는 그 앞에서 맞절을 했다.

[전체] 센드witch: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감사합니다ㅠ

[전체] ㅈi9별: ㄷㄷㄷ

[전체] 인어왕자: 큰일 날 뻔;;;

[전체] 뽀ㄷH오6: 와 내 심장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애헴: 님은 좀 걸어 다니세요…ㅠㅠ

[전체] 냥이냥나냥: ?

[전체] neutaaaa: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 방금 진짜 놀랐엌ㅋㅋㅋㅋㅋㅋ

[전체] ㅈi9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냥님 죽을 뻔ㅠㅠ

그들은 다시 무기를 집어넣고 탑승용 펫에 올라타거나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체] 냥이냥나냥: 님들은 여기서 머 해요….

[전체] ㅈi9별: 현상금 사냥이여ㅎㅎ 잼있다

[전체] neutaaaa: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 구경 왔음ㅋㅋ

워프 포인트 앞에서 기다렸다가, 패망이 나타나면 공격을 가하는 모양이었다. 패망은 오늘 길드룸에 접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유저 여럿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이 무리를 뚫고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귓속말] 계이름표: 야 썬셋 좀 불러줘

[귓속말] 계이름표: 제발 부탁이야 얘기만 할게

[귓속말] 계이름표: 니가 좋아하는 썬셋ㅜ 불러죠ㅠㅠ

별 의미 없이 하는 말인 걸 아는데. …아는데. 또 시선은 노을에게로 이동해 있었다.

‘천노을을 좋아한다고? 내가? 내애 가아? 참나,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노을은 결점투성이였다. 제게는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성격이 나쁘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속이 좁아 툭하면 삐지고, 툴툴거리고. 심지어 남자이다.

노을의 외모에서 결점을 찾아 부정해보려던 경수는 결국 노을의 눈동자 색이 밝은 갈색이라는 것을 알고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시선을 눈치챈 노을이 이번에야말로 꼭 이유를 듣겠다는 듯 단호하게 눈썹을 꿈틀 치켜들며 말했다.

“왜 자꾸 쳐다보세요?”

“눈썹 예쁘네.”

무심코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말을 내뱉고서도 아차 했지만, 노을은 더 어리둥절해 보였다. 자신이 칭찬에 인색한 데다 이런 유의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서 더 그런 듯했다.

“감사해요…?”

노을이 손을 올려 경수가 예쁘다고 평한 눈썹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런데… 형 어디 아파요?”

아프다니, 그건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아프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는 아니지 않나. 하여간 칭찬을 해 줘도 저 난리였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 눈썹 보고 예쁘다고 할 수도 있지.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1분 전으로 되돌려 제 입을 틀어막을 것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아니라는 변명만 늘어놓는데, 하려던 말이 입안에서 엉키고 뒤섞여 자꾸 이상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노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여전히 경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멍청한 표정에 갑자기 감정이 북받친 경수는 버럭 소리쳤다.

“뭐, 씨발!”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요?”

그의 표정이 황당하다는 듯이 바뀌었다.

“네가 날 병신 보듯 쳐다봤잖아!”

“제가 언제….”

“별 뜻 없었어. 구름이나 꽃 보고 예쁘다 하는 것과 같은 거야. 신경 쓰지 마!”

그것도 모자라, 경수는 객관적으로 그 누가 보더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물을 속으로 나열하며 자기 위안을 했다. 그런 것들과 같은 맥락으로 천노을도 …예쁘다.

경수의 말에 노을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눈꺼풀에 생기 있는 눈동자가 가려지며 눈매가 휘어졌다. 천노을, 이름만 내뱉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로 그 웃음이었다. 심드렁하게 야, 라고만 불러도 보여주는 흔한 표정인데.

“형.”

불쾌한 두근거림에 손끝까지 저릿했다. 경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가에 힘을 줘 노을을 노려보았다. 당장 TV를 켜도 볼 수 있을 만큼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널렸다. 하지만 그들을 볼 때는 가슴에 이토록 끔찍한 동요는 일지 않았다.

살짝 엉킨 앞머리도, 곧게 뻗은 콧대도, 심지어는 동그란 귓바퀴와 부드러운 목소리마저….

“제가 예뻐요?”

“…….”

모조리 예뻤다.

“눈썹 말고는요? 또 어디가 예쁜데요? 뭐가 마음에 들어요?”

전부,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경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천노을에게 이딴 감정, 느끼면 안 되는데.

[귓속말] 계이름표: 어휴 됐다 니나 걔나ㅡㅡ

저런 사내자식이 귀여울 이유는 하나도 없다. 자신보다 키도 큰 데다 이상형에서도 백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성격은 또 어떠한가. 파탄 나 있고, 그걸 굳이 숨기려고도 안 하고, 사람 괴롭히는 일이라면 도가 텄다. 그리고 또… 질투도 많고, 어리고, 고집도 세다. 저 싫다는 사람에게 눈웃음을 치지를 않나, 외로움은 또 더럽게 잘 타서 틈만 나면 치대고 주둥이를 가져다 댄다. 매일같이 문자에 전화에, 심지어는 찾아오기까지. 그렇게 살랑거리며 사람 마음을 뒤흔들더니….

“개…빡…쳐…!”

경수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키보드를 내려칠 듯,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싫어야 하는데, 점점 더 싫어져야 정상인데….

“이번엔 어떤 놈이에요? 가만 안 둬.”

저 때문인 줄도 모르고 복수를 다짐하며 입술을 앙다무는 노을이 귀여워 보여, 당장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었던 일 년짜리 내기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제 인생이었다.

*

틈만 나면 쏟아지는 공격에 지친 패망의 말단 길드원들이 서서히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길드 랭킹이 떨어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패망이 벌써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는 소식을 주워듣고 슬슬 놈들이 불쌍해 보일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이시스 주점 앞에서 투명인간을 마주쳤다. 하필 옆에 천노을까지 함께 있던 탓에 삼자대면이 된 셈이었다. 노을이 멈춰 서서 먼저 말을 걸었다.

[전체] 썬셋: 안녕하세요^^

[전체] 투명인간: …;

무심코 지나치려던 경수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돌아갔다.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놈이었다. 길드존에 들어가지 못하는 패망은 PVP가 인정되지 않는 마을이나 필드에 각각 흩어져 있었다. 투명인간 역시, 머리 위에 ‘잠수 중’ 타이틀을 띄우고 있던 길드원 한 명과 함께 있었다.

[전체] 냥이냥나냥: 야 뭐해? 빨리 와.

[전체] 투명인간: 가지 마ㅅ요 잠깐만 나 할 말 잇어

[전체] 썬셋: ?

[전체] 썬셋: 지껄여바…ㅇㅅㅇ

노을은 투명인간에게 경고하듯 저주 버프가 들어가는 스킬을 연주했다. 헛수고였다. 어차피 여기선 공격 안 들어간다니까….

[전체] 투명인간: 냥냥 내가 죽였어

[전체] 냥이냥나냥: ?

[전체] 투명인간: 밤에 님 죽이고 튄 거 저 맞다고요;;;

그럴 것 같기는 했지만, 나서서 자백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사과를 하려는 태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전체] 투명인간: 됐음?

[전체] 썬셋: 머가 됐다는 거지….

[전체] 투명인간: 나만 죽이면 되지 다른 분들은 왜 죽여;;

[전체] 썬셋: 냥님이 너네 싫어해서ㅋㅋ

[전체] 투명인간: ;; 그러면 귓이라도 풀어줘 얘기 좀 하자

[전체] 썬셋: 냥님이 내가 다른 사람이랑 말하는 거 시러해ㅇㅅㅇ!

[전체] 냥이냥나냥: …?

[전체] 투명인간: ㅡㅡ

[전체] 냥이냥나냥: 아니, 왜 내 핑계 대고 난리야….

[전체] 썬셋: ㅋㅋㅋㅋ♡!!

썬셋은 천노을 때보다는 덜했지만, 놈의 퀵슬롯에는 여전히 이모티콘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던 썬셋이 무얼 하려는지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곧 ‘뽀뽀하기’ 이모티콘을 사용해 냥이냥나냥의 볼에 입을 맞췄다.

[전체] 초록의기운: 으 눈 버림

[전체] 나때리면바보: 우엑 욱

[전체] 완두완댜: 세상에

[길드] 완두완댜: 3채 이시스 주점 앞 썬셋이 냥한테 뽀뽀 중!

“…….”

남들의 반응은 둘째치고 이런 장난 같은 행동에도 멀미가 나는 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예전이었으면 미친놈이라 치고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노을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다가 그런 자신을 자각하면 머리를 쥐어뜯었다.

[길드] ㅈi9별: 너무 일상적이라 노잼상 드려요 ㅅㄱ

[길드] 완두완댜: 투명인간도 있는데요?

[길드] ㅈi9별: 달려감

[길드] 완두완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neutaaaa: 탈주 돌앗나ㅠ 마저 뛰고 가….

[길드] ㅈi9별: ㅋㅋ 솔플해 여보><

[길드] 할로윈가지: 너무 몰려가면 없어 보이니까 저까지만 갈게요^^

[길드] 박휘벌래: 전 그저께부터 와 있었음ㅋ

[길드] 냥이냥나냥: ㅅㅂ 오지 마;;

접속 중인 길드원들 대부분이 구경을 하러 몰려들었다. 구경거리도 아닌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달려드는지 몰랐다.

[전체] 투명인간: 내 앞에서 꽁냥대지 마 컨셉충 새1끼야

[전체] ㅈi9별: 언제 싸움? 언제 싸움? 언제 싸움? 언제 싸움? 언제 싸움? 언제 싸움?

[전체] 할로윈가지: 어느 쪽이든 빨리 터졌으면!ㅎㅎ

노을이 말 대신에 애교 부리기 이모티콘을 사용했다. 깜찍한 표정으로 어깨에 고개를 부비는 캐릭터를 보고, 경수는 저도 모르게 귀엽다고 중얼거리다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전체] 초록의기운: ㅅㅂ 머 하냐 게1이 새7기들ㅡㅡ

[전체] 투명인간: 그만하라고 했지 ** 죽어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노을은 계속 이모티콘만 남발했고, 투명인간은 그에 쌍욕을 내뱉었다. 그러다 갑자기 두 사람이 함께 사라졌다.

[전체] 냥이냥나냥: ?

[전체] 할로윈가지: 버림받은 냥냥이,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나레이션)

[귓속말] 냥이냥나냥: 닥1치세요

[전체] 할로윈가지: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닥1칠게요ㅠㅠ

[전체] 박휘벌래: 망겜아 일대일도 관전하게 해 줘

[전체] ㅈi9별: 맞아 지엠 바보

[전체] 박휘벌래: 지바엠보

둘은 일대일 PVP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경수는 주위를 둘러싼 무리 가운데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일대일…. 나도 예전에 많이 했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분을 못 참아 일방적으로 천노을에게 제가 걸어대던 것이었다. 기억은 미화된다. 그래서인지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또한 추억이 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써서 못하는 척을 그렇게 잘한 건진 모르지만….

“…오랜만에 노을이라으아악!!!”

경수는 도리질을 치며 책상에 철퍼덕 엎어졌다. 아니야! 싫어! 그는 팔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다. 그는 그렇게 하루 종일 이상한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아닐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는 행위 자체가 노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슬슬 이게 정말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세뇌당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이 감정을 확정 지어줄 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했다.

[서버] 썬셋: 패망 수배 이벤트는 조기 종료합니다~!!

서버 마이크로 이벤트 종료를 알림과 동시에, 사라졌던 두 사람이 돌아왔다.

[전체] ㅈi9별: ㅠㅠ

[전체] neutaaaa: 쏠쏠했는뎀….

[전체] 핫캣: 지 입으로 이벤트라 했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투명인간의 머리 위에서 길드 마크가 사라졌다. 길드를 탈퇴했다는 소리였다.

“…쟤 부길마 아니었나?”

[전체] 투명인간: 냥냥냥 님은 잘못 없는데 잠수 탈 때 죽이고 튀어서 죄송합니다….

[전체] 냥이냥나냥: ?

[전체] 투명인간: 사과를 잊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잘못한 건 썬발놈인데 님도 피해자인데 새벽이라 홧김에 제가 화풀이를 햇습니다. 죄송합니다.

[전체] 냥이냥나냥: …?

웅성대는 분위기 속, 노을이 눈치 없이 뽀뽀하기 이모티콘을 사용했다.

[전체] 냥이냥나냥: 하지 마ㅡㅡ

하지 말라는 말을 보낸 후, 경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키스를 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을은 경수의 경고를 귓등으로도 처 듣지 않고 또 한 번 뽀뽀하기를 사용했다.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 입을 맞춰달라고 칭얼거리는 놈이니 금방 알 수 있을 게 분명하다.

[귓속말] 투명인간: 님도 참;; 힘내세요;;

그리고 그날 저녁, 게시판에는 투명인간의 사과문이 올라왔다. 은근슬쩍 노을의 협박으로 길드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탈퇴한다는 말도 들어있었다. 또한 채팅으로 했던 말을 구구절절하게 늘려, 그 안에 본인과 청사과청의 러브스토리를 담았다.

‘사과야 보고 싶다. 나는 진심이었어.;; 돌아온다면 이번엔 나와 사귀어줄래?^-^’

하지만 이미 탈퇴로 게임을 떠난 청사과청은 대답이 없었다. 댓글 창은 웃는 자음들과 명대사를 이미지화해 가져온 댓글들로 가득 채워져 월간 베스트 글 4위에 올랐다.

*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각오가 필요했다. 수십 번 노을과 입을 맞췄다고는 하지만, 그때야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별것도 아닐 거라 생각했던 일은 곱씹을수록 매우 중대해졌다.

경수는 노을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 종일 그의 입술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다. 심지어 경수는 노을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 나서야 그런 제 행동을 자각했다. 그는 이제 먼저 키스를 청하는 일이 없어졌다. 전에는 집에 가려고만 하면 단단히 붙잡고 놔주지 않는 데다, 하다못해 볼에라도 짧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보내줬었는데. 현관문에서 멀뚱히 서서 키스를 조르는 노을을 기다렸지만, 그는 친절히 문까지 열어주는 행태까지 보였다.

경수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부모님 집으로 잠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노을은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섭섭한 것은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날 좋아하는 주제에. 그러니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왜 평소 하던 짓을 하지 않는지. 그게 굉장히 의문이었다.

그렇게 나흘째, 경수는 좀비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낮에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반복하니 생활 패턴도 엉망이 되었다. 게임에 접속하는 시간도 불규칙해졌고, 문자에 제때 답하지 못 하는 일도 잦았다.

‘걔 얼굴 본 지 얼마나 지났더라….’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한 달이 지난 것 같았다. 주위가 고요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놈을 보고 싶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경수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잠이 부족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또 사흘이 지나 달력이 한 페이지 넘어갔다. 3월 둘째 주의 수요일, 경수는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달고 학교에 나타났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해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보고, 친구들은 숨을 집어삼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그를 비웃는 말에도 대꾸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차마 한 살 어린 사내새끼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3학년이니 학업에 집중하라는 새로운 담임 선생님의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수 너 야자 신청할 거야?”

“하겠냐.”

“넌 좀 해라.”

“좆 까….”

그는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너 입에서 피 나.”

“…….”

아까부터 계속 입술을 물어뜯은 탓일까. 수영의 말에 그는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조금 아렸다. 이대로 키스하면 더 아프겠지. 천노을도 오늘 학교 갔을 텐데. 끝나면 전화해볼까. 그리고 만약 만나면, 오늘은 하려나. …키스.

“망했어어어….”

이딴 생각을 하는 것 자체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저 해달라고 하기에도 조금 그랬다. 만약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저 호기심이었다면 희망 고문만 하는 셈이 될 테니 말이다. 경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탄식했다.

“뭐가 망해? 네 인생이?”

“어. 꺼져.”

“아앙, 자기야…. 참, 오늘 끝나고 나 인형 하나만 뽑아주라.”

수영이 옆자리 의자를 빼 앉으며 경수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경수는 그런 그를 경멸하듯 어깨를 튕겨 수영의 머리를 떨쳐냈다.

“더러워.”

“뽑아만 주고 집에 가도 돼. 주현이가 갖고 싶어 했는데 못 뽑아줘서 그게 계속 걸린단 말이야….”

“네 여자 친구 줄 걸 내가 왜? 싫어. 끝나고 가볼 데 있어.”

“아아아, 제발요, 형. 넌 금방 뽑잖아….”

“…….”

형이라는 말에 노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분명 같은 말일 텐데도 울림이 다르게 느껴졌다. 분명 그 애한테 들었던 건 이 느낌이 아니었는데.

“형 제발요. 수영이의 일생일대의 소원입니다.”

“…알겠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같이 가줄 거야?”

응응, 하고 수영의 말을 대충 받아넘겼다. 형이라고 불리는 건 노을이면 족했다.

*

“아, 그거 말고오! 그 옆에 눈알 콩만 한 멍청한 토끼라고!”

“탑부터 쌓아놔야 저것도 뽑을 수 있거든?”

“탑을 쌓기는. 그럼 이건 왜 뽑았는데?”

수영은 작은 인형 두 개를 들어 보이며 불평했다.

“아니, 뽑히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 오천 원만 더 넣어봐.”

경수는 입안의 사탕을 이로 씹어 삼킨 뒤, 조이스틱을 능숙하게 움직였다. 경수의 가방을 앞으로 멘 채 뽑힌 인형을 들고 있던 수영은, 뽑기 기계의 집게가 토끼의 머리를 움켜잡자 ‘오오!’ 하며 숨을 집어삼켰다. 대학가 근처라 그런지 식사 후에 심심풀이로 놀러 오는 대학생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기계 몇 개를 전전하다 말고 경수를 구경했다.

“친구야, 좀 더 왼쪽 가야 할 것 같은데.”

“꼬부기 뽑으면 형한테 만 원에 팔아줄래?”

“아아, 거기 아냐! 좀 뒤로, 그렇지!”

“…….”

오늘 처음 본 대학생들이 기계 옆에 달라붙어 훈수를 놓기 시작했다. 인형 여러 개를 입구로 가져와 높게 탑을 쌓은 경수는 수영이 바라는 토끼 인형을 탑 꼭대기까지 끌어오는 것에 성공했다. 그런데 토끼가 치워지자, 그 아래 눈을 지그시 감고 웃고 있는 연분홍색 토끼 인형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닮았다.

“야, 너 뭐해? 이제 치기만 하면 되는데?”

“그 밑에 건 내가 갖고 싶어서. 아직 몇 번 남았잖아.”

그렇게 말하며 남아 있는 기회를 슬쩍 확인해보았다. 하강 버튼 옆에, 빨간 글씨로 4라고 적혀있었다. 기회는 충분했다.

꼭 뽑아야지. 그래서 천노을한테 안겨놓고 사진 찍으면 진짜 웃기겠다. 볼에 동그란 홍조까지 있으니 더 귀… 아니, 바보 같았다.

경수는 손을 가볍게 턴 뒤, 다시 조이스틱을 잡았다. 집게가 토끼의 몸통을 콱 움켜쥐었다. 끼리릭, 소리와 함께 인형이 끌어 올려졌다. 끌려오는 듯하다가 툭 떨어지자, 기계를 둘러싼 이들이 다 함께 탄식을 내뱉었다. 1회의 기회를 남겨두고 천노을 토끼의 머리를 입구에 살짝 걸쳐두었다. 이제 쌓인 탑을 집게로 때려 인형들을 떨어뜨린 뒤, 천노을 토끼까지 뽑으면 완벽했다.

조이스틱을 빙빙 돌리자 집게가 돌아가며 탑을 툭 때렸다. 인형 네 개가 동시에 배출구로 우수수 떨어졌다.

“와, 미친! 다 뽑았어!”

“대박, 꼬부기! 만 원!”

원하던 인형이 나오자마자 수영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는 배출구를 뒤져 인형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좋아했다. 뒤쪽에서는 경수가 뽑은 인형을 가지고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경수는 목을 쭉 뺀 채로, 입구에 목이 걸쳐진 토끼의 어느 부분을 눌러야 가뿐히 넘어갈지 재봤다.

“야, 여긴 왜?”

그때, 한 무리의 학생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거 못 뽑으면 오늘 집에 안 간다. 경수는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하강 버튼을 눌렀다. 발랄한 음악 소리가 멈추고 집게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집게가 몸통을 잡고 들어 올렸지만 드는 체만 하더니 슬쩍 놓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뒤로 기우뚱하던 인형이 완전히 넘어가 배출구에 툭 떨어졌다.

경수는 바닥에 쭈그려 기계 깊숙한 곳에서 인형을 꺼냈다. 그리고 뽑힌 인형을 보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던 경수 앞에, 누군가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형. 여기서 뭐해요?”

“헉.”

노을이었다. 얘가 여길 왜 왔지? 경수는 천노을 토끼와 진짜 천노을을 번갈아 보았다. 노을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여기서 인형 뽑기나 하려고 제 전화 씹었어요?”

“…….”

“제가 지나가다 봐서 다행이지. 지금 저 피하시는 거죠!”

전화를 했었나. 가방에 휴대폰을 넣어둔 탓에 못 봤다. 노을은 경수의 손에 들린 토끼 인형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인형의 외모를 비하했다.

“이게 뭐야, 진짜 못생겼어.”

못생겼다니. 너 닮았는데….

“…너 줄까?”

경수는 무릎을 잡고 일어나며 넌지시 물었다. 싫다고 해도 가지라며 떠넘길 생각이었다. 그러자 노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찡그렸던 미간을 펴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 새끼 왜 저래…?”

그 말에 경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노을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친구로 보이는 이들이 일체 멍한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영은 인형 사진을 찍어 여자 친구에게 보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노을에게 인형을 건네주자, 그는 굉장히 소중한 것을 껴안듯이 인형을 끌어안았다. 입술도 야무지게 앙다물려 있었다. 순간,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죽겠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자주 느껴지는 저릿함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정체를 알 수가 없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누가요? 형 죽어요?”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이 새끼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심지어는 제정신으로 게임도 못 할 정도다. 이대로면 제 명에 못 살 것 같았다.

“…나 확인해볼 게 있어.”

“확인?”

노을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래, 확인. 그러니까 일단 너희 집으로 가자.”

“……좋아요!.”

경수는 수영에게서 제 가방을 낚아챈 뒤, 노을의 손목을 붙잡고 인형 뽑기 방을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노을은 그 뒤를 따라가며 경수에게 잡힌 제 손목을 힐끔 내려 보았다. 그리고 뭐가 그리도 좋은지 헤실헤실 웃었다.

“…….”

“…….”

“…….”

친구의 처음 보는 표정에 남은 이들은 한참 이상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

신발장에다 가방을 팽개친 경수는 노을의 어깨를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얼떨결에 밀려난 노을은 함박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막고 있었다.

“왜 처웃냐?”

“좋아서요.”

“……알아, 너 나 좋아하는 거.”

경수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여기까지만 했어야 하는 게 맞았다. 천노을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까지만. 그게 쌍방이 되어서는 안 됐다고.

‘설마 이딴 것도 옮나?’

막상 입을 맞추려니 또 망설여졌다. 만약 정말 놈의 감정이 내게 옮아온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경수는 초조한 마음에, 목을 조이는 듯한 넥타이를 풀었다. 노을은 흐트러진 셔츠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한테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거예요?”

누가 듣는다면 나쁜 짓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다. 경수는 노을을 안심시키듯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걱정 마, 별거 안 할 테니까 눈 좀 감아봐.”

“싫어요.”

노을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쳐다보았다. 입가에는 미소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하긴.”

눈 뜬 채로 해도 상관없다. 무척 민망하고 꺼려지지만. 만약 아니라면 좋은 거고, 맞다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경수는 한 손으로 노을의 어깨를 붙잡은 채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뭐야?”

“맨입으로는 안 되죠.”

“뭐?”

그러는 본인은 매일 말도 없이 마음대로 주둥이를 들이대고 쪽쪽거렸으면서. 제게만 적용되는 불공평함에 경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머지 사백 년 없애주세요. 그럼 얌전히 형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미쳤어?”

“솔직히 칠천오백 년을 제안한 형이 더 너무했거든요.”

“한 번 만에 칠천 년을 깎은 네가 더 지독해.”

“몰라요. 환생만 몇십 번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뭘 확인한다는 건지, 제게는 알려주지도 않았잖아요. 그거라도 알려줘요.”

그걸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난다. 지금도 이 꼴인데, 말을 했다간 노을에게 인생을 넘겨주는 셈이 될 것 같았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막아야만 했다.

“그건… 개인적인 문제야. 알려 줄만 한 게 안 된다고.”

“그럼 가세요. 저 혼자 있고 싶어요.”

그는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경수가 뽑아준 인형을 더 꼭 껴안은 것은 덤이었다. …이 새끼 또 이러네. 기가 막힌 경수는 헛웃음만 지었다.

“갑자기 왜 혼자 있고 싶은 건데?”

“형한테 거절당해서 너무 슬퍼요.”

“씨발놈아!”

경수는 노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노을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돌린 채로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었다. 경수의 눈에는 아까부터 놈의 붉은 입술만이 들어왔다. 말을 하느라고 입이 오물거리는 것도, 삐진다고 불퉁하게 아랫입술이 튀어나오는 것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줄 듯하더니 안 준다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좋아! 사백 년!”

경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호전적으로 소리쳤다. 노을이 화색을 하며 입술을 벌렸다. 어떤 말을 이어 내뱉으려고 한 것 같았는데, 그걸 기다려줄 정도로 경수는 참을성이 강하지 않았다.

고개를 틀어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먼저 입을 맞춘 건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노을의 입술을 잘게 물고 혀로는 부드럽게 쓸었다. 그렇게 입맞춤이 처음인 것처럼, 몇 번을 반복했다. 노을이 먼저 혀를 옭아왔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녹아내릴 것처럼 말랑하고 달았다. 왠지 더 멍해졌다. 아랫배가 뭉클했다. 경수는 노을의 목을 끌어안고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천노을은 몰라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인데.

이상야릇한 기분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노을은 살짝 입술을 뗐다. 곧 그의 길고 예쁜 손가락이 경수의 뺨에 살포시 닿았다. 아슬아슬하게 숨소리가 닿는 거리에서, 그가 뺨을 감싼 채 넌지시 속삭였다.

“형. …혹시 저 좋아해요?”

*

[안녕하세요 고수님들. 전 평범한 남학생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사실 아는 동생(남자고 나보다 한 살 어림;;)이랑 키스…를 했거든요?ㅅㅂㅡㅡ 근데 걔가 절 좋아하기는 했어요…(나는 아님) 예전에 키스했을 땐 그냥 그랬는데 오늘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키스하다 말고 튀었는데요ㅠㅠ 내일 어쩌죠…?? 아무튼 제가 걜 좋아하는 걸까요? 너무 싫어서 그랬을 확률은…?]

경수는 눈을 질끈 감고 엔터키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뒤, 답변이 등록되었다는 창이 차례로 휴대폰 화면에 떠올랐다.

-으 게이 새끼

신고.

-0%.

이건 성의 없는 개새끼.

-안녕하세요, 평범한 남학생님. 흠… 여기가 일기장인가요?^^ 고민 상담이라 치기에는 이미 스스로도 아시는 것 같군요. 네, 좋아하는 거 맞습니다.(이 답을 원하셨던 게 맞겠죠?ㅎㅎ) 너무 싫었으면 예전에 키스했을 때 ‘그냥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이미 아는 동생분도 평범한 남학생 님을 좋아한다고 했으면. 네. 쌍방이군요.(축하!) 오랜만에 웃긴 질문을 발견해서 즐거웠으니 채택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ㅎㅎ. 후기가 궁금하군요. 화이팅!

얘는 성의 있는 개새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웃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예쁜 사랑하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으으으아악안돼애애….”

웃을 때 예쁘고 게임도 좋아하고 상냥한 여자 친구 사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웃을 때 예쁘고 게임도 좋아하고 상냥한 남자 친구가 생길 것 같았다. 아무리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경수는 얼굴을 감싸 쥔 채로 괴성을 내질렀다.

*

“좋은 소식이 있어.”

“한 번 지껄여봐.”

“형이 나 좋아하는 것 같아.”

“…….”

민재는 노을의 말에 조용히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았다. 그리고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듯 책상에 넙죽 엎드렸다.

그가 그러건 말건, 노을은 경수가 자신을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생글생글 웃으며 이번 발렌타인 이벤트 때 그에게 청혼을 받아내서 결혼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평소 쉽게 보이지 않는 웃는 얼굴에 힐긋대는 시선이 늘었으나, 남의 시선이라면 익숙했기에 무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울지 마. 뭐라고 해줄게.’

노을은 경수의 행동에서 이따금씩 생경함을 느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약간 치켜 올라간 눈매가 자신을 볼 때마다 순간적이지만 부드러워지는 것도. 아마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묘하게 제게 관대했다. 슬쩍 웃기만 해도 표정이 미미하게 풀어지고, 삐진 척을 하면 입술을 꾹 깨물며 어떡하나 고민하는 게 훤히 다 보였다. 원래도 정이 많은 사람인 건 알고 있었으나 그 정도가 날이 가면 갈수록 더했다.

분명히… 무언가 변화하고 있었다. 노을의 머릿속에는 경수가 심경을 토로하게 만들 방법 몇 가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나 이내 관두고 말았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얻을 때까지 부딪히는 게 그 나름의 공략법이었기에. 어차피 시간은 차고 넘쳤으며, 결과적으로는 누구든지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게 관대한 경수의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생일 당일에는 그가 있는 곳까지 내려갈 생각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오랜만에 경수를 볼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도착한 집에는 불청객들이, 그리고 갑자기 닥친 놈들 때문에 놀라 숨어있던 경수가 있었다. 놈들을 모두 쫓아내고 옷장에서 구겨져 있던 그를 발견했을 때에는, 정말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생일 축하해. 선물은….’

‘형이 선물이에요.’

엉겁결에 나온 속마음.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경수가 얼굴을 구기며 아니라고 부정했다. 제가 선물로 그를 달라고 한 거로 판단한 것 같았다.

형은 어떻게 이러지. 단순하고 직설적이지만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지기만 했다. 어딘가에서 사람을 정신도 못 차리게 홀려 놓는 법을 배워오는지도 몰랐다.

일부러 제 생일을 축하해주러 일찍 올라왔다는 것에서 노을은 희망의 실마리를 또 하나 찾았다. 그래서 그를 떠보듯 물었다.

‘저 싫어요?’

‘그건… 아니고….’

처음 같았으면 ‘으.’라든지 ‘당연히 싫어.’ 따위의 반응이 나왔어야 했다. 그는 더 큰 무리수를 둬보았다. 뽀뽀해달란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 돌았냐는 익숙한 말까지 들었다. …이건 아직 좀 무리였나. 하지만 그는 조금 망설이다 정말 먼저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엔 제게 예쁘다는 말까지 했다. 다른 이들에게 수십 수백 번은 들은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한 것이 경수라는 것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해졌다.

“예쁘다고….”

그날 밤은 가슴이 너무 뛰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전부터 그가 자신을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게임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고, 전화도 무시하는 데다 심지어는 다시 부모님 집에 내려갔다. 개학하는 날이니 오늘은 형이 집에 있겠지. 이번에도 전화는 받지 않지만 쳐들어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그의 집을 향해 걷다가 인형 뽑기 기계가 가득한 가게의 유리문 너머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경수를 우연히 발견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설렜고, 자신을 보고 조금 놀라는 모습엔 조금 기뻤다. 제법 큰 토끼 인형을 뽑아 놓고 제게 고민도 없이 건넬 때는 꼭 껴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내팽개친 그에 의해 벽으로 몰아붙여졌다. 긴장이 역력한 얼굴. 목이 타는지 혀로 입술을 축이기도 한다. 무얼 하려는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일부러 입술이 닿기 직전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솔직히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입 한 번 맞춰보겠다고 그전부터 전전긍긍이던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에는 팔을 두르고, 눈을 꼭 감은 채로 고개를 틀어 입을 맞추는 그가 이번에야말로 확신을 주었다.

‘형, …혹시 저 좋아해요?’

이마를 맞댄 채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경수는 노을을 세게 밀쳐내곤 신발을 손에 들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가방을 두고 갔기에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는 그대로 집에 돌아가 버렸다.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긍정의 답이나 마찬가지다.

경수 형이 날 좋아해.

노을은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민재의 공책을 가져와 한 장 뜯었다. 민재는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어폰의 음량을 조금 더 키우며 중얼거렸다.

“……진짜 가지가지.”

그는 왼손으로 경고장을 작성하고 있었다.

*

“씨발….”

학교에서 노을의 메시지를 받은 경수는 반사적으로 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연달아 두 개의 사진을 보내어왔다. 첫 번째는 천노을 토끼가 머리만 내민 채로 경수의 가방 안에 들어가 있는 사진이었고, 두 번째 사진은 삐뚤빼뚤한 빨간 글씨로 경고장이라고 쓰인 종이를 찍은 사진이었다.

[경고장!

김경수는 들어라

네 가방은 내 손에 있다

가방을 무사히 돌려받으려면

오늘 우리 집으로 와요 형

-형이 좋아하는 노을이가-]

아직 좋아한단 말도 안 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건방진 새끼…. 프로필 사진이 귀여워서 화도 나지 않았다. 원래는 아무 사진도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 올라온 프로필 사진은 어제 제가 뽑아준 분홍색 천노을 토끼의 얼굴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네 얼굴.”

경수는 태열이 묻는 말에 삐딱하게 대답하고 급하게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건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남자인 데다 천노을이라는 것. 왠지 그라면 한 번 잡으면 놓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묘하게 집요한 구석이 있는 놈인데 사귀면 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노을을 그렇게까지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아주 조금 호감을 느껴 꿈에도 나오고 하루 종일 생각나는 것뿐. 시간이 지나면 감정의 깊이가 얕아질 것이다.

‘오늘은 절대 휘둘리면 안 돼. 집에 들어가자마자 할 말부터 다 해버리자.’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한 채 친구들 사이에 섞여 미술실로 이동했다.

*

“가방은요?”

“…두고 갔잖아.”

그래서 가방 없이 등교했는데. 경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노을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곧 살짝 미소 지으며 경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손이 따뜻해 놓고 싶지 않았으나, 이내 오전에 한 결심이 떠올랐다.

‘끌려간다!’

안 돼! 오늘만은 휘둘리지 않기로 했잖아, 김경수! 할 말부터 해야지! 경수는 그 손을 뿌리치고 어리둥절해 보이는 노을의 입을 손바닥으로 턱 틀어막았다.

“읍?”

“천노을, 내 말 똑똑히 들어. 왜곡하거나 너 좋을 대로 들으면 가만 안 둘 거야.”

“믐멈멈머.”

“나…….”

막상 말을 하려니 입술이 안 떨어졌다. 노을은 웃음기가 깃든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경수의 손을 떼어냈다.

“방금 제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이제 형이 저 좋아한다고 말할 차례예요.”

입을 틀어막힌 채로 냈던 이상한 소리가 좋아한다는 말이었나. 그런 거였으면 입 막지 말걸. 경수는 얼떨떨하게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 나도 좋아하기는 하는…데.”

“그럴 줄 알았어요.”

아니, 이게 아닌데. 경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하려던 말을 이어 말했다.

“그런데! 너처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아.”

“…….”

아차.

“싫, 싫다는 것도 아니니까 울지 말고. 응?”

“안 우는데요.”

“…아무튼, 아직 네가 이긴 거 아니다. 내가 가을 넘어서까지 널 계속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잖아. 금방 식을지도 몰라.”

그 말에 노을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제가 뭘 이겨요?”

“나도 널 좋아하게 만들겠다며? 그런데 나는 아직 별로 안 좋아한다고!”

“…아, 그거? 그럼 사랑? …아얏.”

경수는 노을의 뺨을 꼬집은 채 결론부터 말했다.

“그래서 당장 사귀는 건 좀 곤란해.”

노을은 제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자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콧잔등이 찌푸려져 옅게 주름이 졌다. 노을은 은근히 표정이 다채로웠다. 뺨을 꼬집었던 손을 뻗어 콧등의 주름을 꾹꾹 눌러 펴주었다. 그제야 찌푸렸던 인상을 편 채로 노을이 말했다.

“언제 안 곤란해지는데요?”

“네가 말한 내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두고 지켜보자. 나도 당장 남자인 네게 인생을 걸기에는 아직 너무 섣부른 감이 있어.”

혹시 내가 착각을 한 지도 모르고…. 마지막 말은 속으로 집어삼켰다.

“게임이라고 쳐. 너 내기 좋아하잖아. 네가 이기면 정말 사귀는 거야.”

두 손으로 노을의 뺨을 감싼 채 말했다. 노을의 갈색 눈동자에 자신이 꽉 들어찼다. 그곳에는 오직 자신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연애… 게임인 거예요?”

경수는 말 대신에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럼 사귀지는 말고 그전까지 저랑 교제해주세요.”

“꺼져, 똑같은 거잖아.”

내가 바보인 줄 아나. 경수는 노을을 밀어내며 슬쩍 웃었다. 그는 순순히 밀려나면서도 잠정적 애인에게 이렇게 굴어도 되는 거냐며 툴툴거렸다.

“돼.”

넌 이런 날 좋아하는 거니까.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노을은 그 대신에 뽀뽀라도 해달라며 고집을 피웠고, 경수는 그런 그의 고집에는 한 번도 이기지를 못했다.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맞댔다. 집 안에도 이른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The Dark Mage’s Return to Enlistment

The Dark Mage’s Return to Enlistment

gwihwanhaessneunde ibdae jeonnal-ida I returned, but it was the day before enlistment. 귀환했는데 입대 전날이다
Score 3.3
Status: Ongoing Native Language: Korean

Kim Minjun, who was a normal high school senior in South Korea, was suddenly summoned to another world and became a dark magician.

Minjun, who persevered through all sorts of hardships with the single-minded goal of returning home, saved this other world with his dark magic.

Casting aside a life as a hero and guaranteed riches, he returned to Earth.

Just when he was about to fully enjoy his life, a problem arose. A dungeon break occurred, and monsters began pouring out. Not only did this threaten the peaceful Earth life that Minjun had just returned to… But on his very first day back, he was also ordered to enlist in the military!?!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