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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1

111화 라플라스 (1)

111화 라플라스 (1)

은월섬에 도착해 뱃멀미에서 해방된 루나는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마을과 가까워질수록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저 멀리 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 뒤로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와 카인과 세실도 달렸다. 쿠훌린도 우리를 따라 달리려 했지만 엘리샤가 온몸을 날려 붙잡았다. 뛰면 안 돼요 단장!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요? 그러다가 정말 뒈진다고요!

“루나······?”

“이봐. 루나가 돌아왔는데······?”

“아······.”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평소라면 너도나도 활기차게 웃으며 루나를 반겨주었을 텐데.

루나도 그것을 느낀 듯했다. 불안한 눈을 깜빡이며 루나는 성을 향해 직진했다. 그러고는 몸통 박치기하듯 성문을 밀어 열었다.

“엄마아아!”

성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미니맵을 확인하고는 조금 안도했다. 사람이 있다. 우호적 대상이 둘. 중립적 대상이 하나.

나는 저 중립적 대상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은월섬에서 내게 중립적 표식으로 보이는 인물은 한 명뿐이니까.

“엄마아! 디네베에에!”

루나는 거의 울 것처럼 외치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니, 울고 있다.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이슬이 흩어진다.

우리 네 사람은 앞다투듯 2층에 도달했다. 1층도 그랬지만 2층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 속에서 나는 보았다. 리아논의 방 앞에 내가 예상한 인물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스카자하! 엄마는요! 디네베는요!”

스카자하가 말없이 문에서 비켜섰다. 루나는 덥석 문고리를 쥐었다가, 두려워하는 신음을 뱉으며 놓았다가, 다시 문고리를 쥐고는 벌컥 방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어둠에 물든 방 안에는 리아논과 디네베가 코끝까지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주위를 확인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즉 미니맵 속 우호적 표식은 리아논과 디네베이며, 그들은 살아있다.

“물러서! 루나!”

두 사람의 얼굴에서 달처럼 빛이 흐르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달렸다. 옆으로 밀쳐진 루나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미안하지만 한시가 급하다. 지금 함부로 환자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뒤를 돌아보니 스르륵 닫히는 방문 사이로 스카자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내 행동을 제지할 생각은 없는 듯, 점점 가늘어지는 문틈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주변에 빛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며 리아논의 이불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내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리아논은 단단히 옷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옷 너머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달빛. 은색 반점이 전신을 뒤덮었다는 뜻이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리아논은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환자에게 손대지 마. 누구도.”

나란히 붙은 옆 침대로 다가갔다.

땀방울이 맺힌 디네베의 동그란 이마.

나는 이그드라실 앞에서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디네베는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이 아이에게는 벌써 은월병의 징조가 드러나고 있어. 너무도 진한 피를 지닌 탓에, 그리고 너무도 어린 나이에 신력을 받아들인 탓에.’

‘리아논보다도······ 먼저?’

‘그래. 리아논보다도 먼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디네베는 리아논보다 더 위험한 상태일 거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며 디네베의 이불을 손에 쥐었다. 아주 조금 들어 올렸을 뿐인데, 그 안에서는 리아논의 것보다 환한 달빛이 새어 나왔다.

루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두 환자의 상태를 짐작하지 못할 사람은 이곳에 없을 것이다.

“디네베의 상태가 더 안 좋아.”

“데미안······. 흐흑······!”

루나가 내 옷깃을 쥐며 매달렸다.

“루나. 내가 디네베의 몸을 확인해야 해.”

은월병 말기에 접어든 환자는 별의 엘릭서를 삼키는 것만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보다 섬세한 치유가 필요하다. 가이아 작가는 소설에서 은월병 말기 환자의 치유법을 상세히 서술한 적이 있다.

“디네베의 전신에 치유제를 발라 흡수시켜야 해. 실은 정령사나 드루이드 같은 특별한 자의 힘이 필요하지만, 나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내게는 자연 감응 적성이 있다.

세계수의 혼돈과 샘터의 혼돈이 있다.

녹음심장도 있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해. 디네베는 물론이고 리아논도. 두 사람 모두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야.”

루나가 끄흑, 끅······!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루나의 두 팔을 꽉 쥐었다.

“울지 마 루나. 정신 차려.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해. 우리가 두 사람을 살려야 해.”

나는 디네베와 리아논을 동시에 치유할 생각이다. 둘 중 한 명만 치유하다가는 그사이 다른 한 명이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루나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내 도움이······?”

나는 내가 지닌 여러 능력으로 디네베의 몸을 세심히 관찰하며 치유제를 도포할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루나를 매개체로 리아논의 몸도 확인할 것이다.

한 손으로 디네베를 치유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루나의 손을 맞잡는다. 그렇게 디네베와 루나의 몸 안에 세계수의 혼돈을 불어넣으며 두 환자를 치유한다.

물론 루나의 도움 없이 두 사람을 동시에 치유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겼다. 지금의 내 능력과 체력으로는 은월병 말기에 접어든 두 환자를 제대로 치유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나는 리아논과 디네베, 모두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런 나를 돕기에 루나만 한 인물은 없다. 그녀는 은월의 마력을 지닌 아르테미스이자, 이그드라실이다. 리아논의 몸에서 발하는 은월병의 기운을 느끼며, 그리고 내가 불어넣어 주는 세계수의 혼돈을 느끼며 리아논에게 적절한 조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내 눈을 봐 루나. 우리는 할 수 있어. 힘을 합쳐 리아논과 디네베의 병을 고칠 수 있어.”

루나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루나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둘러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카인과 세실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문을 지켜 줘. 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절대 환자에게 빛이 닿아서는 안 돼. 나와 루나의 집중력이 흐트러져서도 안 돼.”

카인과 세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뒤돌아선 것을 확인한 나는 디네베의 이불을 완전히 젖히고, 그녀의 옷을 벗겼다.

루나도 리아논에게 같은 행동을 했다. 맞닿은 등을 통해 루나의 떨림이 전해졌다.

“준비됐어? 루나.”

“응. 데미안.”

나의 왼손이 디네베의 몸에 올려졌다. 오른손으로는 루나의 왼손을 잡았다.

“마음을 편히 가져 루나. 내가 전해주는 혼돈과, 리아논의 몸에 집중해.”

루나의 자그만 손이 내 손을 꼭 마주 쥐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심호흡했다. 이어 자연 감응을 발현하고, 녹음심장의 힘을 끌어내며 세계수의 혼돈을 발현했다.

.

.

.

눈을 뜨니 익숙한 장소에 누워 있었다.

성에서 내가 머무르던 방이다.

“데미안.”

늘 그렇듯 이런 상황에서 들려오는 것은 세실의 목소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나는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만도 했다. 디네베와 리아논을 치유하며 내 안의 모든 혼돈과 체력과 심력이 고갈됐을 테니까.

“세실.”

“데미안. 괜찮아?”

세실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세실이 내 이마에 손을 가져오더니, 다른 손으로는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웃는다. 열이라도 났었던 모양이지.

“리아논. 디네베. 회복 중.”

두 사람의 치유는 성공한 듯했다. 사실 나는 치유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리아논의 방에 들어선 이후의 기억이 듬성듬성 지워졌다. 무리한 탓이겠지.

“카인은. 루나. 방에.”

내가 혼절한 것처럼 루나도 치유를 마친 뒤 쓰러졌다고 한다. 또 세실은 말했다. 나와 루나가 쓰러지기 전, 환자의 몸에 이불을 잘 덮어두었다고. 그래서 아무도 두 사람의 나신을 보지 못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세실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연신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이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세실.”

“아. 아니.”

그러나 말과 달리 세실은 이내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데미안.”

“응?”

“······디네베. 봤어?”

세실의 얼굴은 금세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빵빵했다. 말뜻을 알아들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세실. 디네베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라고.

“미. 미안해.”

내 표정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세실은 바로 사과했다. 이어 내 이마에 손을 얹더니, 다른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아니, 조금 전에도 확인했잖아.

“열. 내렸어.”

나도 알아.

“데미안.”

“응?”

세실이 어깨를 옴지락댔다.

“나. 붕대.”

“붕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세실이 내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없는 게. 좋아?”

나는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세실이 느릿하지만 또박또박 이어 말했다.

“데미안이. 그게. 좋다면.”

“자, 잠깐. 세실.”

나는 덥석 세실의 손을 잡았다. 세실이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면 네가 여자아이라는 걸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거야.”

세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쥐었다.

“데미안이. 원한다면.”

세실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난. 괜찮아.”

호수처럼 깊은 연녹색 눈동자.

그 위로 촘촘하게 휘어져 올라간 속눈썹.

세실의 속눈썹이 이렇게나 길었었나?

“데미안. 나는.”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일어났냐! 데미······.”

나와 세실은 깜짝 놀라 문을 돌아봤다.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던 쿠훌린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했다. 그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마치 정지 화면처럼 우리를 바라봤다.

“아. 아으! 쿠훌린······!”

세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매우 아팠다. 세실이 내 손을 부술 것처럼 세게 쥐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실은 도망치듯 방에서 뛰쳐나갔다. 나가는 길에 쿠훌린의 발을 밟은 건 아마도 실수겠지.

“아. 문 두드리는 것을 잊었군. 하하하하!”

벅벅 머리를 긁은 쿠훌린이 방문을 닫고 내 옆에 앉았다. 지금의 반응으로 나는 확신했다. 쿠훌린은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안다.

“몸은 괜찮은 거냐? 데미안.”

“저는 괜찮아요. 쿠훌린이야말로 더 쉬어야 해요.”

쿠훌린이 어금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

“고맙다 데미안. 네 덕분에 리아논과 디네베가 살아났어.”

“제가 원해서 한 일인 걸요. 두 사람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쿠훌린과 엘리샤도요.”

쿠훌린이 내 머리를 마구 손으로 헝클었다. 그러고는 고개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나도 같은 곳을 바라봤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동그란 보름달이 짙은 구름에 삼켜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상기했다. 월식. 그리고 흑기사.

“데미안. 내게 궁금한 것이 있겠지.”

나는 쿠훌린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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